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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ㅣ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조르주 페렉 '사물들'을 읽고-
프라다는 프라다를 입는다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이 태어난 이유로 ‘지와 덕을 갖추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쳐 지와 덕을 갈망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지와 덕은 찾아지지 않았다. 지와 덕은 수많은 딜레마와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났고 사람들은 불안해졌다. 결국 인간은 지와 덕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지와 덕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지와 덕을 갖추지 못한 예술 작품은 예술이 아닌가? 2차 세계대전, 인간이 지와 덕을 상실하고 ‘야만’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무너졌다. 푸른색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머리를 민 사람들에게 정체성이란 팔목에 새겨진 수인번호, 지워버리고 싶기만 한 과거였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교활하던가. 몇몇은 잃어버린 ‘서정’을 회복 가능한 것으로 치환시켰다. 바로 ‘사물’들로.
광고주들은 사람들에게 ‘전쟁’이 끝났으니 사람들은 이제 자유롭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 전에 전제 조건이 있는데, 바로 광고하는 ‘사물’을 사야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풀을 빳빳하게 먹인 하얀 식탁보 위에 은으로 된 식기류들, 그리고 접시에 놓인 고소한 버터와 따끈따끈한 토스트를 보면서 침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이렇게 따끈따끈하게 토스트를 구울 수 있는 토스터기 광고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지갑을 꺼내들게 되는 것이다. 토스터기를 산다고 해서 식탁보가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고 은 식기류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토스터기를 삼으로써 ‘안정감’을 느낀다.
‘안정감’만 느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전에 있었던 ‘계급제’를 소비에 적용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 소비의 ‘계급제’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불행해 한다. 졸업하는 여대생에게는 중고가의 명품백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명품도 다양해서 프라다 뿐만 아니라 베르사체, 타임 등 가지가지다. 명품백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명품백을 사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라면 오히려 양호한 경우다. 명품백을 ‘능히’ 살 수 있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왜 저럴 수가 없는지 비하하는 순간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박탈감’은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게 아니라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그녀들을 두고 ‘된장녀’ 혹은 ‘속물’이라고 말한다.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분수’라는 말은 어찌 보면 허망하고, 화가 찔끔 나는 말이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 해도 ‘분수’에 맞지 않으면 포기해야 한다,놓아야 현명하다. 이 말은 소비의 계급제를 합리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속물’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짝퉁’과 ‘진퉁’을 갈라놓는 사람이야말로 ‘속물’일지도 모른다. 애당초 누가 먼저 충동질을 했는가?
로코코, 로코코, 로코코!
‘사물들’의 인물들, 제롬과 실비는 ‘소비의 계급제’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들은 ‘익스프레스지’를 비판하면서도 그 소비 방식에는 귀를 기울인다. 동시에 자신들이 ‘속물’이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익스프레스지의 사설을 비난하고, 이내 안심해서 우쭐대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그들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 주인공은 예술가로서 억압된 사회에 저항하고자 한다. 그의 예술은 그래서 저항과 자유, 리베라를 주장한다. 허나 막상 그 억압이 풀리고 나자 그는 묘한 공허감을 느낀다. 그의 아내는 억압된 사회 때문에 죽었고 그의 예술은 억압된 사회에 의해 억압되었다. 이 사실들은 억압된 사회에서 ‘현재의 저항’으로써 의미를 가진다.하지만 억압이 풀린 지금은,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당시 간부였던 사람이 그에게 묻는다. 이제 행복한가? 주인공이 추구했던 자유가 손에 쥐여졌다. 하지만 그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자유를 막상 손에 쥐었지만 눈 앞에 보이는 건 혼란 뿐이었다.
제롬과 실비가 처해 있는 상황 또한 비슷하다. 그들은 ‘골리즘’의 도래를 알리는 모임과 거리 시위에 나서는 등 그 당시 사회의 ‘유행하는 상’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착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한계’를 느끼고 만다.
그들은 군중 틈에서 춥고 비도 내리는데, 바스티유, 나시옹, 오텔 드 빌 같은 음울한 거리에서 자신들이 도대체 뭘 하는 것인지 자문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하며, 둘도 없이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무엇인가를 원했다. 두려움에 찬 노력이 의미 있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던 그 무엇이기를, 자기 자신을 알게 해주며, 변화를 가져다주고 살게끔 해주는 무엇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진짜 삶은 다른 곳에 있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온갖 위험, 알아채기 어려운 덫, 주문에 싸인 계략과 같이 훨씬 미묘하고 은밀한 형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75p-
그들은 자유를 획득하고자 했다. 가장 쉬워보이는 방법은 아마도 그 당시 일어나던 ‘시위’였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원하는 건 그 시위로 얻는 자유가 아니었다. 시위의 취지가 좋다 해도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한 시위는 자유가 아니라 ‘억압’이 된다. 결국 그들은 그저 ‘몽상’의 자유만을 즐길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이름 모를 사촌이 억대의 유산을 자신에게 물려주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그 몽상만은 ‘무해’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안정된 생활을 깨뜨리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로코코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대였다. 허나 로코코가 성행하는 만큼 서민들은 궁핍해졌고 비참해졌다. 왕족들은 가짜 목장에서 양털을 깎고 우유를 짜면서 ‘서민 놀이’를 즐겼다. 그들에게 서민들의 생활이란 재미있는 것, 그 자체였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환상’은 깨진다. 프랑스의 ‘환상’은 이렇게 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환상’에 사로잡혔다. 단지 ‘무해해 보인다’라는 이유로. 하지만 그 무해함이 그들을 '유해'하게 만들었다.
실비와 제롬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스스로가 ‘자유롭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쇼윈도우와 진열창이 보여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녹슨 그릇은 진열창에서 무엇보다도 세련된 재떨이가 되고,그 재떨이만 있다면 영국의 젠틀맨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이 시골의 풍요로움을 보면서 감탄하지만, 끝끝내 귀농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시골의 풍요로움은 눈에 보이는 ‘노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는 오로지 방문자 자격으로만 ‘몽상’할 수 있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서 떠나는 순간, 그들의 ‘환영의 공급’은 중단되리라는 것을.
킥(Kick)의 필요성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인의 우울증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우울해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상실’했고, 그 ‘상실’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애당초 그 ‘상실’된 물건조차도 없었다고. 그들은‘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을 쓰는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 ‘없다’를 ‘상실’로 바꾸는 건 간단하다. 결국 둘 다 지금은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상실’을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만큼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 코브는 ‘없는 아내’를 꿈 속에 등장시킨다. 그의 동료는 그에게 그런 ‘꿈’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현실에는 분명 ‘없는 아내’가 꿈 속에서는 ‘상실된 아내’로 바뀌기 때문이다. ‘코브’는 결국 위기에 처한다. ‘상실’은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다. '상실'에 사로잡힌 순간, 있던 것까지도 '없어진다'. 코브는 '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아이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간절하게 '킥(Kick)'을 원한다.
실비와 제롬 또한 그들에게 분명 ‘없는 것’을 당연히 있어야 할 ‘상실’로 바꾼다. 이 때문에 그들은 불행하다.튀니지로 가서 해안과 모래사장을 누리려 한다. 하지만 튀니지에 ‘산다’는 것은 그런 해안과 모래사장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리다. 그들은 스팍스에 살면서 그 ‘없는 것’을 ‘상실’로 바꾸기 위해, 애써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결국 ‘없다’는 현실을 깨달을 뿐이었다.
스팍스를, 우울한 거리를, 그 무의 상태를 탈출하고 싶었다. 파노라마 같은 전경과 지평선, 폐허에서 무엇인가 깜짝 놀라게 홀릴 만한 것, 이미지를 반전시킬 만한 열기로 가득한 경이로움을 찾고 싶었다. 궁전과 사원, 극장의 잔해, 혹은 뾰족한 봉우리 높이에서 초록 오아시스를 발견할 때나 긴 백사장이 이쪽에서 수평선 저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펼쳐지는 광경을 만날 때면 그들의 탐험이 보상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대개는 스팍스로부터 수십,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똑같이 음울한 거리와 사람들로 들끓는 수수께끼 같은 시장, 똑같은 석호와 추레한 야자수, 다를 바 없는 척박함을 발견할 뿐이었다.
120-121p
충분히 깨달을 만큼 깨달았으면 이제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의문을 품어봤을 것이다. 소설의 끝에서 인물은 변화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실비와 제롬은 결국 ‘환상의 공급’이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는 파리로 되돌아간다. 책 앞부분에서 이상적인 집에 대한 묘사, 그 이상에 사로잡혀서. 그들은 ‘환영’에 다가가기 위해‘없다’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환상’에 가까이 가봤자 결국, 그들이 맛보게 될 식사는 밋밋할 것인데도.
제롬과 실비가 좇은 건 환영이었고, 그 환영을 추구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 또한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하고‘환영’을 향해 한데 묶인다. 그래서 ‘진실’된 것이다. 마지막에 인용된 카를 마르크스의 말은 그래서 더더욱 ‘진실’되어 보이고 왠지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진리’를 ‘환영’이라고 바꾸면 묘하게도 들어맞는다. 만약 그들에게 '킥'을 권한다면, 그들이 들을까?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진리’가 '환상' 그 자체라면, 그 또한 하나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문구를 보라. 제롬과 실비에게 '시험'은 바로 스팍스였다. 그들은 '스팍스'에서 '파리'로 돌아오고, 시험에서 '해방'된다. 이런 아이러니한 면 덕분에, 이들은 아마도 ‘행복’해질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게 과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
-카를 마르크스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환영의 일부이다. 환영의 추구는 그 자체로 환영적이여야 한다. 환영적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환영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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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행복하지 않은 원인을 ‘보이지 않는 손’에 돌리는 것도 불합리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충동질을 한 쪽이 누구였던가? 불쌍한 구조들, 탄생만으로도 죄를 짊어졌고 ‘행복하지 않은 이’들은 면죄부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