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가족 - 각자의 알고리즘에 갇힌 가족을 다시 연결하는 법
이은경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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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채, 탁구공을 ‘툭’ 던졌더니, 멀리 있는 컵 속으로 ‘쏙’ 들어간다. 아무렇게 던진 농구공이 깔끔하게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컨텐츠 영상이다. 이를 ‘트릭샷’이라고 부른단다. 수천 번 도전 중 성공 장면만 골라 편집하는 것이다. 영상 속 도전자는 너무 쉽게 도전을 해낸다.

현실에서도 성공이 그리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부, 사업, 다이어트... 그러나 현실은 실패와 지루함으로 가득차 있다. 트리샷 뒤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다. 컵에 들어가지 못한 탁구공을 쭈구려앉아 줍고, 빗나간 농구공을 몇 번이나 허리굽혀 가지고 와야한다. ‘30초’짜리 트릭샷 하나를 찍기 위해 도전자는 수 시간, 수 일간 도전을 반복한다.


완성으로 향하는 최적의 재료는 ‘시간’이다. 편집으로 시간을 걷어낸 결과물이 매력적인 이유는 시간의 특성이 지루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밴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인생은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 그것을 걷어내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싶다. 식사를 준비하는 일, 짧은 대화를 주고 받는 일처럼 일상 대부분은 지루한 빈공간이다. 그것을 견뎌내는 힘을 길러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9살짜리 아이를 기르는 입장에서 ‘학습’은 매번 다른 의미다. 단순 교과과목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예절, 대화매너,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 그런 것들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다.

고깃집에서는 고기 냄새가 배고 카페에서는 커피 냄새가 밴다. 무언가에 시간을 함께 하면 그것은 몸에 밴다. ‘배울 학’의 ‘배우다’는 ‘냄새가 배다’의 ‘배다’와 어원을 함께한다. 김치가 익거나 과일이 익는 것처럼 ‘익히다’ 또한 ‘익다’와 어원을 함께한다. 몸에 배고 익히는 것이 학습이다. 배고 익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시간’이라는 재료가 필요하다.


‘이은경 작가’의 ‘도파민 가족’은 시간이라는 재료를 걷어낸 결과가 어떻게 우리를 중독으로 이끄는지를 설명한다. 아이를 기르는 아빠로서 ‘이은경 작가’의 글과 영상은 언제나 도움을 주는 길잡이가 되준다. 오늘날 어느 가족도 피할 수 없는 도파민의 유혹 앞에서, 이 책은 어떻게 우리가 ‘시간’이라는 삶의 재료를 사용해야 하는지 말한다. 지루함을 견디는 힘, 실패를 인정하는 힘, 그 속에서 진짜 배움과 성장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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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나의 우주가 닿을 수 있을까? (개정판)
서윤 / 더스트스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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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거대한 벌레가 되어 깨어났다.

벌레가 되어 깨달았다. 정말 괴물이 된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외면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누구나 한순간에 '타자'가 된다. 타인을 완전한 타인으로 분류하고 서로의 우주가 점차 닫힌다.

서윤 작가의 '나의 우주가 닿을 수 있을까'는 잠자처럼 어느날 갑자기 완전한 타인으로 깨어나는 경험을 통해 소외와 낯섦을 이야기 한다.

언젠가 비슷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한 사람이 바닥에 놓여진 숫자 9를 보며 '구'라고 말한다.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그 숫자를 바라보며 '육'이라고 말한다.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완전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타인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나에게 보이는 '숫자 구'는 변하지 않는 진실이고 상대가 착각을 하고 있다고 강하게 믿는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는 우리네 사고 방식을 비판하는 짧은 그림이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는 사람과 서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같은 세상을 본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고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가 무너질세라. 고개를 고정하고 꿈쩍하지 않는다. 그렇게 두 개로 나눠진 세계는 좀처럼 연결될 생각이 없다.

잠자와 같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섦으로 태어난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의 온도를 체감한다. 그 세계가 나를 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진짜 자신'을 인식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잠자'는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를 괴물로 만든 것은, 벌레가 된 자신의 몸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며 문을 닫아버린 가족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수필은 '먼 약국 이야기'로 먼저 시작한다.

'내가 그때 용기 있는 말과 행동을 했다면 상대방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깨너 놓는다.

작가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엄마의 약국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동네에는 입구에서 가까운 약국과 먼 약국이 있었는데, 가까운 약국의 주인은 불친절한 아저씨였고 먼 약국의 주인은 친절 했단다.

어느 날 먼 약국의 젊은 주인이 '왜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까지 왔는지 묻는 질문'에 작가는 '친절해서요'라고 답하지 못했다. 약국 주인은 '구순구개열' 즉 언청이었다. 어쩌면 어린 초등학생이 멀리까지 온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했던 주인은 어쩌면 자신이 가진 장애를 어렴풋 떠올렸을 지 모르겠다.

그때, '친절해서요'라고 답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그런 경험 꽤 잦은 편이다. '뭐라고 꼭 말해줘야지'하고 삼키고 몇 번을 시뮬레이션해보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말히자 못하는 경험 말이다.

애석하게도 몇번의 시뮬레이션은 스스로를 착각하게 만든다. 어쩌먼 그러한 말을 꼭 한 것처럼.

그리고 자신과 상대의 관계에 대한 생각치 못한 결과를 맞이 했을 때, 서로가 완전히 다른 우주를 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대부분 사람은 '착각'과 '망각'을 통해 스스로의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타인'의 잘못에는 '상처'로 받아들여 오래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가끔 부모님과의 추억을 떠올릴 때가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다' 싶은 부모님의 모습이 그때는 상처로 다가 온 적이 있다.

분명 나의 기억 속에서는 무서운 어머니께서 혼내시는 기억이 있는데, 그 앞의 상황에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이런 기억이 차곡 차곡 쌓이고 왜곡되면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멀어지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잘해준 기억은 하나도 남지 않는데, 못해준 기억만 남는 그런 연애, 관계, 우정도 마찬가지다. 뒤늦게 후회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겠다.

작가의 이야기에 '하지마!'라는 외침에 반하는 '해도돼!'라는 외침에 관한 글도 있다. 생각해보면 '도대체 왜 그러니!'하고 말을 뱉어놓고 정말 왜 그랬는지를 떠올리는 여유가 스스로에게 없던 적도 있다.

하지마!,의 반대인 '해도돼!'는 그저 반대의 말이지만 그 말을 강하게 뱉는 것은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사람은 각자 자신이 읽고 싶은대로, 보고 싶은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서 글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항상 아이가 잠들고나면 후회할 만한 일을 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여러 관계에서 짓고 있는다고 생각하니 어쩌면 온 인류가 함께 고민해도 역사적으로 풀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관한 방법론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집 아이들은 저녁 8시가 되면 자도록 이야기 한다. 실제로 8시에 자는 적은 많지 않다. 아이가 커가면서 더욱 그렇다. 초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친구와 이야기하며 자신의 루틴의 남다르다는 사실도 깨닫는 듯하다.

어제 저녁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닫고 '그냥 좀 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가 잠에 들어야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읽어가며 내 앞에 놓여진 9를 보고 6이라고 읽는 아이를 나무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이 9던, 6이던 사실 뭐가 중요하겠나...

그것이 6으로도 보일 수 있겠구나, 하는 조그만 틈만 열어둬도 사실 우주가 완전히 닫혀 미세하게 남아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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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INFP 외계인의 인간 행복 보고서 (개정판)
서윤 / 더스트스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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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는 네 글자로 성향을 분류하는데 INFP는 세상을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현실보다 감정을 좇는 성향이다. 서윤 작가는 그런 INFP의 감성을 외계인의 시선과 결합하여 '인간의 행복'을 관찰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비인'이다. '비인'은 외계인이다. 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비둘기의 모습으로 지구에 온다. 그가 갖고 있는 임무는 단 하나, 인간의 행복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

다만 인간의 행복은 논리로 정의 되지 않는다. 행복은 수치나 지표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며 관찰하려는 순간 이미 흩어지는 존재다. 마치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 처럼 관찰하는 순간 그 성향이 파동에서 입자로 변해 버리는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다.

비인은 점차 인간의 감정에 동화된다. 그 과정에서 '행복을 분석하는 자'에서 '행복을 느끼는 자'로 변해간다.


'행복'은 소유와 물질의 개념으로 정의 할 수 있을까. 더 깊게 나아가, '정의'를 할 수 있는가.

대개 사람들은 '행복'을 '성과', '소유'와 같이 '증명'해 낼 수 있는 무언가로 바꾸고자 한다. 행복을 증명해내기 위해 SNS에 사진을 올리고 감정과 감각을 '문자'로 표현하고자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행복'이란 '인증'과 '증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식'의 개념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을 증명하고 인증할 수 없는 그런 굉장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양자역학'에는 '관찰자 효과'가 있다. 관찰자 효과란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대상의 상태를 바꾼다는 개념이다. '전자'는 누군가가 보기 전까지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관찰이 이루어지는 순간 '입자'로 고정된다. 행복도 이와 같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적으로 관찰하려는 순간, 그 본래의 자유로운 파동성이 사라지고 측정 가능한 대상으로 변한다. 그 결과 행복은 더이상 '감정'이 아니라 '결과'가 되어 버린다. '행복'이 가지던 '감정'이라는 고유한 정체성이 상실된 '행복'이라는 '증거'만 남는 것이다.

비인이 인간의 행복을 관찰할수록 그가 본것은 '행복 자체'가 아니라 '행복을 포착하려는 인간의 시선'이었음을 느낀다. 사람들은 행복을 붙잡기 위해 스스로 분석하고 비교하고 증명하고자 한다. 다만 그 행위 자체가 행복의 흐름을 멈추게 한다.


아무 짧은 순간이라도 파동은 관찰자의 '관찰'하려는 행위만으로 입자로 완전히 성격을 바꿔 버린다. 이미 사라진 파동은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마치 파도를 연구하기 위해서 물결을 네모난 상자 안에 가둬 현미경을 들여다 보는 일과 같다.

행복이란 잡으려는 순간 형태를 잃는다. 출렁거리는 파도는 그 자체로 완전하며 그것을 포찰하려는 순간 형태를 완전하게 잃어 버린다. 비인은 결국 그 사실을 깨닫는다. 행복은 분석할 수도 없고, 보고서로 완결할 수도 없는 그런 영역이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관찰할 때는 사라지고 오롯하게 그 존재 자체가 되어 느낄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측정된 상태가 아니라 진행하는 과정이다.

비인의 보고서는 결국 미완이다.

이유는 단 하나.

행복이란 보고서로 기록될 수 없는 생의 파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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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러너 - 변화에 강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한상만 지음 / 청림출판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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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민첩성이라는 용어가 있다. 교육이나 인사, 경영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다뤄지는 용어다.

이는 새로운 상황이나 경험에서 빠르게 배우고, 그 배움을 새로운 상황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저 빠르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배움을 유연하게 새로운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상만'작가는 이런 이들을 '패스트러너'라고 불렀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새로운 일을 두려워 하지 않고 실패를 '경험'으로 재구성한다. 주변의 피드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한 점검을 자주한다는 특징도 있다. 또한 익숙한 방식보다 새로운 접근법을 선호한다.

국내 연구자들은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학습민첩성' 연구 67개를 모아 분석했는데 개중 62개는 직장인 대상 연구였고, 대기업, 중소기업, 공공 기관에서 제조, 영업, 경영 지원, 연구 개발, 교육, 서비스 등에서 근무하는 2만 2,261명의 참여했다.

연구자들은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학습민첩성이 높은 사람이 10개의 영역에서도 뛰어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첫째, 긍정 심리 자본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낙관적인 태도로 도전을 지속하는 힘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나는 할 수 있다'하는 믿음을 기본 바탕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잡 크래프팅

주어진 일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점과 흥미에 맞게 일의 방식과 범위를 재구성하는 능력이다.

셋째, 직원 열의

일에 몰입하고 활력을 느끼며, 의미를 찾는 상태다. 학습민첩성이 높을 수록 이 '에너지 지속력'은 강해진다.

넷째, 목표 지향성

성과보다 성장을 중요시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우기 위해 도전하는 것을 말하며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힘이다.

다섯째, 무형식 학습

공식 교육이 아니라 현장경험이나 관찰,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학습하는 태도다. 즉 일하면서 배우는 능력을 말한다.

여섯째, 지식 공유

배운 것을 감추지 않고 동료와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태도다. 공유를 통해 학습이 구조화되고, 조직의 집단 지성을 강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일곱째, 조직시민 행동

자신의 업무 외에도 조직 전체으 ㅣ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즉 동료를 돕거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자세를 말한다.

여덟째, 리더와 직원 관계

상하 관계를 수직적 지시로만 보지 않고 신뢰와 존중을 기반으로 상호 성장하는 관계로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아홉째, 혁신 행동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실행하며, 기존 방식을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실천적 창의성을 말한다.

열째, 직무 성과

이 모든 요인의 결과로 나타나는 실질적 성취.

즉, 실무적 능력을 말한다.


빠르게 배우는 학습민첩성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능력을 길러내는 것이 틀림이 없다. 스스로 그러한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학습민첩성'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기르는 방법은 역시나 훈련과 습관으로 가능하다.

첫째,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노출하기.

둘째, 실패 후, '복기노트'를 작성하기.

셋째, 다른 관점으로 문제를 재해석하기(타인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넷째, 피드백 루프 만들어 주기적으로 스스로 점검하기

다섯째,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부나 일을 진행함으로써, 낯선 상황을 일부러 만들기.

결국 학습 민첩성은 탄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능력이다. 변화가 빠른 시대일수록, 오래 버티는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빨리 배우는 사람'이다. 매일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실패를 복기하여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습관을 반복한다면 누구든 이러한 '학습민첩성'을 길러낼 수 있다.

다시말해서 '학습 민첩성'이란 지식보다는 '태도'에 가깝다. 낯선 것을 피하지 않고 불확실함 속에서 방향을 찾는 태도을 지닌다면 어느 환경에서도 성장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AI가 빠르게 우리의 능력을 대체하는 시대에 어쩌면 이러한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고 대처하는 이들이 남고 다른 이들이 도태하지 않을까. 세계가 빠르게 온라인화 되어질 때, 오프라인 비디오 대여 서비스를 접고,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했던 '넷플릭스'와 같이 시대에 대한 빠른 적응과 판단은 지금 이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능력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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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0-27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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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품위 -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삶의 태도
최서영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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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경우에는 내면적 성숙과 외면적 성숙의 발달 단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데 제3자로써 굉장히 당혹스럽다. 가령 외형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겉으로 보여지는 무게가 내면의 무게를 대변할 것 같은 착시를 비웃듯 철없음에 놀라게 되는 경우가 있다. 


 비치는 어른의 어린 철학에, 더 깊은 서사를 찾아 본 적도 있다. 그러다 결국 그것이 외면이 주는 착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이듦의 외형은 신뢰를 준다. 그것이 어쩌면 신이 주는 일종의 축복일지 모른다. 이성이 외모에 끌리듯 일정 수준까지 성숙해 보이는 외형은 상당한 이점이 된다. 그 성숙한 외형에 이끌려 속는 경우가 더러 있다.


 외형이 비추는 성장의 속도에 내면은 쫒아가고 있는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나의 삶은 재미없다고 볼 수 있다.


술, 담배, 도박, 게임.. 


 이런 류에 그닥 흥미가 없다. 조용한 걸 좋아해 사람을 만나는 일도 적다. 사람 사이의 갈등도 없다. 이성 문제도 단조로운 편이다. 성직자를 하면 참 어울리겠다는 말도 듣는다. 


 그것이 어떤 나이에는 '컴플렉스'다.


어린 시절, 가벼운 욕도 하지 않고 살았다. 남자들 사이에서 가벼운 욕 정도는 하고 살아야 그 무리에서 무시도 당하지 않는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데, 그 핸디캡을 갖고 청소년기를 지나온 것이 대견할 정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올바름에 아무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살다보니 그저 그렇게 됐다랄까.


 쉽게 말해, 여차 하다보니 타이밍을 놓쳤고, 타이밍을 놓쳐 지내다보니 주변에 그런 사람으로 비춰지곤 했다.


 20대 초반, 친구들과 술집을 다닐 수 있을 즈음, '군대'와 '유학'을 선택했다. 군대에서는 '담배'를 배우지 않았고 '유학'하면서는 '담배'가 비싸서 피우지 못했다.


 '유학' 후에는 '바'와 '클럽'을 동시 운영하는 곳에서 '글라시에'라는 파트타임을 했다. '글라시에'는 쉽게 말해 유리잔을 세척기에 돌리고 마른 헝겁으로 잔을 닦아내는 직업이다. 클럽 내의 빈병을 수거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거나 빈 술을 채워 놓는 직업이다. 놀기 좋을 그 환경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한달에 맥주 한 캔도 마시지 않았다.

 클럽에서 일을 하다보면 정리를 할 때 즈음, 눈 풀린 백인 여성들이 다가 올 때가 종종 있다. 실컷 놀다가 바텐더나 기타 직원들과 연락처를 주고 받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무얼하냐 묻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일이 끝나면 아파트 청소하러 가야 돼'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마다 '혹시 게이야?'하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닥 원칙도, 철학도 없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고리타분하게 삶을 살았다. 그 까닭에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당당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일과를 마치면 책이나 읽고 영화를 보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모범적인 삶을 살던 인간도 아니었다. 그냥 밍숭맹숭하고 시시하고 선택을 하고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밍숭밍숭 재미없음이 무능처럼 보여진다.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잘 노는 친구'는 부러움의 대상인 경우가 많았다. '환경'을 잘 어울리지 못하면 '루저'처럼 느껴지곤 했다. 빨리 이 시기가 지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은 드디어 이루어졌다. 시간은 나를 태우고 마흔에 내려 놓았다. 


 나는 그대로인데 제법 성향에 맞는 나이에 도달한 것 같다. 20대라면 '심심한 놈'처럼 보여질 성향이 40대에 내려 놓으니 제법 그럴싸 한 옷을 챙겨 입은 느낌이다.


 나이가 들어가다보니, 영혼을 갈아섞일 만큼 깊이 있는 우정이라던지, 관계가 중요하진 않다. 대부분의 관계는 가족 단위로 끊어지고, 나머지 관계는 표면적이고 격식적으로 바뀐다.


 아이 '참관 수업'에 다녀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업을 지켜보는 부모 대부분은 나의 또래이다. 그들이 점잔빼는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00 아버님!', '안녕하세요, 00 어머님!' 하신다.


 그들과 비슷한 시기를 겪어 1인으로써 '점잖을 뺄 만한 아이'는 한 반에 '한 두명'도 되지 않는다. 상당수가 비속어를 일상처럼 사용하고 부모님의 속을 적당히 썩이며 자랐다. 나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러다 '어른'이라는 옷을 입으면 꽤 성숙한 외형을 갖추고 격식을 차리게 된다. 어리숙한 어떤 모습을 숨기고 어른인 척 인사하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얼마만큼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가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 지금의 나이에서 나는 앞과 뒤가 비슷해졌다. 어떤 이들은 겉으로 그러면서 속으로 고달픈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가짜 품위 속에서 진짜의 특징이라면 그 나이에 얼마나 편안한가다.


 튀어 나오는 비속어를 겨우 참아낸다거나 모자란 지식을 숨기려 노력을 하고 있다거나... 대부분의 어른은 사실 내면에 있는 아이를 숨겨, 앞으로는 성숙하고 뒤로는 어리숙한 단계로 나아간다.


 일부는 직업에 적당한 '직업윤리나 책임'을 가지고 있고, 괜찮은 경제관념을 통해 스스로의 소비와 수입을 관리한다.

 예전 잘 알고 지내는 이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중년 남성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굉장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에게 적당한 동경을 갖고 있다가 우연히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느껴진 인상은 처참했다. 험담을 너무 쉽게 한다거나, 약속을 너무 쉽게 잊어 버린다거나, 중고등학생들 입에서 나올 법한 저급한 비속어가 너무 가볍게 나왔다.


 '저 나이가 됐을 때, 나도 저렇게 보이려나...'

그런 생각이 막 머리를 스치고 갔다. 요즘 '영포티'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된단다. '영포티'는 젊은이를 따라하는 '중년'을 이야기 한다. 이것이 40대를 놀릴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던데.. 가만보면 그것은 40대의 문제는 아니다. 40대가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놀리는 동안, 과연 그들은 10대, 20대 같은지 묻고 싶다.

 열심히 학업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자신의 스펙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그도 되지 않으며 타인에게 묻은 겨를 탓하는가.


 군군신신부부자자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각자 자신에게 맞는 '롤'을 수행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10대는 10대처럼, 20대는 20대처럼, 30대는 30대처럼...

 모든 인간은 점차 '어른'이 되어가기 때문에 어떤 나이에 상관없이 나아가는 방향은 같다. 결국 어른이 가져야 할 품위는 그 나이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까지 천천히 쌓아가는 듯하다.

 결국 돌고 돌아 2000년 전 공자의 가르침이 맞을수도 있겠다 생각이 든다. 어른은 어른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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