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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지 말 것 사랑을 할 것
슈히 지음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5년 7월
평점 :
아무리 비싸고 예뻐도 맞지 않으면 신발은 상처만 남긴다. 벗어 두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있더라도 아프게 한다면 반드시 벗어야 한다. 그것이 신발의 본질이다. 본질을 상실한 '신발'은 반드시 벗어야 한다.
어떤 신발은 익숙까지 시간이 걸린다. 걷다보면 내 성격과 성향에 맞게 신발 밑창이 닳기 시작한다. 발을 감싸는 헐거움도 점차 맞게 된다. '새것'으로 진열장에 진열되어 있을 때 없던 무언가가 점차 생겨가며 나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과거 가장 좋아하던 신발 중 하나가 있었다. 흔히 '명품구두'였다. 평생 그런 구두를 신을 일이 있을까, 싶은 그 구두를 아껴 신었다. 그러다가 그래, 아끼면 똥된다. 그런 기분으로 아낌없이 신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의 반짝거림은 상실하고 완전히 허름한 구두로 바뀌었다. 얼마나 신었던지 웬만한 운동화보다 편하게 느껴졌다.
어딜가나, 그 구두만 신었다. 험한 일정이 있을 때도 생각없이 그 구두를 신고 나갔다. 복장은 물론 상황에도 어울리지 않은 '구두'는 어느덧 나를 '상황에 적절치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꼭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나에게 맞는 구두라고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반드시 바꿔 신어야 하는 그런 것...
맞지 않아 아픈 신발을 신고 한참 걸었던 경험도 있다.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신경쓰며 아픈 발 쯤이야, 언젠가 벗어버릴 귀가 시간을 기다리며 참았던 적도 있다. 구두로 빗된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다.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삶의 대부분에 적용되는 철학이 하나 있다.
바로 '지속가능성'이다.
뭐든 '지속가능성'이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돈도, 직업도, 공부도 그렇다.
나에게는 꽤 과분한 직업, 연봉, 인간들이 스치고 지나갔던 적이 있다. 그것이 지속 가능했다면 나는 더욱 좋은 위치에 있었겠다. 다만 나는 그것들을 다음 주인에게 양도하고 자리를 떠났다. 내가 비워둔 그 자리 덕분에 누군가는 더욱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았겠지만 나는 한동안 참고 방황하고 힘들어했다. 버텨보려 했던 시간에 대한 '매몰비용'을 탓하며 자신을 허비하곤 했다.
그렇지 않은가. '어린왕자'에서 왕자는 지구에 도착해 수천 송이의 장미를 바라본다. 그러다 사실은 아름답고 고귀한 장미가 지구에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여우'가 말한다.
'장미꽃이 소중한 이유는 네가 그 꽃에게 바친 시간 때문이야'
어쩌면 우리는 상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넘겨 준다. '자신의 시간', '자신의 '삶' 말이다.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 상대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상대를 아끼는 것은 어쩌면 상대에게 묻혀둔 자신의 시간과 삶 때문일지 모른다.
아주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랑은 상대보다 자신의 시간과 감정에 대한 미련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것이 맞는지 모른다. 내가 들였던 시간과 감정 그런 것들이 상대와 관계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내어준 시간과 삶만큼이나 상대의 그것을 앗아왔다.
내가 내어 준 것만 생각하기에 그토록 이기적인 사랑이 다시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빚을 지은 셈이다. 상대의 시간과 감정, 삶을 일부 앗아왔다니...
함부로 그에게 할 수 없는 이유다.
인간관계는, 고로 애초에 ‘좋은 사람’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나의 시간과 감정을 내어주고 상대의 시간과 감정을 앗아오는 일이다. 그렇게 서로의 것을 주고 받는다. 그렇게 나의 것을 내어주고 상대의 것을 가져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상대와 나에게 모두 흔적을 남긴다. 신발 밑창에 난 닳아 사라진 흔적들 처럼 말이다.
결국 관계는 지속될수록 삶을 닮은 구두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관계는 그 자체로 유해하다. 나를 깎아내고 상대의 것을 훔쳐 오는 행위다. 그것은 결국 ‘소진’이다. 자신을 소진하고 상대의 것을 소진시키는 행위다. 진짜 좋은 관계는 나를 성장시키고 가끔 아프더라도 함께 쉬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
구두도, 사람도, 인연도...
닳았다고 바꿔 버리면 결코 나에게 맞는 신발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픈데도 버텨서는 안되다.
신발은 분명 매우 중요한 아이템이지만 신발이 없다고 죽을 수는 없다. 사실 잠을 자고 씻고 생활하는 대부분의 시간에서 언제나 신발은 '신발장'에 있을 뿐이다.
때로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맨발로 걷는 길은 다소 아플 수 있지만, 그제야 진짜 나의 걸음걸이를 다시 찾게 된다. 결국 서로 얽혀 벗어나지 못하는 관계가 아니라 때로는 가끔 자신이 온전하게 되는 시간도 분명 필요하다. 자식과 부모, 하물며 배우자와의 관계도 그렇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지속하는 태도다. 그런 맥락에서 슈히 작가의 신간 '사랑에 빠지지 말 것, 사랑을 할 것'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이야기한다. 사랑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필요한 용기와 태도, 그리고 내가 내 편이 되는 사랑의 방식에 대해 담담하고 단단하게 풀어낸다. 지금, 아픈 신발을 벗고 맨발로라도 걷기 시작해야 할 누군가에게 이 책은 작고 확실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