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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15기 신간평가단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 5

 

1.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는 결국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였다. 인문사회분야의 서적이지만, 어떻게 본다면 소설을 쓰는 여정을 흥미진진하게 모험담으로 풀어낸 것처럼 읽혔다. 결국 용사는 모험의 끝에 다다르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의 영감을 불어넣어주며 새로운 소설들의 가지를 자라게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롤랑 바르트.

 

 

2.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

 ->마사 누스바움의 충격적인 최신작, 굵기도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서술이... 여성 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될, 혐오와 수치심에 대한 감정들의 구분과 그 감정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써내려간 글.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3.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신선하면서도 절망적이고, 유쾌하면서도 기분이 찜찜했던 책의 제목과 표지.

 우리는 일본의 '니트족'이나 오타쿠, 삼포세대를 자신과 분리해오려고 애썼지만 어떻게 본다면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거울'이 아닐까.

 

4. 불안들 / 레나타 살레츨

->두려움과 불안에 대해 구분하고, 불안을 부정적으로 여기면서 '치료 대상'으로 삼는 사회에 대한 '의심'들과, 인간이 윤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의심으로 인한 불안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군인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5. 음식의 언어 / 댄 주레프스키

->단순한 맛집 기행이나 음식의 종류들을 거들먹거리면서 늘어놓는 대신 음식이 어떻게 언어와 연계되어 왔으며, 사회의 변화와 계급구조상을 어떻게 반영해왔는지를 말해준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끝이 '디저트'라는 점에도 주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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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을 넘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평등을 넘어 -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앤서니 앳킨슨 지음, 장경덕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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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이라는 난제

-앤서니 B.앳킨슨의 '불평등을 넘어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비전문가의 비전

 

  앳킨슨은 책의 첫머리부터 포를 내보내되 문을 최대한 좁힌다. ‘이 책은 불평등의 크기를 줄이는 방식에 관해다룬다고 말하면서, 완벽한 평등보다는 지금의 불평등 수준이 지나치다는 믿음에 따라 현재 수준 아래로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책의 제목에도 평등’, ‘실현은 나오지 않는다.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겨질 만한 건 정의라는 단어인데, 왜 이 단어가 이상적인 단어가 되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아하다. 불평등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고 정의는 헛된 희망처럼 여겨진다. 불평등은 이미 대기가 되어버렸다.

  성별과 세대간, 글로벌 불평등에 대한 분석들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다시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재확인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지겹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을 샅샅이 들춰 보여준다. 처참한 현실을 메스로 해부해 드러내 놓고 얼렁뚱땅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커다랗고 얇은 밴드로 붙여 버리는 식의 해답들이 너무 많았다면, 앳킨슨은 계속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다.

  그 이유는 그가 을 제시하는 데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이미 독자가 이 책의 반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전제한다. 그의 독자들은 가구 조사를 귀찮다고 생각하며 무응답을 하길 원하는 사람들이며, 아무리 사회 개혁에 대해 욕망을 느끼거나 분개한다손 치더라도 소위 전문가들의 발언과 지적에 의해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났어야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시경제학의 함정은 바로 그 점에서 발생한다. 거시경제학은 미시경제학이 천착하는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미시경제학의 개인이 잘 살게 되면 그만이 아니냐고 말한다면, 우리는 러브 하우스라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오르고 사람들이 해비타트를 만드는 등 거주 공간의 보편화와 개선에 관심을 두게 되었지만 왜 여전히 빈곤주택과 날림공사가 만면한지 되물어야 하고, 왜 셀프 디자인이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 자문해야 한다. 모든 문제들은 이제 개인밖에 해결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아주 빈곤하지 않은 이상 구제받을 수 없다.’ 아니면 게으름뱅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거시경제학은 보편을 추구한다. 보편의 개선을 위해 최대한 많은 이들을 수치화하고 그래프로 만들어 효율적인 행동을 촉구한다. 하지만 그들의 취지와 다르게 그래프는 어떤 빈곤을 외면하고, 잘 정리된 통계와 결과를 내보내면서 눈을 속인다.’ 통계는 반신반의할 결과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소위 전문가들은 이 거시경제학에 따라 큰 그림을 보라고 말한다. 전문가들을 신처럼 추앙한다는 것은 전문가들이 보는 영역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또다른 징표이기도 하다. 어떻게 본다면 지젝이 방한했을 당시 질문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질문한 분이 지젝을 진정으로 당황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황은 물론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왜 물을 흐리냐는 말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정말 에 관련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실재와 분열, 니체와 라캉에 매몰되어 있었다. 지젝은 자신이 아무 해답도 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최대한 답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그의 태도에 대해 사람들은 당황했고’ ‘경우가 없었다라고 말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던 것이다. 비전문가들은 가끔씩 전문가들의 시선에 매몰되어 무관심해지고, 비전문가로서의 생활과 전문가의 생활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어쩌면 그들 자신에게 비전vision’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비전을 찾는 건 너무나도 부담스럽고 무거운 사명이기 때문에 외면하고 전문가들에게 그 짐을 맡기는 것이다.

 

 

 

파이에서 푸딩으로

 

  아래의 복지를 균등화하고 넓힌다는 것은 그만한 복지 예산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국의 경우 기존의 예산에서 살림살이를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젊은이에게 줄 복지를 노인층에게 주고, 노인층에게 줄 복지를 젊은이에게 준다. 아이와 공놀이를 하듯 던졌다가 다시 던져보라고 손짓을 한다. 아이는 그 공을 다시 받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던지지만, 공이 돌아오지 않으면 공을 던질 때 머뭇거리게 된다.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아이가 너무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고 비판한다. 아이에게 공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는 분명히 또 다른 공을 얻거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아이가 공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면서도. 이로 인해 세대 갈등이 조장되고 성별간 갈등이 일어난다. 한 아파트에서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집값이 떨어졌다고 신고했다는 사례들이 속출했다는 걸 들어본다면, 그게 층간 소음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라는 존재가 이미 갈등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복지에 대한 파이는 국가의 총 예산 중에 얼마 되지 않으며, 이 파이를 더 나눠달라고 했을 경우, 파이를 더 가진 사람들은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의 파이가 줄어드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당연하다고여겨진다. 지니계수가 50 이상을 맴도는 것은 사실 일하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경제노동의 정의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일의 가치를 정하는 순간, 계급 제도가 생기며 결국 사회는 봉건 시대-피의 힘 대신 자본의 힘이 대두하는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게 된다. 아도르노의 말마따나 허울 좋은 계몽일 뿐이며, 진정한 계몽은 결국 모든 불평등과 비극들을 가장 잘 합리화하는 방안을 고안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파이가 말라빠지고 속에 든 과일이 거의 다 썩어간다면 어떨까. 파이의 질은 점차 나빠지고 있다. 파이를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할 돈을 쌓아놓기 위해서 사람들은 애쓴다. 하지만 파이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돈에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쌓아놓은 물건에 귀신이 깃든다는 옛 속담은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말해준다.

  앳킨슨은 질 떨어지는 파이를 계속 쌓아놓는 것보다 사실 맛있는 푸딩을 먹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는 더 맛있는 푸딩이 더 많은 브랜디를 넣어 만든 것이며, 푸딩들을 각기 비교할 수 있지만 이는 더 나은 푸딩을 만들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얻는 자본이 맛있는 푸딩이 될 수 있다면, 그 푸딩을 더 많이 먹거나 독차지하는 대신 좀 더 나은 푸딩을 만들기 위해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에게 의견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건 하나의 사회가 발전하는 양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새 피케티 새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출간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해결책이 나타났으며, ‘피케티 신드롬이라고 명명하며 그를 자본주의의 구세주인 것마냥 치켜세웠다. 이에 반해 피케티의 허상을 지적하고 그의 논의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케티는 틀릴 수 있다. 하지만 피케티도 맞을 수는 있다.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그 또한 마르크스를 읽은 학자들 중 한 명이다. 그에 대한 맹신을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의 논의에 대해 무작정 틀리다고 달려드는 건 텅 빈 비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국제적인 세금 부과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앳킨슨 또한 그 의견을 같이 한다. 사람들이 가장 즐겨 보는 수치는 바로 한국의 부자 10’, ‘세계의 부자 10이 버는 소득이다. 그들의 소득은 이룰 수 없지만 늘 선망하는 목표가 되어버렸다.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고 1면에 실릴 만큼. 반대로 사람들이 보지 않거나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 건 바로 최저 소득 금액이다. 그들은 그 금액이 가깝든 가깝지 않든 현실로 여기는 걸 거부한다.’ 그들의 목표가 아닌, 실패의 결과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선택이 아닌 패배의 결과가 되어버렸으며, ‘잘 사는 삶의 규격이 강요된다. 인간은 같이 살기 위해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결론은 그들과 나를 분리하고 의 생존을 주장하는, 외로운 사회로 이끌고 나간 것이다.

  이에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듯 내세우는 것이 지구촌 사회. 피케티와 앳킨슨은 그러한 지구촌주장과 유토피아론에 대해 역공한다. 진정한 지구촌 사회를 꿈꾼다면, 그러한 지구촌으로서의 전체가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조세 피난처를 찾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손, 이제 모두가 잡아채야 한다는 점을. 그러한 안정 속에서 진정한 지구촌 사회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비록 이게 데이터와 추측들로 가득 찬 책일지라도, 마냥 이상적이지는 않다. 이상적이라고 비난해온 여태껏, 우리는 수많은 방법들을 날려버리고, 멍하니 날아가는 그 들을 바라보고만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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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 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
김동욱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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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기와가 만들어지기까지

-김동욱의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을 읽고-

 

 

 

 

 

 

바다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한국과 중국, 일본을 불문하고 모든 나라가 원조에 목을 맨다. 어떤 자랑거리가 나오면 그 자랑거리의 원조에 대한 논쟁이 펼쳐진다. 영향을 받았다는 것, 어떤 것과 유사하다는 것 자체에 기분이 상해 갈등까지 빚기 일쑤다. 다뉴브 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다뉴브 강줄기를 끼고 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모두 입을 모아 분쟁을 벌였지만 결국 다뉴브 강이 흘러가고 흘러나오는 건 흑해였다. 늪지와 폐선이 떠다니는 흑해.

  지금은 사소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물들의 시작은 사소하고 당연한 게 아니었다. 사물들을 발명하고 새롭게 화반을 만들고 지붕을 솟아오르게 만든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이들에 맞서 그 유용성을 입증했다. 사물들은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오래 살아남아서 그들이 왜 태어났고 태어나서 무엇을 했는지 계속 증명한다. 하지만 남는 건 사물 뿐이며, 발명가는 없다. 이미 죽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시작에 대한 열망을 갖는가? 시작은 어떤 우월감을 부여하는가? 회의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결말이 당연한데도, 왜 시작을 알고자 하는가? 이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물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 사물을 더 자세하게 바라보게 하는 마법의 작동 방식이다. 우리는 바다를 그냥 바라볼 수 있다. 그 순간 바다는 물이 가득 찬 거대한 그릇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다가 어디에서 왔는지 의문을 갖는 순간부터 바다는 그릇에 담긴 물 이상의 것이 된다. 우리는 역으로 바다에서, 물건에서 우리의 짧은 생을 본다. 그 짧은 생은 고요한 수면에 이는 아름다운 파동을 그려낸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래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파동을.

  중국의 경우 집 또한 결국 오래 가지 않는다는 생각 하에 즐겁고 안락한 장소를 만들고자 했다. 그들에게 중점이 되는 건 인간이었다. 일본은 가파르고 험한 자연에 맞서 세밀하고 안전한 내부를 만들고자 했다. 그들에게는 이상이 중요했다. 한국은 주변의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주변의 아름다운 산세에 떨어진 검은 묵이 되지 않는 것을 추구했다. 우리에게는 자연이 중요했던 것이다. 각자에게 중요한 건 다르고, 때문에 설령 누군가가 원조라 할지라도 그 원조의 의미가 그대로 승계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모두들 손을 부여잡고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고 있는 것이며, 물방울의 파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든 비가 내리는 순간 수많은 파동들이 수면 위에 아름답게 깨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모코시와 부계, 그리고 온돌

 

  건축물들은 각 나라가 추구하는 정신 외에도 그 나라의 사회구조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과거 중국과 한반도, 일본에서는 높은 기둥을 이용해 커다랗고 멋진 건물을 만들었다. 그 건물은 겉보기에는 2층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들어가 보면 천장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었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은 없었다. 텅빈 2층인 셈이다. 특히 일본의 모코시와 중국의 부계는 끝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서 고깔 모양이 된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 천황과 황제라는 존재가 모든 국민들의 위에 있었다. 그들은 반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 중국의 경우 위촉오의 갈등 등 여러 차례 황제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이 되어 멋진 색으로 채색되곤 했다. 일본의 경우 천황은 신이 내려준 인간이며 이들의 권력 다툼은 거의 승계 식으로 끝나곤 했다. 까마득한 지붕 끝은 점점 갈수록 하나의 점이 되고, 모든 이들의 위에 선 누군가를 암시하게 한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구조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쓴 이 책에서, 묘하게 드러나는 차이를 본다. 그 차이는 바로 온돌이다.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한국의 온돌은 천민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썼다. 물론 한국의 임금 또한 하늘이 내린 존재라고 하지만, 점의 결과에 휘둘리거나 어떤 갈등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그리스의 석상과 같은 무자비한 신이 로마에서 인간적인 신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어쩌면 세 나라의 건축적 공통점을 발견할수록, 그 차이는 오히려 더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차이를 더 찾아내려고 하지만 그 끝에서 발견하는 건 지울 수 없는 유사한 토대다.

 

 

공포들

 

  공포의 경우 일종의 기둥받침이라고 볼 수 있다. 기둥받침은 모양부터 색까지 다양하다. 중요한 건 지붕과 기둥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점차 건축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면서 창틀까지도 중요한 구성 요건이 되었다. 미니멀리즘 등 서양 건축에서는 유용성에 입각한 건물들, 컨테이너 박스 같은 건물들이 대두되면서 그 밋밋함으로 인해 건축의 정도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건물들이 결국 하나의 그림이고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 작품을 옳고 그름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일본의 경우 지진에 대비해 돌이나 나무로 만든 무거운 기와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가장 가벼운 히노키 소나무를 이용해 지붕을 만들었다. 한반도와 중국에서는 나무로 건물을 만들었다. 서양처럼 튼튼하게 돌로 만들지 않았냐고 묻는 질문은 참 우스운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나 중국, 일본에도 석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목조 건축을 선호한 것은 점점 뒤틀리고 부서져 가는 나무 기둥의 속에서 아름다운 나이테 무늬를 봤기 때문이다. 나무는 영원한 소재가 아니며, 그건 손이 닿을수록 점점 나이가 든다. 인간보다 조금 더 느리거나 같게 나이가 들고 닳아가면서 색이 변한다. 고색창연하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가령 서정주의 먹오디빛 툇마루와 같이, 돌마루라면 그런 먹오딧빛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

  아주 소소한 선택에도 시간이 깃들여 있고, 공포와 두공, 구미모노를 짜올리는 주두와 첨차, 소로는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서로를 맡잡고 깍지를 껸 손이다. 우리를 지탱해오고, 하늘을 떠받쳐 온 그 손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그 손들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다 칠해져 온 곳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때,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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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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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정적인 윤리의 감각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을 읽고

 

 

 

 

 

 

  우리는 샤를리이면서도 샤를 리가 아니다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대상이 분명히 있고, 그 대상을 해치우면 두려움의 감정도 해소된다. 반면 불안은 불안해하는 대상을 규정할 수 없으며, 그 대상으로 추정되는 이를 해치운다 하더라도 불안의 씨앗은 또다시 자라난다. 신이 사라진 시대의 현대인은 모두 신경증자다. 그들에게 신은 이제 사회 시스템이고, 타자이고, 직장이다.

  인플레이션 우주론을 반박하며 미세조정법칙을 논하는 기독교과학론자들은 완벽한 공식을 꿈꾼다. 이성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들 또한 결국 이들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공식의 환상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샤를리 엡도가 테러를 당한 이후 사람들은 나는 샤를리 엡도라고 자처하며 샤를리 엡도를 모든 압력에 거부하고 억울하게 탄압당한 예수의 상으로 만들었고, 스스로 십자군이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점점 의심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테러의 주범들 중 백인이 나타난 것이다. 피부색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인종차별반대주의자들은 경악한다. IS의 대두는 그런 이들에게 사실 구원과 같다. 그들은 이슬람을 악의 종교로 만들고 그 종교에 세뇌된 특정 백인들이 테러를 저지른다고 믿는다. 평범한 백인은 바이러스에 당해 악인이 되는 것이고, 그 악인들의 바이러스에 자신들도 당할 수 있다는 우려 하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 ‘샤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샤를리를 십자가에 매달고 싶어하는 눈치이며, ‘샤를 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샤를리 엡도를 잘못 이상화시켜 자신의 결여를 샤를리 엡도로 틀어막으려는 움직임에 저항한다.

  ‘불안은 결여를 틀어막는 마개가 과연 결여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 품는 의문이다. 현대사회는 그 불안을 불온한 것으로 치부하고,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불안을 두려움으로 바꾼다. 가상의 적을 설정해 그 적을 불안의 원인으로 지정하고, 그 적을 척살하면서 불안을 두려움으로 바꾸어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불안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온전하게충족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뷔리당의 당나귀

 

  예수는 자신 외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사람들은 무슨 물건이든 손에 쥐고 만질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했다. 촉감을 통해서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 물건으로 신을 입증할 수 있으며, 신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과 매한가지라고 믿은 것이다. 근대 사회의 신은 새로운 물건’, 신상품이었다. 쇼퍼 홀릭의 제시카가 신상품과 한정품에 자신의 모든 영혼을 다 쏟아부을 정도로 사랑했듯이, 새로운 것은 곧 지금의 결여를 채워줄 효과적인 발명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옛것, 아날로그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들은 과거 토요일에 들었던 가요를 듣고 그 때를 행복하고 즐거운 시절로 기억하며, 심지어 현재를 그 때와 비슷하게 만들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힐링은 이제 새로움이 아니라 오래됨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이제 발명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유행은 돌고 돈다. 지금의 신상품은 언젠가는 낡은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낡은 것을 쓰면서 옛날의 자신과 작별하고, 좀 더 낫고 특별한 주체를 가꾸려고 한다. 그러나 새로움을 추종하는 것이나 오래됨을 추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뷔리당의 당나귀는 뷔리당티스, 어느 당근을 베어먹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결국 어떤 당근도 먹지 못하는 당나귀를 가리킨다. 신이 있던 사회에서 모든 우연한 사고는 신의 일이었고, 사람들은 신을 저주하거나 신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남탓이라는 것은 편리한 수단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쉽게 남탓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구조의 탓을 하는 건 또다시 혁명을 불러올 수 있으며, 혁명은 시스템의 총체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 된다.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전리품이라는 쓰레기

 

  신이 사라진 사회는 수직이 아닌 수평의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 수평은 평화로운 수평이 아니라, 파리끈끈이와 같은 수평이다. 어느 누구도 더 위로 날아오를 수 없으며, 조금이라도 멀어졌다 싶어도 힘이 빠지면 끈끈이에 의해 다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그 수평 위에 들러붙은 파리들은 서로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날갯짓을 하고 더듬이로 상대방을 밀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신의 판단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매달리게 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쓴다. ‘헬리콥터 맘들은 자식의 성공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내리는 헌신적인 어머니성공한 자식에 목을 맨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으로 들어가 독야청정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우리는 도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사회의 어떤 풍경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정신병자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된다. 정신병자들은 을 믿으며, 신에게 모든 나쁜 일을 떠넘긴다. 사실상 그들 자신이 의 판결을 받는다기보다는 을 판결하고 처벌하는 셈이다.

  결여된 것을 자신이 믿는 결여로 채우기 위해 전리품을 약탈하는 것. 아도르노는 신이 사라진 사회는 계몽된 척 하면서 점점 우매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전리품은 결국 결여를 채우지 못한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이상, 전리품은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트로이아가 멸망하고 카산드라가 전리품이 되었을 때, 아가멤논이 그녀에게 전리품으로서 원했던 역할은 그의 수청을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가멤논의 예상과 다른 예언을 하며, 아가멤논의 아내에 의해 죽는다. 이피게네이아가 죽고 카산드라가 왔지만, 카산드라는 전쟁의 결여를 채워주지 못했다. 이러한 결여를 부재하는 대타자인 아버지의 상실로, 외상을 자초하며 극복하려 해도 이는 성공하지 못하거나 동화가 되어버린다.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언가가 확실하다고 분명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잘못 믿었다라는 걸 확신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완고하며’, 어떤 정신이상이라는 변명으로도 그들을 속죄시킬 수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며, 어떤 잘못된 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눈이 확신으로 반짝거리는사람은 이제 철저한 자신이라는 신을 믿는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은 자신의 무궁무진함을 믿으라고 하지만, 그 무궁무진함은 단순히 답에 대한 확신뿐만이 아니다. 그 무궁무진함은 오답도 포함하고 있다. 아니, 애당초 우리가 받은 문제가 과연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였던가? ‘불안은 우리에게 부재하는 윤리에 대한 환기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확신맹신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보다는 덜 최악이다. 저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 차마 말하지는 못한다. 그렇다

 

 

 

 

 

 

+불안을 맹신하라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적어도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자기계발서나 물건, 테러범의 퇴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불안의 심연을 파고들 것을 요구하며, 그 불안이 결여가 아닌 결여를 향하고 있으며, 그 결여 아닌 결여가 결여되었을 때 불안해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왜 불안해하는가. 그 불안은 우리에게서 온 것인가, 아니면 타인에게서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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