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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 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
김동욱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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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기와가 만들어지기까지

-김동욱의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을 읽고-

 

 

 

 

 

 

바다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한국과 중국, 일본을 불문하고 모든 나라가 원조에 목을 맨다. 어떤 자랑거리가 나오면 그 자랑거리의 원조에 대한 논쟁이 펼쳐진다. 영향을 받았다는 것, 어떤 것과 유사하다는 것 자체에 기분이 상해 갈등까지 빚기 일쑤다. 다뉴브 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다뉴브 강줄기를 끼고 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모두 입을 모아 분쟁을 벌였지만 결국 다뉴브 강이 흘러가고 흘러나오는 건 흑해였다. 늪지와 폐선이 떠다니는 흑해.

  지금은 사소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물들의 시작은 사소하고 당연한 게 아니었다. 사물들을 발명하고 새롭게 화반을 만들고 지붕을 솟아오르게 만든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이들에 맞서 그 유용성을 입증했다. 사물들은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오래 살아남아서 그들이 왜 태어났고 태어나서 무엇을 했는지 계속 증명한다. 하지만 남는 건 사물 뿐이며, 발명가는 없다. 이미 죽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시작에 대한 열망을 갖는가? 시작은 어떤 우월감을 부여하는가? 회의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결말이 당연한데도, 왜 시작을 알고자 하는가? 이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물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 사물을 더 자세하게 바라보게 하는 마법의 작동 방식이다. 우리는 바다를 그냥 바라볼 수 있다. 그 순간 바다는 물이 가득 찬 거대한 그릇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다가 어디에서 왔는지 의문을 갖는 순간부터 바다는 그릇에 담긴 물 이상의 것이 된다. 우리는 역으로 바다에서, 물건에서 우리의 짧은 생을 본다. 그 짧은 생은 고요한 수면에 이는 아름다운 파동을 그려낸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래서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파동을.

  중국의 경우 집 또한 결국 오래 가지 않는다는 생각 하에 즐겁고 안락한 장소를 만들고자 했다. 그들에게 중점이 되는 건 인간이었다. 일본은 가파르고 험한 자연에 맞서 세밀하고 안전한 내부를 만들고자 했다. 그들에게는 이상이 중요했다. 한국은 주변의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주변의 아름다운 산세에 떨어진 검은 묵이 되지 않는 것을 추구했다. 우리에게는 자연이 중요했던 것이다. 각자에게 중요한 건 다르고, 때문에 설령 누군가가 원조라 할지라도 그 원조의 의미가 그대로 승계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모두들 손을 부여잡고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고 있는 것이며, 물방울의 파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든 비가 내리는 순간 수많은 파동들이 수면 위에 아름답게 깨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모코시와 부계, 그리고 온돌

 

  건축물들은 각 나라가 추구하는 정신 외에도 그 나라의 사회구조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과거 중국과 한반도, 일본에서는 높은 기둥을 이용해 커다랗고 멋진 건물을 만들었다. 그 건물은 겉보기에는 2층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들어가 보면 천장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었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은 없었다. 텅빈 2층인 셈이다. 특히 일본의 모코시와 중국의 부계는 끝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서 고깔 모양이 된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 천황과 황제라는 존재가 모든 국민들의 위에 있었다. 그들은 반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 중국의 경우 위촉오의 갈등 등 여러 차례 황제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이 되어 멋진 색으로 채색되곤 했다. 일본의 경우 천황은 신이 내려준 인간이며 이들의 권력 다툼은 거의 승계 식으로 끝나곤 했다. 까마득한 지붕 끝은 점점 갈수록 하나의 점이 되고, 모든 이들의 위에 선 누군가를 암시하게 한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구조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쓴 이 책에서, 묘하게 드러나는 차이를 본다. 그 차이는 바로 온돌이다.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한국의 온돌은 천민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썼다. 물론 한국의 임금 또한 하늘이 내린 존재라고 하지만, 점의 결과에 휘둘리거나 어떤 갈등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그리스의 석상과 같은 무자비한 신이 로마에서 인간적인 신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어쩌면 세 나라의 건축적 공통점을 발견할수록, 그 차이는 오히려 더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차이를 더 찾아내려고 하지만 그 끝에서 발견하는 건 지울 수 없는 유사한 토대다.

 

 

공포들

 

  공포의 경우 일종의 기둥받침이라고 볼 수 있다. 기둥받침은 모양부터 색까지 다양하다. 중요한 건 지붕과 기둥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점차 건축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면서 창틀까지도 중요한 구성 요건이 되었다. 미니멀리즘 등 서양 건축에서는 유용성에 입각한 건물들, 컨테이너 박스 같은 건물들이 대두되면서 그 밋밋함으로 인해 건축의 정도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건물들이 결국 하나의 그림이고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 작품을 옳고 그름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일본의 경우 지진에 대비해 돌이나 나무로 만든 무거운 기와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가장 가벼운 히노키 소나무를 이용해 지붕을 만들었다. 한반도와 중국에서는 나무로 건물을 만들었다. 서양처럼 튼튼하게 돌로 만들지 않았냐고 묻는 질문은 참 우스운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나 중국, 일본에도 석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목조 건축을 선호한 것은 점점 뒤틀리고 부서져 가는 나무 기둥의 속에서 아름다운 나이테 무늬를 봤기 때문이다. 나무는 영원한 소재가 아니며, 그건 손이 닿을수록 점점 나이가 든다. 인간보다 조금 더 느리거나 같게 나이가 들고 닳아가면서 색이 변한다. 고색창연하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가령 서정주의 먹오디빛 툇마루와 같이, 돌마루라면 그런 먹오딧빛을 지닐 수 있을 것인가?

  아주 소소한 선택에도 시간이 깃들여 있고, 공포와 두공, 구미모노를 짜올리는 주두와 첨차, 소로는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서로를 맡잡고 깍지를 껸 손이다. 우리를 지탱해오고, 하늘을 떠받쳐 온 그 손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그 손들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다 칠해져 온 곳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때,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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