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Gran Casa, Casa Grande (위대한 집, 거대한 집)

-니콜 크라우스의 그레이트 하우스를 읽고

 

 

 

 

모두가 디아스포라

 

인간은 그보다도 못한 무엇, 매일 서커스 공연장이 세워졌다 다시 허물어지는 빈 공터와 비슷했다.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모든 것이 바뀌고, 똑같은 공연은 한 번도 없는 그런 곳. 상황이 그 지경인데,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도 제대로 이해해 보겠다는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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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고슴도치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어릴 때는 어디를 가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때도 종종 길가에 죽어 있는 고슴도치를 본 적은 있었다. 그 많은 고슴도치를 모두 죽여 버린 건 뭐였을까?(...)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한 가지만 알고 있다고, 아르킬로코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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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란 누구인가? 원래 있던 곳에서 뿌리 뽑힌 채로 떠돌아다니는,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으로 '고향'에서 떠난 이들이다. 언뜻 보면 피난민들과 같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쟁 피난민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면이 있다. 새로운 주거지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되 자신의 전통과 삶의 방식은 지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배경과 삶이 묻히지 않게끔 '실존성'을 증명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실존성은 기존에 살고 있던 이들의 가치관과 달랐다. 미묘하게 다르다 해도, 똑같은 사이다라 해도 상표가 다르면 눈에 띄는 법이다. 아주 작은 차이로 인해, 혹은 큰 차이로 인해 이들은 눈에 띄는 인물들이 되어버렸다.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라는 말은 그럴듯한 말이기는 하나 잘 생각해 보면 무서운 면이 있다. 칼날로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지켜야 한다'고 완곡하게 말하면서, 칼등으로 짓누르고 있는 게 아닌가. 칼을 세우든 눕히든 칼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는 이 '시선'을 등지고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 결국 사람들은 디아스포라에게 등을 돌리거나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학살과 억울한 누명, 편견들이 생겨났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위 '세계화'라는 흐름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서로의 나라와 문화를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이해를 넓힐 수 있다는, 개방적이고 모던한 현대인이 되었다, 혹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세계화'를 정반대로, 자신의 나라에 온 사람들에게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라는 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따른다면 '차별'할 이유가 없을 텐데, 사람들은 또다시 거기서 다른 점을 찾아내어 그들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과거 민족 정신으로만 똘똘 뭉쳤던 이들의 힘이 갈 곳을 잃어가자 이상한 틈으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슬람 교도들에게 '일할 시간에 왜 기도를 하느냐'고 말하면서 그들을 답답하게 보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몰이해는 거울처럼 다시 되돌아 온다. 결국 소위 '개방적이고 모던'한 현대인들은 현대인들을 몰이해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스스로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기존에는 육체적인 디아스포라로, 육체적인 면만 해결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심적 디아스포라'가 되고 나서야 진정한 해결은 없다는 것을, 딜레마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현대인들은 소외되었다. 도브의 아버지는 현대인의 소외에 관한 글을 읽고 있는 도브에게 물을 뿌린다. 이미 수용소에서 자신이 디아스포라였다는 것을, 그들의 몰이해가 그들에게 반사되어 돌아간 것일 뿐이라는 걸 아는 도브의 아버지로서는 도브가 못마땅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간과한 것이 있다. 도브는 수용소를 몰랐다. 유대인이기는 하나 육체적 디아스포라를 겪지 못하고 심적 디아스포라에 빠진, 끊임없이 헤매이는 방랑자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레이트 하우스'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은 모두 심적 디아스포라다. 나디아는 R이 떠난 후로 드라이버를 가지고 다니면서 집 안의 나사를 모두 조이려고 한다. 이 행위는 단순한 이별 후유증이 아니다. R이 떠난 후 나디아의 방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R의 가구들과 물건들, 이는 나디아의 ''에 포함되어 있었다. 허나 R이 나감으로써 나디아는 '공허'를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의 공간이 이대로 '무너져 내린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그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마치 배가 풍랑에 휩쓸릴까봐 끊임없이 갑판을 맴도는 선장처럼 '방어 행위'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방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고, 결국 그녀의 친구의 주선으로 다니엘 바스키의 가구들을 빌리게 된다. 그 가구들은 그녀의 '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녀는 그 자신의 세계를 그대로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남편 S는 그녀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다. 끊임없이, 조심스럽게 노력하지만 그녀는 화분은 허락해도 S, 허락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 안에 '혼자' 서 있으면서, 타인의 침입을 허가하지 않는 인물은 나디아 뿐만이 아니다. 로테 버그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남편 벤더는 S와 달리, 그 한계를 느끼고 로테의 세계 주변에서 '평화롭게' 맴돈다. 하지만 다니엘 바스키의 '방문'으로 인해 벤더는 그가 알던 아내의 세계 안에 '침입자'가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로 인해 벤더는 아내를 시험하고, 어떻게든 그가 예상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바스키가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굳이 출장을 가지만 결국 그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다. 이 또한 그 자신의 세계에서 나온 시나리오일 뿐이라는 것을. 바스키와 아내의 관계는, 더 미묘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벤더는 아내가 '아기'를 낳았고, 입양시켰다는 것을 안 순간 자신이 알던 아내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과 동시에 '실망'을 느낀다. 다니엘이 그녀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아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에 대한 실망. 그러나 그 예상은 또다시 어긋나 버린다. 와이즈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모든 걸 걷어 젖힐 수 있을지도 모르는 연락처를 건네주지만 벤더는 그 연락처를 태워버린다. 결국 그녀의 세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간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설사 그녀가 죽어서 이제는 고정된 무언가로 남았다고 할지라도-깨달았기 때문이다.

와이즈는 디아스포라의 흔한 예시로 들 수 있는 유대인이다. 그 또한 그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요아브와 레아를 그의 세계 속에 가둔다. 그 곳은 태엽이 정지된 시계처럼 평화롭고 올바르다. 요아브의 연인 이자벨은 보이지 않는 막이 그녀와 와이즈 가족을 갈라놓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보그나가 유일하게 와이즈 가족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요아브와 레아를 위해, 집을 치우면서 그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와이즈의 세계는 굳건했다. 결국 보그나는 '사라지고', 이자벨은 추방당한다. 또다른 유대인으로는 도브와 그의 아버지를 들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육체적인 디아스포라를 겪었던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든 '뿌리'를 세우고자 한다. 그는 육체적인 추락을 겪어보았다. 그리고 정신적인 추락도. 하지만 그는 정신적인 '추락'은 끝이 없다는 것, 계속 떨어지고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육체성에 주목할 것을, 숨쉬고 먹고 움직이는 데 주력을 쏟을 것을 가르친다. 도브의 형인 유리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도브는 다르다. 그는 죽음에 대해서, 정신적인 추락을 겪는다. 그의 전우가 죽고 전우의 아버지가 도브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순간, 도브 또한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도브의 아버지는 그런 도브를 잡아 올리려고 하지만 도브는 거부한다. 어쩔 수가 없다.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이상, 바닥이 있기만을 기원할 수밖에는. 결국 추락하는 모두가 고슴도치가 될 것이고, 멸종할 것이다.

 

 

 

부재와 없음

 

하지만 그 책상은,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다. 그렇게 단출하고 작은 방에서 그 책상만이 무슨 엽기적이고 위협적인 괴물처럼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거의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그 물건은 반대편에, 마치 사악한 자기장에 맞서려는 듯 불쌍한 모습으로 한데 꼭 붙어 있는 다른 가구들을 겁주는 것만 같았다. 짙은 색 나무로 된 책상에는 상판 위로 서랍들이 벽처럼 붙어 있었는데, 중세 마법사의 책상처럼 하나같이 실용적이지 못한 크기의 서랍들이었다. 어느날 저녁 아래층 화장실에 간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그 서랍들이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두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나니 정말 그 책상이, 그 유령 같은 책상이, 책상이 아니라 한 척의 배처럼 보였다. 어디에서도 육지를 만날 수 없다는 절망 속에,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더 어두운 암흑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 그런 생각 때문에 그 책상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건, 항상 그렇게 생각했는데 대단히 남성적인 책상이었다. 가끔 아내를 데리러 갈 때면, 열린 문 뒤로 마치 아내를 삼켜 버릴 듯이 버티고 서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 물건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낯선 질투심을 느낄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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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그 방에서 잘 때, 책상 그림자에 가린 안쓰러울 정도로 작은 침대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깼지. 우리 위에 그 놈이 있었어. 어둡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놈이 말이야. 한번은, 서랍을 열어 봤더니 거기 썩어 문드러진 미라가 들어 있는 꿈을 꾼 적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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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세계에 자리잡은, 전염력이 높고 무시무시한 이 괴물은 무엇인가? 책상은 '연인'이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하며,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외형 때문에? 외형 뿐만이 아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책상에 대해 '한 마디'씩 덧붙임으로써, 여러 사람의 세계를 거쳐 가면서 책상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이는 그레이트 하우스’, 이 책의 제목과 같은 환상 체계를 지니고 있다. 이 위대한 집은 모두의 환상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커지지만’, 도브의 상어처럼 유한한 환상이다. 결국 모두들 깨닫게 될 것이다. 단순히 형용사를 앞 뒤로 붙인 것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결국 허상, 그 뿐이라는 것을. 다니엘 바스키는 나디아에게 '로르카가 쓴 책상'이라고 말한다. 로르카가 쓰고, 다니엘 바스키가 쓴 책상. 나디아는 다니엘이 R처럼 영영 떠나는 게 아니라 책상을 맡겨둠으로써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희망은 그녀의 세계의 중추에 자리 잡는다. 그녀는 책상의 잠긴 서랍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하고, 그 책상이 없어지자 ''을 못 쓰게 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책상을 대체할, 다니엘을 대체할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찾게 된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아담'은 딱히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가 레아를 보고 '다니엘'의 딸이라고 '확신'했듯이, 그녀는 아담에게 다니엘의 환상을 씌운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다니엘이 아니었고, 그녀의 환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 반대로 로테는 남편인 벤더에게 책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으로써 책상이라는 이미지를 더 '무겁게' 만든다. 벤더는 로테의 전 애인이 그녀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로테에게 ''를 내는 대신, 그 책상을 질투한다. 그가 그녀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로테 때문이 아니라, 그 책상 때문이라는 듯이. 그리고 그 책상이 다니엘 바스키에게 갔단 소리를 듣고, 그는 '안도' 대신 불안함을 느낀다. 책상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테에게는 그 책상이 그가 생각하는 만큼 무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디아와 달리 절필하는 대신, 창고에서 또다른 책상을 가져와 쓴 것처럼. 하지만 벤더는 로테의 '짐작'을 그대로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그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책상', 그녀의 세계 중심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그 괴물을 무시하는 순간 그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고 믿는 로테의 세계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와이즈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구를 그대로 '되찾아 주는' 능력을 지닌 골동품상이다. '되찾은 물건'은 기존 물건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게 낡고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을지라도. 와이즈는 그의 아버지가 끌려간 순간의 집을 그대로 복원시키려고 한다. 요아브와 레아 또한 와이즈의 세상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만약 그 순간이, 다시 온전히 되돌아 온다면 어떨까? 그러면 '온전히' 소유한 것이 되는가?

잃어버리고, 되찾는다. 이 행위에 대해 지젝은 날카로운 지적을 던졌다. 현대인의 우울증 증세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졌던 ''하면서, '잃어버린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말을. 그로써 그 물건을 '소유'하고자 하는, 편협한 행동이라고 했다. 그게 책상이나 화장대 거울이라 할지라도, 물건은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건이 기억의 조각이라고 믿고 그 기억의 조각을 '끌어 모은다면', 그 자신을 다시 세우거나 본질을 알아낼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되찾으려고 한다. 이는 결국 본질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와이즈는 그의 가족으로서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레아와 요아브를 태엽 속 세상에 가둔다. 레아는 와이즈가 찾는 '마지막 기억의 조각'인 책상을 몰래 빼돌리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면 그녀 자신의 본질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레아와 요아브는 와이즈가 죽은 뒤 깨닫게 된다. 결국 그들 자신의 뚜렷한 본질은 없다는 것을. 도브가 쓴 소설 속의 '상어'처럼, 사람들은 상어에 그들의 고통을 다 쏟아붓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상어는 언젠가는 죽는다. 소설 속에서 천천히, 수조에 물이 새서 죽어간다. 결국 그들을 정신적 추락에서 구해줄 '본질'이라는 발판은 없다. 고통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이들 모두 '부재''없음'을 착각한 것이다. '다르다''틀리다'를 오용하는 것처럼. 없다는 것은 정말 없는 것이고, 부재는 내 곁에 있던 무언가가 잠깐 떠났고 다시 '귀환'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없음은 그 자체로 절망, 절망이지만 부재는 미묘한 희망을 준다. 나디아는 다니엘을 '부재'한 상태로 만든다. 그의 책상을 지킨 채로, 다니엘이 언젠가는 '귀환'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가 전해준 대로 다니엘은 실종되었고, 다시는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 왜 남편인 S에게는 그런 희망을 품지 않았는가? 남편인 S'살아 있고', 그녀의 희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부재했고, 그녀는 다니엘의 '부재'로 그를 '소유'했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다니엘은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그녀가 찾는 대리 환상은 '아담'이다. 아담은 그녀에게 '늙은 여자'라고 가차없이 쏘아붙이면서 그녀의 환상을 깬다.

로테와 벤더 또한 마찬가지다. 벤더는 로테가 아침마다 들어가곤 하는 '수영 구멍'의 끝없는 어둠 속을 들여다 보면서, 그녀가 잠깐 자신의 곁에 '부재'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당초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세계는 그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재'처럼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고, 언젠가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진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와이즈가 적어준 연락처를 버린다.

처음부터 나디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본질이 '있다'라고 생각하기 위해서 '부재'의 상태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녀는 꿈에서 빨간 실을 잡아 당긴다. 그 끝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걸 믿으면서, 언젠가는 이 기묘한 행위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허나 꿈에서 그 끝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깊숙한 곳에 있는 실까지 끌어당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으로, 그 실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벤야민이라면 이렇게 '실을 잡아당기는 행위'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회의적이다.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와이즈는 '부재'가 아니라 '없다'는 진실을 절절히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카이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하나의 개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개념은 사실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그저 그 일부분이라고 예상되는 파편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결국 하나의 진실을 드러낸다. '지금은 없다'는 것을. 부재가 아니라,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시니컬하고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본질이라는 발판은 없다. 나디아가 무용수의 그림을 보고 '그 본질'을 소설로 써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그저 '눈가리개'밖에 되질 않는다. 무용수는 그녀에게 그림을 떼어버렸다고 했다. 이는 그녀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한 언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모욕감을 느낀다. 이는 그녀가 내놓은 '본질'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추락은 계속 된다. 그 추락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한다. 나디아의 전 남편 S, 그리고 그녀의 차에 치인 도브도. 이 얼마나 잔인하고 헛된 희망일까.

도브의 아버지는 도브가 추락하지 않기를’, 차라리 추락한다면, 육체적으로 추락하기를 바란다. 육체로서 부딪친다면, 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으로 추락하는 순간, 끝은 없어진다. 동시에 끝이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도브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뒤늦게 깨달은 부성애가 아니다. 애당초 도브의 아버지는 도브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정신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도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희망의 소실점

 

결국 희망은 없다. 와이즈가 연 책상 서랍에는 아무 것도 없다. 편지도 글도 없다. 괴물의 심장도 없다. 벤더가 처치하고 싶어했던 그 책상, 사실 그 책상은 괴물이 아니었다. 책상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고, 책상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그 책상에 덧씌운 '허상'일 뿐이었다. 와이즈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되찾아 주는 것', 진짜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환상이다. '되찾는다'는 희망은 없다. 되찾아도 '본질'은 되돌아올 수 없다. 레아는 그녀의 아버지를 '이겨서' 관문을 통과해 '성인'이 되려고 하지만, 결국 역으로 아버지에게 사로잡힌다. '없다'라는 절망으로.

 

결국은 아버지가 이긴 거라는 사실을 이해했어요. 마침내 아버지는 우리가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방법을 찾은 거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빠와 나는 예루살렘의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삶을 멈추었죠.

160

 

그런 마주침을 경험하는 다른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지만, 그 순간은 여전히 놀라웠다. 실망감,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무언가가 서서히 가라앉는 듯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397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하나의 희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니콜 크라우스는 이 '그레이트 하우스'에서 최소한, 하나의 사랑만큼은 지켜내고 있다. 요아브와 이자벨, 이 둘은 서로를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서 자기 자신을 붙잡는다. 뿌리를 내릴 땅이 없다면, 서로에게 뿌리를 내리면 된다. 물론 풍랑에 휩쓸려 정처없이 어디론가 떠내려 갈지라도 그들의 존재는 '부러지거나' '흩어지지 않는다'. 요아브는 이자벨에게 열대 지방으로 가서 주스를 팔면서 살자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헛된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말이다. 둘이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는 요아브와 이자벨 둘 다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에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이자벨은 그녀의 한계에 맞부딪치고 그녀 자신의 '본질'이 과연 굳건한 것인지 스스로 질문해 보고 있었을 때, 요아브만이 그녀를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해 주었다.

벤야민은 희망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 바깥, 소실점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소실점을 향해 간다. 하지만 그 소실점을,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다. '순간'만을 겪을 수 있을 뿐. 그 순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순간''기억'으로 바꾸어 '잃어버린다'. 첫사랑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내내 연연하다가 다시 찾으려고 여행을 떠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읽은 적 있다. 그 남자는 첫사랑과 대면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만큼의 '기쁨'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한다. 차라리 찾지 말 것을, 왜 첫사랑을 다시 보고자 했는지를 후회한다. 결국 '환상'이란 없다. 레아는 아버지에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깨진 후, 요아브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자벨'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역설적이면서도, 결국에는 희망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인 것이다. 요아브는 이자벨에게서, 이자벨은 요아브에게서 각자의 '대답'을 찾는다. 서로가 서로의 대답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행위로 작용하고 있다. 로테의 아들을 입양한 피스크 부인은 아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 ‘지켜주는 엄마로 만들고자 한다. 그녀는 로테가 다시 찾아와서 아이를 돌려달라고 할까봐 겁을 내고 아이에게 끊임없이 정을 쏟는다. 하지만 죽음,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조용해진다. 죽음이 한계인 것이다. 도브의 아버지가 죽음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할 게 없을 것이라고 말하듯이. 오로지 인간은 살기 위해서움직인다고. 피스크 부인은 테디가 로테의 아들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아들이었음을 말한다. 이미 로테가 친어머니라는 환상보다 테디, 육체적으로 그녀와 더 가까웠기 때문에. 연결고리가 진짜이든 아니든 간에 서로 붙잡은 순간진실이 된다. 요아브와 이자벨은 아기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온 세상에서 그분만이 제가 느낀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고서야 깨달았네요. 피스크 부인이 말했다. 그분도 절대 모를 거라고, 제 아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373

 

 

자신에게 맞는 어떤 여자, 어쩌면 여러 명의 여자들을 만나면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그 아이가 자신을 쏟아부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또 다른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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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8-07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 관계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개체들이,
보이지 않는 인드라 망에 걸린 듯,
서랍 열 아홉 개의 책상과 얽힌 이 위대한 집이 우리 사는 세상일까요?
아주 멋진 리뷰를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