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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읽기의 힘 - 우리 아이 공부그릇 키우는 기적의 교과서 공부법
고갑주 지음 / 살림 / 2016년 3월
평점 :
글을 쓰다보면 '종교적 색체'의 글이 나오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 '코끼리 명상 어플'에 '불교에 관한 글'을 종종 개재한다. 가장 최근에 집필한 책은 '유대인'이 관한 책이었으며 글을 쓸 때, '성경'과 '불경'에 대한 인용을 자주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어떤 종교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심취해 있지는 않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을 좋아할 뿐이다.
어찌됐건 이야기의 포문을 '종교'로 시작한 이유는 '문해력'에 대한 아주 그럴싸한 깨달음을 '한 목사님'으로부토 얻게 됐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목사 님께서 '성경'을 읽어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고 물으셨다. '어렵다'고 답했다. 어느 부분을 읽었느냐고 물으셨다. '창세기'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가 또 누구를 낳고, 걔가 또 누구를 낳고...' 도대체 이 글을 읽고 깨달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솔직한 평도 드렸다.
그때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읽는 법이 잘못됐다'고 하셨다. 그는 성경의 구조를 설명하며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서는 구약에 해당되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시고, 이 중에 아무 곳이나 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 곳이나 폈다.
거기서 아무 문장이나 읽으라고 하셨다. 아무 문장이나 읽었다.
그렇다. 그냥 읽었다.
'이게 무슨 말이죠?'
그러자 목사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한 번 더 읽어보라고 하셨다.
다시 읽었다.
'무슨말이지...'
천천히 다시 읽어보라는 주문이 있으셨다. 목사 님은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몇 번을 다시 읽도로 하셨다. 그때 느껴지는 감각은 이렇다. 주어와 술어가 길어서 한 호흡에 다가오지 않던 문장이 반복된 음독으로 서서히 분해되고 나눠지고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문장이 담고 있는 그 힘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 문장이었고 아무 페이지였다. 그곳을 여러 번 읽다보니, 무언가 '전체'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성경은 '전체'를 담고 있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문장에 대략 3만개 정도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구나.. 싶었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에 관한 내용은 아니다. 문해력에 관한 내용이다. 내가 그때 얻은 경험은 '신학적 경험'이 아니다. 어떻게 글을 접해야 하는가에 대한 경험이었다.
표면적으로 글을 읽어내는 행위가 아닌, 그것을 '문해'했을 때 과연 얼마나 사람이 달라지는가. 그것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자를 '음성 변환'하는 정도의 훈련으로 다져진 삶을 산다. 그러나 어떤 문장을 제대로 문해하려면 그것을 충분히 익힐 수 있도록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문장은 읽는 것이 아니라, 체득하는 것이다. 한 문장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소리내어 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왜 그렇게 쓰였는지, 왜 그런 순서로 나열됐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몸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해는 해석이 아니라 흡수다. 반복적인 음독은 글을 이해하기 위하 노구가 아니라, 그리 내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행위다.
고로 문제는 속도다. 대부분의 교육은 얼마나 빠르게 이해했는가에 중심을 둔다. 그러나 진짜 독해력은 속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깊이에서 나온다. 천천히 읽어야 비로소 문장의 구조가 보이고, 저자가 숨겨 놓은 결이 드러난다. 문해력은 그런 세밀한 결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이다. 감각은 단련된다. 반복적으로 같은 문장을, 같은 페이지를, 같은 책을 들여다 보는 사람만이 그 진짜 뜻을 할 수 있다.
고갑주 작가의 '교과서 읽기의 힘'도 사실 이 맥락과 딱 맞아 떨어진다.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 하나가 함부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목적, 하나의 방향,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구성된 시스템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문제집의 재료쯤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자꾸 해설을 보려고 한다. 자꾸 줄을 그으려고 하고, 밑줄의 의미를 묻는다. 하지만 그전에 필요한 건, 그 문장을 그대로 여러번 읽는 일이다.
목사님의 말씀은 그래서 잊히지 않는다. 그냥 읽으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읽으라고 했다. 설명도 따로 없이, 해설도 없었다. 다만 반복시켰을 뿐이다. 마치 고갑주 작가가 수업에서 아이들과 문장 하나를 가지고 20분씩 붙드는 것 처럼, 천천히 반복적으로 문장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다. 문장을 내면화하는 훈련이다.
우리는 어쩌면 글을 너무 쉽게 다룬다. 읽었다는 것마으로도 다 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읽은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거기서 질문을 건져 올린다. 문해력은 그 질문을 건져 올리는 능력이다.
문해력이 높다는 단순히 똑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세상을 풀어내는 실마리를 문장에서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장에서 세계를 읽는 능력, 그것은 교과서든, 성경이든, 신문이든, 심지어 지하철 광고판 문장이든 상관 없다. 어디서든 감각은 깨어 있고, 문장은 단서를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해력을 국어 점수나 수능 지문 같은 것에만 국한시킨다. 하지만 진짜 문해력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 그걸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 이면에 흐르는 맥락과 구조, 맥락 속 숨은 의도를 읽어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일상 속 수많은 정보들, 그 안에 담긴 은근한 감정과 숨겨진 방향성, 타인의 말 속에 들어 있는 망설임과 속뜻, 회의에서 발표되는 숫자들의 구조적 왜곡, 정치인의 말 속에 숨겨진 프레임, 뉴스의 문장 배열에 깔려 있는 시선의 방향. 이런 것들을 읽어내는 힘이 곧 문해력이다. 이건 감상이나 해석이 아니다. 구조를 읽는 힘이고, 세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인지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해력은 단지 읽기의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문장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사실 ‘세상을 어떻게 대하느냐’와 같다. 빠르게 흘려보낼 것인가, 멈춰서 음미할 것인가. 설명을 요구할 것인가, 스스로 질문을 만들 것인가.
나는 그날 목사님과의 짧은 경험을 통해 그런 방식의 읽기, 그런 방식의 사유, 그런 방식의 존재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이 고갑주 작가가 말하는 ‘교과서를 읽는 힘’과 똑같은 구조라는 걸 깨달았다. 교과서의 문장을 반복해서 읽게 하는 수업, 아이들이 자기 속도대로 문장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구성하게 하는 수업. 그건 결국 교과서라는 매개를 통해 문해력을 키우고, 더 나아가 세상을 해석하는 감각을 키우는 일이었다.
문해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천천히 읽고, 반복하고, 묻고, 다시 읽는 훈련을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그 힘은 교실을 넘어서 삶 전반에 스며든다.
결국, 문해력이란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모든 문장을 질문으로 바꾸는 능력’.
그 질문이 생긴 순간, 사람은 더 이상 단순한 독자가 아니다. 그는 사유하는 존재가 된다. 세상과 텍스트를 같은 방식으로 읽고, 해석하고, 살아내는 사람. 그가 바로 진짜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