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되살리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120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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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기억은 정말 '사실'일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언가를 기억하고 다시 잊느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의 총량이 아니라 그 기억을 얼마나 왜곡 없이 저장하느냐는 것이다.

만약 한 순간도, 단 하나의 이미지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의 주인공 '에이모스 데커'가 그렇다.

'완벽한 기억력'이라는 소재는 이미 다른 장르에서 사용되는 소재다. 다만 작가 '빌디치'는 그 능력을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뒤바꾼다. 에이모스 데커는 미식 축구 선수 출신 형사다. 다만 경기 중 뇌를 다친다. 그는 하이퍼타이메시아에 시넥스 테지아를 동시에 겪는다. 말은 어렵지만 어쨌건 기억이 영상처럼 저장되며 정보가 잊히지 않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가족이 살해 당하던 그날의 냄새, 빛, 소리, 공기. 잊혀지지 않는다. 그 끔찍한 장면이 매일 밤 되살아난다.

실제 하이퍼타이메시아는 존재하는 증상이다. 2006년 UCLA 신경과학자 제임스 맥거 박사가 '질 프라이스'라는 여성을 통해 이 개념을 발표했었다. 그녀는 30년 전의 특정 날짜를 말하면 그날이 무슨 요일이었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무엇을 입었는지까지 기억해 냈다. 다만 그녀는 그 능력을 고통이라고 말하곤 했다. 지우고 싶은 과거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빌디치는 이 고통의 본질을 소설에 담았다.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뇌'라는 곳을 '저장의 감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데커는 가족을 잃고 경찰마저 그만둔다. 그의 삶은 바닥까지 추락한다. 그는 거리에서 살아가고 매일 악몽을 꾼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이 이걱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현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데커는 그 사건에 자신이 연류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 직업이었던 '형사'의 특성을 살려 수사하고 범인을 찾고자한다. 단순히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이 기억하는 '진실'이 과연 '진짜'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쯤 질문이 생긴다.

과연 기억은 '사실'인가. 기억은 '객관적'인가. 심리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2014년 존스홉킨스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피 실험자들에게 가짜 사건을 주입한 결과 30%이상이 그것을 '실제'라고 기억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기억은 감정이나 관점, 환경에 따라 쉽게 변형된다. 다만 데커는 그렇지 않다. 그의 기억은 변형되지 않는다. 모든 장면은 편집없이 저장된다. 그리고 그 문제로 '잊을 수 없는 고통'을 갖게 된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은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꽤 과거의 나도 그랬을 것이다. 아주 과거의 '나'는 일부의 고통을 서서히 세월에 편집해가며 미화시켰을 것이고 지금에 와서는 온통 왜곡 투성이로 어떤 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지금 역시 나에게는 '고통'의 기억이 있다. 그 일부는 서서히 세월에 의해 다듬어지고 깎여 나간다. 잊혀져야 하는 것들은 잊혀져야 한다. 그 본질을 현 세계는 흔들어낸다.

과거 유명인들이 발언이나 행동이 현재에 와서 재조명되는 경우가 있다. 알고리즘을 타고 이미 몇년이나 지난 이야기가 다시 회자되며 사람들은 그 사람의 본질을 흔든다.

한 사람이 다른 시간에 말한 두 이야기를 교차 편집하여 '모순 덩어리'로 만든 것도 너무 쉽다. 본래 기억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단백질 고깃덩이에 화학작용으로 만들어내는 '환영'과 같다. 현대 우리는 어떤가. 그것을 '디지털화'하고 '클라우드'에 저장한다. 흔히 '흑역사'라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영원히 '박제'되는 시기에...

이 소설은 현대 우리의 삶을 되돌려 보도록 했다. 지금도 수 백개씩 올라가는 수많은 영상과 사진, 글들은 시간이 지나면 세월에 철학이 달라지고, 삶의 가치관도 달라지고, 외모와 말투 등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어쩌면 일부는 이미 죽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앞으로도 살아간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고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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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읽기의 힘 - 우리 아이 공부그릇 키우는 기적의 교과서 공부법
고갑주 지음 / 살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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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보면 '종교적 색체'의 글이 나오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 '코끼리 명상 어플'에 '불교에 관한 글'을 종종 개재한다. 가장 최근에 집필한 책은 '유대인'이 관한 책이었으며 글을 쓸 때, '성경'과 '불경'에 대한 인용을 자주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어떤 종교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심취해 있지는 않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을 좋아할 뿐이다.

어찌됐건 이야기의 포문을 '종교'로 시작한 이유는 '문해력'에 대한 아주 그럴싸한 깨달음을 '한 목사님'으로부토 얻게 됐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목사 님께서 '성경'을 읽어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고 물으셨다. '어렵다'고 답했다. 어느 부분을 읽었느냐고 물으셨다. '창세기'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가 또 누구를 낳고, 걔가 또 누구를 낳고...' 도대체 이 글을 읽고 깨달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솔직한 평도 드렸다.

그때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읽는 법이 잘못됐다'고 하셨다. 그는 성경의 구조를 설명하며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서는 구약에 해당되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시고, 이 중에 아무 곳이나 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 곳이나 폈다.

거기서 아무 문장이나 읽으라고 하셨다. 아무 문장이나 읽었다.

그렇다. 그냥 읽었다.

'이게 무슨 말이죠?'

그러자 목사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한 번 더 읽어보라고 하셨다.

다시 읽었다.

'무슨말이지...'

천천히 다시 읽어보라는 주문이 있으셨다. 목사 님은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몇 번을 다시 읽도로 하셨다. 그때 느껴지는 감각은 이렇다. 주어와 술어가 길어서 한 호흡에 다가오지 않던 문장이 반복된 음독으로 서서히 분해되고 나눠지고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문장이 담고 있는 그 힘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 문장이었고 아무 페이지였다. 그곳을 여러 번 읽다보니, 무언가 '전체'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성경은 '전체'를 담고 있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문장에 대략 3만개 정도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구나.. 싶었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에 관한 내용은 아니다. 문해력에 관한 내용이다. 내가 그때 얻은 경험은 '신학적 경험'이 아니다. 어떻게 글을 접해야 하는가에 대한 경험이었다.

표면적으로 글을 읽어내는 행위가 아닌, 그것을 '문해'했을 때 과연 얼마나 사람이 달라지는가. 그것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자를 '음성 변환'하는 정도의 훈련으로 다져진 삶을 산다. 그러나 어떤 문장을 제대로 문해하려면 그것을 충분히 익힐 수 있도록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문장은 읽는 것이 아니라, 체득하는 것이다. 한 문장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소리내어 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왜 그렇게 쓰였는지, 왜 그런 순서로 나열됐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몸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해는 해석이 아니라 흡수다. 반복적인 음독은 글을 이해하기 위하 노구가 아니라, 그리 내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행위다.

고로 문제는 속도다. 대부분의 교육은 얼마나 빠르게 이해했는가에 중심을 둔다. 그러나 진짜 독해력은 속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깊이에서 나온다. 천천히 읽어야 비로소 문장의 구조가 보이고, 저자가 숨겨 놓은 결이 드러난다. 문해력은 그런 세밀한 결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이다. 감각은 단련된다. 반복적으로 같은 문장을, 같은 페이지를, 같은 책을 들여다 보는 사람만이 그 진짜 뜻을 할 수 있다.

고갑주 작가의 '교과서 읽기의 힘'도 사실 이 맥락과 딱 맞아 떨어진다.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 하나가 함부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목적, 하나의 방향,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구성된 시스템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문제집의 재료쯤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자꾸 해설을 보려고 한다. 자꾸 줄을 그으려고 하고, 밑줄의 의미를 묻는다. 하지만 그전에 필요한 건, 그 문장을 그대로 여러번 읽는 일이다.

목사님의 말씀은 그래서 잊히지 않는다. 그냥 읽으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읽으라고 했다. 설명도 따로 없이, 해설도 없었다. 다만 반복시켰을 뿐이다. 마치 고갑주 작가가 수업에서 아이들과 문장 하나를 가지고 20분씩 붙드는 것 처럼, 천천히 반복적으로 문장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다. 문장을 내면화하는 훈련이다.

우리는 어쩌면 글을 너무 쉽게 다룬다. 읽었다는 것마으로도 다 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읽은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거기서 질문을 건져 올린다. 문해력은 그 질문을 건져 올리는 능력이다.

문해력이 높다는 단순히 똑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세상을 풀어내는 실마리를 문장에서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장에서 세계를 읽는 능력, 그것은 교과서든, 성경이든, 신문이든, 심지어 지하철 광고판 문장이든 상관 없다. 어디서든 감각은 깨어 있고, 문장은 단서를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해력을 국어 점수나 수능 지문 같은 것에만 국한시킨다. 하지만 진짜 문해력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 그걸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 이면에 흐르는 맥락과 구조, 맥락 속 숨은 의도를 읽어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일상 속 수많은 정보들, 그 안에 담긴 은근한 감정과 숨겨진 방향성, 타인의 말 속에 들어 있는 망설임과 속뜻, 회의에서 발표되는 숫자들의 구조적 왜곡, 정치인의 말 속에 숨겨진 프레임, 뉴스의 문장 배열에 깔려 있는 시선의 방향. 이런 것들을 읽어내는 힘이 곧 문해력이다. 이건 감상이나 해석이 아니다. 구조를 읽는 힘이고, 세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인지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해력은 단지 읽기의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문장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사실 ‘세상을 어떻게 대하느냐’와 같다. 빠르게 흘려보낼 것인가, 멈춰서 음미할 것인가. 설명을 요구할 것인가, 스스로 질문을 만들 것인가.

나는 그날 목사님과의 짧은 경험을 통해 그런 방식의 읽기, 그런 방식의 사유, 그런 방식의 존재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이 고갑주 작가가 말하는 ‘교과서를 읽는 힘’과 똑같은 구조라는 걸 깨달았다. 교과서의 문장을 반복해서 읽게 하는 수업, 아이들이 자기 속도대로 문장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구성하게 하는 수업. 그건 결국 교과서라는 매개를 통해 문해력을 키우고, 더 나아가 세상을 해석하는 감각을 키우는 일이었다.

문해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천천히 읽고, 반복하고, 묻고, 다시 읽는 훈련을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그 힘은 교실을 넘어서 삶 전반에 스며든다.

결국, 문해력이란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모든 문장을 질문으로 바꾸는 능력’.

그 질문이 생긴 순간, 사람은 더 이상 단순한 독자가 아니다. 그는 사유하는 존재가 된다. 세상과 텍스트를 같은 방식으로 읽고, 해석하고, 살아내는 사람. 그가 바로 진짜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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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돈의 세계지도 - 세계3대 투자가가 예측하는 저무는 나라, 성장하는 나라
짐 로저스 지음, 오시연 옮김 / 알파미디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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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 가장 유동성 높은 통화, 가장 신뢰받는 채권을 발행하는 나라였다. 다만 이제 재무부는 매년 수천억 달러의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2025년 현재, 미국 연방정부의 부채는 36조 2,200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연간 이자 비용만 1조 달러를 넘는다. 특히 올해는 약 1조 1,600억 달러로 추정된다. 이는 미국 국방 예산인 8,860억 달러를 크게 상회하는 수준이다. 다시 말해, 미국은 이제 '국방력'을 유지하는 것보다 부채를 유지하기 위해 '이자' 갚는데 더 많은 돈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채권은 단지 돈을 빌리는 수단이 아니다. 국가의 생존 전략이나 다름없다.

미국은 시장을 관리한는 방식에서 단순 경제 논리를 넘어서기 시작했따.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여 위기를 관리하고 안전 자산에 대한 수요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채권 시장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려고 한다. 즉, 시장을 흔들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위기 국면을 이용하고 자 한다. 달러와 미국 국채로 자금을 유도하고 그것으로 재정 압박을 버틸 수 있는 임시적 장치를 두고자 한다.

2025년 현재, 세계는 여전히 금리 인상기의 끝자락에 있다. 미국 연준(Fed)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2022년부터 공격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그 효과는 실물 경제의 둔화와 채권 시장 변동성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예측할 수 있는 트럼프의 행보는 '긴출 탈출'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1기 당시에 낮은 금리와 강한 달러, 높은 증시를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포장해왔다. 아마 2기에서도 비슷한 기조를 유지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금리'나 '재정 정책'이 아니다. 지금도 뉴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슈 중 하나는 '무역'이다. 그는 '보호무역주의자'이다. 중국에 대한 고율 관세라던지 멕시코와의 국격 장벅, 동맹국들에 대한 방위비 협상 등 너무 다양한 이슈들이 하루가 멀리하고 터져 나온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공부해보면 '보호무역'이 도래한 시기의 결과가 그닥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트럼프는 자유무역주의에서 잃게 된 국가 경쟁력을 회복하고자 한다. 미국 제종버을 되살리고, 공급망을 재편하여 글로벌 무역 질서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흐름은 지정학과 직결된다. 트럼프는 시장 혼란을 감수하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곧 안전자산의 선호를 의미한다. 금값은 오르고, 미국 국채에 대한 수요는 늘어난다. 트럼프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다. 자신들이 쌓아올린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 의미의 '세계질서'는 의미를 상실했다. 고로 그는 자국 내 제조업을 부흥시키고 관세를 높여 보호 무역을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앞으로 공급망은 지역화되고 국경은 더 높아질 것이다. 또한 중앙은행은 더 이상 전통적인 역할만으로 경제를 조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구조적 불신은 하나의 새로운 대안을 떠오르게 만든다. 기존 통화에 대한 회의와 정부 재정, 채권 구조에 대한 피로감, 중앙은행의 신뢰 상실.

이 모든 흐름이 결국 시장의 일부를 어쩌면 '탈중앙화된 대체 자산'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생각되게 한다.

꽤 진보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 현상이 '비트코인'이지 않을까 싶다.

국가가 흔들릴수록, 부채가 누적될수록, 정부에 의존하지 않는 가치 저장 수단에 대한 수요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금일 수도 있고, 디지털 금으로 불리는 비트코인일 수도 있다. 트럼프의 귀환과 미국의 전략변화는, 어쩌면 비트코인 같은 대체 자산에게 새로운 무대를 열어주는 신호일 수도 있다.

아무개는 이 '암호자산'을 외면하거나 '없애버린다'는 선택지를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다만 비트코인은 '기술적으로' 없애기 상당히 어려운 구조다.

비트코인은 '전 세계 수천 개의 노드'가 탈중앙적으로 유지하는 네트워크다. 다시말해서 비트코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전세계 노드 즉 컴퓨터의 51% 이상을 동시에 무력화 시켜야 한다.

국가가 인터넷을 차단해도 이런 암호 자산은 위성이나 라디오 신호로도 전송이 가능하다. 중국과 같이 채굴과 거래를 법적으로 금지시킬 수도 있다. 다만 이는 VPN을 통해 여전히 사용가능하다. 미국이 국가적으로 나서서 이 자산을 없애고자 달려들어도 이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다시말해서 '비트코인'은 정치적으로 '통제 불능의 자산'이다. 세금 회피나 자본 도피의 수단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 자산이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비트코인'에 대해 '전략 비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 정부는 이 골치거리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현실적으로 받아들였다. 어떻게하면 이것을 제도권으로 유입시킬 수 있을지, 통제권에 둘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바가 느껴진다.

2030년, 돈의 세계지도는 비록 '암호화폐'에 관한 책이 아니지만.. 어째서 나는 '비트코인'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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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전쟁이다 - 전 세계를 집어삼킨 아마존의 단 하나의 원칙
다나 마티올리 지음, 이영래 옮김, 최재홍 감수 / 21세기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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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잘 모른다.

'다나 마티올리'라는 사람도 낯설고, 그녀가 쓴 '모든 것이 전쟁이다'라는 책도 아직 생소하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 미국에서 아주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마존 이라는 기업은 정말 그게 전부인가'

일단 그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다나 마티올리'는 누구인가.

그녀는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오랜 기간 기업들의 내부 사정을 추적해온 저널리스트다. 그녀는 기업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끈질기게 파고든다. 수년간 그녀는 아마존 내부 관계자들을 취재하고, 수백 건의 문서를 분석하여 '모든 것이 전쟁이다'에 담았다.

아마존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기업이다. 직구를 할 때, 경제 관련 뉴스를 볼 때도 종종 접하게 된다. 다만 여타 다른 미국 기업들에 비해 한국에서 그 영향력에 비해 인지도가 크지는 않다. 다만 이 기업의 세계적 영향력이라는 것은 꽤 엄청나다. 이 책은 아마존을 단순한 기업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의 '전쟁 기계'처럼 본다. 고객의 클릭 하나, 직원의 움직임하나, 심지어 정책 결정 하나까지도 모두가 전쟁의 일부라는 것이다.

아마존은 초기에 단순한 온라인 서점이었다. 다만 월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마존은 경쟁에 속도를 높인다. 회사를 인수하고 경쟁자를 압박하고, 심지어는 플랫폼 안에서 경쟁자의 제품을 모방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협력자로 함께하던 아마존이 어느순간 경쟁자가 되어 있는 모습은 아마존의 성장과정에서 풍기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꽤 익숙한 여러 멤버십 중 일부는 '아마존'에서 대중화 된 경우가 있다. 특히 '쿠팡'과 '쿠팡 플레이'가 그렇다. 아마존은 고객을 '프라임'이라는 이름의 멤버십으로 묶는다. 편리함이라는 당근 뒤에 잠금 장치를 작동하여 고객을 묶어두는 것이다. 물건을 더 빨리, 더 싸게 주는 대신에 더 자주 사야 하고, 더 오래 아마존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것은 아마존이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던 성장 동력 중 하나다. 시장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여타 다른 플랫폼에서도 흉내를 내는 경우가 있다. 아마존이 퍼스트무버로써 전략을 어떻게 짜고 있는지가 여타 패스트 팔로워들에게도 중요한 자산이 되는 셈이다.

아마존은 얼핏 물류회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아마존은 물류회사는 아니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물류망을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는 AI가 사람을 관리하고 작업자는 초 단위로 움직인다. 어떤 직원은 화장실 갈 시간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이처럼 치열함 속에 아마존은 생존하고 있다.

안으로 뿐만 아니다. 아마존의 생존은 밖으로도 치열하다. 아마존은 정부와 계약하고, 국방부와 클라우드 계약을 맺는다. CIA의 데이터를 처리하기도 한다. 단순한 '플랫폼'을 넘어서 '인프라'를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한 학자는 '아마존'은 이제 미국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됐다고 말한다. 그 말은 즉, 누가 이 이 회사를 견제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과 같다.

우리가 쇼핑을 하는 행위는 현대에 와서는 '취미'처럼 소비된다. 자유롭게 물건을 고르고 여러 물건을 비교하며 최대한 억압받고 있던 사회의 업무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마음껏 누리는 '해방'의 취미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일까.

우리가 자유롭게 '쇼핑'을 즐기고 있는 사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잃고 있었다. 자신의 데이터를 빼앗기고, 일정하지 않은 알고리즘의 '룰'에 갇히고, 말없이 밀려나는 중소 셀러들도 있었다. 휴식없는 물류 현장의 노동자들 또한 있다.

그 한가운데, 우리는 웃으며 장바구니를 클릭한다. 다나 마티올리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고 혹은 당신이 나쁘다'하고 말이다. 다만 이렇게 묻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편리함이라는 것은 과연 누구의 비용 위에 세워져 있는가'

책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감춰진 질문을 끄집어낸다.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전쟁이다'는 단순히 아마존에 관한 책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기술'이라고 불렀다. 또한 '시장'이라고 믿었다. '자유'라고 생각했다. 다만 어떤 면에서 이것은 거대한 '통제'이기도 했다.

기업으로써 아마존은 얼마나 치열하게 성장하고 있는지, 소비자로써는 또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책은 정리하여 말하지 않지만 여러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무심코 클릭한 하나가 어떤 세계를 만들고 있는지를, 이책은 묵묵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해주고 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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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의 심리학 - 예술 작품을 볼 때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오성주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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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상화 50여점 중 80% 이상이 왼쪽을 향하고 있다. 그들의 왼쪽을 택한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흥미롭게도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당시 동양화에서 인물을 그릴때는 오른손 잡이 작가가 왼쪽 얼굴을 그리기 쉬웠다. 게다가 권위와 중심감을 왼쪽 방향을 통해서 표현했다는 시각적인 관습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반대로 서양은 어떨까.

서양 회화에서 자화상의 경우 인물이 오른쪽을 향하는 예가 더 많다. 이는 대부분의 화가가 오른손잡이인데다가, 동양과는 다르게 그들이 '거울'을 통해 자신을 그렸기 때문이다. 오른쪽 고로 오른쪽 얼굴이 더 자주 보였을 것이다. '반 고흐'의 '자화상'이나 '렘프란트'의 여러 자화상에서도 이런 경항이 나타난다. 이러한 방향성의 차이는 단순히 구도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도구, 제작 방식이 감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예시다.

시선의 방향만으로도 우리는 인물의 감정을 유도받는다. 구도가 어디로 흐르느냐에 따라 감정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시선이 멈추는 지점에서 감상의 촛점이 정해진다. 방향성은 그림의 구조를 지탱하는 축이다.

우리는 이제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재현된 그림에 큰 감동을 받지 않는다. 이유는 이렇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술'의 발달로 인간 능력이 '기술'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현실을 복사해내는 '사진'과는 다른 '차별점'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사진술이 발달한 시점부터 인간의 예술은 '모방'보다는 '표현'에 집중하게 된다. 현대 미술에서 자주 보이는 왜곡과 생략, 과장은 그런 의미에서 발달했다고 보여진다. 이런 표현은 감상에 더 큰 흥미를 준다. 이는 단순한 형상의 변형이 아니다. 작가는 왜곡을 통해 본질을 강조하고 감정을 우선시한다.

직선은 강직함이나 냉정함을, 곡선은 부드러움이나 감정을 유도한다. 굵고 무거운 선은 무게감과 진지함을, 얇고 가벼운 선은 섬세함과 유연함을 상징한다. 이처럼 형태의 왜곡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감상의 핵심 장치다.

책은 감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조작화된 과정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요컨데, 캐리커처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실제 인물보다 캐리커처처럼 특징을 왜곡한 얼굴을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상징하는 캐리커처를 항상 가지고 있다. 즉 평균적인 것보다 왜곡과 과정적인 요소가 감정과 기억을 더 자극하고 오래 기억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이 현대 미술을 감상하는데 꽤 도움을 준다.

감상은 결코 순수한 개인의 반응이 아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고 있거나,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은 자연에서 언제나 가능하다. 이런 감상을 두고 굳이 평면에 그려진 예술작품을 바라 볼 이유가 따로 있을까.

실제 자연과 예술작품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형상과 비례, 방향과 색채처럼 구조적으로 배치된 요소들은 '작가'에 의해 의도된 장치들이다. 이것은 감상자의 판단을 유도한다. 박수근 작가의 선은 투박하고 건조하다. 그러나 그 거친 선이 오히려 진정성을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형태가 아닌, 형태의 선택에 담긴 맥락이 감상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다.

작가가 본 그것을 그대로 카피해내는 것이 아닌, 작가가 대상에서 찾아낸 본질과 감정을 감상자에게 넘겨주는 행위다. 고로 작가는 어떤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생각한다.

선의 굵기와 방향, 생긔 농도와 명도, 화면의 구도는 감정의 방향을 암묵적으로 이끈다. 구도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면 불안과 낯설음을 자극하고,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려면 자연스럽고 익숙한 감정을 유도한다. 이러한 시각적 요소들은 감상자가 작품을 어떻게 읽을지를 미리 설계해놓은 장치다. 감상이란 결국 이 장치들을 얼마나 잘 감지하느냐에 대한 문제다.

감상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언어와 문화, 기대와 선입견 속에서 만들어진다. '왜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까'라는 질문은 '왜 황혼을 보면 울컥할까'하는 질문과 닮았다. 색조주의처럼, 특정한 색과 분위기는 사람의 감정을 자동적으로 자극한다. 이는 예술이 아니라 생리적 반응에 가깝다.

미술 감상의 기술은 이처럼 감정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단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느끼게 되었는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명암의 대비, 신선의 유도선, 색의 대비와 반복, 구도의 대칭과 파괴. 이 모든 시각적 언어들은 감상자에게 끊임없이 힌트를 던진다. '감상의 심리학'은 그 힌트를 해석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오성주 작가'의 '감상의 심리학'은 당신의 감상 뒤에 숨은 '타인'의 '기획'에 대해 말한다. 결론적으로 감상이란 작가가 심어둔 장치를 감상자가 발견하고 되짚어가는, 서로의 심리를 서로 마주보게 되는 일인 셈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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