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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을 넘어 -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앤서니 앳킨슨 지음, 장경덕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5월
평점 :
불평등이라는 난제
-앤서니 B.앳킨슨의 '불평등을 넘어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비전문가의 비전
앳킨슨은 책의 첫머리부터 포를 내보내되 문을 최대한 좁힌다. ‘이 책은 불평등의 크기를 줄이는 방식에 관해’ 다룬다고 말하면서, 완벽한 평등보다는 ‘지금의 불평등 수준이 지나치다는 믿음에 따라 현재 수준 아래로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책의 제목에도 ‘평등’, ‘실현’은 나오지 않는다.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겨질 만한 건 ‘정의’라는 단어인데, 왜 이 단어가 이상적인 단어가 되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아하다. 불평등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고 정의는 헛된 희망처럼 여겨진다. 불평등은 이미 대기가 되어버렸다.
성별과 세대간, 글로벌 불평등에 대한 분석들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다시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 재확인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지겹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을 샅샅이 들춰 보여준다. 처참한 현실을 메스로 해부해 드러내 놓고 얼렁뚱땅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커다랗고 얇은 밴드로 붙여 버리는 식의 해답들이 너무 많았다면, 앳킨슨은 계속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다.
그 이유는 그가 ‘답’을 제시하는 데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이미 독자가 이 책의 반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전제한다. 그의 독자들은 ‘가구 조사’를 귀찮다고 생각하며 ‘무응답’을 하길 원하는 사람들이며, 아무리 사회 개혁에 대해 욕망을 느끼거나 분개한다손 치더라도 소위 ‘전문가’들의 발언과 지적에 의해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났어야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시경제학의 함정은 바로 그 점에서 발생한다. 거시경제학은 미시경제학이 천착하는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미시경제학의 개인이 잘 살게 되면 그만이 아니냐고 말한다면, 우리는 ‘러브 하우스’라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오르고 사람들이 ‘해비타트’를 만드는 등 거주 공간의 보편화와 개선에 관심을 두게 되었지만 왜 여전히 빈곤주택과 날림공사가 만면한지 되물어야 하고, 왜 셀프 디자인이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 자문해야 한다. 모든 문제들은 이제 개인밖에 해결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아주 빈곤하지 않은 이상 ‘구제받을 수 없다.’ 아니면 ‘게으름뱅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거시경제학은 ‘보편’을 추구한다. 보편의 개선을 위해 최대한 많은 이들을 수치화하고 그래프로 만들어 효율적인 ‘행동’을 촉구한다. 하지만 그들의 취지와 다르게 그래프는 어떤 빈곤을 외면하고, 잘 정리된 통계와 결과를 내보내면서 ‘눈을 속인다.’ 통계는 반신반의할 결과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소위 ‘전문가’들은 이 거시경제학에 따라 ‘큰 그림’을 보라고 말한다. 전문가들을 신처럼 추앙한다는 것은 전문가들이 보는 영역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또다른 징표이기도 하다. 어떻게 본다면 지젝이 방한했을 당시 질문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질문한 분이 지젝을 진정으로 당황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황은 물론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왜 물을 흐리냐는 말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정말 ‘생’에 관련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실재와 분열, 니체와 라캉에 매몰되어 있었다. 지젝은 자신이 아무 해답도 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최대한 답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그의 태도에 대해 사람들은 ‘당황했고’ ‘경우가 없었다’라고 말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던 것이다. 비전문가들은 가끔씩 전문가들의 시선에 매몰되어 ‘무관심’해지고, 비전문가로서의 생활과 전문가의 생활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어쩌면 그들 자신에게 ‘비전vision’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비전을 찾는 건 너무나도 부담스럽고 무거운 사명이기 때문에 외면하고 전문가들에게 그 짐을 맡기는 것이다.
파이에서 푸딩으로
아래의 복지를 균등화하고 넓힌다는 것은 그만한 복지 예산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국의 경우 기존의 예산에서 ‘살림살이’를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젊은이에게 줄 복지를 노인층에게 주고, 노인층에게 줄 복지를 젊은이에게 준다. 아이와 공놀이를 하듯 던졌다가 다시 던져보라고 손짓을 한다. 아이는 그 공을 다시 받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던지지만, 공이 돌아오지 않으면 공을 던질 때 머뭇거리게 된다.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아이가 너무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고 비판한다. 아이에게 공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는 분명히 또 다른 공을 얻거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아이가 공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면서도. 이로 인해 세대 갈등이 조장되고 성별간 갈등이 일어난다. 한 아파트에서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집값이 떨어졌다고 신고했다는 사례들이 속출했다는 걸 들어본다면, 그게 층간 소음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라는 존재가 이미 ‘갈등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복지에 대한 파이는 국가의 총 예산 중에 얼마 되지 않으며, 이 파이를 더 나눠달라고 했을 경우, 파이를 더 가진 사람들은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의 파이가 줄어드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지니계수가 50 이상을 맴도는 것은 사실 ‘일하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경제노동의 정의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일의 ‘가치’를 정하는 순간, 계급 제도가 생기며 결국 사회는 봉건 시대-피의 힘 대신 자본의 힘이 대두하는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게 된다. 아도르노의 말마따나 허울 좋은 계몽일 뿐이며, 진정한 계몽은 결국 모든 불평등과 비극들을 가장 잘 합리화하는 방안을 고안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파이가 말라빠지고 속에 든 과일이 거의 다 썩어간다면 어떨까. 파이의 질은 점차 나빠지고 있다. 파이를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할 돈’을 쌓아놓기 위해서 사람들은 애쓴다. 하지만 파이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돈에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쌓아놓은 물건에 ‘귀신’이 깃든다는 옛 속담은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말해준다.
앳킨슨은 질 떨어지는 파이를 계속 쌓아놓는 것보다 사실 ‘맛있는 푸딩’을 먹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는 ‘더 맛있는 푸딩이 더 많은 브랜디를 넣어 만든 것’이며, 푸딩들을 각기 비교할 수 있지만 이는 더 나은 푸딩을 만들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얻는 자본이 ‘맛있는 푸딩’이 될 수 있다면, 그 푸딩을 더 많이 먹거나 독차지하는 대신 좀 더 나은 푸딩을 만들기 위해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에게 의견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건 하나의 사회가 발전하는 양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새 피케티 새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출간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해결책’이 나타났으며, ‘피케티 신드롬’이라고 명명하며 그를 자본주의의 구세주인 것마냥 치켜세웠다. 이에 반해 피케티의 허상을 지적하고 그의 논의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케티는 틀릴 수 있다. 하지만 피케티도 맞을 수는 있다.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그 또한 마르크스를 읽은 학자들 중 한 명이다. 그에 대한 ‘맹신’을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의 논의에 대해 무작정 틀리다고 달려드는 건 텅 빈 비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국제적인 ‘세금 부과’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앳킨슨 또한 그 의견을 같이 한다. 사람들이 가장 즐겨 보는 수치는 바로 ‘한국의 부자 10명’, ‘세계의 부자 10명’이 버는 소득이다. 그들의 소득은 ‘이룰 수 없지만 늘 선망하는 목표’가 되어버렸다.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고 1면에 실릴 만큼. 반대로 사람들이 보지 않거나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 건 바로 최저 소득 금액이다. 그들은 그 금액이 가깝든 가깝지 않든 현실로 여기는 걸 ‘거부한다.’ 그들의 목표가 아닌, 실패의 결과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선택이 아닌 패배의 결과가 되어버렸으며, ‘잘 사는 삶’의 규격이 강요된다. 인간은 같이 살기 위해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결론은 그들과 나를 분리하고 ‘나’의 생존을 주장하는, 외로운 사회로 이끌고 나간 것이다.
이에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듯 내세우는 것이 ‘지구촌 사회’다. 피케티와 앳킨슨은 그러한 ‘지구촌’ 주장과 유토피아론에 대해 역공한다. 진정한 지구촌 사회를 꿈꾼다면, 그러한 지구촌으로서의 전체가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조세 피난처를 찾아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이제 모두가 잡아채야 한다는 점을. 그러한 안정 속에서 진정한 ‘지구촌 사회’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비록 이게 데이터와 추측들로 가득 찬 책일지라도, 마냥 이상적이지는 않다. 이상적이라고 비난해온 여태껏, 우리는 수많은 ‘방법’들을 날려버리고, 멍하니 날아가는 그 ‘새’들을 바라보고만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