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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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레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어둠에게 말 걸기

 

처음에는 농담으로 시작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당혹스러울 만큼 처참한 죽음과 강간으로 끝난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요제프 K는 모르는 이유로 소송을 통고받는다. 무례한 두 남자가 그의 아침식사와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를 순식간에 두렵고 낯선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요제프 K는 소송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무죄를 입증하려고 한다. 하지만 죄를 알지 못하는 이상 그는 자신이 무죄라는 걸 입증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개처럼 죽는다.’ 카프카의 소설을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 중 대다수는 요제프 K에게 동정심을 보이면서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낙천주의자들이다. 솔닛이 가장 경계하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녀가 쓴 책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백만장자 남성이나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뜨거운 라떼를 쏟는 남성이 아니다.

낙천주의자들은 자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쉬운 법이라는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않는다. 모든 혁명들이 약속했으나 회피하고 지나간 것, 그 미지의 대륙은 바로 여성이었다. 지나치게 우상화하거나 비하하며 인지하기를 거부한다. 여성들의 거절은 그들에게 하나의 심판처럼 다가오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무자비하고 이유 없는 심판, 그러나 그 심판을 여는 소송 주체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다른 누가 그들의 존엄성에 소송을 건 것이 아니다. 이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을 만들고 수행하는 모든 역할은 다 그들 자신이다. ‘거절은 그들의 거울에 상처를 내는 것이고, 이러한 모욕을 견디지 못한다. 그 모욕은 바로 그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고백에 대한 거절, 그들 자신의 존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믿는다. 나아가 그들은 딜런 패로처럼 자신을 거절한 누군가를 거절할 가치가 없는사람으로 만들며, 그들이 고백했던 사실을 하나의 실수로 만들어 버린다. 그로 인해 그들은 다시 고결해진다고 믿지만, 사실상 그들은 자기 자신이 무너질 수 있었던어떤 순간을 겨우 회피한 것에 불과하다.

침묵이 긍정이라는 말만큼 폭력적인 관념이 어디 있는가? 물론 거울이야 침묵한다. 만약 누군가가 칼을 들고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할 때, 그에게 신이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 누군가는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 신의 침묵 또한 긍정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오딧세우스는 키클롭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린다. 오딧세우스는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린다. 이는 거짓 행동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딧세우스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진실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 그들을 분간할 수 없는 어떤 야만적인 시간이었다. 버지니아를 강하게 했던 건 바로 그런 어둠에 대한 그녀의 통찰과 꾸밈없는 시선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강 바닥에 가라앉게 한 것도 그런 어둠이었다. 레베카 솔닛은, 버지니아 울프부터 수전 손택까지 죽 이어져 온 계보들을 가볍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둠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한다. 우리는 불빛으로 이 어둠을 쫓아내려고 하지만, 어둠은 우리의 발밑에 끈질기게 붙어 있다. 그걸, 이 책에서는 맨스플레인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세월

  

영화 세월The hours에서는 세 여성들의 에피소드가 교차된다. 버지니아 울프와 현대의 댈러웨이 부인, 그리고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금발 머리의 전업주부. 저항적인 작가와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을 개척하고 모두에게 인망이 높은 중년 여성, 그리고 순종적인 전업주부 사이에서 우리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 쉬운 공통점은 그들의 심연적 공통성을 지적한다. 그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 그들이 찾아내고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시간에 의해 떠밀려 가버리고 상실된다. 그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들이 바란 것이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었다면, 좀 더 쉽고 구체적으로 비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란 건 아주 소박한 것이었고, 그래서 당혹스러운것이 된다. 그들이 원한 건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밀집해 있는, 평온하고 조용한 자기만의 방. 그러한 소박함은 공격의 정당성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전투력마저 해체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더 격렬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노예제에 대해, 로맹 가리가 묘사했던 장면이 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자신의 집을 뒤집어 엎고, 아내를 강간하며, 아이를 죽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흑인들이 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명백해지는 순간, 백인들은 더 맹렬하게 흑인들을 미워하게 된다. 흑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의 증오는 점점 더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크게 부풀어 오른다.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어떤 욕구에 대해 말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나대지 않는 것이 모범이라고 여겨지게 된다. 그렇다면 나대는 남성은 어떠한가?

언어의 힘은 강력하다. “‘우리는 단어의 힘을 이용해 의미를 묻어버릴 수 있지만,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언어는 사소하지만 동시에 양분하는 강력한 벽이 된다. 화성과 금성에서 각기 따로 왔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해지기도 하고, ‘우정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진다. 가장 최악의 사례는 이 언어의 힘을 폭력이라고는 인지하되 여성들을 피해자로만 보는 남성의 시선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동등한 동료가 아니라 불쌍하고 가여운 피해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평등을 말하지만, 사실상 그러한 평등하지 않은 현실을 역으로 강요하게 된다. 만약 여성이 그들을 동정하는 순간, 그들은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자이자 공감할 수 있을만큼 넓은 인식관을 가진 자신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동정을 모성애나 싸구려 감수성으로 폄하하는 시도들은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도들이 남성적인 것으로 포장되는 순간, 그러한 방어가 얼마나 끔찍한지 우리는 새삼 알 수 있게 된다.

프로이트는 환자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판단과 가능한 대처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그들을 거부한다.’ 그러한 처사에 대해 폭력이라고 비판하는 대신, 프로이트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라. 이는 모든 인간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심지어 여성 자신마저도.

 

 

 

우먼스플레인

우리는 아주 쉽게, 같은 피해자로서의 여성에게 공감할 수 있고 그들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성들이 착각하는 지점은, 그 곳이 안전하다는 생각이다. 스테퍼니 스털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나오는 한 여대생은 현모양처를 꿈꾸며, 현모양처가 해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 또한 맨스플레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이 맞으며, 맨스플레인이 강요하는 대로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평온한 사회 시스템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란다. 맨스플레인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가? 그들은 유별난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괜히 시끄럽게 만든다고 여기며, 아주 쉽게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한다. ‘과자를 받고 싶은 욕망, 강력하다. 그들에게 표백제를 하사하며 여성들을 과민하고 섬세한 이들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그들에게 동화하는 것이다. 역으로 그들의 사고를 이용하고, 그들의 이미지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 ‘여자니까라는 이유로 모든 걸 용서받는 것.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 그녀는 남성들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여성다운 여성으로.

여성들만이 뒷담을 하고 서로를 흉보며, 관계를 깬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남자들만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여성에 대한 험담을 해도 그게 험담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정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비판이 상대방이 모르게 이어진 이상 험담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차마 말하지 못한 이유를 대며 변명한다. 여자들은 여자들에게 허용된 싸움만을 해야 한다. 허용된 이미지와 허용된 행동만을 고집해야 한다. 그러한 억압 속에서 그들은 미쳐버릴 것만 같다고 느껴도, 자신 곁에 있는 비슷한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는 걸 보면서 견뎌낸다. 그렇게 그들은 같이 미쳐간다.

 

우리 문화에서 소녀들은 그들 자신을 왜곡하여 점점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위치로 몰아간다. 우리는 소녀들에게 대담하면서도 소심하고, 육감적이면서도 야위고, 성적 매력을 풍기면서도 얌전하라고 말한다. 서두르라고 하면서 기다리라고도 한다. 그런 식으로 몰리면 소녀들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와해된다.

    

레이철 시먼스 소녀들의 전쟁’ 158

 

남성이나 여성이나 어떤 공동체외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제거하려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괴짜가 된다. 솔닛을 비롯한 수전 손택, 그리고 다른 여성들의 경우 페미니스트 여성이자, ‘시끄러운 여자로 언급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들과 같다고 자신하는 여성들에게 침묵하는 여성은 순종하는 여자로 치부될 수 있다. 둘 다 한 인간에 대해 존중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비판은 잘 하나, 이해하지 않는다. 이 이해는 바로 상대방의 가치관이 얼마나 옳은지 판단하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강점과 약점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들을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이는 데에서 온다. 물론 이는 상하적 인식, 동정심이 아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끝마쳤고, 그걸 갑옷처럼 온 몸에 두른 채 달려든다. 어디로? 그 비판을 통해 자신을 어떤 이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갈 수 있으며, 그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비판은 너무나도 쉽다. 찌르는 방법만 알면 된다.

찌르기는 쉬우나, 고치는 건 어렵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순식간이지만, 고치는 건 단번에 할 수 없다. 이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 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여성이 부당한 상처를 받아왔고 여성의 공동체적 공감을 통해 치유가 가능했다 치더라도, 그 치유의 한계치가 있다. 붕대로 감아도 피는 여전히 흘러나오고, 상처는 흉터로 남는다. 그래서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것은 우먼스 플레인이라는 상처의 흔적, 서로에 대한 존중과 연대일지도 모른다.

솔닛의 책은 맨스플레인에 대해서 말하고 남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읽힐 수 있지만, 사실상 솔닛이 말하는 것은-우스꽝스러운 일화 속에 숨겨진 상처의 흔적, 그 흔적을 회피하지 말라는 강력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치료'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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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말>.

-손택은 '캠프' 이론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갈등 사이에 새로운 불을 지핀 여성 지식인이다. 그녀의 발언들은 한 여성이 지식인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을 걸치고 사유의 한계를 극복해 냈어야 하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당시 '사유'는 사유로서의 본질과 다르게 남성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억압되고 자유를 포기당해야 했다. 여성의 발언은 쉽게 방종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수전 손택은 자유와 방종의 차이를 지적하며 자유로운 사유와 새로운 개념의 도출을 가능케 했고, 그녀의 예민한 시선은 고통의 윤리를 포착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폭력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윤리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마음의 힘>. 강상중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이후, 재난의 상황에서 맨 먼저 일어나는 건 책임의 전가다. 상처입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가장 최악의 방법이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인 강상중은 어떤 상처로 인한 '분열'을 죽 겪어왔으며, 큰 상처로 인해 그의 생각을 어떤 방향으로 바꿔 나가야 할 지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민한다. 그에게는 어떤 '범인'을 지적하는 폭력성이 없다. 이러한 폭력도 마음의 힘 중 하나다. 강상중을 단순히 자기계발서라는 편견으로 읽느냐, 아니면 그가 소세키와 몇몇 작품에 대해 소박하게 논하면서 점차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붓질을 하고 있다는 시선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강상중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거나 귀찮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에서는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쉬운 말의 위로와 치밀한 분석이 더 위안이 되는 법이다.

 

,정치: 운명을 거스르는 이론> 로베르트 웅거

'사회는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는가?' 정치가 단순히 어떤 생계구조의 지속이라면,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제도가 되어야 하며, 어느 누구도 정치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사실상 정치는 책 제목처럼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정치의 이론들은 그러한 행위를 현실화해줄 이론으로 규정된다.

 

 

 

 

 

 

 

<푸코 이후> 오모다 소노에 외 지음

재난의 상황에 처한 일본에 한국이 구호 물자를 보내주고 그 상황이 담긴 영상을 보았을 때, 대부분 첫 반응은 비슷했다. 저 사람들은 저 와중에도 줄을 서네! 그 감탄사는 거의 경악에 가까웠다. 우리는 법에 익숙해지고, 관습에 익숙해져 있다. 사실상 본능에 치우쳐 약탈을 하든 관습에 익숙하게 줄을 서든 어떤 쪽도 비인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후 상황은 법과 관습의 무력화를 다시금 증명했고, 인간에 대해 되묻게 했다. 인간이 구조를 통해 생산되는 것이라면 과연 구조가 무너져 내렸을 때,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있는가. 구조주의자인 푸코의 죽음 '이후', 어떤 사유가 가능할 것인지를 묻는 일본학자의 태도야 말로 어쩌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후'일지도 모른다.

 

 

<씨네샹떼>

영화를 철학적으로 생각하겠다고 해서 영화가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 수업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질지 궁금하다. 강신주의 '자유로운 사유'와 이상용의 경험을 통해, 이 책은 영화를 새롭게 보고 읽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책이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어떤 깊이를 부여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도 하다. 책에 대해 너무 기대하면 안된다는 속설도 있지만, 여하간 기대가 되는 걸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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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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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위한 준비

 

 

 

 

 

 다이빙의 순간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고-

 

 

 

 

 

 소설은 언제 쓰이고, 쓸 수 있는 것일까?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은 뒤, ‘소설을 쓸 준비를 준비한다. 평생을 텍스트와 도상의 해석으로 보내면서 그 누구보다 그는 창작에 민감했다. 모든 비평가들은 창작자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바르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소설 텍스트를 사랑했고 그 누구보다도 소설이라는 돌 속에서 진주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예민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텍스트를 사랑한 이상으로 그가 사랑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소설은 그에게 어머니의 텍스트였고, 어머니는 한 편의 소설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그는 어머니를 한편의 거대한 소설로 인지하게 된다. 상실된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쓰는 것, 그것이 그의 애도였다.

 

 하지만 쓴다는 것은 노타시오-메모하기의 딜레마를 초래한다. 메모는 시간성에 의해 가능해지면서 제한된다. 시간은 계속 물이 흐르듯이 흐른다. 물은 단단하고 거친 돌을 매끄럽게 다듬고 구덩이를 점점 더 깊게 만든다. 메모의 가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야 하지만 흘러가서는 안 될 어떤 것을 붙잡는 것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물 속에서 반짝이던 어떤 것은 건져 올려진 순간 낡은 부츠와 빈 깡통처럼 빛을 잃고 무미건조한 사물이 되어버린다. 일방적인 정지는 그 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혹스러울 만큼 초라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초라함을 극복하는 것은 바로 기억이다.

 

 프루스트는 조그맣고 부드러운 조개 모양의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한 입 베어 먹었을 때, 그는 그의 죽었던 과거가 다시금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르트는 슬픔 뒤에 이어지는 끝없는 권태를 기록하고, 그 권태를 정지시키려 한다. 모든 슬픔은 자극 뒤에 권태가 오며, 그 권태 끝에 결국 생존하기 위한 삶으로 꾸역꾸역 되돌아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생의 충동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그러한 생으로의 귀환은 어머니에 대한 애도의 거친 종결이었다. 이를 중지하고 끊임없이 메모해 가는 것,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라는 텍스트를 읽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 그가 만약 소설을 썼더라면, 그 소설은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바르트가 생각한 소설은 하나로 집약되었다가 끊임없이 확산되는 것이었다. 만화경을 들여다 보면 조그만 사각형과 삼각형들이 하나로 모여들었다가 분열된다. 색과 모양과 배치가 바뀌면서 아름다운 하나의 환상이 펼쳐진다. 이는 하이쿠의 형식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이쿠는 매번 다른 순간, 집약된 세 문장으로 제시한다. 만약 하이쿠를 일본의, 어떤 형식으로 구분되는 시로 여긴다면 하이쿠를 즐길 수 없을 것이라고 바르트는 단언한다. 그가 번역해 온 수많은 텍스트들은 사실 그 텍스트들의 형식적 전통이 아니라 그 형식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어떤 내재된 것의 전달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나의 사케 잔 속에서

벼룩이 한 마리 헤엄치네

절대적으로

(잇샤, 코요)

 

 

  일상의 순간, 대수롭지 않게 넘길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순간을 잡아 정지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바르트가 본 하이쿠였다. 그가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에 가득 담은 모래가 소리없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처럼 흘러가는 그 시간들을 잡기 위해서는 하이쿠가 필요했다. 잔 속에서 헤엄치는 벌레를 보면서 절대적으로라는 생에 대한 강박까지 어떻게 다다를 수 있었을까? 기형도는 모든 사람들의 입속에 돋아난 검은 잎을 보면서도, 어떻게 말로써 또다시 써내려갈 힘을 얻었을까.

 

  하지만 바르트의 한계는 그 집약에서 그친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프루스트처럼 펼쳐나가기를 바랐으나, 그의 결정적인 단점은 바로 기억력이었다. 그가 잘 깜박거린다가 아니다. 바르트가 말하는 기억력은 물에 띄우면 저절로 봉오리가 열리면서 꽃을 피우는 일본의 종이꽃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한 매개를 만나면, 죽어 있던 봉오리가 하나의 꽃으로 다시금 태어나는 순간을 쓰고 싶어했던 것이다. 어쩌면 소설가에서 평론가로 전환하기는 쉬울지 모르나 평론가에서 소설가로 전업하기에는 어렵다는 말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이상을 가지기는 쉽고, 거대한 숭고로 그려낼 수 있지만 그 숭고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 경악하고 공포를 느낀다. 마크 로스코는 단면 회화를 연속해서 그렸지만, 대중이 그에게서 느낀다는 카타르시스’, 감정의 정화를 그는 느끼지 못했다. 그가 마주한 붉은 그림에서, 그는 어떤 공포와 절망을 느꼈는가. ‘하나의 환상, 매번 달라질 수 있는 환상’, 바르트는 끊임없이 이상화했고, 소설을 위한 준비만을 거듭했다. 이 강의는 마지막이되 마지막을 내지 못한 강의다. 바르트를 죽인 건 차가 아니라, 응급실에서 처치를 거부한 그 자신이었다. 동시에 그는 타살이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거대한 이상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을지도 모른다. 준비는 늘 행복하다. 하지만 준비가 끝날 때면 우리는 한없이 두려워진다.

 

  하지만, 어떤 바다에 뛰어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수밖에 없다. 헤엄쳐 나가야 한다. 짜고 차가운, 묵직한 파도가 온 몸을 두들겨 패 눕히더라도. 이제, 써야 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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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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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방과 전이의 차이에 대하여

 -카롤린 라로슈의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전이로의 귀환

 

 

   저자 캐롤린 라로슈는 서두부터 분명히 밝히고 넘어간다. 제목과 다르게, 이 책은 거장의 그림을 베껴 그리면서 그림을 배우는 이들에 대한 책이 아니다. 혹은 무작정 표절해서 자신의 것인양 우기다가 예민한 관찰자의 지적으로 인해 꼬리가 밟힌 화가들의 스캔들에 관한 책도 아니다. ‘이 책의 주제는 작품들의 계보를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간격을 두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 간의 혈연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말인즉슨 베끼다가 내포하는 부정적인 어미와 달리, 여기에 나열된 작품들은 과거 화가로부터 현재의 화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어떤 예술의 줄기를 짚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는 베끼는 것’, 최근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종종 발생하는 트레이싱 문제와는 다른 차원이다. 또한 인용된 피카소의 말마따나 한 그림의 구도를 따라 그린다는 것은 그 그림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욕망을 드러낸다. 상품은 복제될 때 동일성을 기반으로 그 복제품의 가치가 판단되며, 동시에 완벽하게 복제될수록 본품의 가치는 떨어지지만 그림이나 예술의 경우엔 다르다. 복제가 아닌 전이로 명명할 수 있다. 대상이 되는 예술품의 가치는 상승하며, 다르면 다를수록 작가 고유의 시선으로 인정받는다. 저자는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며, 정해진 수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당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예술가들 중 그 누가 살아남았는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질투한 이유는, 살리에리가 당시 모차르트에게 분명하게 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살아남을 가능성을 모차르트에게서 보았다. 심지어 그의 곡들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 어쩌면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질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우리가 그러한 차이에 입각해 단순한 반감을 라이벌 의식으로 더 부각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질투가 맞다면, 살리에리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데 바로 어떤 재능을 알아보는 눈이었다. 모차르트에게는 그 눈이 없는 대신 창작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재능을 그들에게 부여했다는 점에서 신은 공평했던 셈이다. 다른 말로 새버렸지만, 다시 말하자면 제목으로 명명된 원작의 가치를 훼손하는 베끼기보다 더 알맞은 말은 전이인 셈이다. 물론 전자의 경우가 더 쉬운 말이겠지만, 저자가 우려하듯이 책의 내용을 곡해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왜 아이를 낳는가? 친족의 생산 및 번식이 왜 미덕이 되었는가? 인간은 태어난 뒤 죽음을 향해 간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예정된 자연의 시간이 있다. 하지만 이 시간을 거스르기 위해 인간은 여러 수단을 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잘 하는 라스코 동굴의 벽화들이고, 또 하나를 더 들자면 아이를 낳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또다른 분신인 양 애지중지하거나 혐오한다. 그렇다면 작품들은 어떠한가? 작품들의 전이는 어쩌면 그 가치를 발견하고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아닌가. 아이는 계승의 의무를 지고 있지만 어떤 작품도 이전 작품의 계승의 의무를 지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전이는 이전 작품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감성적인 눈을 통해 그 작품의 가치를 되살리고 계승하는 또다른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전이의 계승 방식은 좀 더 다양하겠지만, 이 책에 언급된 작품들에 의거한다면 크게 부정과 확대, 번역이라는 세 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정의 경우 과거의 작품이 내포한 의미나 부르주아적 사고에 대한 프롤레탈리아적 부정으로, 이는 그 작품의 가치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포한 이념을 지적한다. 작품의 가치는 모순적으로 그 작품을 비판한다고 말하면서 전이된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되살아날 수 있다. 혹은 과대포장된 작품의 아우라에 대해-아우라는 오히려 그 작품이 원치 않는 물신으로 격상하게끔 하기도 한다-비판하고 그 아우라를 벗겨내는 작업으로서 부정적 전이를 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두 번째, 확대의 경우 과거의 작품에 대한 선망을 느끼고 이를 계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의 베끼기에 가장 적절한 쪽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존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및 그 작품의 가치를 되살리고 확대해 당대 사람들에게 다시 전달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베끼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는 번역을 들 수 있다. 이는 부정과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매 시대의 번역은 이전 시대의 번역과 다를 수밖에 없다. 당대 사회와 화가들의 위치적 차이에 따라 작품은 다르게 이해되고 다르게 감동을 준다. 기존의 작품은 현대에서 새롭게 번역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지나쳤던 어떤 숨겨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거듭된 부정

     

   미술을 모르는 사람도 아는 그림이 있다. 바로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가 이룬 모든 예술적 성과가 한 여자의 초상으로 집약되고 판단되었다는 점에서 통곡할는지도 모르지만, 측면을 그리는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캔버스 밖의 사람들을 응시하는 신비로운 시선과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한 미소는 모나리자라는 여자의 영혼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한다는 믿음을 심어 줄 수 있을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유리를 끼우는 사내에게 도난당하고 되찾은 이후 모나리자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도난범 센초 페루자가 말한 이탈리아에 그림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는 말과 달리 그가 고미술상에게 거래를 요구했다는 현실과 충돌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의 처음 취지는 순수했을지언정, 결국 자본적 이득을 노렸다는 점에서 모나리자의 자본적 가치가 드러난 셈이다. 현대 미술에서는 시장을 빼놓을 수 없는 바, 모나리자는 자본적 상품최고급품이 된 셈이다. 이러한 상품화는 모나리자의 영혼의 움직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와 미술의 결탁은 이전부터 이어져 왔으나 박물관 유리에 의해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숭배했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하게 모나리자가 얼마나 가치 있는 상품인지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모나리자는 자본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미술사의 아이콘이라고 명명하지만, 이전에 미술사의 아이콘이었던 모나리자는 도난 이후 자본화된 미술사의 아이콘이 되어버린다. 화가들은 분노에 사로잡힌다. ‘모나리자 스캔들이라는 책에서도 되묻는다. 과연 모나리자는 있기나 했던 것인가? 모나리자는 자본적 판단에 의해 확대되고, 왜곡되고, 살짝 입꼬리를 올린 미소마저도 어떤 내숭이 되어버린다. 그녀의 미소는 마치 제가 이럴 줄은 몰랐어요.’ 라고 살짝 당황한 듯, 한편으로는 자신만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미술계에서 지나치게 떠받들어진다는 것은 모나리자라는 그림의 부활이 아니라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나리자는 진정한 모나리자를 찾는 사람들, 혹은 미술의 자본화에 대한 시대의 흐름에 반발하는 이들로 인해 부정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마르셀 뒤샹, 페르낭 레제의 경우 모나리자를 다른 그림들과 뒤섞어버리거나 콧수염을 붙이면서 모나리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모나리자를 우상화하는 움직임에 가차없이 냉소를 날리고자 한다. 게다가 르네 마그리트는 아예 모나리자의 자리를 비워버린다’. 모나리자는 여전히 도둑맞은 것이다. 그들은 자본적 아이콘인 모나리자를 부정하면서 모나리자의 진정한 가치를 바라보고자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모나리자의 이미지는 실추되지 않았으며, 그 미소와 신비는 여전하다. 그들의 부정은 모나리자를 짓밟아버리자는 의의가 아니라, 모나리자를 부정함으로써 모나리자의 가치를 되살린다는 의의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작품으로는 마네의 발코니를 들 수 있다. 마네는 고야의 그림을 그대로 자기 식으로 풀어 해석했지만, 마네의 발코니는 르네 마그리트에 의해 부정된다. 마네의 인물들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이며 가볍게 미소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야의 인물들과 달리 권태에 가득 차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바라볼 맘도 들지 않는 인물들이 나오고 있다. 그들은 왜 이 그림에서 같이 공존해야 하는가? 르네 마그리트는 아마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화가들 중 한명일 것이다. 저자는 그의 원근법 2: 마네의 발코니가 마네의 그림을 재해석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르네 마그리트는 지리한 공존에 오히려 자신이 답답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마네의 그림을 따르되 그 그림에 부정을 심는다. 어차피 그들은 하나의 관으로 생을 마칠 것이다. 일종의 바니타스로도 볼 수 있는 그림인 셈이다. 마그리트는 소통의 소멸에서 극단까지 치달으면서 마네의 권태를 필요없는 것으로, ‘부정한다. 마네의 그림이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으나 분산되는 중심점은 그 주제를 배반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친구라고 할 수 있는가? 르네 마그리트는 간과할 수 있는 지점을 붙잡고 그 지점에 대해 타격을 가한다

  혹은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을 자각하게 하는 바니타스 정물화 중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안나 푸아리에와 파트릭 푸아리에의 작품을 부정의 예시로 들 수 있다. 모든 그림에서는 풍요로운 물질과 함께 해골을 등장시켜 죽음을 자각하라고 교훈적인 권고를 내놓았다면, 이 그림에서는 사실상 파멸의 원인이 돈에 대한 헛된 욕심이고, 그 욕심으로 인해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모든 바니타스적 가상에 대한 부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투기가 되어버렸고, 모든 이미지는 가치화된다. 그래서 그들은 문자로 그 가치에 반발하고 부정하고자 한다

 

 

 

 

 

가까이 볼수록 아름다운

 

 

  카스파드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그림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광활한 하늘과 낮게 내려앉은 구름들, 그리고 짙푸른 바다는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넘실거리고 있다. 거대하고 광막한 풍경 속에 있는 건 조그맣고 초라한 수도승 한 명 뿐이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 거대함을 느끼는 한편 그 와중에도 고개를 숙이거나 회피하지 않으려 한다. ‘신은 곳곳에 존재한다. 심지어 모래알 한 알에도 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자연주의와 기독교적 발언은, 그의 그림을 하나의 자연 애호적 그림으로 축소해 이해할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쿠르베는 풍경 자체보다는 풍경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하려고 애썼으며,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구도를 따라 팔라바스 해변을 그렸는지는 모르지만-적어도 그 또한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어떤 감탄을 느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에게 자연은 거대함 그 자체로서 순전한 숭고를 환기시키는 한편, 동시에 겸손함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자연을 제압하고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따금씩 그 무력함을 깨닫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제임스 휘슬러는 이러한 쿠르베에게 직접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파랑과 은색의 하모니, 트루빌을 그리며-이 그림에는 쿠르베가 등장하기까지 한다. 쿠르베는 희미한 빛에 잠긴 형상으로 드러나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바다의 끝을 응시하고 있다. 쿠르베의 명징하고 깊은 바다에 대한 색채적 묘사와 달리, 휘슬러의 그림에서 바다는 부드럽고 온화한 빛을 지니고 있다. 이는 쿠르베를 실제로 만났고 그와 함께 지낸 휘슬러의 최대 찬사와 존경의 표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자연에 대한 감탄, 쿠르베와 휘슬러로 전해지면서 자연 앞에 선 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연약함과 그 앞에서도 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사랑스러움을 점차 확대해 계승한다.’

  이어 윌리엄 터너의 , 증기 그리고 속도에서는 터너 특유의 연기에 대한 묘사가 드러난다. 안개나 비, 구름이나 천둥처럼 자연적인 산물이 아닌 어떤 인공적인 기술의 발달으로 인한 기후의 충격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에 경이를 표했고, 나아가 이런 발전을 가져온 인간을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발명품이 그림에 묘사되면서 그림은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증거이자 그 사회의 기념비가 된다. ‘생 라자르 역을 그린 모네 또한 마찬가지로 기존의 자연에 대한 회화와 다른 어투로 발전의 양상을 그린다. 인간이 발달시킨 기술에 대해 경시하는 시선도 있지만, 동시에 그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취지는 라이오넬 월든의 카디프 부두에서도 확대되어 드러나며, 이는 더 발전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터너와 모네가 찬양한 기차의 기적 뿐 아니라 인간이 발명한 눈에 보이지 않는 힘’, 흡사 파직거리는 신인 전기가 그려진것이다.

 

 

 

 

 

의도된 오독 

 

  니콜라 푸생의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로 이어진다. 푸생은 로물루스와 로마인들을 무뢰한으로, 그리고 납치당하는 여인들의 괴로운 표정을 묘사하면서 공포를 조성했다. 반면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뒷 이야기인 중재를 그린다. 그는 실제로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이었으며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중재를 통해 평화주의를 선도하고자 했다. 인체의 아름다움과 함께 공화주의자들의 사면을 위한 변론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처벌은 아무 것도 낳지 않으며, 사비니 여인들이 낳은 아이들이 제 3의 해결책이 되었듯이 평화를 통한 새로운 창출이 필요했다. 나아가 그는 그가 존경하는 화가 푸생의 그림을 계승하면서도 그 그림의 공포를 압도할 만한 평화를 그려내고 싶어했다. 푸생이 시작을 알렸다면 다비드는 끝을 맺고자 했던 셈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이러한 계승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게르니카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피카소는 다비드의 평화주의적인 담론이 어떤 해결책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이미 목도했으며, 3의 해결책을 강구하다가 끝내 부르주아 마르크시스트들이 보수주의자들과 타협하는 데 이르렀다는 비겁한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인과 아이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다비드의 병사들과 달리 무고한 희생자들을 무참히 죽이고 짓밟는 모습을 그린다. 실제로 당시 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과 상관없다고 여겨졌던 민간인들이 많이 참살되었고, 그리고 그 민간인들은 홀로코스트에 가담할 것을 강요받고 이에 따르기도 했다. 피카소는 푸생과 다비드의 작품을 보고 그 맥락을 읽었으며그의 시대적인 판단에 의거해 다시 그려냈다.’ 이는 의도된 오독이자 시대적인 맥락에서의 정독이다.

 

 아를의 밤의 카페에 관련해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고흐의 편지가 일부 책에 언급된 바 있다. ‘오늘은 내가 묵고 있는 카페 내부를 그려볼 생각이야. 가스등이 켜진 저녁 풍경으로 말리야. 여기 사람들은 이곳을 밤의 카페라고 부른단다. (...) 밤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여관에 갈 돈이 없거나 너무 취해서 여관에서 받아주지도 않을 때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곳이야.’ 그리고 말한다. ‘나는 인간의 끔찍한 열정을 붉은 색으로 표현하려 했어. 카페 홀은 핏빛의 붉은색과 칙칙한 노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가운데 녹색 당구대가 놓여 있고 4개의 노란 레몬빛 전등이 오렌지색과 녹색의 빛을 발하고 있지.’ 이 카페는 사람들이 망가질 수도 있고, 미칠 수도 있고,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다. 가스등의 발명으로 인해 밤이 사라지면서 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존재까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온전하게숨을 수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밝은 빛에 의해 시달려야 하며, 그 빛을 견뎌내기 위해 카페로 모여든다. 집에서 잠시 을 자며 어둠을 즐길 여유도 없는 사람들은 이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버린다. 에드워드 호퍼가 가장 좋아했던 고흐의 작품이라고 한다. 호퍼의 작품 밤을 새우는 사람들에서는 헤밍웨이의 단편 살인자들이 연상되는 한편, 고흐의 그림에서 묻어나온 어떤 초조함과 불안함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기이한 초록빛은 그들의 얼굴과 코트 깃에 내려앉으면서 그들이 어떤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설령 그게 단순히 밤이 끝나고 해가 떠오르는 어떤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좀 더 예의바르고 정돈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고흐의 그림보다 더 절제되고 꽉 짜여진 틀에 매여 있다. 고흐의 그림에서 사람들이 어떤 범죄의 순간을 기다리거나 분노를 터트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호퍼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지쳐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범죄의 순간을 기다리고 그 순간에 뛰어들 준비를 할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기다리는 일뿐이다. 자크 모노리의 컬러 n.1’더 블루 주크박스에서도 이러한 모티브가 반영되는데, 이제 사람들은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울 경우, 사람들은 이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꿈 속을 거닐게 된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되어버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른다. 우리는 그렇게 잠을 강탈당했으며낮이라는 폭력에 흠씬 두들겨 맞은 채 캔버스와 카메라 액정 위를 떠도는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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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

 아즈마 히로키, 마티, 2015.3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 중 가장 대단한 것을 꼽자면, 그건 그들의 죽음을 앞당기는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체르노빌은 오염된 자연, 죽음의 공간으로 폐쇄되어 있었으며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의 범죄에 대해 자각하게끔 만들었다. 체르노빌에 대해 만화를 그리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체르노빌에 비닐 봉지로 둘둘 싸인 채 들어가고 체르노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러 감정들을 쏟아냈지만, 사실상 이는 체르노빌이라는 한 외국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치는 일이 다수였다. 하지만 최근 원전 사고를 일으켜 광범위한 오염을 경험했던 일본인 아즈마 히로키가 바라본 체르노빌은, 과연 후쿠시마의 현재인가, 미래인가. '다크 투어리즘'은 어떤 맥락을 지닌 용어일까.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 민음사, 2015.3

 책 소개에는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이라고 나와 있다. 우리는 인권에 대해 지극히 긍정적인 면만을 강조하는데, 이는 인간은 긍정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선입견과 함께 불쾌한 감정들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의 책 표제에서 언급되는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가장 복잡하며, 인간의 갈등을 초래하는 '나쁜 요소'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본다면 인간의 윤리적 갈등을 자아내는 궁극적인 요소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라는 말에 더 꺼림칙해져야 할는지도 모른다.

 

 

<탐식의 시대>

레이철 로던, 다른 세상, 2015.3

 최근 사람들에게 떠오르고 있는 문화는 바로 '먹방문화', 먹을 것에 대한 관심이다. 왜 사람들은 갑자기 먹는 것으로 시선을 돌리는가? 입는 것도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닌, 먹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개성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한다. 때문에 식사는 늘 '탐식'이 되곤 한다. 먹는 양이 아닌 먹을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개성 표출'의 욕구에 대해. 비록 이 책이 그러한 개성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탐식'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그 과거와 현재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중요할 듯하다.

 

 

 

 

 

<대중들>

그린비, 2015.3

우리들은 대중이지만, 동시에 대중에 대해서 모른다. 그래서 대중들의 의견이 우리와 반대일 경우, 우리는 한없이 두려움을 느끼며 옳고 그름의 척도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제프리 슈나프 등이 엮은 '대중들'이라는 총서에서는 각 장르별로 보이는 대중들에 대해 분석하며, '단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힘과 가능성, 그리고 함정에 대해 속속들이 분석해 보고자 한다. 솔직히 이 책의 경우 대중들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현대인들이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생각하기에 신간평가단 페이퍼에 추천해 보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진경, 꾸리에, 2015.3

 마르크스 학자로서 유명한 이진경의 책, 마르크스가 현재까지 언급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의문을 지니지만, 그의 자본론은 과거에서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예언서'가 되어 있다. 이러한 모순은 어디에서 출발하며, 마르크스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잡아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의 여자들>

캐롤라인 무어헤드, 현실문학, 2015.3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는 주로 남자들의 이야기였다. '수인'이었지만 '여자'였다는 자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대부분 가스실로 보내졌다는 평이 다수였다. 이에 맞서듯 무어헤드의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이라는 제목까지 달고 나왔다. 한번 읽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하우스 스캔들>

 루시 워슬리, 을유, 2015.3

 

 집은 우리에게 휴식처인가, 아니면 또다른 전쟁터인가? 우리는 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한국의 주말 드라마 대부분은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끊임없이 동맹을 맺고 적을 만들며, 1차와 2차, 3차까지 대전을 거듭한다. '각 가정은 각자의 이유로 불행하다'라고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쓴 것처럼, 집에 얽힌 갈등은 집에 대한 기대에 보답하듯 더 큰 배신감과 복수로 찾아든다.

 

 

 

 

 

<젠더 무법자>

케이트 본스타인, 바다출판사, 2015.3

<젠더>는 여성만 뜻하는 용어인가? 우리는 <젠더>라는 말이 붙으면 곧장 고개를 내젓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주어진 역할에 대해 수긍하고 살아가는 것,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 <젠더>를 고려해 보느냐고 하지만 사실상 '페미니즘 논쟁'이 불붙은 이 나라에서 <젠더>는 꼭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과연 이러한 '무법적'이고 '무례한' 물음이, 우리의 생을 더 비참하게 만들까?

 

 

 

 

 

 

 

 

<마크 로스코>

 마크 로스코, 강신주, 민음사, 2015.3

 

 무슨 말이 필요하랴. 마크 로스코인데. 사실 제일 읽고 싶고 제일 리뷰를 쓰고 싶은 책이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한없이 울고 있었다는 한 여자처럼, 나 또한 로스코의 조그만 복사본 앞에서 눈물을 떨군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은 로스코가 단순한 단면 화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야유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접속'의 순간이었다. 그의 그림과 강신주의 글이 어떤 조화를 이룰지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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