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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포기하지 않기에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고독의 하모니에 반박하는
포기했기에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제3의 하모니
그리고,
허들링Huddling
-가즈오 이시구로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위안은 프롤로그지만, 위로는 에필로그다. 위안은 받는 순간 미소 짓게 되는, 예상치 못했던 작은 선물이지만 위로는 받는 순간 벅찬 기대를 하게 하면서 여는 순간 한숨을 부르는, 커다란 만큼 그 실망도 큰 선물이다. 두 단어는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무게나 사용에 있어서 상당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개나 고양이 같은, 인간과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동물이나 사물들은 위안을 줄 수 있지만 위로는 주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인간에게 위로해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위로를 통해 모든 걱정들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어떠한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해결책을, 들으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위로를 듣길 바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위로를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듣길 원한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신에게 '방법'을 구하는 걸 들 수 있겠다. 허나 근대, 모던 타임즈는 신을 연극 무대의 기계장치로 폄하하면서 그 지위를 격하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덫에 걸려들게 된다. 이제, 누구에게 위로를 구한단 말인가?
'멘토 열풍'은 이 '위로를 구하는 이들'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유명하거나 능력이 있는, 성공한 이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충고를 듣고자 한다. 단순한 위안이라면 굳이 멘토를 구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있는 타인들, 부모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덫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정답을 알기 위해 사람들은 안철수, 박경철 등 경제적-사회적 우위에 있는 멘토들을 원한다. 수많은 멘티들이 그런 멘토를 원하고, 결국 멘토들은 많은 멘티들에게 최대한 그들을 다 포괄할 수 있을 만한 답변을 내놓게 된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멘토로서 애쓰고 있는 것이다. 다만 멘티들은 이에 부족함을 느낀다. 결국 더 많은 멘토, 더 많은 위로를 원하게 된다. 허나 어떤 위로도 '충분'해질 수 없다. 의무교육에서 오지선답의 삶에 익숙해진 그들에게, 모든 답을 다 불러 봤으나 결국 정답이 없다는 말은 원망과 좌절을 불러온다. 모 대통령은 수해민에게 '마음을 편하게 먹어요. 기왕에 (수해가) 된 거니까."라고 말한다. 허나 수해민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편안하게 먹을 수 있어야죠." 섣부른 위로는 선이 아닌 악이 되며, 이보다 해가 된다.
그렇다면 온전한 위로는 과연 가능할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들은 인물의 상처와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음악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소명제에서 예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명제까지, 그 방법은 자못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결말에서는 '실패'하게 된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 소녀는 '네버 렛 미 고Never let me go'라는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꿈꾸지만 그들을 장기로만 보는 사람의 귀에는 좀 더 발달된 과학이 죽음을 붙잡기 위한 노래로 들릴 뿐이다. 음악을 테마로 다룬 단편집 '녹턴'에서 조용하고 잔잔하게 되풀이되는 내용 또한 끝없는 실패를 그리고 있다. 그 실패는 너무 당연하고 허무해서, 몇몇 사람들은 이 단편집에 대해 '정적'이라고 평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번 작품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 끝은 실패다. 허나 그 실패는 아름답다. 실패와 실패의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작품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가린다. 실패 아닌 실패인가, 아니면 실패인 실패인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나란히 놓여 있지 않고, 독자가 본다는 전제 하에서-독자와 소통하면서 나온다. 어떤 하나에 대답하는 순간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하는 듯한 또다른 질문이 나오고, 사람들은 어디에서 날아올 지 모르는 테니스공에 과민해진다. 실제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힘겹다고 느꼈고, 주변 사람들에게 괜히 짜증을 내기도 했다. 허나 테니스공을 쳐내지 않는 이상 경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 테니스공은 바로 가즈오 이시구로가 우리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이며, 동시에 모던 키즈에서 모던 피플로 자라난 현대인들이 빠진-자기 자신의-덫이다.
괜찮아질 거야/힘내/넌 할 수 있어/난 널 믿어/넌 정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내년에는 좋아질 거예요/정신 차려-이와 같은 흔한 위로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라이더가 도착한 한 마을의 사람들은 라이더가 오기 전부터 그를 필요로 한다. 아주 소소한 시민단체와 만나는 일에서부터 백작부인의 집에 가서 레코드를 듣는 일, 그리고 지극히 사적인 일까지. 그들은 예술을 사랑하기 때문에 라이더 또한 사랑한다고 말한다. 허나 그들이 예술을 사랑하든 말든, 그들의 마을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사실은 그들에게 상처가 된다. 어떤 훌륭한 예술가가 이 예술을 사랑하는 마을에 와서 꽃을 피우고, 또 이 마을에 그의 이름을 붙여 주지 않을까.
페더젠 의원과 호프만은 그런 염원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바이올린 연주자에 불과한 크리스토프를 추켜세웠다. 허나 크리스토프가 마을에서 인정받는 바이올린 선생 리프리히를 '인정'하지 않는 순간, 크리스토프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하게 바뀌고 만다.
"아아, 그렇군요. 리프리히 씨의 불행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요. 리프리히 씨는 크리스토프 씨가 오기 전에 오랫동안 우리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바이올린 선생이었답니다. 이 도시의 명문 자제들을 가르쳤고, 높은 평가를 받았지요. 그런데 크리스토프 씨는 첫번째 연주회를 마친 지 얼마 되기도 전에 누군가가 리프리히 씨에 대한 의견을 묻자, 리프리히 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답니다. 리프리히 씨의 연주도 그렇고 가르치는 방법도 마음에 안 든다고 말입니다. 리프리히 씨는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실상 모든 걸 잃어버린 상태였지요. 제자, 친구, 사회적 지위...... 리프리히 씨 경우는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른 한 가지 사례일 뿐입니다. 우리가 크리스토프 씨를 처음부터 잘못 파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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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라는 우상은 그들에 의해 철거되고 만다. 과거와 현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이 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면서 손쉽게 '신'을 바꿔치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무시받기 일쑤였던 늙은이 브로즈키를 그 다음 타겟으로 삼는다. 백작부인이라는 고귀해 보이는 인물의 주도 하에서. 브로즈키의 '예술'을 다시 한번 꽃피우겠답시고 호프만은 호텔의 휴게실을 브로즈키에게 내주며 목요일 밤 행사를 기획하고, 라이더를 초청하기까지 한다. 라이더의 '인정'과 '연주'로, 목요일 밤 행사가 더 빛나고, 그들의 마을이 '특색'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이와 같은 '마을 전체의 상처' 뿐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상처 또한 라이더를 필요로 한다. 라이더의 옛날 지인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라이더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위로를 바란다. 제프리 손더스는 과거 라이더보다 우위에 서 있던 사람이었으나 어떠한 고난으로 인해 지금은 가난하고 외로운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호소하고, 라이더가 난관에 부딪쳤을 때 라이더만이 괴로운 게 아니라고 말하며 역설적으로 그 자신의 상처에 대해 자랑한다. 피오나 또한 라이더에게 '우리를 실망시켰다'고 말하며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서 손상된 자신의 지위를 라이더가 되찾아 달라고 요구한다. 파크허스트는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광대'가 아니며, 그걸 원치도 않는다는 걸 라이더가 알아주길 원한다. 허나 라이더가 그들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그건 다 '실패'로 돌아갈 뿐이다. 피오나와 함께 아파트 주민들을 만나러 가지만 그들은 라이더가 진짜 라이더라는 걸 알지 못하고 파크허스트는 라이더에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쏘아붙인다.
구스타프와 소피, 보리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라이더의 '가족'이다. 라이더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여행을 다니며, 그들에게서 도피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그들과 마주했을 때 라이더는 어떻게든 그들을 '위로'하려고 한다. 보리스에게는 9번 선수를 찾아주려 하고 구스타프에게는 소피와 다시금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소피에게는 그가 더이상 여행을 떠나지 않고 머무를 것이라는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
라이더 또한 '위로'를 필요로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 제프리는 그에게 '엄살을 부린다'고 말하고 소피는 위로해주는 듯하면서도 이내 자신의 문제로 돌려 버린다. 보리스와 함께 9번 선수를 찾기 위해 아파트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그는 이 모든 상황이 곧 있으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버스는 사람을 싣고, 그 사람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 그렇다면 라이더 또한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아파트에서 그는 9번 선수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마을 주민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모든 '혼란'을, 슈트라트만 양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슈트라트만 양이 그에게 이런 버거운 일을 맡길 것이었다면 라이더 자신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행정적 도움' 또한 줄 수 있어야 했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은 콜린스 여사와 라이더, 둘밖에 없다. 라이더는 결국 자신의 상처에만 골몰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만다.
"이 작은 도시에서 당신들이 이런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게 과연 놀랄 만한 일인가요? 당신들 가운데 일부는 그 문제를 '위기'라고 부르더군요. 이 도시에서 그렇게 많은 시민이 그토록 불행하고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는 게 이상한 일인가요? (중략)바꿔 말하면 당신들은 이 도시 공동체의 하찮은 내부 혼란에만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거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우리한테는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보이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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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위로를 받으려고만 할 뿐, 위로하려고는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들은 크리스토프가 입게 될 상처는 신경쓰지 않았다. 호프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브로즈키의 '성공'을 꾀하는 척하면서 그의 '실패'를 바랬다. 호프만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였다. 호프만은 아내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목요일 밤 행사를 '실패'시켜야 하고, 그 실패로 성공까지 가는 길을 조금 더 지연시켜야만 한다. 만약 성공에 이르게 된다면, 아내는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브로즈키는 타격을 입는다. 또한 콜린스 여사와 브로즈키가 서로를 '위로'하려고 다가선 순간, 브로즈키의 '위로'는 콜린스 여사에게 향할 뿐 타인에게 향하지 않게 된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9번 선수를 잃어버린 보리스에게 아파트 주민은 부부 싸움을 상세하게 묘사해 주며, 그 말을 듣지 않게 하려는 라이더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소리친다. 그들은 위로하려 하지 않는다.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이라는 이름의 오만한 공포를 휘두르며, 그들이 아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외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상처가 더 크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행동 앞에서 사람들은 지극히 냉담해진다. 라이더 또한 소설이 전개되어 갈 수록 사람들의 요구에 지쳐가고, 위로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한다. 자틀러 기념관에서 찍은 사진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지위'가 격하되었다고 생각한다. 페더젠 또한 그의 그런 행동이 결함이었다고 지적한다. 라이더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변명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콜린스 여사 또한 수많은 이들의 '걱정'을 들어주었으며 끊임없이 '위로'를 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누군가의 '상처'를 짊어지는 데에 진력을 냈고 끝내 브로즈키의 요청을 거부하고 만다. 수많은 위로들이 있었으나 어떤 위로도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위로 앞에서 끊임없이 '그게 아니다'라고 부정하면서, 위로하는 이들의 의지마저 꺾어놓는다. 호프만은 그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해 한탄하며, 그 모든 탓을 '슈테판'에게 돌린다. 슈테판이 사실 진짜 연주를 잘 한다 할지라도, 호프만 자신이 느끼는 불행 때문에라도 슈테판은 '실패자', 희생양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라이더는 슈테판의 진면목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려고 하지만 호프만은 계속 부정한다. 라이더는 호프만이 정한 ‘시나리오’에 따라서만 움직여야 한다. 호프만의 ‘허락’을 벗어난, 가령 슈테판을 인정하는 등의 ‘벗어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 ‘벗어난 행동’은 호프만 자신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호프만 씨, 슈테판은 아주 재능있는 젊은이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있는데, 그런 인사치레로 나를 모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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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takes all people to the heaven
플라톤은 '음악'을 두고 모든 예술들 가운데 가장 수학적이고 이데아에 가까운, 진정한 '예술'이라고 여겼다. 그만큼 '음악'은 어떤 논리가 개입하기 힘든 예술이다. 예술 분야 중 가장 많은 '장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생활의 어떤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다. '고정된 형식'은 나오는 즉시 반발을 받고, 어떠한 음악도 '상위권'에 머무를 수 없다. 또한 논리적인 언어가 '소통의 장벽'을 두고 있는 반면 음악은 귀만 있다면, 혹은 귀가 없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을 가능할 수 있게 해준다.
마을 사람들이 '음악'을 그들의 마을을 되살릴 '예술'로 지정한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들의 상처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시리다.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라이더의 사적인 '위로'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그들은 '음악', 그들의 '연주'로 치유받고자 한다.
허나 크리스토프의 실패 뒤, 사람들은 회의를 느낀다. 극장에서 라이더는 페더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소개받는다. 그들은 술에 취한 채로 카드놀이를 하며, 영화에는 별 관심도 없어보인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이미 너무 많이 튼 고전 영화다. 라이더 또한 그 영화를 좋아한다. 라이더는 그 영화를 감상하고 싶어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테오는 크리스토프에게 빼앗긴 로자 클레너에게 빠졌던 과거의 자신을 부정한다. 크리스토프가 추락한 이상, 로자 클레너와의 추억은 이제 그에게 어떠한 '이점'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다시 브로즈키라는 우상을 세우려는 페더젠에게 '반박'한다.
"당신은 거짓말을 둘러댔어요! 무려 17년 동안이나. 17년 동안이나 크리스토프가 제멋대로 일을 처리해도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요. 그래 놓고는 이제 와서 우리한테 브로즈키를 내놓는 겁니까? 브로즈키라니! 라이더 씨, 이젠 너무 늦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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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더젠은 테오의 반박에 '반박'하며, 라이더와 함께 극장 밖으로 나간다. 그들이 나갈 즈음에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만능로봇 HAL은 해체되기 직전을 앞두고 있었다. HAL은 발달된 시대의 증거물이자 모든 사람들의 꿈-우주로 나가고자 하는-이다. 허나 HAL이 인간을 죽인 순간, HAL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는 사라지고 만다. 결국 사람들은 HAL을 파괴한다. 이는 이 마을에서도 되풀이되는 '비극'이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계속 상영하는 것은 그렇기에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라이더는 계속 '위로하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는 위로를 멈추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이는 지극히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예술로 위로를 받고자 하는가? '천재'라는 개념만 봐도 알 수 있다. 천재는 하늘이 내려주신 인재,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에 가까운 인물이다. 사람들은 '천재'를 받들고 질투하며 동시에 사랑한다. 천재들 또한 그들 자신이 천재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들은 신에 더 다가가고자 하며, 그들의 예술은 그럴 수록 점점 더 가치있게 되는 것 같이 보인다.
허나 신은 인간과 다르다. 신에게는 '고향'이 없다. 라이더는 '좁은 세계'를 거부한다. 그의 가족과 소피, 보리스를. 하지만 그는 '인간'이다. 모차르트는 천재였으나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인간들은 '천재'가 인간 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신'으로부터의 위로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호프만 부인 또한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계시처럼 내려오는 '위로'를 원한다.
"갑자기 끈이 툭 끊어져 두꺼운 커튼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새로운 세계가, 햇볕과 따스함으로 충만한 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런 걸 믿는 제가 미친 건가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한순간, 정확한 한순간이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걸고 믿는 게 미친 짓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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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녀의 갈망을 단순히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는 건 속단이다. 문학 속의 수많은 여인들, 보바리 부인과 테레즈들도 '새로운 세계'를 원했다. 그들의 '갈망'을 헛된 여인네들의 공상이라고 치부할 순 없다. 모든 사람들이 위로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여태까지는 잘못이었고, 앞으로는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는 위로를.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의 상처에만 탐닉할 뿐, 타인의 상처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속칭 '오지랖 넓게' 타인의 상처에도 관여하는 라이더는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말은 듣지 않으려 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는 염증보다 더 심한 '반감'을 느낀다. 허나 라이더가 꿈꾸는 예술은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지, 그 자신을 위로하지는 못한다. 이는 수많은 이들이 되풀이했던 질타,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라이더는 천재 피아니스트지만,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그는 과거 부모님의 불화 앞에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한, 무력한 어린아이였다. 그는 결국 가족과 소피, 보리스를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난다. '좁은 세계' 대신 '넓은 세계'로 나가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허나 브로즈키는 '넓은 세계'에서 하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대신 자신의 '좁은 세계', 콜린스 여사에게로 돌아오고자 한다. 브로즈키가 지휘할 수 있게 된 순간은 바로 그가 그 자신의 상처를 인식했을 때부터였다.
그가 그 자신의 상처를 인지하고, 그의 주변을 둘러싼 호프만의 계략을 인지한 순간 어느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브루노의 죽음을 추앙하지만 브로즈키는 브루노가 그저 '개'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무덤의 미망인은 그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남편의 죽음을 부정하고자 라이더에게 신경을 쓰지만, 라이더에게 아무리 신경을 써도 그 슬픔은 메워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라이더를 탓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호프만은 라이더를 탓하는 대신 미망인에게 '라이더'를 신경쓸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슬픔에 신경쓰라고 말한다. 그의 광기어린 연주 앞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던 아름다움 대신 '실재 너머의 진리'를 인지하게 된다. 객관적인 현실 너머에는 우리가 인지하고 싶지 않아했던 실재가 있었고, 실재 너머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진리가 있다. 그건 바로 그들 모두가 '위로'를 받고자 했던, 지극히 이기적이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라이더가 결국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지극히 이기적이고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연주를 하려고 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에게는 연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며 환대를 받으며 도착해야 할 그의 부모님은 오지 않는다. 또한 구스타프는 죽었고 소피마저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만다. 그가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으로 내놓은 '연주'는 시도조차 해보지도 못하고 그는 실패한다. 그는 좁은 세계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좌절한다. 신과 인간의 간극 앞에서, 예술가는 좌절하게 된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공간은 이와 같은 부조리와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라이더가 다른 장소인 줄 알았던 곳은 사실 호텔이었고 연주회장까지 가는 길 앞에는 벽이 둘러서 있다. 게다가 그 벽은 관광 상품이기까지 하다. 그가 찾아다녔던 슈트라트만 양의 사무실은 연주회장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소피와 보리스, 그가 카르빈스키 미술관에서 나가려고 여는 문들에서는 이상한 것들이 튀어나온다. 마치 앨리스가 토끼의 집에 떨어졌을 때처럼, 그들이 나갈 수 있는 문은 진짜 출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작은 문'이었다. 또한 라이더가 '위안'을 얻는, 그를 어디로든 데려다 줄 '버스' 또한 결국 노선대로 순환할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소설의 모든 것들은 예술마저도 '위로'는 불가능하고, 사람들은 계속 자신의 상처에만 탐닉하며 위로하려는 이들은 위로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내 곁에 있어줘
왜 사람들은 '위로'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상처가 나면 마데카솔을 바르고 그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혹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도록 대일밴드를 붙인다. 타인에게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아하면서도 약점을 드러내 공공연히 위로를 받고자 하는 이와 같은 행위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결국 모두 서로를 위로하다가 지쳐버리고 계속 자신의 상처가 타인보다 더 크다는 것을 드러내기만 할 뿐인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위로'라는, 헤어날 수 없는 덫에서 나름대로 두 가지의 대안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바로 '포기'다. 위로를 포기하고, 위안을 택할 것. 브로즈키는 콜린스 여사에게 찾아가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말한다. 콜린스 여사는 그에게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둘 사이의 해묵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브로즈키는 '옛날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말한다. 해봤자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가 없으니 대신 '애완동물'을 기르자고 말한다.
"그게 나한테 어땠는지 당신은 알 수 있을 거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때로는 너무 끔찍해서 죽고 싶었소. 그냥 끝내 버리고 싶었소 하지만 이번에는 길이 보였기 때문에 계속한 거요. 내가 다시 지휘자가 되면 당신은 돌아올 거다. 다시 옛날처럼 될 거다. 아니, 어쩌면 옛날보다 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때로는 끔찍했소. 벌레 같은 자식들....더 이상 어떻게 해야 그걸 증명해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소. 우리는 자식이 없소. 그러니 동물을 키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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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들여다 봤자 서로의 상처만 들쑤시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브로즈키는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서로의 상처에 집중하는 대신, 전혀 다른 것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서로 '집중'하는 게 아닌, 서로 '공유'하는 것을 통해 사랑을 이어나가자고 하는 것이다. 공격적인 두 직선 위로 하나의 점이 생기고, 삼각형이 생긴다. 그 삼각형을 통해 그들의 관계는 입체적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행위는 브로즈키가 말했듯 그 자신의 상처를 인식하는 데에서 있다. 타인의 상처에 탐닉하거나 자신의 상처에 탐닉하거나, 어떤 것도 결국 상처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인지하는 순간,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얻게 된다. 브로즈키가 이전에 잘렸던 그 자신의 다리를 인식하고, 그 다리에 더 깊은 상처가 생겼어도-설사 다리미판으로 목발을 대신했더라도-그는 지휘하려고 한다. 이는 그가 그 자신의 상처를 극복했다는 것을, 콜린스 여사와 함께 '동물'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이'와 '동물'은 다르면서도 같다. 슈테판 또한 호프만이 원했던 '해결책'이었다. 허나 호프만은 슈테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슈테판은 그들보다 '오래 살 것'이며, 그들의 의지와는 다른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슈테판은 호프만과 이 '마을'을 극복하고 넓은 세계로 나가겠다고 말한다. 그건 라이더가 정해준 '위로'가 아니었다. 슈테판 자신이 정한 것이었다. 슈테판은 그래도 라이더를 원망하지 않고,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라이더는 그에게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동물'은 말이 없고 인간보다 비교적 짧은 삶을 산다. 물론 그들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슬퍼한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 있는 순간, 그들은 인간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을 보여주며 인간 또한 그걸 알기 때문에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기대'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저 콜린스 여사와 함께, 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동물’과 ‘아이’의 닮은 점은 역설적으로, 둘 다 어느 정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동물 나름대로의 ‘짧은 수명’과 ‘인간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아이는 어느새 자라서 ‘아름다워질 것이며’, 그들에게서 ‘독립해 나갈 것이라는 걸’. 호트만과 호프만 부인의 아들인 슈테판은 그들에게 얽혀 있었고 이 마을에 묶여 있었다. 허나 슈테판이 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면서 그는 그들에게서 끝내 ‘독립’하게 된다.
하지만 콜린스 여사는 브로즈키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한 것을 본 순간 깨닫는다. 그녀는 브로즈키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우위에 서 있는 척했지만 사실은 그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타인을 위로할 만큼 '우위'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브로즈키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친다.
그리고 라이더 또한 마찬가지로 거절당한다. 구스타프의 죽음 뒤에 소피는 더이상 누구의 위로도 받기를 거부한다. 구스타프가 예전에 소피를 위로하기를 '포기'하고, 둘 사이에 오랜 시간동안 그 '오차'를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말과 행동이 있었지만 결국 위로는 실패했다. 소피는 더이상 라이더를 포옹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보리스는 다르다. 보리스는 라이더에게서 오는 '위로'를 '위안'으로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라이더가 준 책을 보며 감탄하고 9번 선수를 찾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 소설에서 그에게 진심으로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보리스 뿐이다. 보리스는 소피에게 그들은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위안'을 위해서다. 허나 소피는 끝내 거부한다.
거부당한 라이더는 그러면 브로즈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허나 아직 두 번째 대안이 있다. 그는 그를 '다른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다 주는 '전차'를 탄다. 그리고 그 '버스'에서 그의 부모님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사내를 만난다. 그는 그의 부모님을 봤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대신 그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에게 '밥'을 먹으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 마주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축구나 그 밖에 우리가 좋아하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밖에서는 태양이 점점 높이 떠올라, 거리와 우리가 앉아 있는 창가를 환히 비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완전히 끝냈을 때, 음식도 배불리 먹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모두 끝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전기공 사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 내가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어 낼 것이다. 우리는 악수와 함께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그는 자기도 이제 곧 내려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그동안 앉아 있던 자리를 떠나, 승강구 주위에 모여 있는 쾌활한 승객들 틈에 끼어들 것이다. 이윽고 전차가 멈춰 서면,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고 나서 전차에서 내릴 것이다. 이제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헬싱키로 떠날 수 있겠다고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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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라이더는 헬싱키에서도 또다시 '좌절'을 맛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이 희망은 확실하지 않다. 확실함을 포기했기 때문에, 희망은 성립 가능하다. 지나치게 영리한 현대인들이 '온전한 것'을 포기하는 대신, '온전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 사소한 포기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따뜻해진다. 자신의 어려운 사정에만 한탄하는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도우려고 애쓰는 것,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대신 타인의 상처를 감싸는 것. 우리는 이타적인 타인만을 원할 뿐, 이타적인 자신을 꿈꾸지는 않는다. 지극히 이타적일 필요도 이기적일 필요도 없이 '불완전한 상태'로, 애매한 상태로 놓여 있는 건 어떨까.
현대의 수많은 화젯거리들이 그러하고, 한국의 '정치'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젊은 세대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 중 자신이 좌우파라고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왜 가릴 수 없을까. 좌우파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그들 자신의 정치 의식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일까? 오히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정치 의식', 주관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대신 자유롭다. 이로 인해 얻는 단점도 있으나, 그만한 장점도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소설의 결말을 온전히 내놓는 대신 애매하게 끝내며, 사람들에게 애매한 방향을 가리킨다.
나는 이 두 가지 방안 중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가즈오 이시구로보다 더 애매하게, 나는 그 ‘중도’를 제시하고 싶다. 바로 허들링(Hudding)이다. 현재 극찬리에 방영중인 ‘남극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펭귄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이는 본능적이고,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슬프다. 아무 것도 모르는 타인에게 의지해야 하고 그 의지는 우리를 추운 밖으로 밀어낼 수도, 따뜻한 안으로 들여보낼 수도 있다. 허나 확실한 것은 허들링의 특성상 언젠가는 추위와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인지하고 있어야만 타인과의 허들링이 가능하다. 포기함으로써 생존의 가능성을 찾는 것.
물론 그 방향이 온전한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허나 그것이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적어도 그것은 '해답'까지 인간이 스스로 나아갈 수 있게끔 북돋아 준다. 제3의 점, 희망의 소실점을 향해서, 우리는 천천히 움직일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