패스트 러너 - 변화에 강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한상만 지음 / 청림출판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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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민첩성이라는 용어가 있다. 교육이나 인사, 경영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다뤄지는 용어다.

이는 새로운 상황이나 경험에서 빠르게 배우고, 그 배움을 새로운 상황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저 빠르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배움을 유연하게 새로운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상만'작가는 이런 이들을 '패스트러너'라고 불렀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새로운 일을 두려워 하지 않고 실패를 '경험'으로 재구성한다. 주변의 피드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한 점검을 자주한다는 특징도 있다. 또한 익숙한 방식보다 새로운 접근법을 선호한다.

국내 연구자들은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학습민첩성' 연구 67개를 모아 분석했는데 개중 62개는 직장인 대상 연구였고, 대기업, 중소기업, 공공 기관에서 제조, 영업, 경영 지원, 연구 개발, 교육, 서비스 등에서 근무하는 2만 2,261명의 참여했다.

연구자들은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학습민첩성이 높은 사람이 10개의 영역에서도 뛰어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첫째, 긍정 심리 자본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낙관적인 태도로 도전을 지속하는 힘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나는 할 수 있다'하는 믿음을 기본 바탕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잡 크래프팅

주어진 일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점과 흥미에 맞게 일의 방식과 범위를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셋째, 직원 열의

일에 몰입하고 활력을 느끼며, 의미를 찾는 상태다. 학습민첩성이 높을 수록 이 '에너지 지속력'은 강해진다.

넷째, 목표 지향성

성과보다 성장을 중요시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기 위해 도전하는 것을 말하며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힘이다.

다섯째, 무형식 학습

공식 교육이 아니라 현장경험이나 관찰,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학습하는 태도다. 즉 일하면서 배우는 능력을 말한다.

여섯째, 지식 공유

배운 것을 감추지 않고 동료와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태도다. 공유를 통해 학습이 구조화되고, 조직의 집단 지성을 강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일곱째, 조직시민 행동

자신의 업무 외에도 조직 전체으 ㅣ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즉 동료를 돕거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자세를 말한다.

여덟째, 리더와 직원 관계

상하 관계를 수직적 지시로만 보지 않고 신뢰와 존중을 기반으로 상호 성장하는 관계로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아홉째, 혁신 행동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실행하며, 기존 방식을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실천적 창의성을 말한다.

열째, 직무 성과

이 모든 요인의 결과로 나타나는 실질적 성취.

즉, 실무적 능력을 말한다.


빠르게 배우는 학습민첩성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능력을 길러내는 것이 틀림이 없다. 스스로 그러한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학습민첩성'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기르는 방법은 역시나 훈련과 습관으로 가능하다.

첫째,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노출하기.

둘째, 실패 후, '복기노트'를 작성하기.

셋째, 다른 관점으로 문제를 재해석하기(타인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넷째, 피드백 루프 만들어 주기적으로 스스로 점검하기

다섯째,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부나 일을 진행함으로써, 낯선 상황을 일부러 만들기.

결국 학습 민첩성은 탄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능력이다. 변화가 빠른 시대일수록, 오래 버티는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빨리 배우는 사람'이다. 매일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실패를 복기하여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습관을 반복한다면 누구든 이러한 '학습민첩성'을 길러낼 수 있다.

다시말해서 '학습 민첩성'이란 지식보다는 '태도'에 가깝다. 낯선 것을 피하지 않고 불확실함 속에서 방향을 찾는 태도을 지닌다면 어느 환경에서도 성장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AI가 빠르게 우리의 능력을 대체하는 시대에 어쩌면 이러한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고 대처하는 이들이 남고 다른 이들이 도태하지 않을까. 세계가 빠르게 온라인화 되어질 때, 오프라인 비디오 대여 서비스를 접고,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했던 '넷플릭스'와 같이 시대에 대한 빠른 적응과 판단은 지금 이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능력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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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0-27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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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품위 -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삶의 태도
최서영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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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경우에는 내면적 성숙과 외면적 성숙의 발달 단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데 제3자로써 굉장히 당혹스럽다. 가령 외형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겉으로 보여지는 무게가 내면의 무게를 대변할 것 같은 착시를 비웃듯 철없음에 놀라게 되는 경우가 있다. 


 비치는 어른의 어린 철학에, 더 깊은 서사를 찾아 본 적도 있다. 그러다 결국 그것이 외면이 주는 착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이듦의 외형은 신뢰를 준다. 그것이 어쩌면 신이 주는 일종의 축복일지 모른다. 이성이 외모에 끌리듯 일정 수준까지 성숙해 보이는 외형은 상당한 이점이 된다. 그 성숙한 외형에 이끌려 속는 경우가 더러 있다.


 외형이 비추는 성장의 속도에 내면은 쫒아가고 있는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나의 삶은 재미없다고 볼 수 있다.


술, 담배, 도박, 게임.. 


 이런 류에 그닥 흥미가 없다. 조용한 걸 좋아해 사람을 만나는 일도 적다. 사람 사이의 갈등도 없다. 이성 문제도 단조로운 편이다. 성직자를 하면 참 어울리겠다는 말도 듣는다. 


 그것이 어떤 나이에는 '컴플렉스'다.


어린 시절, 가벼운 욕도 하지 않고 살았다. 남자들 사이에서 가벼운 욕 정도는 하고 살아야 그 무리에서 무시도 당하지 않는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데, 그 핸디캡을 갖고 청소년기를 지나온 것이 대견할 정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올바름에 아무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살다보니 그저 그렇게 됐다랄까.


 쉽게 말해, 여차 하다보니 타이밍을 놓쳤고, 타이밍을 놓쳐 지내다보니 주변에 그런 사람으로 비춰지곤 했다.


 20대 초반, 친구들과 술집을 다닐 수 있을 즈음, '군대'와 '유학'을 선택했다. 군대에서는 '담배'를 배우지 않았고 '유학'하면서는 '담배'가 비싸서 피우지 못했다.


 '유학' 후에는 '바'와 '클럽'을 동시 운영하는 곳에서 '글라시에'라는 파트타임을 했다. '글라시에'는 쉽게 말해 유리잔을 세척기에 돌리고 마른 헝겁으로 잔을 닦아내는 직업이다. 클럽 내의 빈병을 수거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빈 술을 채워 놓는 직업이다. 놀기 좋을 그 환경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한달에 맥주 한 캔도 마시지 않았다.

 클럽에서 일을 하다보면 정리를 할 때 즈음, 눈 풀린 백인 여성들이 다가 올 때가 종종 있다. 실컷 놀다가 바텐더나 기타 직원들과 연락처를 주고 받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무얼하냐 묻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일이 끝나면 아파트 청소하러 가야 돼'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마다 '혹시 게이야?'하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닥 원칙도, 철학도 없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고리타분하게 삶을 살았다. 그 까닭에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당당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일과를 마치면 책이나 읽고 영화를 보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모범적인 삶을 살던 인간도 아니었다. 그냥 밍숭맹숭하고 시시하고 선택을 하고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밍숭밍숭 재미없음이 무능처럼 보여진다.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잘 노는 친구'는 부러움의 대상인 경우가 많았다. '환경'을 잘 어울리지 못하면 '루저'처럼 느껴지곤 했다. 빨리 이 시기가 지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은 드디어 이루어졌다. 시간은 나를 태우고 마흔에 내려 놓았다. 


 나는 그대로인데 제법 성향에 맞는 나이에 도달한 것 같다. 20대라면 '심심한 놈'처럼 보여질 성향이 40대에 내려 놓으니 제법 그럴싸 한 옷을 챙겨 입은 느낌이다.


 나이가 들어가다보니, 영혼을 갈아섞일 만큼 깊이 있는 우정이라던지, 관계가 중요하진 않다. 대부분의 관계는 가족 단위로 끊어지고, 나머지 관계는 표면적이고 격식적으로 바뀐다.


 아이 '참관 수업'에 다녀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업을 지켜보는 부모 대부분은 나의 또래이다. 그들이 점잔빼는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00 아버님!', '안녕하세요, 00 어머님!' 하신다.


 그들과 비슷한 시기를 겪어 1인으로써 '점잖을 뺄 만한 아이'는 한 반에 '한 두명'도 되지 않는다. 상당수가 비속어를 일상처럼 사용하고 부모님의 속을 적당히 썩이며 자랐다. 나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러다 '어른'이라는 옷을 입으면 꽤 성숙한 외형을 갖추고 격식을 차리게 된다. 어리숙한 어떤 모습을 숨기고 어른인 척 인사하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얼마만큼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가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 지금의 나이에서 나는 앞과 뒤가 비슷해졌다. 어떤 이들은 겉으로 그러면서 속으로 고달픈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가짜 품위 속에서 진짜의 특징이라면 그 나이에 얼마나 편안한가다.


 튀어 나오는 비속어를 겨우 참아낸다거나 모자란 지식을 숨기려 노력을 하고 있다거나... 대부분의 어른은 사실 내면에 있는 아이를 숨겨, 앞으로는 성숙하고 뒤로는 어리숙한 단계로 나아간다.


 일부는 직업에 적당한 '직업윤리나 책임'을 가지고 있고, 괜찮은 경제관념을 통해 스스로의 소비와 수입을 관리한다.

 예전 잘 알고 지내는 이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중년 남성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굉장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에게 적당한 동경을 갖고 있다가 우연히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느껴진 인상은 처참했다. 험담을 너무 쉽게 한다거나, 약속을 너무 쉽게 잊어 버린다거나, 중고등학생들 입에서 나올 법한 저급한 비속어가 너무 가볍게 나왔다.


 '저 나이가 됐을 때, 나도 저렇게 보이려나...'

그런 생각이 막 머리를 스치고 갔다. 요즘 '영포티'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된단다. '영포티'는 젊은이를 따라하는 '중년'을 이야기 한다. 이것이 40대를 놀릴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던데.. 가만보면 그것은 40대의 문제는 아니다. 40대가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놀리는 동안, 과연 그들은 10대, 20대 같은지 묻고 싶다.

 열심히 학업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자신의 스펙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그도 되지 않으며 타인에게 묻은 겨를 탓하는가.


 군군신신부부자자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각자 자신에게 맞는 '롤'을 수행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10대는 10대처럼, 20대는 20대처럼, 30대는 30대처럼...

 모든 인간은 점차 '어른'이 되어가기 때문에 어떤 나이에 상관없이 나아가는 방향은 같다. 결국 어른이 가져야 할 품위는 그 나이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까지 천천히 쌓아가는 듯하다.

 결국 돌고 돌아 2000년 전 공자의 가르침이 맞을수도 있겠다 생각이 든다. 어른은 어른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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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생공부 - 천하를 움직인 심리전략 인생공부 시리즈
김태현 지음, 나관중 원작 / PASCAL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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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일을 꽤함은 사람에게 있고 이루어짐은 하늘에 있다. 이 말은 조조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 '위서'에서 조조는 군사 행동을 앞두고 위와 같은 말을 했다.

이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진인사대천명'과 닮았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때'가 있는 법이다. '때'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기에 정확하게 그것을 맞춰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러한 '때'를 '운'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가수 '신해철'은 성공의 비법을 '운'이라고 했다. 참 가혹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대부분의 것은 시기를 알 수 없이 움직이는 '운'이라는 것에 작용된다. 고로 미래를 미리 재단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

삼국지를 처음 읽었을 때, 자연스럽게 '유비'로 이입을 하게 된다. 무언가 평범하지만 비범한 인물이 점차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덕'이라는 것은 저렇게 사람을 '모종의 힘'을 통해 길러내는 구나, 하고 배우게 한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 읽었을 때, 삼국지의 첫인상은 그랬다. '유비'는 좋은 사람, '조조'는 나쁜 사람.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가 깨진 것은 머리가 더 성장한 이후였다. 살아보니 삶은 실제유비만큼이나 '조조'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

'녕아부천하인, 무천하인부아'

조조의 대표적인 어록 중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저버리게 하지 않겠다."

그 독함을 '악'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어쩌면 어린시절부터 읽어왔던, '혹부리 영감'이나 '흥부 놀부'와 같은 '욕심을 버려라'하고 가르치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는 느낌으로 '조조'는 틀림없이 '벌'을 받아 마땅했다.

다만 살아가면서 '욕심'이 꼭 나쁘다고 볼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지나친 과욕'이 아니라면 사람에게 '욕'이라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조조가 '관우'를 대할 때의 태도에서도 복잡한 그의 인간상이 들어난다. 그는 단순히 관우를 적군의 장수로만 보지 않았따. 인재로서의 가치를 알아보고 예를 다해 대접한다. 동시에 그가 언제든 자신을 떠날 수 있따는 사실 또한 꿰뚫고 있다. 그 두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던 조조의 태도에서 냉철함과 인간미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덕'을 중요시하는 '유비'의 답답함이 보이고, 시대를 읽는 통찰력을 가진 조조를 전략가, 현실주의자로의 유능함이 보이면서 '조조'를 다시 평가하게 됐다.

사실 삶에서 '유비'와 '조조' 어느쪽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유비가 이상을 좇는 인간이라면 조조는 실리를 좇는 인간이다. 세상은 소설과 다르기에 '유비'와 같은 태도로는 버티기 어렵다. 또한 '조조'와 같은 실리만으로도 외로워진다.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는 말은 앞서 말한 '조조'의 인간다움과 스토아철학의 정신을 닮았다. 스토아철학에서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의지와 판단, 노력은 인간의 영역이지만 결과와 외부의 상황은 '하늘'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서 '조조'가 '인간의 오만함을 경계하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이 문장을 '유비'가 했다면 현대 우리가 받아 들이기는 꽤 어려운 수동적인 표현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다면 이 말을 한 사람이 '조조'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짓고 스스로의 영역에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삼국지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과 상황은 어쩌면 우리가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와 상황의 다른 모습들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어가며 다시금 삶을 인생을 공부해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어떤 이의 말에 따라, 역사서는 과거 인간들의 오답노트 같은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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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의 미술관 문학동네 시인선 241
류성훈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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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는 있지만 커피가 없고, 보일러는 있지만 가스가 없고, 그릇은 있는데 김치가 없고, 현재는 있지만 그 속에 우리가 없고, 삶은 있지만 내가 없는 곳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류성훈 시인의 '아직'의 일부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본질'이다.

본질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시다. 류성훈 시인의 '아직'에서 포트는 그 자체로 본질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쓰임'을 위해 창조된 도구다. 즉 '포트'는 있으나 '커피'가 없다면 그것은 본질을 잃은 사물이 된다. 본질을 잃은 사물이 가진 무의미함.

본질은 뿌리를 찾도록 하는 이정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어디서 왔고,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그것을 묻는다. 커피 포트의 본질을 따라가면 더 깊은 진리에 닿는다.

커피와 포트가 있다고 해도 마시고 싶은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먹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마실 여유가 없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무언가의 본질을 끊임없이 따지고 들면 결국은 '사람'. 더 깊게는 그 내면을 만난다.

어떤 생각으로 삶을 채우고 사는 사람인가. 그 본질을 다시 쫒다보면 '철학'을 만나게 된다.

예전 한 명품 의류의 원가가 공개된 적 있다. 원가를 알고 봤더니 꽤 저렴하다. 그것에 상표를 박아놓고 그토록 폭리를 취한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물음에 개인적 공감은 하지 않는다.

오렌지는 오렌지주스가 되는 순간 가격이 수 배로 치솟는다. 상표를 달고 유통 과정 몇번을 거치면 오렌지는 원가의 열배도 넘게 된다. 그렇다면 오렌지 주스는 과연 폭리를 취하고 있는가.

이런 식의 사고는 '시'나 '책'의 가치를 허무하게 만든다. 책의 원가는 허무할 정도로 적다. 책의 가치는 대부분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발생한다.

유통과정, 마케팅, 작가의 철학.

원가를 쫒아가는 이들은 '오렌지의 원가'에서 멈춘다.

'농사' 짓는 집에서 자란 '촌놈'의 입장에서 아버지, 어머니는 매번 말씀하셨다.

"'농사꾼'에게 '손해'라는 것은 없다."

농사는 '원가'를 따질 수 없는 '노동'과 '자연'에서 수익을 얻는 사업이다.

하나의 과일을 틔우기 위해 꽤 적절한 '시설'과 '관리'가 들어가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을 길러내는 것은 '사람', '땅'과 '볕', '물' 따위다. 그것의 원가는 무엇인가.

그것을 쫒아 올라간 그 상위의 어떤 것. 그것의 원가는 얼마인가.

태양의 원가는 얼마이고 그 이전에 우주를 이루는 원소들의 원가는 얼마이며, 빅뱅의 순간을 에너지로 환산하면 얼마가 되는가.


우리 인간은 표피로 연약하게 포장되어 있으나 아주 단단한 과거를 쌓고 미래로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언제나 경험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일 뿐이다. 지나간 혹은 다가 올 현재는 언제나 관념속에서나 존재하는 '상상의 산물'이다. 거기에 '과거'와 '미래'의 이름을 붙인다고 존재가 생겨나는 법은 없다.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유물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수가 하는 거짓말, 세상이 만들어낸 착각, 누군가의 조작, 그런 것과 진실을 구분할 수 없다. 타인의 정보를 '신뢰'한다는 '관념적이고 사회적인 믿음'이 그것의 '존재'를 연약하게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즉, 태양이 원반이 아니라 '구'라는 것,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공 모양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실제 겪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증명한 더 나은 존재들의 입증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본질로 들어가면 결국 '사람'만 남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무의미하게 변한다.


'포트는 있지만 커피가 없고, 보일러는 있지만 가스가 없고, 그릇은 있는데 김치가 없고, 현재는 있지만 그 속에 우리가 없고, 삶은 있지만 내가 없는 곳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본질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으로 출발하여 사람으로 끝난다. 포트는 커피가 있어야 완성되겠지만 결국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사람이 '커피'를 알아야 하고, 마시고 싶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커피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 있어야 한다. 커피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은 과거의 현재로 부터 끄집어 내어야 한다. 그 과거의 기억에서 '커피'란 항상 '타인'과 함께하게 된다. '타인'의 '커피'는 어떻게 시작했는가.

류성훈 시인의 '산 위의 미술관' 중 '아직'의 일부에서 쓸모와 본질이 생각났다. 시인이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의 본질이란 시인이 남겨 놓은 흔적의 의미를 찾는다기 보다 시인이 남겨 흔적에서 나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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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 개정판 미쓰다 신조의 집 2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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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여름과 가을의 중간쯤 되는 기온에 에어컨을 켰다가 껐다가 반복한다. 여름이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라는 표현에 맞게 '공포'나 '스릴러' 같은 문학작품들이 인기다.

흔히 '간'과 '담(쓸개)'은 '용기'을 담는 주머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쓸개가 담고 있는 '용기의 힘'을 담력이라고 한다. 쓸개가 크면 '대담하다'라고 한다. 몸안에 용기를 담는 주머니가 가득차서 펄펄 끓는 상태라면 모를까. 이것이 '쓱~'하고 빠져 나가면 '간담'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두렵가나 놀라게 되면 '용기' 주머니에서 용기를 다 써버려 간담이 서늘해진다는 동양의 지혜를 담은 말이다.

무더위가 살짝 물러가서 에어컨을 켜기에는 너무 춥고 끄기에는 더울 때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여름과 가을의 중간쯤 되는 기온에 에어컨을 켰다가 껐다가 반복한다. 여름이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라는 표현에 맞게 '공포'나 '스릴러' 같은 문학작품들이 인기다.

흔히 '간'과 '담(쓸개)'은 '용기'을 담는 주머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쓸개가 담고 있는 '용기의 힘'을 담력이라고 한다. 쓸개가 크면 '대담하다'라고 한다. 몸안에 용기를 담는 주머니가 가득차서 펄펄 끓는 상태라면 모를까. 이것이 '쓱~'하고 빠져 나가면 '간담'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두렵가나 놀라게 되면 '용기' 주머니에서 용기를 다 써버려 간담이 서늘해진다는 동양의 지혜를 담은 말이다.

무더위가 살짝 물러가서 에어컨을 켜기에는 너무 춥고 끄기에는 더울 때, 딱 알맞게 우리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문학과 같은 문화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개중 '미쓰다 신조'의 '화가'는 그런 서늘함을 채험하게 하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미쓰라 신지로는 '필명'이고 작가의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꼭 그럴 때가 있는데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작품의 집중도를 해치는 경우다. 어떤 배경의 사람인지 인간적인 공감을 하고나면 그의 상상력에 대한 한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 우리가 읽기에 적절한 이유는 그가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문화적 공감을 가진 사람이 쓴 글에서도 깊은 공포를 느낄 수 있겠지만 이국적인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공포감'도 한몫한다고 본다.

미쓰다 신조는 주로 호러나 미스터리 장르를 쓰는 작가다. 어쩌다보니 그의 작품을 꽤 읽어 오고 있다. 본래 공포나 스릴러를 좋아하기도 하고 추리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도 어느정도 작용하는 듯 하다.

현실과 꿈, 사실과 허구. 그 사이를 모호하게 오가며 풀어내는 이야기는 과거 '일본식 괴담'을 읽는 듯하다.

학창시절,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 '빨간 마스크'니 뭐니, 하는 등 일본식 괴담을 듣곤 했다. 역시나 한국과는 궤를 다르게 하는 분위기는 '미쓰다 신조'의 분위기에서 물씬 느껴진다.

단순히 '역겹고 징그러운 표현을 나열하여 불쾌감을 주는 공포'와는 다르다. 특유의 음산함을 문체에 녹여 분위기 자체를 음산하게 만들어 나간다. 거기에 독자가 추리를 하면서 따라가도록 하는 미스터리를 섞는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낯선 동네로 이사한 소년의 이야기다. 그는 처음들어오는 그곳에서 어떠한 기시감을 갖는다. 사실 그 도입부 톤과 장치가 비슷한데, 어디서 봤나 했더니 전에 읽었던 '미쓰다 신조'의 '흉가'와 도입 구조가 비슷하다.

두 작품 다 낯선 곳에서의 기시감과 이질감 거기서 오는 불안, 현실과 비현실의 붕괴라는 전재를 탄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어쩌면 그의 '집' 시리즈를 찾아가며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딱 알맞게 우리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문학과 같은 문화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개중 '미쓰다 신조'의 '화가'는 그런 서늘함을 채험하게 하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미쓰라 신지로는 '필명'이고 작가의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꼭 그럴 때가 있는데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작품의 집중도를 해치는 경우다. 어떤 배경의 사람인지 인간적인 공감을 하고나면 그의 상상력에 대한 한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 우리가 읽기에 적절한 이유는 그가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문화적 공감을 가진 사람이 쓴 글에서도 깊은 공포를 느낄 수 있겠지만 이국적인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공포감'도 한몫한다고 본다.

미쓰다 신조는 주로 호러나 미스터리 장르를 쓰는 작가다. 어쩌다보니 그의 작품을 꽤 읽어 오고 있다. 본래 공포나 스릴러를 좋아하기도 하고 추리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도 어느정도 작용하는 듯 하다.

현실과 꿈, 사실과 허구. 그 사이를 모호하게 오가며 풀어내는 이야기는 과거 '일본식 괴담'을 읽는 듯하다.

학창시절,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 '빨간 마스크'니 뭐니, 하는 등 일본식 괴담을 듣곤 했다. 역시나 한국과는 궤를 다르게 하는 분위기는 '미쓰다 신조'의 분위기에서 물씬 느껴진다.


단순히 '역겹고 징그러운 표현을 나열하여 불쾌감을 주는 공포'와는 다르다. 특유의 음산함을 문체에 녹여 분위기 자체를 음산하게 만들어 나간다. 거기에 독자가 추리를 하면서 따라가도록 하는 미스터리를 섞는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낯선 동네로 이사한 소년의 이야기다. 그는 처음들어오는 그곳에서 어떠한 기시감을 갖는다. 사실 그 도입부 톤과 장치가 비슷한데, 어디서 봤나 했더니 전에 읽었던 '미쓰다 신조'의 '흉가'와 도입 구조가 비슷하다.

두 작품 다 낯선 곳에서의 기시감과 이질감 거기서 오는 불안, 현실과 비현실의 붕괴라는 전재를 탄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어쩌면 그의 '집' 시리즈를 찾아가며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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