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 별사
정길연 지음 / 파람북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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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갈 수 없으면 그립고 다가오면 버거운것, 이는 제 홀로만 아는 이의 ㅂ라걸음이 아닐는지요. 가깝든 멀든, 무겁든 헐겁든, 수많은 관계가 그리움과 버거움의 중간 그 어디쯤에서 어긋납니다. 한 치 사람 속 알 길 없다는데, 그 마음이란 것이 한바탕 휘저어놓은 감탕밭처럼 어지러운 까닭이지요.'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책은 독자의 손을 떠나지만 문장은 남는다. 정길연 작가의 '안의, 별사'는 그런 책이다. 손을 놓아도, 페이지를 덮어도, 문장들은 한동안 머리속을 떠돌며, 끊어진 듯 그렇지 않은 어떤 인연인듯 묘하다.

관계란 무엇인가. 가까이 다가서면 부담스럽고, 멀어지면 그리운 것. 이 모순 속에서 불안과 외로움의 적정선을 찾아 타협하는 것이 아닐가.

관계나 인연이라는 것은 꼭 '사람 간'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인연(因緣)에서 인(因)은 '원인'이나 '이유'를 뜻하는 한자다. 연(緣)은 '연결됨'이나 '인과관계'를 뜻하는 한자다. 이 한자 어디에도 '사람'은 없다.

우리가 흔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할 때, '인연'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연(因緣)의 한자에 사람(人)이 사용될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과는 전혀 관계없는 한자다. 굳이 따지자면 '인할 인(因)'은 '에워쌀 위 口)'에 '사람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인 큰대(大)'가 합쳐진 말인데, 이는 사람이 무언가에 기대어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뜻한다. 여기에 사람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된다.

그렇게 보면 '인연'은 내가 기대고 의존하고 의지하고 있는 연결된 무언가를 뜻한다. 그것은 '공간'일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는 '도구'일수도 있다.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이라던지, '연하일기'로 이미 유명하다. 박지원은 조선의 외교 사절단인 '연행사'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북경과 열하를 방문했다. 그의 나이 45세 때 일이다. 이후 그의 나이 55세에 '안의 현감'으로 4년 2개월을 재직한다. '안의'는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이다. 북경 여행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현감시절 물레방아와 풍구 등의 선진 농기구를 제작하고 보급했다. 또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는데 힘을 쓰거나 제사 시설을 정비하고 수취 제도을 개선하기도 했다.

소설 '안의, 별사'는 그 시공간을 '재구성'한다. 현감으로 일하던 '박지원'이 안의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남기는 글. 안의 별사는 '인연'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에서 '박지원'은 '책'과 인연이 깊다. 문구를 인용하자면 '세상이 곧 책이다. 책이 없다면 나도 없을 것이다'하며 규장각 검서인 박제가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자연은 계절에 따라 감흥이 다르고, 하루에도 절정을 보여주는 시간이 다르다. 사람은 어제와 내일이 다르고,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다. 자연을 일러 천변만화라고 하며, 사람을 일러 심무소주, 즉 줏대가 없다고 한다. 누구나 자연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 자연을 좆아 산다는 것이 몸을 자연에 둔다는 것이 아니라, 속세의 티 없이 사는 것임을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아, 나는 어떠한가.'

'안의'는 산과 계곡이 특히 많은 지역이다. 영남 제일의 동천이라는 '안의삼동'이라는 표현이 있는 걸로 봤을 때, 박지원에게 '안의'란 자연과 뗄 수 없는 장소인 듯하다.

그가 보기에 자연은 계절마다 그 모습을 다르게 한다. 4년이라면 그 변화무쌍함을 네번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자연은 계절마다 변하고 또 하루마다 변한다. 사람도 자연과 다르지 않게 아침의 기분과 저녁의 기분이 다르다. 자연과 닮아 변화무쌍하다. 박지원의 입장에서 자연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저 물리적인 공간을 자연으로 옮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그 본성을 함께 하는 것이 자연과 함께 사는 것이다.

소설은 실존 인물인 박지원과 가상의 인물인, 이은용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진 내용이다. 몰입도가 높고, 문체는 아름답다. 역사적 사실과 상상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 독특하게도 화자가 번갈아가며 서술되는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실재와 상상이 교차하는 '안의,별사'는 단순 역사소설이 아니다. 관계와 인연을 곱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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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0 시대 - 글로벌 대격변이 시작된다
박종훈 지음 / 글로퍼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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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의 디커플링(Decoupling), 국가 간 경제적 연결이 악화되고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다. 2010년대 초반 '그렉시트'라는 용어가 생기기 시작했다. 언론에서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탈퇴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세상이 이 정도로 파편화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렉시트가 거의 완전한 용어로 정착할 쯤, 난데없이 '브렉시트'라는 용어기 신문에서 나왔다.

'갖다 붙이기도 나름이구나'하는 나름의 비판을 하고 넘어갔다. 실제 영국인들이 '유로존 탈퇴'를 국민투표에 부칠 때까지, '브렉시트'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에 얼마나 확신이 들고 있었던지, 국민투표가 발표되는 날, 투자하고 있던 주식의 요동도 그닥 신경쓰이지 않았다.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있던 날, 나는 새벽 같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세상 멍청한 결정을 할리 없다는 확신이었다. 개표는 새벽부터 시작했고 오전 7시쯤 BBC에서 탈퇴 선언이 나왔다. 주식은 장이 열리자마자 황당할 정도로 내리 꽂혔다. 그때는 그게 그냥 사건이라고 여겼지만 지금보면 1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알린 '한발의 총알'같은 순간이었다.

브렉시트는 내가 경험한 디커플링의 첫 사례다. 브렉시트 이전만 하더라도 EU는 세계화의 상징이었다. 다국가 단일시장, 관세 없는 무역, 자유로운 인력과 자본 이동. 교과서에서 배우던 '세계화'의 표본과 같았다. 다만 영국은 글로벌 경제 블록에서 탈퇴하여 자국 중심의 독립 경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후 세계는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선택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사례가 미국의 트럼프 등장이다. 힐러리와 트럼프가 대선을 할 때, 소위 '전문가'라고하는 사람들은 TV에 나와 '트럼프'라는 괴짜에 대해 비웃었다. 트럼프라는 재밌는 현상이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실제로 2017년 트럼프가 당선 됐고 2018년 미중 무역 전쟁이 개시됐다. 2018년 미국과 멕시코에 장벽을 세우겠다거나,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매기겠다는 황당한 공약, 동맹국에게 '방위분담금'을 요구하겠다는 공약도 당시 헛웃음나는 공약들이었다. 그렇게 비웃던 전문가들도 이제는 꽤 진중한 표정이되어 트럼프의 공약에 골똘해 한다. 그런 걸 보면 '세계 파편화'는 '해프닝'이 아니라, '주요 흐름'이다.

세계화는 단순환 논리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확장판과 같다. '분업화'라는 개념을 세계에 적용한 사례다. 각 국가마다 지정학적 이유로 경제적 강점이 다르다. 무역이 활발하지 않던 시기, 서로의 것을 갖기 위해서는 '전쟁'이 유일한 답이었다. 다만 2차세계대전에서 '석유'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미국은 중동으로부터 '석유'를 안전하게 공급 받아야하는 하는 문제를 가졌다. 안전한 석유 공급을 위해 미국이 해상 패권을 장악하면서 세계는 항로를 이용한 자유 무역이 가능한 시대가 됐다.

미국은 '석유'를 가져 올 때, 사우디아라비아 왕조의 안보를 책임져 주는 대신 '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다. 사우디는 지급받은 달러로 미국의 채권을 매입했다. 이렇게 서로가 각자의 국익에 따라 꽤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갔다. 페트로달러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통상 거래에서 달러를 사용하자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이 시스템과 정확하게 맞아가며 세계화는 더 가속화 됐다.

내가 더 가진 것을 내놓고 남이 가진 것을 가져오는 자유무역, 세계화가 시작한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문제가 발생했다. 자유무역은 태생적으로 불균형한 산업구조를 만든다. 가령 분업화한 개인도 자신의 업무 외에 다른 업무를 보지 못하는 바와 같다.

그렇게 한 국가에 대한 핵심 기술, 에너지, 군사적 의존도가 높아졌다. 곧 이를 무기화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중국의 일본 희토류 제재라던지, 한국에 대한 사드 보복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결과가 경제적, 안보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정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세계가 되면서 이를 무기화하는 사례는 속속 늘어났다. 코로나19가 발발하자 중국에서는 공장이 멈추고 전세계 공급망은 마비될 정도였다. 러우전쟁도 에너지 가격을 폭등시켜 유럽에 심각한 경제적 안보적 위협을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디커플링'은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하나의 전력인 셈이다.

인력, 기술, 산업이 한 국가로 점차 쏠리면서 심각한 문제가 전 세계 곳곳에 생겼다. 기업들은 인건비가 저렴한 국가로 공장을 이전하곤 했는데 그 국가 중 하나가 '중국'이다. 중국이 '제조업'을 흡수하듯 가져가는 과정에서 미국은 자국 내 제조업이 약화되고 일자리가 줄어 들었다. 대표적으로 '반도체' 혹은 '조선', '자동차', '석유산업' 은 20세기에 미국의 주요 산업중 하나다. 이들은 현재 모두 유럽과 동아시아로 산업이 이전 된 상태다. 미국내에서 산업 공동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안보와 직접적으로 얽혀 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엄청난 생산력으로 선박을 찍어 찍어내던 국가다. 미국은 사실상 해양국가이기 때문에 해군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와중에 세계의 조선업 1위가 중국이 된 셈이다.

21세기에는 인공지능과 같이 더 심각한 안보적 위협이 될 기술이 중국으로 흡수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2010년 초반, 세계화에 발목이 잡혀 있던 미국에게 기회가 생겼다. 미국의 셰일가스 생산은 생산 가격이 급격하게 낮아지고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한다. 2018년, 미국이 사우디보다 원유생산량이 많아지기 시작하는 분기로 미국은 더이상 자신들의 세금으로 세계경찰 노릇을 할 이유가 사라졌다. 세계화는 미국에게 책임만 많고 이익이 없는 계륵 같은 것이다. 여기에 철저하게 '손익'을 계산하는 사업가가 대통령이 됐으니 세계를 보는 시각도 대차전표 보듯 하게 됐다.

미국은 식량, 에너지, 군사력, 첨단기술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국가다. 일부 해외 의존도가 있는 높은 산업도 있다. 다만 다행히 이들 대부분은 '일본',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편이다.

'유럽', '캐나다'는 '미국'과 산업 구조가 겹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자국에서 충족가능한 산업을 갖고 있는 상대국가인 셈이다. 세계가 '트럼프의 위협'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고 있는 다수의 언론이 '서방언론'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핵심 산업을 보유하고 있고 경쟁 관계보다는 협력 관계에 놓여 있는 분야도 많다. 이런 분야는 공급망 개편 과정에서 오히려 호황을 맞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최근에 미국이 한국이나 일본의 기술을 가져오기 위한 리쇼어링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기술을 빼앗거나 대체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완전한 대체는 거의 불가능하다. 반도체나 배터리 생산에는 수많은 소재, 부품, 장비가 필요하다. 공장을 짓는다고 해도 공급망 문제나 인력 문제, 생산문제는 지속성을 잃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는 탈세계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다만 정확히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파악하면 꼭 트럼프의 당선이 위기라고만 할 수는 없다.

트럼프2.0은 더 강력해진 트럼프 시대를 설명한다. 가볍고 가독성도 좋다. 요즘 같이 '미국에 관한 뉴스'가 쏟아지는 시대에 이 책을 안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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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배불리 먹지 말 것 - 성공과 행복을 이루고 싶다면!, 개정판 세기의 책들 20선, 천년의 지혜 시리즈 4
미즈노 남보쿠 지음, 서진 엮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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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통 관상가이자 명리학자인 미즈노 남보쿠는 '사람의 운명'을 '식생활'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그는 과식을 하면 인생이 망가지고 절제를 하면 운명이 길해진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다소 '동양철학적 이론'에 기인하고 있지만 음식과 운명의 상관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적게 먹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판단력이 좋아진다. 반대로 많이 먹으면 정신이 혼탁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실제로 '식곤증'의 발생 원인을 보면 알 수 있다. 식사 후에는 위와 장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소화를 돕기 위해 많은 혈액이 위와 장으로 몰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뇌로 가는 혈류가 줄어든다. 뇌의 산소 공급이 줄어들면 졸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식사 후에 소화기관으로 피가 몰려 뇌의 활동이 둔해지는 현상을 주기적으로 느낀다면 뇌는 어떻게 되나.

만성적인 뇌혈류 감소는 신경전달 물질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주기적으로 뇌로 들어가는 산소와 포도당 공급이 줄어들면 일시적인 집중력 저하와 뇌기능 저하가 일어난다. 기억력 감퇴, 집중력 저하, 만성적인 사고력 저하 또한 학습과 업무에서 효율이 저하된다. 인생이 변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식사 후에는 부교감신경이 활성화 된다. 부교감 신경은 휴식 중에 활성화 되는데, 휴식과 소화를 담당한다. 몸이 긴장을 풀고 소화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혈압과 심박수를 낮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만족감'을 갖지만 대체로 현대인들에게 이런 만족감은 때로 '게으름'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다시말해서, 먹는 음식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실제로 '원시인류'는 '육식'을 시작하면서 '뇌'의 크기가 커졌다. 육식은 에너지가 밀집된 음식이라 적은 양으로도 많은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었다. 채식의 경우는 소화가 오래 걸리고 칼로리가 적은 편이다. 반대로 고기는 소화가 빠르고 에너지가 풍부하다. 즉 적은 음식으로도 충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 뇌발달을 가능하게 했다. 진화 과정에서 '식습관'은 중요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하나가 '식'의 변화다.

다만 현대인에게 '고기'가 좋지 않다. 이유도 같은 원인이다. 너무 많은 칼로리를 섭취하면 뇌에서 에너지 과부하가 걸린다. 실제로 칼로리를 30%를 줄인 실험군의 인지능력이 더 좋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즉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적당히'에 머무는 것이다.

빵이나 밥, 면과 같은 탄수화물은 '식곤증'을 유발한다. 고기나 생선, 두부와 같은 음식도 인슐린을 자극하여 졸음을 유발시킨다. 다시말해서 이런 음식을 폭식하거나 과식하게 되면 일상 생활에서 내려야 할 판단에 오류가 잦아진다. 반면 섬유질이 많은 채소는 혈당이 급격하게 오르지 않는다.

미즈노 남보쿠의 설명에 따르면 '음식'은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지다. 금은보화가 없어 죽은 사람은 없으나 '한끼 식사'가 없어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이런 값진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면 시간의 차이가 발생하겠지만 반드시 '변'으로 나온다. 즉 '값진 것을 똥'으로 만드는 이 일을 반복하는 것은 '빈곤'해지는 길 중 하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입은 화장실이다. 입으로 넣었던 것은 다시 뱉어내도 더럽기는 마찬가지다. 그 맛있고 좋은 음식을 결국 변소에 갖더 버리는 일을 하는 셈이다. 시간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입으로 들어간 것은 '변기'를 향하게 되어 있다.

'음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것에서 '절제'는 중요하다. 흔히 '검소함'이라고 하는 것은 절제력의 결과물이다. '검소한 사람'치고 '과식'이나 '폭식'을 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절제 능력은 식사를 통해 알수 있는데, '남보쿠'는 사람의 식생활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배가 모두 차지 않은 상태에서 숟가락을 내려 놓는 일은 보통사람에게 힘든 일이다. 그만한 절제력은 성공과 출세, 발전과 행복, 운과 부귀영화, 자식과 가문의 안정, 건강과 긴 수명에 필수 요소다.

음식을 탐하는 것을 두고 '남보쿠'는 불에 뛰어드는 걸 좋아하는 날발레와 같다고 말한다. 불에 들어가면 '타닥'하고 타버릴 것을 알고 있으면서 '본능'을 절제하지 못하고 몸을 '불속'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음식을 앞에 둔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두라고 말한다.

'애초에 음식이란 생명'이다. 다시 말하자면 '음식'은 '타생명'을 섭취하여 자신의 생명을 얻는 일이다. 고로 음식을 버리는 행위는 '생명'을 경시 여기는 것이다.

고대부터 인간은 '신'에게 받치는 '생명'을 받치곤 했다. 즉 음식을 신께 바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밥 세공기를 먹는 사람이 두 공기만 먹고 나머지 한 공기는 신께 받친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줄여 나가는 것이다. '남보쿠'는 이를 '공양'이라고 했다.

참 역설적이게 나는 이 책을 야식으로 배가 불러 잠을 설쳤던 다음날 아침 읽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소식'을 할 때는 그 음식의 맛을 느끼며 먹지만 과식이나 폭식을 할 때는 그 '맛'의 예민함이 사라지는 듯하다. 결국 '소식'이라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도 맞지만 인생 전반의 '운'을 길들이기 위해 중요한 습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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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한 번 당신만의 책을 써라 - 당신을 위한 고품격 책 쓰기 수업
우희경 지음 / 밀크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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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튜버가 말하길, '개나 소나 책을 쓰니까, 요즘 출간하는 책은 질 낮아서 볼 수가 없다' 라고 한다.

그 물음에 답하길, '책 안보는 핑계를 잘도갖다 붙이는 구나'다.

'개나소'나 책을 쓰면 그대로 읽을 가치가 있다. 최소한 나는 사서 볼 것 같다. 굉장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을 가치가 있다는 건 지나친 '엘리트주의'다. 말그래도 '경력자'만 뽑으면 '신입'은 어디 가서 경력을 쌓나.

지금처럼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는 시대에서 더 많은 작가의 글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비록 일정 부분 '질 나쁜 글'이 많아지겠만, 이또한 좋은 징조다.

'책을 써보라', 주변에 이야기하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소재'가 없단다. 다만 '소재'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유튜버 '국가대표 쩔템'은 '모기 잡는 컨텐츠'를 가지고 영상은 그저 모기를 잡는 여상이지만 40만 구독자를 가졌다.

유튜버 '프응TV'는 양봉을 하며 일상을 담은 채널이다. 해당 채널의 구독자는 103만이다. 채널 중 '토치로 말벌을 태워 죽이는 영상은 무료 조회수가 1280만 뷰에 이른다.

세상이 유튜브에는 관대하면서 유독 '책'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 이렇게 장벽을 높게 세워두니 사람들이 책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윌리엄 쿠피'의 '파리잡는법'이라는 책이 있다. 제목처럼 '파리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혹은 다른 동물들의 여러 습관을 분석한 에세이다.

'피에르 토마 니콜라 위르토'의 '방귀의 예술'이라던지, 특수청소부의 경험을 담은 '김완' 작가의 '죽은 자의 집청소', 혼자 노는 법을 알려주는 '강미영' 작가의 '혼자놀기', '이종구' 작가의 '고독한 놀거리 마스터'도 있다. 지방에서 용접노동자로 일하는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 택시기사 '표용덕 작가'가 쓴 '택시기사가 쓴 세 종류의 이야기'도 그렇다. 공장노동자로 일하며 초단편소설을 쓴 '김동식' 작가의 상상력도 재밌다.

당사자들에게는 일상이지만 해당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신선한 이야기다. 시장가치는 시장이 판단하는 것이지, '공급자'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공급자는 그저 시장에 상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다. 결코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1등에게만 권한이 주는 것이 아니다. 100등도 101등보다 알면 가르쳐 줄 수 있고, 200등도 201등을 가르쳐 줄 수 있다. 본인의 스승을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 '독서'의 즐거움인데, 괜히 자신에게 맞지 않는 스승을 선택하고 '스승' 따위는 필요없다고 성급한 일반화해서는 안된다.

성장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로, 철도, 항만, 공항, 통신, 방송' 등 사회인프라가 잘 운영되어야 한다. 이런 '인프라'에 '정보'도 분명 한 몫 하고 있다. '기록 이전 시대인 선사시대'에는 정보를 저장할 수단과 방법이 없어, '정보 소유자'가 죽으면 정보는 소멸했다. 다른 동물들이 문명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다. 다만 북아프리카와 중동 사이에서 최초의 문자가 만들어지고 사회는 문명을 이루고 발전해 왔다.

각자가 갖고 있는 정보가 저장되고 전달되면서 사회는 '기회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됐다. 전임자가 아무런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퇴사'하는 것만큼 막막한 것이 '사회생활'인데, 그런 깜깜이 사회보다는 '아이 돌보는 법', '파리잡는법', '여권 갱신하는 법' 등 다양한 정보가 공유되는 사회가 옳은 세상이다.

우희경 작가의 '일생에 한 번 당신만의 책을 써라'는 '소재'가 없다고 생각할만한 많은 일반인들에게 '글을 쓸 수 있다는 독려'를 한다. 표면적인 지식이 아니라 꽤 실용적으로 출판을 돕는 정보가 있다. 본인의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개인적으로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사회는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회라고 본다. 인간을 '사회화 동물'이라고 부르는게 맞다면 최소한 다른 이들의 삶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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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가 묻고 니체가 답하다 - 비관마저 낙관한 두 철학자의 인생론
크리스토퍼 재너웨이 지음, 이시은 옮김, 박찬국 감수 / 21세기북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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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욕구'로 움직인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고, 외로우면 이성을 만나고 싶어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갖기 위해 움직인다. 이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하고 이루려고 노력한다.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다. 이를 '욕구' 혹은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원하는 것을 이루면 우리는 만족감을 늘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우리는 잠시의 기쁨을 느끼지만 다시 공허함을 느끼고 다른 '원함'을 갖게 된다.

즉, 인간은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끼고 항상 공허함을 갖는다. 결국 완전한 만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고로 삶이 끊없는 고통이라고 봤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채우는 어떻게 보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저주 받은 챗바퀴를 돌리는 삶과 같다.

우리를 소진시키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 챗바퀴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쇼펜하우어는 답했다. '의지', 즉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는 삶을 살면 된다. 다시말해서, '바람'이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움직이지말고 그저 그 자체가 의미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그냥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을 하되, 성취를 위한 무언가를 내려 놓는 것이다. 타인을 돕거나 자연을 감상하는 일은 '성취'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고로 '성취'를 목표로 하는 삶은 '고통'을 필연적으로 만들기에 '성취'라는 '욕구'를 덜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쇼펜하우어를 가장 평면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럼 니체는 어떤 사람인가.

그 또한 아주 평면적으로 설명해보자.

니체는 '삶의 방식'에 대한 정의를 부정했다. 즉, 니체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삶에 정의'가 필요했다. 대개 그 '정의'는 '신'께서 내려 주신 경우가 많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신'은 '인간'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이 많다. 정해진 법칙이 존재하며 그 법칙에서 어긋난 삶을 '오류'로 정의 했다. 니체는 '이 생각'에 의문을 품었다. 종교나 전통적인 가치가 삶에 피로도를 준다고 봤다.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

즉, 자신의 의지가 '신'이 내린 '삶의 정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초인'에 대한 언급을 했다. '초인'이란 누군가가 정해준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을 뜻한다. 가령 아무개가 '어떠한 삶을 살아라'라고 말해도 흔들림 없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택하는 사람이다. 이런 삶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만나는 '고통'에 맞서라고 말한다. 고통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초인'으로 가도록 만들어주는 '주재'가 된다. 쇼펜하우어가 피해려 했던 그 '고통'이라는 '소재'를 니체는 직면해야 할 과제로 여겼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여겼다. 힘든 일을 겪을 때,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삶은 끝없는 고통이고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봤다. 고로 삶에서 '고통'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니체는 답한다.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다. 피하지 말고 부딪쳐라.

쇼펜하우어는 '행복'하기 위해,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 놓으라고 말한다.여기에 니체가 답한다. 더 강한 욕망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얼핏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 '어떤 삶을 취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의문은 '삶'은 '성장'보다 '행복'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는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다만 '니체' 또한 '행복'을 말한다. '니체'는 진정한 행복이란 '편안함과 즐거움'이 아니라 극복과 성장에서 얻어지는 기쁨이라고 봤다.

성취를 했을 때 얻어지는 '성취감', '자부심' 이런 것들이 진짜 행복이고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피하고 도망가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우고 도전하면서 얻어진다고 봤다.

누구의 행복론이 정답인가.

그런 것은 없다. 철학은 '답'을 내놓는 학문이 아니라 그저 '질문'을 내놓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의 답도 옳지 않고, 누구의 답고 그르지 않다. 거기에는 애초 '답'도 없고 두 철학자 또한 답을 내린 바가 없기 때문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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