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잘되는 사람의 모닝 루틴 - 내 인생을 바꾸는 좋은 아침 습관
이시카와 가즈오 지음, 김슬기 옮김 / 다른상상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잠에서 막 깬 직후의 행동은 대부분 의식적 사고 없이 이루어진다. 반복하는 행동 혹은 습관을 자동으로 하게 도와주는 신경구조를 '신조체'라고 하는데 선조체의 활동은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또한 이미 입력된 자동화된 행동을 촉진한다. 이 과정에서 도파민이 보상 체계를 강화하고 쉽게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사람마다 아침 루틴이 존재한다. 시간과 상관없이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행위가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눈을 뜨자마자, 알람시계를 살피며 겨우 눈을 뜨고, 누군가는 명상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고 일어난 자리를 잽싸게 정리하기도 한다. 물을 한 컵 들이켜는 사람도 있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일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 행동이 아니라, 아주 높은 확률로 '반복', '지속'되는 '루틴'일 것이다.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는 '최면'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 이를 '최면성 각성 상태' 혹은 '최면 유사 상태'라고 한다. 우리의 뇌는 특정 가정이나 생각에 따라 천천히 그 떨림을 방출한다. 이 떨림의 크기와 빈도에 따라 알파파 부터 델파파로 구분할 수 있다.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지 않고 약간 비몽사몽한 상태, 즉 그 상태는 최면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다.

영화 올드보이는 최면 상태를 통해 각성 상태를 조종한다. 결국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영화적 설정은 현실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잠에서 깬 직후의 상태는 외부 자극에 더 민감하고 수용성이 높다. 즉 최면 상태와 유사하다. 이때 어떤 암시나 제안을 넣으면 더 쉽게 받아 들여질 여지가 있다. 가장 이완된 상태에서 주입되는 암시가 최면가 연결된다는 것은 그닥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때 반복하는 일이 습관을 형성하거나 사람의 생각과 인생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에도 동의가 된다.

눈을 뜨지마자 무엇을 하는가.

아이가 성장하며 나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삶의 루틴을 고민한다. 7살 이후에 가장 중요한 삶의 루틴 중 하나는 침실에는 '결코' 전자기기를 갖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는 법칙이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 우리가 하는 '첫 생각', '첫 행동'이 무엇인가. 아마 '시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시계를 확인하면 곧바로 짧게 쌓인 메일이나 문자를 확인하고 간단한 '알림'을 확인할 것이다. 시계를 확인한다는 '명분'으로 우리가 하는 그 첫 행동이 문제다.

'마케팅 전쟁터'로 시작과 동시에 빨려 들어간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플랫폼 기업들'이 한푼 파는 것 없이 세계적인 수익을 얻어내는 세상에서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그것에 빨려 들어간다.

내가 가진 철칙 중 하나는 눈을 뜨자마자, 처음하는 행동이 '그날 하루'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콘라트 로렌츠 박사는 거위 새끼가 부화한 후에 처음 보는 물체를 어미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을 '각인'이라고 한다. 각인은 매우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 더이상 각인이 일어나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움직이는 첫 물체를 어미로 인식하는 과정은 보통 '조류'에게 일어나는데, 나는 조류와 인류가 0.01%의 연결성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을 뜨자마자, 연예인 기사를 읽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요즘과 같은 '알고리즘 지능'이 고도화 된 사회에서 그 정보는 다른 정보를 끌어당긴다. 이 얼마나 직관적인 사고 흐름인가.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간 것은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이처럼 인간의 사고 흐름은 앞에서 주어진 인식 대상에 짧은 연결성을 긋고 끊임없이 이어 나간다. 그 사고의 흐름을 '알고리즘'이 기가 막히게 포착해주니, 처음에는 '연예기사'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난데없는 정치 기사나 전혀 관심없었던 물건 사용 후기를 의식없이 들여다 보게 된다.

만약 눈을 뜨자마자, 성경, 불경, 도덕경, 논어, 맹자, 채근담을 읽는다고 해보자. 우리의 사고는 주어진 인식 대상에서 그 사고의 첫 뿌리를 시작한다. 한참을 사고가 확장하다가도 책은 다시 중심으로 돌아 오도록 한다. 아무리 떠내려가더라도 중심 바닥에 앵커가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주고 있으니,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 올 수 있다. 정처없이 사고의 흐름으로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조금은 안정적인 방식으로 중심을 잡고 사고를 제어 할 수 있다.

집에는 TV가 없다. 태블릿도 없다. 스마트폰도 없다. 이것들은 업무에서 사용하고 배터리가 모두 소진되면 부엌 넘어에 있는 세탁실의 세탁기 위, 유일한 충전선에 연결된다. 간단한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꽤 귀찮은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하여 '수도승' 같은 삶을 살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굉장히 화가 났던 적이 있었다. 꽤 오래 전 일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하고 있던 사업이 활력이 돌 때 였다. 전화는 쉴틈이 없이 울리고, 문자, 알림이 미친듯이 쏟아졌다. 이 와중에도 가장 나를 괴롭게 한 것은 '스팸문자'와 '스팸전화' 였다.

'보험', '주식','대출'과 같이 무작위로 대상을 정하여 돌리는 그들의 마케팅 공격에 무기력하게 당해야 했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꽤 큰 중요한 전화를 놓칠 여지가 있었다. 당시 업무의 특성상 입력되지 않은 전화번호는 모두 받아야 했기에, 나는 매우 급한 상황에서 그 쓰레기 같은 전화를 모두 받아야 했다. 어디서 노출된지 알 수 없지만 점차 걸려오는 전화의 상당수가 '광고, 주식, 대출, 보험' 등의 성격이 늘었다. 한 번은 너무 화가 나서, 이들 중 일부를 신고하고 '행정 처리 결과'를 받았는지 확인까지 해봤다.

그때 상담사분께서 말씀하시길, '자신도 이 일을 하지만, 이런 전화를 받게 된다고 피할 수 없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어떤 기분 좋았던 하루,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대며 전화를 끊었던 적이 있다.

나의 하루가 그들에게 간섭 당하는 것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수 년 간, 스마트폰에서 멀어지기를 시도했다.

지금은 꽤 그 균형을 잡았다. '아이폰13미니'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특정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방해금지모드'를 설정하면 원하는 전화만 받을 수도 있고 워낙 작은 화면 탓에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습관도 줄어 들었다. 쓰지 않으면 가방에 넣어 두어 전자책을 꺼내어 본다.

물론 밀려 있는 '메일'과 '문자', '알림'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확인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런 모든 유혹은 참 신기하게도 주 5일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이뤄진다. 스팸을 보내는 이들이 주 5일 8시간 근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꽤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은 주체적으로 관리 할 수 있는 루틴을 가졌다. 이런 까닭에 꽤 여유로운 마음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시간이 짧다고 여긴다. 아이는 여덟 살이고, 앞으로 4년 뒤에는 '아빠'보다 '친구'를 좋아 할 것이다. 다시 4년 뒤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게 될 것이고 다시 4년 뒤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4년, 짧게 보면 1000일 밖에 남지 않았다. 이 1000일을 놓치면 아이와의 추억은 영원히 사라질지 모른다.

일상을 모두 끝내고 난 뒤에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거의 어렵다. 다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4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확보된 시간이다. 아이는 자신의 일과를 마치고 스스로 하루를 정리할 마음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고로 아이와 해야 할 일을 아침에 함께하고 충분한 이야기를 하며 하루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각자 시작한다.

아침 시간은 모든 유혹이 잠에들고 부지런한 이들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자기 수양을 하는 시간이다. 그 시기에 놓쳐도 주어지는 두 번 째 기회가 있는 꽤 너그러운 시간이다. 저녁 또한 역시 매우 중요한 시간이지만, 저녁은 모든 유혹이 필사적으로 자기 성과를 위해 달려드는 시간이며, 그 시기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주체적인 삶이 중요하다. 기상 시간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 상황에 따라 주체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현재 나의 상황에서는 '아침'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 손웅정의 말
손웅정 지음 / 난다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순간 자기계발서를 잘 안읽게 됐다. 이유는 이렇다. '가짜'가 너무 많다. 누구나 쉽게 '책'을 출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철학' 없는 글들이 무책임하게 쏟아진다. 개중에는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라며 '쉽게 달성하는 법'을 알려준다. 다만 읽다보면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자기소개서'인 경우가 많다.

인터넷을 켜면 '이것 하나만 알면'이라는 문구를 많이 보게 된다. '이것만 알면 월 수익 얼마', '자신만 따라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 일색이다. 그 거짓부렁들에 회의감을 느낀다. 결국 그 잘난 '자기소개서'를 안보게 됐다. 이들의 최종목적은 '성공 팔이'다. '성공'을 팔아 '성공'을 이루고, 강연과 유튜브, 출판의 새로운 수익 구조를 창출해 낸다.

워런버핏, '이것만 알면 누구나 쉽게 투자의 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 '누구나 쉽게 월수익 두 배 올리기'

이런 강연을 본 적 있을까. 없다. 그들이 그런 강연을 하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본업에 충실하기에 그런 강연을 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은 '곁다리'로 빠져 이타적인 행동에 삶을 좀먹지 않는다.

진짜는 사람들에게 성공팔이를 하지 않는다. 다면 물으면 답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다. 자기의 일상와 루틴을 행하기 정신 없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다.

대중은 각자 자신의 몫으로 삶을 산다. 그것을 바꾸어 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교육'이 아니라 주체적 의식에 달려있다. 고로 노하우를 알리지 않아도 할 사람은 한다. 목이 마르면 우물을 팔라고 말하지 않아도, 우물을 파게 된다. 진짜는 대중의 계몽을 위해 자신의 일상과 루틴을 내팽겨칠만큼 무책임하지 않다.

강연하고 책 쓰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몇 일을 통으로 내어 놓아야 한다. 누군가 유튜브나 책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타성'이 아니라 '그것'이 '업'이라는 의미다. 진정한 이타성이라면 돈 한푼 받지 않고 그저 행해야 한다. 만약 성공을 쉽게 이루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한다면,

"그런 순수 이타적 행동 말고, 본인을 성공에 이르게 했던 '본업'은 대체 언제쯤 시작하실껀가요?"

묻고 싶어진다.

입 다물고 묵묵히 치열하게 자기 일을 하던 '진짜'는 지금도 입을 다물고 있다.

진짜는 본래 입을 다물고 있으니, 가짜는 제발 그 입을 다물라, 말하고 싶다.

진짜들의 하루는 '철학'으로 덮혀 있다. 물음에 답할 뿐, 알려주고 싶어 안달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에 '명확한 철학'이 있기 때문다.

'손흥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쉽고 빠른 노하우'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가 '손흥민'이 된 것은 '쉽고 빠른 노하우'가 아니라, 하루와 하루를 쌓았던 작은 습관과 생각, 삶의 방식의 연속 때문이다. 여태껏 남들보다 게을렀으나 지금이라도 역전 한방으로 삶을 바꾸고자 하는 욕심은 푼돈이 되어, 누군가의 '낚시바늘'에 꿰인다. 철학 없는 푼돈을 모은 가짜는 그렇게 '진짜 성공'의 모습으로 탈바꿈 된다.

삶은 끊임 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선택은 현재로 하여금 미래를 과거로 결정 짓게 하는 마법이다. 과거의 내가 나태했다면 그것은 현재에 충분히 반영이 돼었다. 현재의 내가 나태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내가 충분히 반영할 것이다. 지은 죄값을 받지 않겠다는 욕심이 '지금까지는 나태는 했으나 한방으로 성공하여, 과거부터 노력한 이를 바보취급 하겠다.'는 터무니없음을 만든다.

'하려고 하면 방법이 보이고, 하지 않으려 하면 변명이 보인다.'

지금껏 스스로를 만들어갔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다짐을 했을 땐, 최소 버렸던 시간만큼이나 노력을 채워 물타기를 했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10년을 버렸으면 10년을 보고, 20년을 버렸으면 20년을 봐야 하지 않을까. 20년을 허투로 살고 단 1년 만에 모든 것을 뒤집겠다면, 반대로 1년 만에 이룬 성공 또한 그렇게 쉽게 다시 뒤집힐 수 있다.

빚더미보다 잿더미에서 일어나기가 더 쉽다. 이미 쌓아둔 업보를 되돌려내기 보다 아무런 업보를 쌓지 않는 것이 훨 수월하다. 간단한 논리다. 뒤로 달렸던 사람보다 멈춰있던 사람이 훨씬 더 목적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꼭 경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가만히 있어서 '퇴화'에 이른다. 몸과 정신은 노화한다. 생물학적, 사회적 나이는 점차 차오르고 사회가 원하는 '기대치'는 점차 높아져 간다. 8살에는 한글을 읽고 10살에는 구구단을 외우며 16살에는 적어도 '이차방적식'에 대해 들어본다. 각 나이에 맞는 '수준'을 요구하던 사회가 30살이나, 60살이나 변함없이 세월만 축낸 이에게 같은 결과를 보상하진 않는다. 즉, 나이가 들수록 더 능동적으로 성장해 내야 한다.

인생은 가만히 있으면 우리를 뒤로 후진 시키는 '런닝머신'과 같다. 내가 발을 내딛지 않으면 나는 뒤로 움직인다. 내가 한발과 한발을 떼야 겨우 그 자리를 유지할 뿐이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일 년을 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왕자불가간 내자유가추'라는 말이 있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의 일에 더 신경을 쓰라는 말이다. 이 말은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하면 즉각적인 보상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다. 지은 죄에 대한 죄값은 그 죄만큼 받고 결국은 터벅터벅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즉, 어쩔 수 없는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손자병법'에는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승전후구전', 무작전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라, 이길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싸움을 걸어라.

준비 없이 보낸 세월을 망각한 채, 자신이 가진 하찮은 무기를 가지고 덤벼 드는 것은 '필패'를 의미한다. 충분히 쌓여 '낭중지추', 나의 잔이 차고 밖으로 흘러 넘쳐지는 순간이 '필승'의 순간일 것이다.

'손웅정 작가'의 글을 보면 딱 두 가지가 보인다. '더하고 덜기'.

그는 필사적으로 어떤 것은 더하고 어떤 것은 덜어낸다. 마치 자기를 채워가는 수많은 시간과 경험에서 끊임없이 좋은 것만 남기고 나쁜 것을 빼버리는 '필터링' 과정을 쌓아가는 것이다.

근육을 더하고 살은 뺀다. 지식은 더하고 주변은 덜어낸다. '지식을 얻고자 하면 무언가를 더하고, 지혜를 얻고자 하면 무언가를 버리라'는 의미다. 그의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엉덩이가 들썩 거렸다. 미루고 있던 '버리기'를 실천 하느라 온주말을 사용했다. 가끔 '진짜'를 보면 그 경외감에 감탄하기 바쁠 때가 있다. 대상을 보고 한참을 감탄하다가 나에게 흡수하기로 했다. 가만 보면 나의 독서는 진짜 독서인가, 하고 되돌아보게 된다. 간만에 제대로 자극 받는 책을 보게 됐다.

"강력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학·중용 - 수양과 덕치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증자.자사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중용'은 '대학'과 '중용'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먼저, '대학'은 말한다. 개인 수양이 가정과 국가를 이어서 천하 평화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개인의 도덕적 수양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격을 만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 평화의 기본이 된다는 '이상'을 제시한다. 질서과 체계, 규칙과 정리라는 명확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공자의 '유교'를 잘 보여준다.

공자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정리', '질서', '체계', '규칙'이다. 태양은 태양의 자리를 지키고, 달은 달의 자리를 치키고, 나무는 나무의 자리를, 풀은 풀의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알고 지켜야 한다.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이 고리타분해 보이는 이천년 넘은 꼰대어는 소통이 안되는 '권위주의 사고방식'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에게 '유교'는 '꼰대'의 철학이다. '질서'를 강조하는 쪽이 '위'라는 점이 이유다. 사람의 욕심이 한이 없는지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선택적 철학이 가장 '유교'를 위험하게 만드는 자세다.

'유교'의 핵심은 '너'가 아니라 '나'다.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하지, 상대가 상대의 위치에 최선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 '위치'에 오른 이들이 난데없이 "너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라." 하니, 그것은 '유교'를 빙자한 '간섭'이 된다.

대부분의 철학은 '남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라, 스스로를 '수양'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 '너'는 없다.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공자의 가르침을 보면 각자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다만 오늘 그 '성인'을 방패막이로 삼는 '공자팔이'는 공자말을 앞세워 말한다.

"너의 본분을 다하라."

사실 유교 철학의 핵심은 모두가 각자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둘이 있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하나 있다.

"왜 나만 해?"

이 유치하고 철없는 생각은 그대로 성장하여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예순이 된다. 자신만하기에 '손해' 본다고 생각한 이들이 '다른 이들의 철학'을 고쳐 놓으려고 간섭하기 시작한다.

상대는 하던 말던 자신은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간섭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임금'이 '임금'의 위치를 다하지 못하더라도 '신하'는 '신하'의 역할을 하고,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못하더라도 '아들'은 '아들'의 역할을 해야 한다.

상대는 하지 않는데 '나만' 한다고 손해라고 여길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수신'은 모든 덕목의 기본이다. 이렇게 자신의 수양에 힘쓴 이들이 많아지면 사회는 점차 자리를 잡는다. 부처를 팔고 예수를 팔고, 공자를 파는 것처럼 자신의 말에 위엄이 없는 자들은 성인을 힘을 빌어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니 결국 '제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스승'을 욕보인다.

다음으로, 중용은 무엇인가. 중용은 '유교와 도교'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적절한 중간을 말한다. 모든 행동과 사고는 중도를 지켜야 한다. 도덕적 행위와 인간관계의 가르침도 준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이 말은 '지나칠 것 같으면 차라리 모자른 편이 낫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화'를 위해서는 다다익선이 맞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단'은 꼭 화를 부른다. 즉 선을 넘지 않는 조화로움은 '질서' 만큼이나 중요하다. 달이 달의 위치에 떠 있는 이유는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과 지구로 부터 튕겨 나가는 관성 사이의 균형 때문이다.

즉, 대학과 중용은 사실 우주를 이루는 방식이다. '균형'은 '질서'를 낳고, '질서'는 '균형'을 낳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 둘이 너무 붙어 '충돌'하지 않고, 너무 멀어 '튕겨져' 나가지 않는 적절한 선의 균형이 필요하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만 그렇겠는가.

군자지교 담담여수(君子之交淡淡如水), 군자의 사귐은 맑은 물과 같아서 담백하고 평온해야 한다. 군자의 우정이 욕심 없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소인지교 감감여주(小人之交甘甘如酒), 소인의 사귐은 달콤한 술과 같아서, 진하고 강렬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소인의 우정이 이해관계에 얽혀 있고 일시적이라는 의미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함께 여행하거나 동거를 하게 되면 꼭 싸우게 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살다보면 그 흠을 보게되고 싸우게 된다. 즉 너무 가까워지면 결국 '화'를 면치 못한다. 모든 관계는 '대학'과 '중용'처럼 질서와 균형이 중요하다.

다시보자면

공자의 철학의 핵심은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예수의 철학도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부처의 철학도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도덕'과 '윤리'의 잣대는 '너'가 아니라 '나'에 두어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원수'가 해서는 안된다.

'깨닮음'에 이르러라, 라는 말은 '상대'가 아니라 '나'에게 두어야 한다.

공자의 수양, 예수의 사랑, 부처의 깨닮음.

그 가르침을 우리는 때로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가. 그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향하는 무기여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 Andersen, Memory of sentences (양장) - 선과 악, 현실과 동화를 넘나드는 인간 본성
박예진 엮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원작 / 센텐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여행자를 자신의 침대에 눕힌다. 누운 여행자가 침대에 몸이 맞지 않으면 자르거나 늘려서 맞춰 버린다. 그리스 신화 중 하나다.

잔혹 행위의 명분은 '정의 집행'이다. 결국 '폭력'이고, '잔혹함'이만 그것이 문명 사회에까지 남아 일부 유용하게 사용된다. 왜 그럴까.

현대 사회는 '죄값'을 치루게 하지 않는다. '교화의 기회'를 준다. 결국 폭력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감옥'이라는 용어는 '교도소'로 바뀌고 다시, '교정시설'로 바뀌었다. 이처럼 사회는 '비폭력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비문명에서 문명으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에 대한 '합의'다. 다수가 '규칙'에 합의한 국가가 '문명국'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집단의 상상력'이 하나의 커다란 규약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법'이 된다. 자연계에서 '살해'나 '폭력'은 '죄'가 아니다. 약육강식은 '생존'의 최우선 덕목이다. 이런 자연계에서 태어난 인류는 점차 다수가 합의에 이른 '규칙'을 갖게 됐다. 점차 사회가 '문명'으로 나아 갈수록 '폭력'보다는 '비폭력'으로 흐른다.

인간 사회는 '공리'를 추구한다. 폭력이 결과적으로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차원적인 해결책이라는 사실에 합의했다. 그럴싸하게 말하면, 법리와 법치는 '문명화'의 기준이다. 사회가 개인의 이익과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때, 집단은 '폭력'이라는 원시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폭력'은 즉각적인 해결책이다. 즉, 때로는 즉각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불길로 쓰러지는 아이를 보게되면, 발로 걷어차서라도 일차적으로 불길 밖으로 꺼내야 한다. 그거에 대고 비폭력과 대화를 선호 할 수는 없다. 언어적으로 '폭력'이 '사회악'처럼 되는 시대지만 때로 '폭력'은 즉각적인 해결책으로 유용하다.

반면 울고 있는 아이에게 '호랑이' 만큼이나 효과적인 것이 '곶감'이다. 때로는 '교화'도 반드시 필요하다. '교화'와 '폭력'은 적절한 비율로 사용돼야 한다.

분명한 것은 언제나 '교화'가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물을 훈련 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공감해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훈련시키는 확실한 방법은 당연히 먹이를 통해, 혹은 적당한 신체적 행위를 동반해서다.

언어가 덜 발달한 아이를 점차 문명인으로 기르기 위해, 일부는 비문명적인 방식이 필요하기도 하다. 단순히 신체적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심리적인 위협이다. 잔혹한 이야기는 공포심을 자극한다. 어린 시절, 밤 열 두시면 도깨비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12시 전에 잠에 든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거나 누워서 먹으면 소가 된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설득할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 논리력을 가지고 길들이는 것 보다는 일단 행동을 통제하고 문화를 습득하는게 먼저인 경우도 있다.

'안데르센의 동화집'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처럼 '잔혹성' 매개로 '교훈'을 나른다. 그의 이야기에 '잔혹성'과 '공포'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존 매커니즘이 본질적으로 '공포'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밖을 나다니지 않고 낮선 이를 경계하며 특정한 주파수의 소리에 긴장감을 갖는다. 그것은 '생존력'을 높였다.

'공포가 없어야 하는 사회'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생존 면역은 줄어든다. 개인적으로 '조던 피터슨'의 '훈육 방식'에 크게 공감했다. 훈육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회가 오면서 '아이'의 무법적 행동을 절제할 방법이 잃어가고 있다.

부모도, 선생도 사회도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는 공포에 내성 없는 '청소년'들이 자라면서 되려 우리 사회는 '생존력'의 위협을 받는다.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적당한 공포를 통해 아이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고 생존력을 높인다.

자연은 우리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언제나 따사로운 햇살과 밝은 낮만 주지도 않았고 푸르른 봄과 풍요로운 가을만 선물하지도 않는다. 자연이 우리를 기른 방식은 어둡고 적막한 밤, 춥고 굶주리는 겨울, 때로는 폭풍우와 천둥, 번개와 같은 위협도 있다.

필수 인자의 일부를 완전히 정제해 버린 순수하고 깔끔한 비폭력은 때로는 우리 사회를 약하게 만든다. 원래 온실속 화초는 세상과 단절된 온실 속에서만 꽃을 피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 15분 명상
혜거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렇다. 큰일이라 생각한 일 뒤에도 '아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사건을 맞이 한다. 나를 삼켜 버릴 위협도 있다. 그러나 깨달을 때도 됐다. 나를 덮칠 듯한 위협 뒤에도 '아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고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사업을 망친다. 시험에 떨어진다. 기회를 놓친다. 인생을 바꿔 놓을 결정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그 뒤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가 결정되는 순간,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다른 선택지는 사라진다.

비교대상은 사라진다. 사건 발생과 동시에 사라진다. '현실'만 남고 모두 사라진다.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이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됐는데, 사람은 그것에 의미를 둔다.

바뀌는 것은 없다. 그냥 일어났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맞이할 뿐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럴 수도 있었는데...' 혹은 '그럴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이 마치 내것이었던 것처럼, 마치 내것으로 올 것처럼 아른 거린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으로 오고 간다. 머리로 진리를 깨우쳐도 행하기 어렵고 마음은 저절로 일어나며 '나'는 그것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하나처럼 보이는 '자아'는 사실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아'를 분열한다.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 등. 나를 구성하는 내면과 외면은 일체화 되지 못한다.

'해야 하는데...'하지 못하는 일,

'하면 안되는데...' 해버리는 일,

'부조화'는 불안을 야기한다.

바벨탑 이야기를 해보겠다.

성경 구약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시기다. 노아의 홍수 후, 모든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 함께 모여 살고 화합했다. 인류는 목적을 가졌다. '하늘'에 닿는 일이다. 야심찬 계획은 가능해 보였다. 신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끈기? 노력? 열정? 꿈과 희망?

아니다.

소통이다. 신은 인간의 계획을 무너 뜨리기 위해 '소통'을 막았다. 소통이 중단되자 탑쌓기는 중단됐다.

무슨 일이든 '집중'이 중요하다. 집중은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회사는 회의를 통해 사업을 전개하고, 정치는 소통을 통해 국민을 통합한다. 그렇게 하나로 모아지면 꽤 어려운 일들은 그럴싸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여러 사람도 아니고, 하나의 '나'를 구성하는 마음과 감정, 행동, 생각, 말이 모두 따로 움직이면 어떻게 이루고저 하는 바가 이루어지겠는가. 마치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작동된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서로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일체화를 떠나 어떤 상태인지 관심도 없이 마구잡이다.

축구를 한다며 오르손은 오른쪽으로, 왼손은 왼쪽으로 힘차게 돌리고 머리는 위아래로, 오른 다리는 뒤로, 왼다리는 앞으로 움직인다. 그 정신없이 산만함을 갖고 경기장에 들어 섰으니, 체력과 실력은 둘째치고 '축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한다.

차분히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을 하나로 모으려면...

일단은 그렇다.

그것들이 뭘 말하는지는 듣고봐야 한다.

윗집과 아랫집이 싸우고 있으면 서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귀 기울이고 봐야 한다. 그 소통의 첫째는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물을 맑게 하려면 가만히 두어야 한다. 가만히 두면 물결이 고요해지면서 온갖 티끌이 가라앉는다. 물은 점차 맑고 깨끗해진다.

후회라는 낚시로 끌어당기는 '과거'와 '희망'이라는 낚시로 끌어당기는 '미래'에 줄이 손발이 꿰어 움직이는 현재를 살고 있다면 그 시간의 노예에서 벗어나 차라리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왼쪽 발가락 네번째의 감각을 느끼는 편이 훨씬 낫다.

스스로를 돌이켜보건데, '일치하지 않는 자아'는 일반적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상대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일체화된 자아를 갖고 있나'.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했던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처럼, 상대는 스스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고로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코코샤넬은 상대를 겉으로 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다만 상대는 자신을 겉으로 평가할 것이라 했다. 즉, 나는 상대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되, 스스로는 정제된 자아를 가질 수 있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 나의 '자아'는 지금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지금도 고삐 놓쳐 촐랑거리는 망아지가 제멋대로 나를 헤치고 있진 않은지 잔잔히 살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