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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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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정적인 윤리의 감각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을 읽고

 

 

 

 

 

 

  우리는 샤를리이면서도 샤를 리가 아니다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대상이 분명히 있고, 그 대상을 해치우면 두려움의 감정도 해소된다. 반면 불안은 불안해하는 대상을 규정할 수 없으며, 그 대상으로 추정되는 이를 해치운다 하더라도 불안의 씨앗은 또다시 자라난다. 신이 사라진 시대의 현대인은 모두 신경증자다. 그들에게 신은 이제 사회 시스템이고, 타자이고, 직장이다.

  인플레이션 우주론을 반박하며 미세조정법칙을 논하는 기독교과학론자들은 완벽한 공식을 꿈꾼다. 이성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들 또한 결국 이들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공식의 환상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샤를리 엡도가 테러를 당한 이후 사람들은 나는 샤를리 엡도라고 자처하며 샤를리 엡도를 모든 압력에 거부하고 억울하게 탄압당한 예수의 상으로 만들었고, 스스로 십자군이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점점 의심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테러의 주범들 중 백인이 나타난 것이다. 피부색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인종차별반대주의자들은 경악한다. IS의 대두는 그런 이들에게 사실 구원과 같다. 그들은 이슬람을 악의 종교로 만들고 그 종교에 세뇌된 특정 백인들이 테러를 저지른다고 믿는다. 평범한 백인은 바이러스에 당해 악인이 되는 것이고, 그 악인들의 바이러스에 자신들도 당할 수 있다는 우려 하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 ‘샤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샤를리를 십자가에 매달고 싶어하는 눈치이며, ‘샤를 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샤를리 엡도를 잘못 이상화시켜 자신의 결여를 샤를리 엡도로 틀어막으려는 움직임에 저항한다.

  ‘불안은 결여를 틀어막는 마개가 과연 결여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 품는 의문이다. 현대사회는 그 불안을 불온한 것으로 치부하고,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불안을 두려움으로 바꾼다. 가상의 적을 설정해 그 적을 불안의 원인으로 지정하고, 그 적을 척살하면서 불안을 두려움으로 바꾸어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불안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온전하게충족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뷔리당의 당나귀

 

  예수는 자신 외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사람들은 무슨 물건이든 손에 쥐고 만질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했다. 촉감을 통해서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 물건으로 신을 입증할 수 있으며, 신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과 매한가지라고 믿은 것이다. 근대 사회의 신은 새로운 물건’, 신상품이었다. 쇼퍼 홀릭의 제시카가 신상품과 한정품에 자신의 모든 영혼을 다 쏟아부을 정도로 사랑했듯이, 새로운 것은 곧 지금의 결여를 채워줄 효과적인 발명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옛것, 아날로그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들은 과거 토요일에 들었던 가요를 듣고 그 때를 행복하고 즐거운 시절로 기억하며, 심지어 현재를 그 때와 비슷하게 만들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힐링은 이제 새로움이 아니라 오래됨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이제 발명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유행은 돌고 돈다. 지금의 신상품은 언젠가는 낡은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낡은 것을 쓰면서 옛날의 자신과 작별하고, 좀 더 낫고 특별한 주체를 가꾸려고 한다. 그러나 새로움을 추종하는 것이나 오래됨을 추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뷔리당의 당나귀는 뷔리당티스, 어느 당근을 베어먹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결국 어떤 당근도 먹지 못하는 당나귀를 가리킨다. 신이 있던 사회에서 모든 우연한 사고는 신의 일이었고, 사람들은 신을 저주하거나 신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남탓이라는 것은 편리한 수단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쉽게 남탓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구조의 탓을 하는 건 또다시 혁명을 불러올 수 있으며, 혁명은 시스템의 총체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 된다.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전리품이라는 쓰레기

 

  신이 사라진 사회는 수직이 아닌 수평의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 수평은 평화로운 수평이 아니라, 파리끈끈이와 같은 수평이다. 어느 누구도 더 위로 날아오를 수 없으며, 조금이라도 멀어졌다 싶어도 힘이 빠지면 끈끈이에 의해 다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그 수평 위에 들러붙은 파리들은 서로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날갯짓을 하고 더듬이로 상대방을 밀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신의 판단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매달리게 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쓴다. ‘헬리콥터 맘들은 자식의 성공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내리는 헌신적인 어머니성공한 자식에 목을 맨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으로 들어가 독야청정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우리는 도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사회의 어떤 풍경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정신병자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가 된다. 정신병자들은 을 믿으며, 신에게 모든 나쁜 일을 떠넘긴다. 사실상 그들 자신이 의 판결을 받는다기보다는 을 판결하고 처벌하는 셈이다.

  결여된 것을 자신이 믿는 결여로 채우기 위해 전리품을 약탈하는 것. 아도르노는 신이 사라진 사회는 계몽된 척 하면서 점점 우매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전리품은 결국 결여를 채우지 못한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이상, 전리품은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트로이아가 멸망하고 카산드라가 전리품이 되었을 때, 아가멤논이 그녀에게 전리품으로서 원했던 역할은 그의 수청을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가멤논의 예상과 다른 예언을 하며, 아가멤논의 아내에 의해 죽는다. 이피게네이아가 죽고 카산드라가 왔지만, 카산드라는 전쟁의 결여를 채워주지 못했다. 이러한 결여를 부재하는 대타자인 아버지의 상실로, 외상을 자초하며 극복하려 해도 이는 성공하지 못하거나 동화가 되어버린다.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언가가 확실하다고 분명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잘못 믿었다라는 걸 확신시킬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완고하며’, 어떤 정신이상이라는 변명으로도 그들을 속죄시킬 수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며, 어떤 잘못된 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눈이 확신으로 반짝거리는사람은 이제 철저한 자신이라는 신을 믿는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은 자신의 무궁무진함을 믿으라고 하지만, 그 무궁무진함은 단순히 답에 대한 확신뿐만이 아니다. 그 무궁무진함은 오답도 포함하고 있다. 아니, 애당초 우리가 받은 문제가 과연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였던가? ‘불안은 우리에게 부재하는 윤리에 대한 환기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확신맹신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보다는 덜 최악이다. 저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 차마 말하지는 못한다. 그렇다

 

 

 

 

 

 

+불안을 맹신하라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적어도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자기계발서나 물건, 테러범의 퇴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불안의 심연을 파고들 것을 요구하며, 그 불안이 결여가 아닌 결여를 향하고 있으며, 그 결여 아닌 결여가 결여되었을 때 불안해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왜 불안해하는가. 그 불안은 우리에게서 온 것인가, 아니면 타인에게서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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