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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모방과 전이의 차이에 대하여
-카롤린 라로슈의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전이로의 귀환
저자 캐롤린 라로슈는 서두부터 분명히 밝히고 넘어간다. 제목과 다르게, 이 책은 거장의 그림을 베껴 그리면서 그림을 배우는 이들에 대한 책이 아니다. 혹은 무작정 표절해서 자신의 것인양 우기다가 예민한 관찰자의 지적으로 인해 꼬리가 밟힌 화가들의 스캔들에 관한 책도 아니다. ‘이 책의 주제는 작품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 간의 ’혈연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말인즉슨 ‘베끼다’가 내포하는 부정적인 어미와 달리, 여기에 나열된 작품들은 과거 화가로부터 현재의 화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어떤 예술의 줄기를 짚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는 ‘베끼는 것’, 최근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종종 발생하는 ‘트레이싱 문제’와는 다른 차원이다. 또한 인용된 피카소의 말마따나 한 그림의 구도를 따라 그린다는 것은 그 그림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욕망을 드러낸다. 상품은 복제될 때 동일성을 기반으로 그 복제품의 가치가 판단되며, 동시에 완벽하게 복제될수록 본품의 가치는 떨어지지만 그림이나 예술의 경우엔 다르다. 복제가 아닌 ‘전이’로 명명할 수 있다. 대상이 되는 예술품의 가치는 상승하며, 다르면 다를수록 작가 고유의 시선으로 인정받는다. 저자는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며, 정해진 수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당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예술가들 중 그 누가 살아남았는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질투한 이유는, 살리에리가 당시 모차르트에게 분명하게 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살아남을 가능성’을 모차르트에게서 보았다. 심지어 그의 곡들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 어쩌면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질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우리가 그러한 차이에 입각해 단순한 반감을 라이벌 의식으로 더 부각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질투가 맞다면, 살리에리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데 바로 어떤 재능을 ‘알아보는 눈’이었다. 모차르트에게는 그 눈이 없는 대신 ‘창작’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재능을 그들에게 부여했다는 점에서 신은 공평했던 셈이다. 다른 말로 새버렸지만, 다시 말하자면 제목으로 명명된 원작의 가치를 훼손하는 ‘베끼기’보다 더 알맞은 말은 ‘전이’인 셈이다. 물론 전자의 경우가 더 쉬운 말이겠지만, 저자가 우려하듯이 책의 내용을 곡해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왜 아이를 낳는가? 친족의 생산 및 번식이 왜 미덕이 되었는가? 인간은 태어난 뒤 죽음을 향해 간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예정된 자연의 시간이 있다. 하지만 이 시간을 거스르기 위해 인간은 여러 수단을 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잘 하는 라스코 동굴의 벽화들이고, 또 하나를 더 들자면 아이를 낳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또다른 분신인 양 애지중지하거나 혐오한다. 그렇다면 작품들은 어떠한가? 작품들의 ‘전이’는 어쩌면 그 가치를 발견하고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아닌가. 아이는 계승의 의무를 지고 있지만 어떤 작품도 이전 작품의 계승의 의무를 지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전이’는 이전 작품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감성적인 눈을 통해 그 작품의 가치를 되살리고 계승하는 또다른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전이’의 계승 방식은 좀 더 다양하겠지만, 이 책에 언급된 작품들에 의거한다면 크게 부정과 확대, 번역이라는 세 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정의 경우 과거의 작품이 내포한 의미나 부르주아적 사고에 대한 프롤레탈리아적 부정으로, 이는 그 작품의 가치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포한 이념을 지적한다. 작품의 가치는 모순적으로 그 작품을 비판한다고 말하면서 ‘전이’된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되살아날 수 있다. 혹은 과대포장된 작품의 아우라에 대해-아우라는 오히려 그 작품이 원치 않는 ‘물신’으로 격상하게끔 하기도 한다-비판하고 그 아우라를 벗겨내는 작업으로서 부정적 ‘전이’를 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두 번째, 확대의 경우 과거의 작품에 대한 선망을 느끼고 이를 계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의 ‘베끼기’에 가장 적절한 쪽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존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및 그 작품의 ‘가치’를 되살리고 확대해 당대 사람들에게 다시 ‘전달’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베끼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는 번역을 들 수 있다. 이는 부정과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매 시대의 번역은 이전 시대의 번역과 다를 수밖에 없다. 당대 사회와 화가들의 위치적 차이에 따라 작품은 다르게 이해되고 다르게 감동을 준다. 기존의 작품은 현대에서 새롭게 번역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지나쳤던 어떤 ‘숨겨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거듭된 부정
미술을 모르는 사람도 아는 그림이 있다. 바로 ‘모나리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가 이룬 모든 예술적 성과가 한 여자의 초상으로 집약되고 판단되었다는 점에서 통곡할는지도 모르지만, 측면을 그리는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캔버스 밖의 사람들을 응시하는 ‘신비로운 시선’과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한 미소는 모나리자라는 여자의 ‘영혼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한다는 믿음을 심어 줄 수 있을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유리를 끼우는 사내에게 도난당하고 되찾은 이후 모나리자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도난범 센초 페루자가 말한 ‘이탈리아에 그림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는 말과 달리 그가 고미술상에게 거래를 요구했다는 현실과 충돌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의 처음 ‘취지’는 순수했을지언정, 결국 자본적 이득을 노렸다는 점에서 모나리자의 ‘자본적 가치’가 드러난 셈이다. 현대 미술에서는 ‘시장’을 빼놓을 수 없는 바, 모나리자는 ‘자본적 상품’ 중 ‘최고급품’이 된 셈이다. 이러한 상품화는 모나리자의 영혼의 움직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와 미술의 결탁은 이전부터 이어져 왔으나 박물관 유리에 의해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숭배했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하게 모나리자가 얼마나 가치 있는 상품인지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모나리자는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미술사의 아이콘이라고 명명하지만, 이전에 미술사의 아이콘이었던 모나리자는 도난 이후 자본화된 미술사의 아이콘이 되어버린다. 화가들은 분노에 사로잡힌다. ‘모나리자 스캔들’이라는 책에서도 되묻는다. 과연 모나리자는 있기나 했던 것인가? 모나리자는 자본적 판단에 의해 확대되고, 왜곡되고, 살짝 입꼬리를 올린 미소마저도 어떤 ‘내숭’이 되어버린다. 그녀의 미소는 마치 ‘제가 이럴 줄은 몰랐어요.’ 라고 살짝 당황한 듯, 한편으로는 자신만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미술계에서 ‘지나치게 떠받들어진다’는 것은 모나리자라는 그림의 부활이 아니라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나리자는 진정한 모나리자를 찾는 사람들, 혹은 미술의 자본화에 대한 시대의 흐름에 반발하는 이들로 인해 ‘부정’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마르셀 뒤샹, 페르낭 레제의 경우 모나리자를 다른 그림들과 뒤섞어버리거나 콧수염을 붙이면서 ‘모나리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모나리자를 우상화하는 움직임에 가차없이 냉소를 날리고자 한다. 게다가 르네 마그리트는 아예 모나리자의 자리를 ‘비워버린다’. 모나리자는 여전히 ‘도둑’맞은 것이다. 그들은 자본적 아이콘인 모나리자를 ‘부정’하면서 모나리자의 진정한 ‘가치’를 바라보고자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모나리자의 이미지는 실추되지 않았으며, 그 미소와 신비는 여전하다. 그들의 ‘부정’은 모나리자를 짓밟아버리자는 의의가 아니라, 모나리자를 부정함으로써 모나리자의 가치를 되살린다는 의의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작품으로는 마네의 ‘발코니’를 들 수 있다. 마네는 고야의 그림을 그대로 자기 식으로 풀어 해석했지만, 마네의 ‘발코니’는 르네 마그리트에 의해 ‘부정’된다. 마네의 인물들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이며 가볍게 미소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야의 인물들과 달리 권태에 가득 차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바라볼 맘도 들지 않는 인물들이 나오고 있다. 그들은 왜 이 그림에서 같이 공존해야 하는가? 르네 마그리트는 아마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화가들 중 한명일 것이다. 저자는 그의 ‘원근법 2: 마네의 발코니’가 마네의 그림을 재해석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르네 마그리트는 지리한 공존에 오히려 자신이 답답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마네의 그림을 따르되 그 그림에 ‘부정’을 심는다. 어차피 그들은 하나의 관으로 생을 마칠 것이다. 일종의 바니타스로도 볼 수 있는 그림인 셈이다. 마그리트는 소통의 소멸에서 ‘극단’까지 치달으면서 마네의 ‘권태’를 필요없는 것으로, ‘부정’한다. 마네의 그림이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으나 ‘분산되는 중심점’은 그 주제를 배반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친구라고 할 수 있는가? 르네 마그리트는 간과할 수 있는 지점을 붙잡고 그 지점에 대해 ‘타격’을 가한다.
혹은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을 자각하게 하는 바니타스 정물화 중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안나 푸아리에와 파트릭 푸아리에의 작품을 부정의 예시로 들 수 있다. 모든 그림에서는 풍요로운 물질과 함께 해골을 등장시켜 ‘죽음’을 자각하라고 교훈적인 권고를 내놓았다면, 이 그림에서는 사실상 파멸의 원인이 돈에 대한 헛된 욕심이고, 그 욕심으로 인해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모든 바니타스적 가상에 대한 ‘부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투기가 되어버렸고, 모든 이미지는 가치화된다. 그래서 그들은 ‘문자’로 그 가치에 반발하고 부정하고자 한다.
가까이 볼수록 아름다운
카스파드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 그림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광활한 하늘과 낮게 내려앉은 구름들, 그리고 짙푸른 바다는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넘실거리고 있다. 거대하고 광막한 풍경 속에 있는 건 조그맣고 초라한 수도승 한 명 뿐이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 거대함을 느끼는 한편 그 와중에도 고개를 숙이거나 회피하지 않으려 한다. ‘신은 곳곳에 존재한다. 심지어 모래알 한 알에도 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자연주의와 기독교적 발언은, 그의 그림을 하나의 ‘자연 애호적 그림’으로 축소해 이해할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쿠르베는 풍경 자체보다는 풍경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하려고 애썼으며,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구도를 따라 팔라바스 해변을 그렸는지는 모르지만-적어도 그 또한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어떤 감탄을 느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에게 자연은 거대함 그 자체로서 순전한 ‘숭고’를 환기시키는 한편, 동시에 ‘겸손함’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연을 제압하고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따금씩 그 무력함을 깨닫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제임스 휘슬러는 이러한 쿠르베에게 직접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파랑과 은색의 하모니, 트루빌’을 그리며-이 그림에는 쿠르베가 등장하기까지 한다. 쿠르베는 희미한 빛에 잠긴 형상으로 드러나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바다의 끝을 응시하고 있다. 쿠르베의 명징하고 깊은 바다에 대한 색채적 묘사와 달리, 휘슬러의 그림에서 바다는 부드럽고 온화한 빛을 지니고 있다. 이는 쿠르베를 실제로 만났고 그와 함께 지낸 휘슬러의 최대 찬사와 존경의 표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자연에 대한 ‘감탄’은, 쿠르베와 휘슬러로 전해지면서 자연 앞에 선 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연약함과 그 앞에서도 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사랑스러움을 점차 확대해 ‘계승한다.’
이어 윌리엄 터너의 ‘비, 증기 그리고 속도’에서는 터너 특유의 ‘연기’에 대한 묘사가 드러난다. 안개나 비, 구름이나 천둥처럼 자연적인 ‘산물’이 아닌 어떤 인공적인 기술의 발달으로 인한 기후의 ‘충격’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에 경이를 표했고, 나아가 이런 발전을 가져온 인간을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발명품이 그림에 묘사되면서 그림은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증거이자 그 사회의 기념비가 된다. ‘생 라자르 역’을 그린 모네 또한 마찬가지로 기존의 자연에 대한 회화와 다른 어투로 ‘발전’의 양상을 그린다. 인간이 발달시킨 기술에 대해 경시하는 시선도 있지만, 동시에 그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취지는 라이오넬 월든의 ‘카디프 부두’에서도 확대되어 드러나며, 이는 더 발전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터너와 모네가 찬양한 기차의 기적 뿐 아니라 인간이 발명한 ‘눈에 보이지 않는 힘’, 흡사 파직거리는 신인 전기가 ‘그려진’ 것이다.
의도된 오독
니콜라 푸생의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로 이어진다. 푸생은 로물루스와 로마인들을 무뢰한으로, 그리고 납치당하는 여인들의 괴로운 표정을 묘사하면서 ‘공포’를 조성했다. 반면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뒷 이야기인 ‘중재’를 그린다. 그는 실제로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이었으며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중재’를 통해 평화주의를 선도하고자 했다. 인체의 아름다움과 함께 공화주의자들의 사면을 위한 변론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처벌은 아무 것도 낳지 않으며, 사비니 여인들이 낳은 아이들이 제 3의 해결책이 되었듯이 평화를 통한 새로운 ‘창출’이 필요했다. 나아가 그는 그가 존경하는 화가 ‘푸생’의 그림을 계승하면서도 그 그림의 ‘공포’를 압도할 만한 ‘평화’를 그려내고 싶어했다. 푸생이 시작을 알렸다면 다비드는 끝을 맺고자 했던 셈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이러한 계승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게르니카’ 등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피카소는 다비드의 평화주의적인 담론이 어떤 해결책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이미 목도했으며, 제3의 해결책을 강구하다가 끝내 부르주아 마르크시스트들이 보수주의자들과 타협하는 데 이르렀다는 비겁한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인과 아이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다비드의 병사들과 달리 무고한 희생자들을 무참히 죽이고 짓밟는 모습을 그린다. 실제로 당시 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과 상관없다고 여겨졌던 민간인들이 많이 참살되었고, 그리고 그 민간인들은 ‘홀로코스트’에 가담할 것을 강요받고 이에 따르기도 했다. 피카소는 푸생과 다비드의 작품을 보고 그 맥락을 ‘읽었으며’ 그의 시대적인 판단에 의거해 다시 ‘그려냈다.’ 이는 의도된 오독이자 시대적인 맥락에서의 정독이다.
‘아를의 밤의 카페’에 관련해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고흐의 편지가 일부 책에 언급된 바 있다. ‘오늘은 내가 묵고 있는 카페 내부를 그려볼 생각이야. 가스등이 켜진 저녁 풍경으로 말ㅇ리야. 여기 사람들은 이곳을 ’밤의 카페‘라고 부른단다. (...) 밤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여관에 갈 돈이 없거나 너무 취해서 여관에서 받아주지도 않을 때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곳이야.’ 그리고 말한다. ‘나는 인간의 끔찍한 열정을 붉은 색으로 표현하려 했어. 카페 홀은 핏빛의 붉은색과 칙칙한 노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가운데 녹색 당구대가 놓여 있고 4개의 노란 레몬빛 전등이 오렌지색과 녹색의 빛을 발하고 있지.’ 이 카페는 ‘사람들이 망가질 수도 있고, 미칠 수도 있고,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다. 가스등의 발명으로 인해 밤이 사라지면서 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존재까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온전하게’ 숨을 수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밝은 빛에 의해 시달려야 하며, 그 빛을 견뎌내기 위해 카페로 모여든다. 집에서 잠시 ‘잠’을 자며 어둠을 즐길 여유도 없는 사람들은 이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버린다. 에드워드 호퍼가 가장 좋아했던 고흐의 작품이라고 한다. 호퍼의 작품 ‘밤을 새우는 사람들’에서는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이 연상되는 한편, 고흐의 그림에서 묻어나온 어떤 초조함과 불안함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기이한 초록빛은 그들의 얼굴과 코트 깃에 내려앉으면서 그들이 어떤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설령 그게 단순히 밤이 끝나고 해가 떠오르는 어떤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좀 더 예의바르고 정돈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고흐의 그림보다 더 절제되고 꽉 짜여진 틀에 ‘매여 있다. 고흐의 그림에서 사람들이 어떤 범죄의 순간을 기다리거나 분노를 터트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호퍼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지쳐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범죄의 순간을 기다리고 그 순간에 뛰어들 준비를 할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기다리는 일‘ 뿐이다. 자크 모노리의 ‘컬러 n.1’과 ‘더 블루 주크박스’에서도 이러한 모티브가 반영되는데, 이제 사람들은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울 경우, 사람들은 이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꿈 속을 거닐게 된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되어버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른다. 우리는 그렇게 잠을 ‘강탈당했으며’ 낮이라는 폭력에 흠씬 두들겨 맞은 채 캔버스와 카메라 액정 위를 떠도는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