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나의 우주가 닿을 수 있을까? (개정판)
서윤 / 더스트스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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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거대한 벌레가 되어 깨어났다.

벌레가 되어 깨달았다. 정말 괴물이 된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외면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누구나 한순간에 '타자'가 된다. 타인을 완전한 타인으로 분류하고 서로의 우주가 점차 닫힌다.

서윤 작가의 '나의 우주가 닿을 수 있을까'는 잠자처럼 어느날 갑자기 완전한 타인으로 깨어나는 경험을 통해 소외와 낯섦을 이야기 한다.

언젠가 비슷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한 사람이 바닥에 놓여진 숫자 9를 보며 '구'라고 말한다.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그 숫자를 바라보며 '육'이라고 말한다.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완전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타인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나에게 보이는 '숫자 구'는 변하지 않는 진실이고 상대가 착각을 하고 있다고 강하게 믿는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는 우리네 사고 방식을 비판하는 짧은 그림이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는 사람과 서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같은 세상을 본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고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가 무너질세라. 고개를 고정하고 꿈쩍하지 않는다. 그렇게 두 개로 나눠진 세계는 좀처럼 연결될 생각이 없다.

잠자와 같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섦으로 태어난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의 온도를 체감한다. 그 세계가 나를 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진짜 자신'을 인식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잠자'는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를 괴물로 만든 것은, 벌레가 된 자신의 몸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며 문을 닫아버린 가족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수필은 '먼 약국 이야기'로 먼저 시작한다.

'내가 그때 용기 있는 말과 행동을 했다면 상대방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깨너 놓는다.

작가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엄마의 약국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동네에는 입구에서 가까운 약국과 먼 약국이 있었는데, 가까운 약국의 주인은 불친절한 아저씨였고 먼 약국의 주인은 친절 했단다.

어느 날 먼 약국의 젊은 주인이 '왜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까지 왔는지 묻는 질문'에 작가는 '친절해서요'라고 답하지 못했다. 약국 주인은 '구순구개열' 즉 언청이었다. 어쩌면 어린 초등학생이 멀리까지 온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던 주인은 어쩌면 자신이 가진 장애를 어렴풋 떠올렸을 지 모르겠다.

그때, '친절해서요'라고 답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그런 경험 꽤 잦은 편이다. '뭐라고 꼭 말해줘야지'하고 삼키고 몇 번을 시뮬레이션해보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말히자 못하는 경험 말이다.

애석하게도 몇번의 시뮬레이션은 스스로를 착각하게 만든다. 어쩌먼 그러한 말을 꼭 한 것처럼.

그리고 자신과 상대의 관계에 대한 생각치 못한 결과를 맞이 했을 때, 서로가 완전히 다른 우주를 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대부분 사람은 '착각'과 '망각'을 통해 스스로의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타인'의 잘못에는 '상처'로 받아들여 오래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가끔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릴 때가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다' 싶은 부모님의 모습이 그때는 상처로 다가 온 적이 있다.

분명 나의 기억 속에서는 무서운 어머니께서 혼내시는 기억이 있는데, 그 앞의 상황에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이런 기억이 차곡 차곡 쌓이고 왜곡되면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멀어지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잘해준 기억은 하나도 남지 않는데, 못해준 기억만 남는 그런 연애, 관계, 우정도 마찬가지다. 뒤늦게 후회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겠다.

작가의 이야기에 '하지마!'라는 외침에 반하는 '해도돼!'라는 외침에 관한 글도 있다. 생각해보면 '도대체 왜 그러니!'하고 말을 뱉어놓고 정말 왜 그랬는지를 떠올리는 여유가 스스로에게 없던 적도 있다.

하지마!,의 반대인 '해도돼!'는 그저 반대의 말이지만 그 말을 강하게 뱉는 것은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사람은 각자 자신이 읽고 싶은대로, 보고 싶은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서 글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항상 아이가 잠들고나면 후회할 만한 일을 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여러 관계에서 짓고 있는다고 생각하니 어쩌면 온 인류가 함께 고민해도 역사적으로 풀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관한 방법론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집 아이들은 저녁 8시가 되면 자도록 이야기 한다. 실제로 8시에 자는 적은 많지 않다. 아이가 커가면서 더욱 그렇다. 초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친구와 이야기하며 자신의 루틴의 남다르다는 사실도 깨닫는 듯하다.

어제 저녁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닫고 '그냥 좀 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가 잠에 들어야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읽어가며 내 앞에 놓여진 9를 보고 6이라고 읽는 아이를 나무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이 9던, 6이던 사실 뭐가 중요하겠나...

그것이 6으로도 보일 수 있겠구나, 하는 조그만 틈만 열어둬도 사실 우주가 완전히 닫혀 미세하게 남아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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