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료함 - 1% 리더들만의 사람을 이끄는 기술
탁민 오 지음 / 탁희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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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거실에는 커다란 가훈이 걸려 있었는데 흘림체 한자로 쓰여 있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어린 시절 아버지께, 그 한자 의미를 여쭤 봤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

의미는 분명하게 좋았지만 가끔씩 우리집 가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부모님 역시 '가훈'에 대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셨는지, '가화만사성'에 대한 이후의 언급도 없으셨다.

호기심에 적혀 있던 '한자의 의미'를 여쭤봤던 그 한번의 기억이 거의 유일한 기억이다.

물론 좋은 말이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 그러나 좋은 말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철학으로 뿌리 깊게 박혀 생각과 행동이 모두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 것은 다르다. 우리집은 실제로 화목한 집이었으나 그 뿌리가 명확하게 '가훈'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느낌은 받은 바 없다.

'오탁민' 작가의 '명료함'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치열한 사고의 과정 없이 아웃소싱 한 기준은 리더 스스로도 지킬 수 없다."

스스로 창업한 회사의 미션과 핵심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회사 직원들이 '사훈'에 대한 이해도가 크지 않았다는 자각을 한다. 이미 퇴사를 한, 자신이 해고한 직원과의 대화에서 자신을 돌이켜보며 잘못된 점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해도에 대해서는 '직원' 뿐만 아니라 '리더'인 스스로 조차 명료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다. '대충', '유도리 있게', '척하면 척'이 통하던, 서구를 따라가던 과거 산업화 시대에 상당한 무기로 사용되던 '직관'과 '직감'이 이제는 '모호함', '무질서함', 기준없음'이라는 결과가 됐다.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은 조직은 그 규모가 커질수록 반드시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무질서하게 된다. 어떤 조직이던 규모가 커지면 무질서도는 증가하게 되어 있다. 기준은 규모에 맞게 반드시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들면서 '리더'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리더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리더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스스로 한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고민을 하게 된다.

'기준을 제시해주던 아무개'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가정에서는 '부모님', 학교에서는 '선생님', 회사에서는 '직장 상사'의 지시을 받아 나름 보이지 않는 기준에 맞게 생활해 나간다. 그러다 어디서부터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지점을 지나고나면 '기준을 제시해주던 아무개'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시점에 일시적인 방황을 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나면 그리고 다시 깨닫는다.

'나에게는 기준을 제시해 줄 만한 사람이 없구나'

방향을 제시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쉬운 방황'을 의미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기준을 제시해야 할 위치에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영국 국왕'에게는 '여권'이 없다. 운전면허증도 없다. 그러나 어느 국가를 갈 수 있고 아무때나 운전을 해도 된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여왕은 운전면허가 없었지만 평생 운전을 즐겼고 90대가 넘어서도 직접 차를 몰고 사유지를 돌아다니곤 했다.


왜 그런가.

이유는 단순하다.

여권이나 운전면허의 발급 주체 자체가 영국 국왕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미국대통령도, 일본 천황도, 대한민국 대통령도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나 영국 군주는 근현대의 그 법과 제도의 근원이 되는 존재다. 자신이 발급하는 문서를 자신에게 발급할 수는 없다.

이는 다른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준의 최종 책임자는 스스로가 즉 기준이 된다. 즉 기준 없는 리더는 조직으로 하여금 기준없는 조직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라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가.

바로 리더의 철학이다. 리더의 역할은 모호한 잣대로 '일잘하는 직원'과 '못하는 직원', '조직의 방향'을 대략의 감으로 때려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확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 언어화하기 힘든 일인지 모른다.

동네 편의점을 찾아 갈 때, 네비게이션이나 지도, 나침반은 필요 없다. 기준도 필요없다. 오히려 감으로 발품 팔고 움직이는 것이 더 빠르고 현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가야 할 목적지가 '뉴욕 맨해튼의 5번가 350번지의 작은 서점', 이런 식이라면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특히 내가 인도자로써 여럿을 함께 그곳에 다다르도록 해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실제로 역사에는 기준이 명확한 리더와 그렇지 못한 리더가 이끈 집단의 차이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남극을 탐험한 아문센과 스콧의 이야기다.

두사람 모두 남극점을 목표로 출발을 했지만 아문센의 기준은 '생존'이었고, '스콧'의 목표는 '과학적 성과'였다. 실제로 아문센은 장비도 식량도, 이동수단도 모두 생존과 귀환에 목적을 두고 선택했다. 반면 스콧은 극한 상황에서도 과학 표본을 수집하고 운반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과는 극명하게 달라졌다. 아문센은 대원 전원을 무사히 데리고 남극점에 도달한 뒤 귀환했다. 스콧 역시 남극점에 도달은 했지만 귀환에 실패했고 대원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열정과 노력이라도 어떤 기준 아래 놓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결국 리더의 역할은 정답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명료함이란 단순 개인과 회사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정이나 국가를 비롯한 모든 개인과 조직에게 필요한 일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이 질문에 대해 깊고 치열한 사고의 과정을 거쳐 본 적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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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해방
에이먼 돌런 지음, 김은지 옮김 / 복복서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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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경전인 열반경에 '맹인모상'에 관한 글이 있다. 맹인들이 코끼리의 서로 다른 부위를 만져보고 코끼리의 생김새를 설명하는 이야기다.


 누구는 다리를 만지고 '기둥 같다'말하고, 누구는 코를 만지고 '뱀 같다' 말한다.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같다' 말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빗자루 같다' 말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한치 거짓없는 명백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진실'이라 하여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진리'의 일부분일 뿐 일부만 정확하게 꿰뚫어본다하여 그것이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맹인모상'에 따르면 인간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더 정확하게 더듬어 볼 것이 아니라 감고 있는 눈을 떠야 한다. 대상을 가만히 지켜보고 옆으로, 앞으로, 뒤로 심지어는 그 속과 외면, 내면, 행동을 포함하여 완전한 해체 상태를 인지하는 것을 두고 '안다'고 할지 모른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그 '앎'이 피상적인지, 본질적인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과'를 보고 '사과'를 안다, 말할 수 있지만 사과가 어떤 토양에서 자라는지, 어떤 계절을 견뎠는지, 왜 붉은 색을 띄게 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사과의 표면에 튕겨나온 광자가 전달한 피상적 정보를 가지고 '안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눈을 감고 코끼리를 면밀하게 뒤적거리던 여러 맹인 중 하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TV'나 '책', '교과서'에서 보면 '가족'을 그리는 통상적 이미지라는 것이 있다. 아버지는 양복을 차려 입으시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넥타이를 고쳐 주신다. 아버지가 출근 할 때, 구두를 신고 '다녀오겠소' 하면, '잘 다녀오세요' 하고 아이와 어머니가 배웅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정답으로 정해둔 정상적 가정의 '형태'가 아닐까,


다른 가족과 달리,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두 분 다 '작업복'을 입고 출근하셨다. 해가 뜨면 농사일은 진행하기 힘들기에 부모님은 새벽처럼 밭일을 나가셨다. 일을 마치면 땀에 젖은 작업복을 보며 우리집은 '비정상인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어느 가정과 다르지 않게 부모님은 자상하셨고 책임감 있는 분들이셨다.


 가정의 모습은 모두 다를 수 있다. 그것을 어린 시절 한번 피상적으로 이해했고 이후 나이를 조금 먹고 다시 알게 됐다. 고등학교로 입학을 하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의 범주가 넓어졌다.

 모든 아버지가 책임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모든 어머니 역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아이들은 친척에 의해 길러졌고 어떤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서울로 혹은 해외로 일하러 가신 아버지를 수년간 보지 못한 아이도 있었고 지금 생각하기에 '학대'라고 생각이 드는 집도 있었다.


 그닥 헌신적이지 않은 다른 아이들의 '부모'를 보며, 사실 '저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 일거야'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내 안에 '가족'이라고 하는 '일반화'가 너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가족의 보호를 받는 '아이'의 입장에서 또다른 '가족'을 형성하게 된 '성인'이 입장이 됐다. '게임에 중독된 아이', '어린 시기부터 도박을 하던 아이', '굉장히 이기적이거나 무책임한 아이'들은 어느 경계도 없이 '어른'이라는 이름표를 갖게 됐다.


 그들에게 아무런 가이드라인도 정해주지 않은 사회가 제대로 된 '가정'의 이미지를 전달하기란 쉽지 않았다. 각자 자신만의 가치관대로 아이를 기르기 시작했고 역시 우려하는대로 '사회'는 '아동학대', '방임' 등의 문제를 '통계'로 보여주곤 했다.


 '에이먼 돌런'의 '가족해방'은 어느 봄날 오후 자신의 어머니와 절연하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머니의 어느 모욕적인 말에 작가는 어머니와 절연을 선언한다.

 저도 모르게 '철 없는 행동'이라, '나중에 깊은 뜻을 알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 것을 봤을 때, 나 역시 눈을 감고 내 몫에 할당된 코끼리의 어느 부분을 열심히 뒤적거리고 살았던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됐다.


 세상에는 각자의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여러 모양이 있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럴 것이고, 그들 역시 이쪽을 그렇게 바라 볼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가끔씩 '사회'를 보여주겠노라, 조사하는 어느 기관에 의해 한번씩 공개 되는데, 서로가 가지고 있는 카드를 열어 보이며, '아, 저런 패를 들고 있었구나'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어느 책에서 보건데 이런 말이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폭력적인 관계를 포함하여 다양한 문제로부터 가족을 떠나는 사람을 보면서 가지고 있는 세계가 이렇게 작다는 또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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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들
정해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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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신없이 빠져 읽은 책이다. 뒤로 갈수록 속도감이 붙으며 책장이 넘어간다. 오른손에 잡힌 책장이 얇아 질수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학교에서도 모범생으로 알려져 있는 한 여고생의 사망 사건에 관한 소설이다. 여고생을 중심으로 가장 친했던 친구, 남자친구, 남자친구의 부모, 학생의 부모, 담임 선생님까지 다양한 인물이 용의 선상에 오르며 각자의 시선이 그려진다.

사건은 물론 '여고생의 사망사건'이 주가 되지만 각 개인의 입장에서 다양한 상황과 심리가 묘사되어 있다. 각각의 개인사는 모두 이해가 가능하면서 의심스럽기도 하고 소설이 끝난 뒤에서 그들의 삶 다음 장면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각 용의자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갈등이 있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 아들과 엄마, 아내와 남편, 가장 친한 친구들까지, 그 사이에 묘사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설이 흘러가고 하는 '살인사건'의 이야기와 별개로 흥미롭게 진행된다.

어떤 소설이건, 영화건 다 읽고 나서도 그 인물들이 그 다음 삶이 궁금하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물론 '추리소설'이지만 단순한 '추리'를 떠나 각 인물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나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어쩌면 각각의 인물에 대한 다음 삶을 묘사한 글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구매하고 읽어 볼 것 같다.


'정해연 작가'의 소설은 웬만하면 실패를 하지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유학시절 부터 '영화감상'을 몹시 좋아했다. 최대 2시간이면 '기승전결'이 완료되는 짧은 여가가 마음에 들었다.

책을 정말 좋아하는 이들은 1권, 2권, 3권의 형식으로 분권 된 책들도 부담없이 읽는다는데 개인적으로 그렇게 분권된 책에 대한 부담이 있는 편이다. 일단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장시간 하나의 이야기에 몰입하다가 플롯을 놓쳤을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해연 작가의 소설은 주변이 시끌거리는 와중에도 몰입하여 읽기 좋고 딱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끝낼만큼 적당히 여운을 주는 분량도 좋다.

패드나 모니터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많은 만큼 혹은 지나치게 많은 청각 정보가 들어오는 것이 스트레스인만큼 요즘은 '영화'보다는 '소설'이 더 맞는 것 같다.

적당한 분량, 직관적인 플롯, 짧고 간결한 문장은 영화나 드라마를 소설로 대체하기 충분하게 만든다.


정해연 작가의 글을 우연하게 보게 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와 서점에 가서 '정해연 작가'의 모든 책을 '싹~'하고 구매하고 나온 적이 있다. '홍학의 자리'가 대표작이라고 하여 '홍학의 자리'를 제외한 다른 주변 소설부터 먼저 읽고 있는 중이다.

'홍학의 자리'는 초반 챕터 하나 정도를 두어번 읽다가 그만둔 상태다.

'나중에 제대로 집중해서 읽어야지'하고 아껴둔 상태다. 개인적으로 '용의자들'은 '홍학의 자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물론 '홍학의 자리'를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 배경이 '여학생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는 점과 그 배경이 학교라는 점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느낀 것 같다.

예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빠져 읽을 때가 있었다. 벌써 20년도 넘었는데 글이 쉽고 직관적이라 즐겨 읽었던 것 같다. 워낙 다작하는 작가이기에 그가 쓴 모든 작품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같은 작가의 글을 계속 읽다보면 흔히 같은 반찬을 매일 먹을 때와 같이 '물리는 느낌'을 갖게 된다.

특히 작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작법에 대해 적응하게 되는데 그렇게되면 솔직히 소설이 기술적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실제로 그렇게 한번 그 느낌을 갖게 되면 꽤 오랫동안 그 작가의 다른 책을 읽는 것에 거부감이 생겨 버린다.

이런 이유로 같은 작가의 글은 약간의 텀을 두고 읽는 것이 좋다. 아마 정해연 작가의 다른 책들도 아껴가며 다른 책들과 섞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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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잘 지내는 법 - 나를 만나는 49일 글쓰기 워크북
조민영 지음 / 스피어인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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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학 이론 중에 '자아 확장(self-expansion)이라는 표현이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과정은 시작된다.


 가령 우리가 정의하는 '나'는 어디까지인가,


 쉽게 말해서 어느 영화의 장면처럼 '순간이동'이나 '시간이동'을 할 경우, '나'라는 것의 시공간을 이동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나'라고 정의하고 이동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손톱'의 경우 그 뿌리는 분명 살아 있겠지만 새로운 세포가 계속 만들어지므로 앞으로 밀려나온 세포는 케라틴으로 굳어진다. 이렇게 밖으로 나온 손톱은 이미 죽은 세포 덩어리다. 고로 우리는 손톱을 잘라내더라도 고통이나 상실을 느끼지 않고 그것이 떨어져 나감에 있어서 '나'가 분리되었다는 느낌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머리카락, 손톱, 피부 각질, 우리몸에 있는 수십조 마리의 미생물은 '나'와 별개의 것들이다.


 우리몸의 60%는 물로 이뤄져 있다. 물은 대체로 태평양 증발한 수증기가 따뜻한 공기와 함께 상승하여 구름이 됐다가, 바람을 타고 이동하여 찬공기를 만나 비가 되어 땅에 내린다. 내린 비는 땅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를 거치고 수도꼭지를 통해 우리 입으로 들어온다.

 이렇게 들어온 물은 핵액 속에서 최소 수시간 혹은 수일을 머물고 몸 전체에서 짧게는 2주, 길게는 4주 정도 머물다가 소변으로 빠져나가 하수관을 지나고 정화시설을 거쳐, 강으로 흘렀다가 마침내 다시 바다에 이른다.


 즉 우리몸의 60%는 한달 전까지 태평양 바다의 일부였다. 이것은 동아시아 어느 호랑이의 방광에 머물었기도 하고, 인도 평원을 걷던 코끼리의 땀이기도 했으며, 수백년 전 이름 모를 사람이 흘렸던 눈물이거나 소변이기도 했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을 확장하다보면 꽤 경이로운 순간을 만날 수가 있다. 우리가 더 크게 비약하면 '별'에서 왔다는 증거를 알 수 있다.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와 산소, 질소와 철은 지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우주 초기에 오래된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것들이 다른 원자와 중력으로 모여 있다가 초신성 폭발을 통해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기를 반복하면 결국 '내'가 된다.


 '나'는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우주 생리 속에 잠시 모여 형태를 짓고 있는 찰라의 흔적일 뿐이다.


 어떤 감정에 의해 스스로가 괴로워지는 순간이 있다. 남들과의 비교,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 열등감, 외로움, 슬픔.

 이런 것들은 '나'의 한계를 좁혔을 때 삶을 괴롭게하는 무엇이겠지만 '나'의 경계를 무너뜨려 확장시키다보면 '우주의 경이로움'의 한 조각일 뿐이다.


 '한낱 원자 알갱이'가 모였다가 폭발했다가를 반복하다가 이런 '감정'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우리는 금빛 물고기나 황금을 낳는 거위, 말하는 고양이에는 무한한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다. 이유는 그것이 '참 희귀하고 신비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비로운 현상이라는 것.


사실은 저 멀리에서 찾을 것 없다. 별의 죽음에서 태어난 원자가 모여,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런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 않은가.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의 비유에 따르면 '고철 더미로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갔더니 우연히 보잉 747 여객기 한대가 조립되어 나올 확률'과 얼마나 다른가.


이 무섭고도 믿기 힘든 우연이 바로 여기 '나'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십억 년 우주를 떠돌던 원자들이 잠시 모여 의식을 만들어 낸다니, 세상은 '나'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주 전체'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쩐지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우울하고 현실의 번아웃 상태에서 괴로운 상태에 머물고 있을 때, 너무 '나'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너무 갇혀 있어서 작은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라는 것이 '고정'됐다는 그 착각이 워낙 '금강'과 같아, 인도의 한 수행자는 오랜 세월 그것을 깨뜨리고자 노력했다. '금강'이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즉 '다이아몬드'를 의미하다. 깨지지 않는 그 관념을 깨부수자고 불교 경전 '금강경'은 물었다.


 '나'라는 것은 정말 고정된 값인가,


여러 글을 읽다보면, 혹은 글을 쓰다보면 '천체물리학'이든, '양자역학'이든, '심리학'이든, 종교나 수필이든, 그 모든 것이 '나'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돕는다. 그리고 그런 여러 글들은 내 속에서 섞여 자신만의 대답을 만든다. 다시말해서 오늘의 '나'에 대한 마음을 느끼고 기록하는 것은 150억 광년 우주의 역사상 단 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에 대한 현상이고 기록이다. 


 이 경이로운 관찰을 언제든 펜과 조금의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조미영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언제든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관찰하다보면 스스로 뿐만 아니라 '나'의 확장으로 만들어진 주변 세계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생기지 않을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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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 - 우리가 서로를 적이라 믿게 만드는 마음의 함정
커트 그레이 지음, 제효영 옮김 / 김영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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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분명 '포식자'의 특성을 가진 종이다. 다만 사자처럼 순수 육식포식자는 아니다. 현대 인류는 먹이사슬 최상위권에 올라 있어 만생명을 고루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 능력만 보면 생물종으로 우리가 처음부터 '포식자'에 위치 했었는지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날카롭지 않은 '이빨'을 가지고 있다. 위협적인 발톱도 없고 느린 속도와 약한 근력도 가지고 있다. 고로 우리가 지구 최상위 포식자로 설계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포식자와 피식자는 진화과정에서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포식자의 대부분은 진화 과정에서 눈이 앞으로 향하게 진화했다. 거리 감각과 입체 시야가 사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피식자의 상당수는 눈이 양옆에 달려 있다. 넓은 시야로 주변의 위협을 빠르게 감지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눈은 분명 '포식자'의 그것을 닮았다. 다만 다른 대부분의 증거가 우리를 '피식자'라고 인도하면서 우리의 위치는 '피식자'와 '포식자' 그 중간 어디쯤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이족보행을 하고 허리를 곧게 세우는 순간부터 우리의 시야는 허리와 목을 이용하여 넓어졌다. 거기에 타인과 협력을 통해 사방을 훑어 볼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면서 우리는 사방을 경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식자'이면서 '포식자'인 종이지 않았을까.

'미국 도덕심리학자', '커트 그레이'는 '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라는 책에서, '우리가 서로를 적이라 믿게 만드는 불안과 분노은 '피식자'로 진화해 온 '인류종'이 가진 '방어기제'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집단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선과 악'이 개념이 아니라 '피식자'의 불안감을 '타인에 대한 위험'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부모와 자녀'

'온라인 커뮤니티'

'종교'

'국가 간 갈등'

현대 우리 사회가 '분노'로 가득찬 사회라고 증명해내는 다양한 갈등들이 사실은 오랜 시절, '포식자'로부터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불안해 했던 조상들의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은 공격성이 짙은 포식자라기보다, 단순히 위협에 민감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위험 신호를 과도하게 담지하도록 진화했다. 내부집단와 외부집단을 나누고 비록 내부집단의 구성원이 반사회적이라 하더라도, 외부집단의 구성원이 조금더 친사회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내부집단의 행동을 모방하고 방어하도록 행동한다.

인간의 대부분은 항상 자신이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유는 '상대'를 위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을 '악'이나 '위협'의 존재로 상정하고 '분노'를 표출한다.

실제로 진보 혹은 보수적 정치 특성을 가진 이들은 상대쪽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보며 '지능이 낮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 비율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크기 다르지 않은데, 통계적 결과를 살펴보면 그들의 지능과 학력 차이가 무의미한 차이라고 한다.


커트 그레이는 인간의 이런 성향을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뇌과학' 관점에서,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관찰한다. 얼핏 '사피엔스'처럼 '역사와 진화'를 이야기하는 듯 하다 현실로 돌아와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한다.

뉴스를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나 얼핏 뉴스를 보게 되면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분노'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신의 불안을 표출하는 그 방식이 '피식자'가 갖던 불안을 증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선과 악',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간종의 작동 매커니즘을 이해하고 나면 조금 더 우리가 갖는 '분노'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살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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