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잘 지내는 법 - 나를 만나는 49일 글쓰기 워크북
조민영 지음 / 스피어인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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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학 이론 중에 '자아 확장(self-expansion)이라는 표현이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과정은 시작된다.


 가령 우리가 정의하는 '나'는 어디까지인가,


 쉽게 말해서 어느 영화의 장면처럼 '순간이동'이나 '시간이동'을 할 경우, '나'라는 것의 시공간을 이동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나'라고 정의하고 이동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손톱'의 경우 그 뿌리는 분명 살아 있겠지만 새로운 세포가 계속 만들어지므로 앞으로 밀려나온 세포는 케라틴으로 굳어진다. 이렇게 밖으로 나온 손톱은 이미 죽은 세포 덩어리다. 고로 우리는 손톱을 잘라내더라도 고통이나 상실을 느끼지 않고 그것이 떨어져 나감에 있어서 '나'가 분리되었다는 느낌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머리카락, 손톱, 피부 각질, 우리몸에 있는 수십조 마리의 미생물은 '나'와 별개의 것들이다.


 우리몸의 60%는 물로 이뤄져 있다. 물은 대체로 태평양 증발한 수증기가 따뜻한 공기와 함께 상승하여 구름이 됐다가, 바람을 타고 이동하여 찬공기를 만나 비가 되어 땅에 내린다. 내린 비는 땅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를 거치고 수도꼭지를 통해 우리 입으로 들어온다.

 이렇게 들어온 물은 핵액 속에서 최소 수시간 혹은 수일을 머물고 몸 전체에서 짧게는 2주, 길게는 4주 정도 머물다가 소변으로 빠져나가 하수관을 지나고 정화시설을 거쳐, 강으로 흘렀다가 마침내 다시 바다에 이른다.


 즉 우리몸의 60%는 한달 전까지 태평양 바다의 일부였다. 이것은 동아시아 어느 호랑이의 방광에 머물었기도 하고, 인도 평원을 걷던 코끼리의 땀이기도 했으며, 수백년 전 이름 모를 사람이 흘렸던 눈물이거나 소변이기도 했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을 확장하다보면 꽤 경이로운 순간을 만날 수가 있다. 우리가 더 크게 비약하면 '별'에서 왔다는 증거를 알 수 있다.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와 산소, 질소와 철은 지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우주 초기에 오래된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것들이 다른 원자와 중력으로 모여 있다가 초신성 폭발을 통해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기를 반복하면 결국 '내'가 된다.


 '나'는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우주 생리 속에 잠시 모여 형태를 짓고 있는 찰라의 흔적일 뿐이다.


 어떤 감정에 의해 스스로가 괴로워지는 순간이 있다. 남들과의 비교,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 열등감, 외로움, 슬픔.

 이런 것들은 '나'의 한계를 좁혔을 때 삶을 괴롭게하는 무엇이겠지만 '나'의 경계를 무너뜨려 확장시키다보면 '우주의 경이로움'의 한 조각일 뿐이다.


 '한낱 원자 알갱이'가 모였다가 폭발했다가를 반복하다가 이런 '감정'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우리는 금빛 물고기나 황금을 낳는 거위, 말하는 고양이에는 무한한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다. 이유는 그것이 '참 희귀하고 신비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비로운 현상이라는 것.


사실은 저 멀리에서 찾을 것 없다. 별의 죽음에서 태어난 원자가 모여,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런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 않은가.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의 비유에 따르면 '고철 더미로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갔더니 우연히 보잉 747 여객기 한대가 조립되어 나올 확률'과 얼마나 다른가.


이 무섭고도 믿기 힘든 우연이 바로 여기 '나'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십억 년 우주를 떠돌던 원자들이 잠시 모여 의식을 만들어 낸다니, 세상은 '나'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주 전체'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쩐지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우울하고 현실의 번아웃 상태에서 괴로운 상태에 머물고 있을 때, 너무 '나'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너무 갇혀 있어서 작은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라는 것이 '고정'됐다는 그 착각이 워낙 '금강'과 같아, 인도의 한 수행자는 오랜 세월 그것을 깨뜨리고자 노력했다. '금강'이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즉 '다이아몬드'를 의미하다. 깨지지 않는 그 관념을 깨부수자고 불교 경전 '금강경'은 물었다.


 '나'라는 것은 정말 고정된 값인가,


여러 글을 읽다보면, 혹은 글을 쓰다보면 '천체물리학'이든, '양자역학'이든, '심리학'이든, 종교나 수필이든, 그 모든 것이 '나'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돕는다. 그리고 그런 여러 글들은 내 속에서 섞여 자신만의 대답을 만든다. 다시말해서 오늘의 '나'에 대한 마음을 느끼고 기록하는 것은 150억 광년 우주의 역사상 단 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에 대한 현상이고 기록이다. 


 이 경이로운 관찰을 언제든 펜과 조금의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조미영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언제든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관찰하다보면 스스로 뿐만 아니라 '나'의 확장으로 만들어진 주변 세계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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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 - 우리가 서로를 적이라 믿게 만드는 마음의 함정
커트 그레이 지음, 제효영 옮김 / 김영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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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분명 '포식자'의 특성을 가진 종이다. 다만 사자처럼 순수 육식포식자는 아니다. 현대 인류는 먹이사슬 최상위권에 올라 있어 만생명을 고루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 능력만 보면 생물종으로 우리가 처음부터 '포식자'에 위치 했었는지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날카롭지 않은 '이빨'을 가지고 있다. 위협적인 발톱도 없고 느린 속도와 약한 근력도 가지고 있다. 고로 우리가 지구 최상위 포식자로 설계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포식자와 피식자는 진화과정에서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포식자의 대부분은 진화 과정에서 눈이 앞으로 향하게 진화했다. 거리 감각과 입체 시야가 사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피식자의 상당수는 눈이 양옆에 달려 있다. 넓은 시야로 주변의 위협을 빠르게 감지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눈은 분명 '포식자'의 그것을 닮았다. 다만 다른 대부분의 증거가 우리를 '피식자'라고 인도하면서 우리의 위치는 '피식자'와 '포식자' 그 중간 어디쯤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이족보행을 하고 허리를 곧게 세우는 순간부터 우리의 시야는 허리와 목을 이용하여 넓어졌다. 거기에 타인과 협력을 통해 사방을 훑어 볼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면서 우리는 사방을 경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식자'이면서 '포식자'인 종이지 않았을까.

'미국 도덕심리학자', '커트 그레이'는 '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라는 책에서, '우리가 서로를 적이라 믿게 만드는 불안과 분노은 '피식자'로 진화해 온 '인류종'이 가진 '방어기제'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집단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선과 악'이 개념이 아니라 '피식자'의 불안감을 '타인에 대한 위험'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부모와 자녀'

'온라인 커뮤니티'

'종교'

'국가 간 갈등'

현대 우리 사회가 '분노'로 가득찬 사회라고 증명해내는 다양한 갈등들이 사실은 오랜 시절, '포식자'로부터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불안해 했던 조상들의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은 공격성이 짙은 포식자라기보다, 단순히 위협에 민감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위험 신호를 과도하게 담지하도록 진화했다. 내부집단와 외부집단을 나누고 비록 내부집단의 구성원이 반사회적이라 하더라도, 외부집단의 구성원이 조금더 친사회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내부집단의 행동을 모방하고 방어하도록 행동한다.

인간의 대부분은 항상 자신이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유는 '상대'를 위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을 '악'이나 '위협'의 존재로 상정하고 '분노'를 표출한다.

실제로 진보 혹은 보수적 정치 특성을 가진 이들은 상대쪽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며 '지능이 낮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 비율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크기 다르지 않은데, 통계적 결과를 살펴보면 그들의 지능과 학력 차이가 무의미한 차이라고 한다.


커트 그레이는 인간의 이런 성향을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뇌과학' 관점에서,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관찰한다. 얼핏 '사피엔스'처럼 '역사와 진화'를 이야기하는 듯 하다 현실로 돌아와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한다.

뉴스를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나 얼핏 뉴스를 보게 되면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분노'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신의 불안을 표출하는 그 방식이 '피식자'가 갖던 불안을 증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선과 악',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간종의 작동 매커니즘을 이해하고 나면 조금 더 우리가 갖는 '분노'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살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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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18주년 특별기념판) - 사람을 얻는 마법의 대화 기술 56
샘 혼 지음, 이상원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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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한 자존심으로 '사용설명서'를 외면한 경험은 누구나 있다. '내비게이션' 없이 길을 찾거나, 약 복용법을 대충하는 경우도 있다.

엑셀 단축키, 함수를 배우지 않고 마우스로만 버티는 경험.

운동 자세를 배우지 않고 몸만 축내는 경험.

스마트폰 설정을 건드리기 싫어서 기본값으로만 몇 년을 쓰는 경험도 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사용설명서를 들여다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야!', 혼자 골똘하게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이미 거기에 적혀 있을 때가 많다.

같은 길을 몇바퀴나 돌다가, '안되겠다, 내비게이션을 켜야겠다'하고 켜고나면 너무 쉽게 길을 안내해서 허무할 때도 있다.

가만보면 세상은 애초에 '모든 사용설명서를 먼저 제공해 주었다. 인류가 쌓아 놓은 집단지성은 세대가 지나고나면 흙이 되어 버리는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아래로 옆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됐고 그렇게 거인의 어깨 위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보면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게 됐다.

인류는 30만년간 5억 제곱킬로미터에 펼쳐진 수많은 '사피엔스(지혜로운 인간)들'의 발견을 무시하고 혼자서 스스로 해 보겠다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비효율이자 오만에 가까운 일일지 모른다.

물론 직접 부딪혀 배우는 경험은 중요하다. 실패도 중요하다. 시행착오 끝에 얻어지는 감각도 중요하다. 다만 문제는 이미 수없이 반복된 실패를 다시 처음부터 재현하고자 하는 아집에 있다.


미국의 '희극인' '그로우초 막스'는 이렇게 말했다.

"남들의 실수에서 배워야 한다. 그 실수를 다 직접 겪어보기에는 인생이 짧다."

그렇다면 수많은 현세와 과거의 '사피엔스'들이 남긴 인간관계의 실패와 후회, 갈등, 화해를 다루는 방법을 외면하는 것이 맞을까.

다른 '사용설명서'처럼 인류는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수십만년간 쌓아가면서 노하우를 축적했다. 그 중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기술'인 '화법'도 마찬가지다.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역시 그런 종류의 책이다. 누군가는 평생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고, 누군가는 말 한마디로 관계를 잃는다. 또 누군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다만 우리가 겪는 이런 상황이 인류 탄생 이래로 최초, 전세계 모든 인간들 중 나에게 첫번째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다른 시대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미 비슷한 문제를 고민해 봤으며 친절하게도 그것을 잘 기록하였다. 대부분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해나 감정적 반응, 불필요한 자존심, 상대를 이기려는 태도, 자기 말만 맞다고 생각하는 습관은 시대가 바뀌어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반복되어 일어난다.

이는 다양한 국가와 시대의 '소설'이나 '역사적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다.

'샘혼'의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에는 그들의 기록이 적혀 있다. 또한 흔히 '밥 먹고 그것만 연구한다'라고 하는 '전문가'의 정리도 함께 있다.

'샘혼'은 미국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그녀는 강연이나 워크숍, 다양한 저술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이야기 한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또다시 실전 경험으로 실패를 쌓아가며 인류 역사 만큼의 데이터를 혼자 만들어 가기에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스마트폰에 '최신 기능'이 업데이트 되거나, 더 좋은 카메라 성능을 탑제 하는 것만큼 우리 인간 자체에게 가장 유용하게 쓰일 반영구적 기능은 '말하기'다. 이는 한번 '업데이트'가 되면 퇴보하지 않고 '배터리'도 달지 않으며 '버전'이 오래됐다고 버벅거리는 경우도 없다.

언제나 복리로 그 기술을 쌓아 올릴 수 있으며 '외부 장치'가 아니라 내 신체에 직접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이다.

우리는 '말'이라는 강한 도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말'은 사회생활에서 필수적이고 '가족'과 '친구'를 사귀는데 가장 중요하며 스스로를 갈고 닦는데 필수불가결한 도구다.

그것을 어제와 오늘, 언제나 불편함을 느끼며 업데이트를 하지 않은 채, 구버전을 고집하는 것은 어찌보면 아둔한 일일 것이다.

가끔 어떤 어른들을 보면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구식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기기로는 간단한 '은행 업무'도 힘들다. 약간만 시간을 내면 바로 달라질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스마트 기기' 뿐만 아니라 사고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업데이트하는 일은 나이와 상관없이, 어쩌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갈고 닦아야 하는 일인 것 같다.

오늘 나는 '어떤 도구'를 가지고 세상에 나서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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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세계사 - 고대 이집트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상하게 빠져드는 역사 속 23가지 명장면
지식지상주의 지음, 염명훈 감수 / 북라이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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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를 향하는 '우편배달부'의 이야기라던지, 고대 그리스의 '헬스장'의 이야기, 철도 회사 직원들의 여가 '스포츠' 이야기.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현실 우리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역사를 좋아하는데 '거시적 역사'들이 주로 '거대자본'이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얼핏 획일적인 경우가 많다.

모든 학문이 그렇겠지만 거시적인 정보에서 점차 내려가며 미시적인 정보를 알게 해주는 경우가 있고 미시적인 정보부터 시작하여 올라가다보면 거시적인 정보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쪽이 더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후자 쪽이 접근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분명 한 것 같다.

역사에 관한 책은 여러 시선으로 읽을수록 좋은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역사'은 '사피엔스'와 '총균쇠'였다. '인류'를 지칭하는 명사를 '사피엔스'라고 시작하는 것부터, 어째서 인류 문명의 발전 속도는 각각 다르게 됐는지를 설명하는 총균쇠의 도입부도 몹시 새로웠다.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사피엔스'라는 종의 특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지리와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이 어떻게 역사에 관여했는지 다양한 시선을 보여 준다.

'지식지상주의'의 '말도 안돼 세계사'에서도 '아, 그랬겠구나'하는 인사이트가 있었는데, 여권의 향상이 '세계대전'에서 출발했다는 시선이다.

'여성의 경제참여'가 언제부터 활발해졌는지는 굳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굳이 생각해보면 1971년에야 여성 참정권이 도입됐다는 '스위스'를 보며, '여성의 권리'가 생각보다 최근에 발전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특히나 스위스의 칸톤 지방에서는 무려 1990년까지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니, 우리가 누리는 대부분의 상식들이 생각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전쟁에서 사망하거나 전쟁 인프라 구축을 위해 소모되고 있을 때, 각 국가에서 '급하게 여성의 노동력'을 찾았다. 스위스는 비교적 전쟁의 직접적 피해를 덜 입근 국가였기에 변화의 속도 역시 느린 편이었다.

앞서말한 '영국의 철도 노동자의 스포츠'가 '프리미어 리그'가 되고, 플라톤이 신체를 단련하던 공간이 '헬스장'이 된 것처럼 변화는 아주 점진적으로 일어났지만 확실하게 일어났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면 세상에 많은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언젠가 아이들과 외출을 했는데 아이가 물었다. '아빠, 구름은 왜 안 떨어져?' 혹은 '호주머니에 구름을 담아오면 안돼?', '달은 왜 자꾸 우리를 따라오는 거야?'하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그것에 대한 대답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아이만큼 어린 나이에 내가 비슷한 질문을 아버지께 했건 기억이었다.

나도 세상이 다 호기심 투성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어설프게 알고 있다는 착각으로 호기심이 줄어 들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저절로 그냥'이라는 것은 없다. 항상 이유와 원인이 있었을텐데, 어른이 되면서 '그냥 원래 그래'라는 방식의 사고방식을 하게 되면서 삶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지는 듯하다.

어쩌면 역사는 과거를 배우는 학문이라기 보다, 현재를 조금 더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학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역사를 배우면 단순 '공부'가 아니라 삶이 즐거워지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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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소한 삶 - 적은 소유로 깊은 향유를 살아가는 사람들
스콧 새비지 엮음, 강경이 옮김 / 느린걸음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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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커피 그라인더를 하나 구매했다. 요즘처럼 '전동 그라인더'는 아니고 핸드밀 방식으로 그 본체가 '목재'로 되어 있는 그라인더다. 그라인더를 구매하고 얼마 뒤에는 '모카포트'를 또하나 구매했다.

물품을 늘리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데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면 하나 둘 물건이 늘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꽤 고민을 하고 구매한 흔적이 있다. 첫째 모카포트와 핸드밀 그라인더 둘다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게 어떤 의미에서 비효율적일 수 있겠지만 구매한 아이템에는 꽤 만족하고 있다.

수동으로 커피 원두를 갈면 '바스락'거리며 갈리는 원두의 향과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날카롭게 돌아가는 '모터' 소리가 아니라 촉각과 시각, 후각으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편안함이 '커피 제조' 자체부터 '커피'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콧 새비지'가 엮은 '간소한 삶'에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에서 '간소한 삶'을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었다.

책을 읽는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자동'이 되고 기계가 일상화 된 세상에서 '인간다움' 즉 '인간다운 감성'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까.

'야구'에서 투수들이 던지는 공의 최고 시속은 160km/h 이상이다. 이 엄청난 구속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투수들은 이 공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던지기 위해 끊임없이 신체를 단련한다.

세상 이처럼 비효율적인 행위가 있을까. 인간을 위해 대신 공을 던져주는 '피칭머신'의 경우 '속도 제한'이 걸려 있다. 이는 인간의 '구속력'에 맞춰 의도적으로 낮은 속도에 설정된다. 기술적으로 이 피칭머신의 구속력은 200km나 300km 이상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마운드 위에 투수가 아니라 기계 하나만 세워 둔다면 야구는 훨씬 효율적인 스포츠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 '야구'는 더 빠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기계'들에게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이런 기계는 '선수'로 뛸 수 없다.


'스포츠'는 '효율'보다 '규칙'과 '절제'가 중요한 행위다.

축구에서 '오프사이드'라는 반칙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골'을 기다리고 있지만 축구에서는 '오프사이드 규칙'을 만들어 '골이 너무 쉽게 들어가는 상황'을 절제 시켰다.

초기 축구에서 '공격수'들이 효율적으로 골을 넣기 위해서 골대 앞에 그냥 서 있다가 긴 패스를 받고 점수를 만들어서 그렇다.

AI 이후 사람들은 '인간이 직접 하는 것'에 큰 가치를 느끼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리고 단순 '효율'이 아니라 '규칙'을 통해 '절제'된 '게임'이 더 큰 가치를 가진다.

가치는 '결과'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학습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폰' 하나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1~200만원의 현금이 필요하지만 '아이폰'을 생산과정을 구매하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하다. '결과물'은 싸구려일 뿐이다. 인류 전체가 그것을 학습하고 있기 때문에 AI와 기계 시대에 오히려 '아날로그'에 더 큰 차치를 주고 있는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

본래 모든 것은 그렇다. 인간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에 '가치'는 부여된다. '반짝거리는 광물'에 '가치'를 부여하면 '금'이라는 가치가 생기고 어떤 '종이'는 단순 문자와 숫자가 적혀 있을 뿐이지만 그 '광물'의 수백배의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AI와 기계가 만들어내는 값싼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다양한 부산물의 감정들.

우리 모두가 그것에 가치가 있다고 여길 때, 그것의 시장은 더 커질 수 있다. 간소한 삶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워렌버핏'이나 '빌게이츠', '일론 머스크' 등 세계 최고의 부자들의 특징이라면 물욕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의외로 삶의 방식이 단순하다. 어쩌면 액자속 그림에 코를 박고 사는 우리가 '그림 전체'를 감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그림 전체를 조망하며 살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멀리 떨어져 그림 전체를 바라보면 본질이 무엇인지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부유해질수록 '소비'보다는 '시간과 경험, 몰입'과 같은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돈으로 대부분의 결과를 살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오히려 '결과'는 흔한 '싸구려'가 됐기 때문이다. 희소성이 발생한 것에 우리는 가치를 느낀다.

천천히 커피를 내리고, 천천히 종이책을 읽고, 스포츠를 감상하는 일은 어찌보면 자판기가 내려준 커피나 자극적인 쇼츠, 공장 기계들끼리 무한 기술 경쟁을 벌이는 방면보다 훨씬 가치 있고 인간다운 삶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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