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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리앗>

 영국 만화가 톰 굴드의 대표작, 우두커니 앉아 있는 골리앗의 형상에서는 골리앗이 짓고 있는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다윗에 대입해 왔고, 골리앗은 그저 절대 악에 불과했다. 굴드의 만화는 과연 어느 쪽을 비추고 있을까.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이 흔들릴 때 태어난다. 이 만화는 어쩌면 우리에게 그 균열이 일어난 틈새를 보여줄는지도 모른다.

 

 

 

 

 

 

 

 <모스크바 일기>

 편지는 가벼운 종이 위에 무거운 펜촉으로 내리찍으면서 써나가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유대인을 탄압하는 독일의 공기 속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내려간다. 그게 농담 따먹기이든 진지한 이야기이든, 그 속에는 벤야민의 면모가 담겨 있다. 우리가 말로 하지 못하는 긴 속내를 써내려간 편지를 읽는다면, 독일 철학의 난제로 꼽히는 벤야민의 상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앙드레 말로: 참나무를 쓰러뜨리다>

 앙드레 말로와 프랑스의 샤를 드골과의 대담집. 우리 나라 정치인과의 대담집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왜 외국의 대담집을 읽어야 하는지 되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성과 이성, 문화와 정치라는 이분법적인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중간 지점을 찾기 위해 둘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러한 시도 끝에 프랑스는 나아졌는가? 설령 나아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날까지도 그 시도는 포기되지 말아야 한다.

 

 

 

 

 

 

 <여론과 군중>

  타르드의 저서, 우리는 군중의 하나이지만 군중에서 예외인 것처럼 쉽게 생각한다. 군중이 여론을 형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론 또한 군중을 움직이고 형성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 더 깊이 깨달아야 한다. 폭력이 일상화되고 내리찍는 압력이 점점 강해질 수록, 우리는 더 민감해지기 보다는 무뎌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창조>

 우리는 모두가 함께 살아나갈 유토피아를 꿈꾸었는데 왜 불평등이 강화되는가. 선험적인 피와 신분에서 후천적인 자본에 이르기까지 불평등은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도 똑같이 번복된다. 개인주의 주창과 다르게 불평등에 다들 굴복하라고 강요하는 전체주의적인 모순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불평등의 아주 단순한 단계, 그 시작까지 내려가 보아야 한다. 아직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자신의 곁에 종속시키기 위해서, 그가 혼자서 틀어박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평등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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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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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현재 일본의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일컫는 '사토리 세대'를 대상으로 삼는다. 불황에 의해 구직의 문은 좁아지고, 부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희망 대신 어떻게 해봐도 될 리가 없다는 절망에 익숙해진 이들은 끝에 몰려 저항하고 폭발하기 이전에 불씨를 꺼버린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기성 사회를 비판하거나 의욕이 없는 젊은이들을 비난하는 등, 욕할 대상은 많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담담하다. 그들은 포기의 끝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 이러한 삶의 윤리성에 대해 과연 옳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이러한 인식을 낙관이라고 끝내 저버릴 수 있을 것인가?

 

 

 

  미즈시마 히로코의 '여자의 인간관계'는 알기 어려운 여자언어에 대해 풀이하거나 여자들은~이렇다 라고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여자들의 일정한 무리짓기 현상을 분석하고 그 현상의 귀결을 '여자들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들이 그렇게 될수밖에 없었던 사고 작동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어떤 변명이 아니다. <뒤틀린 여자>를 만들어낸 건 그 여자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와 관습의 강요가 남긴 상처인 것이다.

 

 

 

 

 

 플로렌스 윌리엄스의 '가슴 이야기'는 언뜻 보면 남성들에게는 읽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실제로 이 책은 가슴을 가진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들도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딸의 딸들을 위해, 그리고 여성이 가진 신체에 대해 스스로 기피하는 대신 자신의 일부로 여길 수 있게끔.

 

 

 

 

 

 

 

 

 최광현이 지은 '가족의 발견'은 가족이 남긴 상처야말로 원초적이고 치유가 힘든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한다. 서로 다른 인간 군상들이 한 공간을 공유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설령 평등에 기반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을지라도 실제로는 상위관계에 의해 철저하게 짜여진 '가족 사회'다. 현대 사회의 특성상 마지막 피난처는 가족이지만, 억압 또한 가족에서 나오므로 이러한 악몽의 순환은 번복된다.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지은 '달의 이면'은 레비 스트로스가 유독 아끼고 사랑했던 일본 문화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았다.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마냥 취하는 것보다는 일본에 대해 탐구해 보는 것이야말로, 이 적대관계를 깨트릴 수 있는 대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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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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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ㄴ이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면서 그를 평온하고 흥분시켰던 음악의 세계에 끼어들기 위해 애썼던 것도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ㄷ이 사금파리 밥을 먹으며 죽어갔던 여자애가 되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애썼던 것도 하나의 몸짓이다. ㄱ이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 싶어서,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안정된 삶을 꾸미려고 했던 것도 하나의 몸짓이다. 서글프게도 하나의 몸짓들에 불과하고, 그 몸짓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ㄴ은 베이스 기타를 부수고, ㄷ은 끊임없이 도망친다. ㄱ은 자신이 생각했던 물이 어항에 불과했다는 걸, 결국에는 누군가의 시선 아래에서 끊임없이 헤엄치고 파닥거리면서 스스로를 기만해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다.

 

ㄱ, ㄴ, ㄷ 세 명은 어떠한 고유명사도 갖지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 기호로만 남는다. 그들은 실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빛나는 순간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누군가의 탓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서글프고 초라하다. 거기가 자신의 자리라고 오해했고, 껴줄 것이라고 섣부른 희망을 품었다. 그들이 품은 희망이 간절했던 만큼 절망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고,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건 처절하리만치 참혹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 ‘풍경’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무언가 하나만 부각시킨다면 그림은 인물화나 다른 주제를 담은 그림이 되기 쉽다. 그림을 칭할 때, 가장 부담을 덜 느끼고 그 앞에서 편히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있다면 바로 풍경화일 것이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름답거나 슬프다고 최소한의 감정적 판단만 내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절망한 자들이고, 그래서 그들은 ‘셋’이서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ㄷ이 둘을 보며 ‘치사하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서로를 받아들인다. 그 ‘치사함’을 느껴본 이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풍경화란 아주 짤막한 한순간을 담는다. 모네의 그림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인 그는 빛이 풀잎 위에서 빛나는 순간을,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모든 것들의 소리를 화폭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의 풍경화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풍경을 그리려고 애썼고, 그 풍경은 사실 ‘인위적인 몸짓’에 불과했다. 누구도 풍경을 온전하게 잡아 놓을 수 없다. 셋은 서로가 이루는 풍경에 안주하고 싶었지만, 그 풍경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다. 그들이 본래 의심이 많다기보다는, 그들이 풍경에 느꼈던 행복이 너무나도 절실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행복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셋은 둘이 자신을 따돌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동시에 어느 한 명이 빠져나가 이 풍경이 깨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급급해 했다.

 

그래서 ㄱ은 ㄷ이 ㄴ을 밀어 넣을 때,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했다. 우물이 완성되는 순간 ㄴ이 떠난다면, 그들의 풍경은 깨져버린다. 그녀는 우물을 파서 그 끝을 보려고 했던 ㄴ을 내심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ㄴ은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죽은 화자로 과거를 끊임없이 회상하며 바라보는 존재일 뿐이다. 세 명 다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이 이루었던 ‘소소한 풍경’을 되새기면서, 그 힘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그들은 과거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살인의 풍경’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그 ‘소소’가, ‘사랑의 풍경’이다. 사랑을 증명하는, 끝내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어 ‘밀어버려야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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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장수미 옮김 / 단숨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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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의 미덕은 바로, 어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거꾸로 매달려 죽은 소녀, 양 눈이 파여진 남자, 회색으로 단단하게 굳어버린 소년의 시체. 일상에서 스스럼없이 마주치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분명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추리 소설에서는 그런 장면들을 그리고 있고, 그 장면들은 영화화된다. 왜 그런 장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영화가 되고 텍스트가 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다 살인마의 기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풀 수 없는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굳이 사람들 속에서 지옥을 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지옥은 언제나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추리 소설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조마조마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져도 결국에는 모두 다 수습되기 때문일 것이다.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은 늘 그렇듯이 자신들의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몇 마디 말로 사건을 마무리할 것이다. 미스 마플은 뜨개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매그레 경감은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에게로 돌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이다.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몰타의 매’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들은 점점 그 방향을 바꾼다. 이제 사건에 휘말린 탐정은 무사히 그 곳을 빠져나와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신없이 뒤섞이고, 탐정은 그 손놀림들을 주시하면서 어떻게든 ‘조커’ 카드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카드들은 다 조커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범인에게도 피해자에게도 공감하지 못한 채, 마치 버려진 선물 포장지처럼 나뒹굴게 된다. 그들의 삶도 비참해진다.


  ‘눈알 사냥꾼’의 초르바흐와 알리나는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가 바라던 이 추리 소설의 마지막은 율리안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것이고 알리나는 초르바흐의 아기를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프랑크를 죽인 아버지에 대해 불신의 눈빛을 보내고 알리나는 더 이상 임신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뒤, 눈을 뜨게 해줄 방법을 찾아 돌아다닌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소설이 충격적이지만 충격적이지 않은 이유는 결국 그 끔찍한 ‘사건’에서 나온 우리가, 과연 초르바흐의 상상대로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리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힘든 일을 통과하면, 낙원이 기다리고 있는가. 현재에 와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힘든 일을 하루하루마다 넘기고 있는데, 하루가 끝날 때쯤에 마주하는 건 전철 차창으로 비치는 삼십년쯤 더 늙어 보이는 나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모두들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책을 읽는다. 레오나르트 슐리어가 자신의 딸이 죽은 그 때, ‘이리스’를 알아보기 위해 초르바흐와 계획을 짜다가 ‘비가 올까’라고 걱정하는 행동은 어떤 충격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가장 초라하고도 연약한 방패, 우리가 지긋지긋해하던 일상이 도리어 사건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동전처럼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일상은,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그걸 도로 찾아오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 일상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전의 ‘일상’이. 그렇다면 그 일상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율리안이 고른 쥐 미스터 존스처럼, 초라하지만 어떤 보이지 않는 얇은 ‘끈’을 찾는 것이다. 율리안은 이전처럼 ‘고맙다’고 말하고,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걸 기억해 낸다. 초르바흐는 ‘믿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라는 듯이 말하지만, 동시에 그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추리소설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이제는 따뜻하게 불이 켜진 난롯가도 없고, 자신을 기다리는 따뜻한 식탁도 없는데? 아주 희망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 파국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잃어가는 그 ‘소중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요청하면서 인간은 살아남는다.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의 추리소설들, 피체크의 소설이 주려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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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AR MINI 마이 카, 미니 - 나를 보여 주는 워너비카의 모든 것
최진석 지음 / 이지북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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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부끄러운 말이지만, 만약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넘긴다면 이 리뷰는 온통 거짓말투성이가 될 것이다. 나는 면허가 없다. 폭스바겐도 몰랐고 BMW라는 차종도 몰랐다. BMW에 미니라는 시리즈가 속해 있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딱 하나, 어디선가 많이 본 차였다. 크지도 않고 뉴비틀처럼 앙증맞게 생긴 것도 아닌데, 유명 인사들이 많이 타고 다니는 차였다.


  때문에 책을 받았을 때 많이 걱정했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차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들만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물론 나왔다. 엔진에 관해 비교해 놓은 표라거나 몇 기통, 혹은 조작법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이. 하지만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단지 리뷰를 써야 한다는 의무에서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읽혔기 때문이다. 그 전부터 미니의 종류들과 일화에 대해 말해주고, 엔진에 대해서도 마치 아이에게 알려주듯이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어쩌면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로서는 이 리뷰를 읽으면 책이 전문적인 드라이버용은 아니라고 오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르다.


 자본주의 시대와 천편일률의 소비 패턴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는 것이 있다. 취향이다. 개성이다. 개성과 취향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성은 어떻게든 사이에서 튀어 자신의 개별성을 인정받으려는 것이고, 취향은 타인과의 비교를 신경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의 ‘호’가 기준이 된다.


 타인과의 비교를 필요로 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에게 종속되어 버린다. 자신의 개성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나빠진다.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타인을 곁눈질하는 것이다. 하지만 취향은 다르다. 타인이 자신과 같은 ‘호’를 지니고 있다면, 그건 반가운 일일 수도 있다. 불쾌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것, 그것은 개성이 아니라 ‘취향’이다.


 ‘미니’라는 차종도 그러한 ‘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BMW 시리즈 중에서는 저렴한 축에 속한다고 하고, 살짝 긁히기만 해도 ‘목숨’ 달린 일이라고 말하는 고급 차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영국인들마저도 미니에 매혹된다. 왜일까. 그들은 개성과 취향의 차이를 알고 있다. 미니가 롤스로이스 부스 반대편에서도 당당하게 프로모션을 펼칠 수 있는 건 그런 자신감 덕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니를 타는 사람들은 ‘즐겁다’.

 


미니 부스의 풍경은 롤스로이스 부스의 엄숙하고 차분한 분위기와는 180도 달랐습니다. 미니의 목적은 미니 브랜드를 접하는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명차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흥겨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미니는 신차를 소개하며 신기술을 홍보하거나 이 차가 가격 대비 성능과 만족도가 우수하다는 걸 굳이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저 미니와 함께 하면 ‘즐겁다’는 걸 직접 느끼도록 할 뿐이죠. 평범한 자동차 브랜드라면 섣불리 시도하지 못할 마케팅 전략이자 미니만의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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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미니는 어디에서도 어울린다. 롤스로이스가 물에 빠지고, 벽을 뚫고 나온다면 어떨까? 미니는 어떤 ‘지위’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로든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존 쿠퍼와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활약한 미니, 미니스커트와 어울리는 미니, 오픈카 미니, 영국 왕실의 미니. 경주에서부터 패션, 정치까지 다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재미난 점은, 미니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꼽아 놓았다는 것이다. ‘이탈리안 잡’은 예전에 봤던 영화였다. 미니가 나오는 장면을 보니 생생히 기억이 난다. 지하철 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미니들. 왠지 커다란 트럭이 나와야 할 것 같은 장면에 조그맣고 통통한 자동차가 나오다니.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만약 내가 언젠가는 면허를 따고, 자동차를 마련하게 된다면. 미니를 사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본다. 그렇게 된다면 과연 무슨 색으로 미니를 물들이게 될까. 짐작컨대, 일단 바탕은 코발트블루일 것이다. 김칫국도 너무 일찍이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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