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 부르디외 사유의 지평 트랜스 소시올로지 8
피에르 부르디외. 로익 바캉 지음, 이상길 옮김 / 그린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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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어야 할 곳이 너무 많아 두 곳만 골라본다. 


사회학자라는 직업의 무의식적인 동기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메타가 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내 의견으로, 사회학은 메타가 되어야 하지만,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서 그래야 한다. 사회학은 스스로가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또 스스로가 어디 서 있는지 더 알기 위해 그 자체의 도구들을 이용해야만 한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객관화하기 위한 용도에만 봉사하는 메타의 논쟁적인 활용을 거부해야만 한다.”(313)

 

아마도 좋은 사회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젊음과 연계되는 어떤 성향들 일종의 단절, 반항, 사회적 순수의 힘 을 통상 많은 나이와 연계되는 성향들 현실주의, 사회 세계의 거칠고 실망스런 현실에 대적할 수 있는 능력 과 결합시키는 일이 필수적일 것이다.”(3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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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김경만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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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만의 글을 읽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의 성찰이 폐부를 찌르듯 날카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끊임없이 내보이며 이를 인정하라고 압박하는 듯한 태도가 피곤해서이다이런 의미에서 그의 글은 스스로 표방하듯 지적 도발이라기보다는 투정에 가깝게 느껴진다. 다만 이번 책을 읽으면서 김경만을 조금 더 이해할 수는 있게 되었다. 특히 이론과 학문의 역할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인식론적, 과학철학적 입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다 잘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논의가 나에겐 큰 설득력이 없었고 그의 입장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일전에 담론과 해방을 읽었을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나름의 평은 담론과 해방을 읽고 썼던 메모(http://blog.aladin.co.kr/726565144/7463168)로 대신하며 여기에서는 추가적인 몇몇 지점에 대해서만 부연한다.

 

그가 자신의 비판 대상들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사항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론가의 앎이 현실을 제대로 재현하고 있으며 객관적 세계에 대한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해보라는 것이다. 둘째, 사회과학적 지식이 일상적 행위자의 실천을 바꿔낼 수 있음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구는 서로 결합되어 지식인의 현실 참여라거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김경만 특유의 회의적 입장으로 귀착된다. 사회과학자의 연구 결과가 일상적 행위자의 사회에 대한 지식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으며, 설령 그렇다 해도 지식인의 언설이 실제로 사람들의 실천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는 없으므로 학자는 현실에 대한 개입을 추구하지 말고 학계 내에서의 경쟁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공감하는 바가 없지는 않다. 사회과학 지식이 현실을 완전히 반영해내는 것은 극히 어려우며 누군가의 연구 결과가 절대적일 수도 없고 계속해서 부정될 수밖에 없다. 사회가 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적 지식이 의미가 있는 것은 사회에 대해서 일상적 행위자들, 즉 각자의 위치에서 물질적, 상징적 투쟁을 벌이며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나도 힘들게 사는데 정부한테 떼쓰며 징징대는 이들이 못마땅해 보였던 사람이라도, 자신과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거나 제도적 문제에 해당하는 것임을 논증한 사회과학적 논의를 접하게 되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느끼게 되고 이는 이전과 다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들 실천이 모이게 되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나는 사회과학이 애초에 온전한 재현이나 완벽한 객관성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사회를 구성해내려는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모든 행위자는 각자의 도식에 따라 사회를 해석하며 그 해석에 입각하여 일상적 실천을 해나간다. 사회과학자는 사회를 해석하는 자신의 도식을 통해 연구를 하고 이를 가지고 사람들의 도식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어 이들의 실천 및 실천들이 구성해내는 사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다. 학자들이 재현해낸 사회의 모습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학계는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가 제출한 사회의 모습을 나름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공간이다.

 

바캉과의 논쟁에서도 드러난 바이지만 김경만의 사회학은 사회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사회학 장에서의 의례에 참여하는 것에 가깝다. 사회과학 장에 축적된 이론사와 논쟁의 구도 속에서 각각의 논리를 검토하고 자신의 독창적 근거를 수립하여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써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사회학인 듯하다. 사회에 대해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알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캉이 김경만에게 왜 우리는 사회과학을 하는 겁니까?”(221)라고 묻는 것은 필연적이고 궁극적이었다. 김경만은 사회에 대해 더 잘 알고자 하거나 연구 결과를 통해 변화를 가져오고자 사회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회학을 한다. 그리고 다른 사회학자 모두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그 역시 나름의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강의를 듣거나 글을 읽고 동의한 학생들은 현실 참여라거나 비판이라는 계기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미련도 버리고 일급의 학술지에 논문을 쓰는 학자가 되기를 꿈꾸며 자신의 생활을 바꾸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역사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수많은 투쟁과 논쟁들을 생각하면 지식이 현실을 바꾸어낼 수 있음을 증명해보라는 그의 공격은 훈련된 무지에 가깝다.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제기될 수 있을 법한 의문이지만 논리에 몰두하다 보니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작용을 보지 못하는 스콜라적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부르디외의 학문장 분석은 바로 이러한 학자들의 태도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일견 고상하게 보이는 학자들의 행태 역시 실은 상징적 자본을 둘러싼 투쟁임을 폭로함으로써 비판적 효과를 낸 것인데, 김경만의 경우에는 애초에 고상한 척 하지 않고 장 내의 상징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입장에서 당혹스럽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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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kyn 2015-07-1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동의하기 어렵네요. 사회과학이 사회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제공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간접적으로나마 실천적 참여를 하는 것 역시, 그 이론이 갖는 (완전할 수 만은 없는 -이것은 자연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현과 객관성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재현과 객관성이 부족한 만큼 사회과학은 사람들을 오도하게 될 것이고,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이론의 객관성을 위해 노력하는 만큼 그 실천적 가치는 높아질 것입니다. 만약 사회과학이 객관적인 재현과 정말 무관하다면, 그것이 사회참여적인 문학과 갖는 차이는 문체나 쟝르의 문제가 되어버리겠지요.

개인적으로 김경만님의 주장이 그래도 부분적으로나마 유효한 것은 보직 놀음이나 벌일 시간에 이론적 고투를 벌이자는 단말마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국내 대학의 교수임용과정이나 학위논문 심사과정, 그리고 국내 학술지의 심사과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 이 `한국 사회과학계 비판`이 그저 해외 대학 출신 학자의 `신자유주의판 선비정신`의 일환일 뿐이지 않을까하는 강한 의구심은 듭니다만.

청루 2015-07-14 10:59   좋아요 1 | URL
그 이론적 고투라는 것이 진리를 위한 순수하고 고귀한 일이 아니라 학계에서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상징투쟁이라는 것이 부르디외의 폭로입니다. 그리고 김경만 교수는 그 폭로가 무색하리만치 노골적으로 상징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구요.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김경만 교수의 학계 비판은 `토착적` 사회과학을 지향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글로벌화되려는 한국 학문풍토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생각은...
말씀하신 객관성을 모두들 지향하고 추구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검증은 학계와 공론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사회과학이 객관적 재현의 노력을 방기한다거나 그것과 무관하다는 것은 김경만 교수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그는 상대주의적 과학철학을 근거로 하여 애초에 사회과학이 사회현실에 대한 절대적 진리를 산출할 수 없으므로 실천이니 비판이니 계몽이니 하는 의도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김경만의 주요 비판 대상이 되는 이론가들은 이른바 일상적 행위자의 실천적 영역을 방법론적으로 존중하는 이론가들이다가핑클을 비롯한 민속방법론자부르디외기든스하버마스 등은 이론가가 사회의 객관적인 모습을 실증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인식론상의 특권적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이들은 모두 행위자들의 일상적 실천을 그 내적 맥락에서 기술이해설명하고자 시도한다문제는 이렇게 해서 도출된 사회학적 결과물과 이들 행위자의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영향관계를 둘러싸고 제기된다저자인 김경만은 아무리 행위자의 실천적 논리와 문법을 존중하려는 이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실천의 차원에서 통용되는 논리와는 다른 사회학적 언어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이론적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듯하다더 나아가이들이 사회학적 작업을 통해서 행위자들의 실천에 개입함으로써 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비판적 기획 역시 논리적으로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다일상적 실천의 세계와 사회학이라는 이론적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민속방법론을 주장한 가핑클과 그의 제자들부르디외기든스하버마스로티 등의 논의를 집요하게 파헤치면서 이들의 입장이 모순적임을 드러내고자 한다일상적 행위자의 실천을 이해하고 비판하려는 이들의 시도가 사실은 학계라는 지적 장의 상호참조체계 안에서 형성된 것이고 이 특수한 장의 언어를 사용할 때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상적 행위자의 실천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실천이라는 차원에 대한 관심과 비판적 지향을 거두지 않는 기존 학자들의 태도가 저자에게는 위선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실천비판해방 등의 명분을 내세우지 말고 사회학이라는 작업이 결국에는 학계라는 특수한 장의 논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이는 사회학자가 실천적 지식인을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이론을 터부시했던 반이론적 문화를 지양하고 학계에서의 전문적 논의에 충실하자는 그의 지론으로 이어진다.

 

저자가 책에서 이른바 비판이론가들을 비판할 때 가장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요구는 이론가들의 작업이 일상의 행위자들에게 수용된다는 전제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라는 것이다사회이론은 상호작용적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이론과 현실 사이의 환류(feedback)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그의 입장을 수긍한다고 해도 위와 같은 요구는 다소 부당해 보인다일례로 그는 낸시 프레이저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녀는 여성주의 이론가들이 자신들의 전문적 용어들을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해서자신들의 지식을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지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번역을 통해여성주의 이론가들이 억압받는 여성들을 설득하여지금까지 당연시해온 사실들을 여성주의 이론의 조명하에서 재해석하게 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만 한다.”고 말한다(278).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이론가 자신이 입증해야 할 사항이라기보다는 번역가저술가교사활동가의 역할이다비판이론가들의 목표는 이론이 다루고 있는 세계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 세계와 대화 및 토론을 하려는 것이지그 과정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이들 이론가에게 그러한 공적 소통과 수용의 과정은 전제되어 있다저자인 김경만은 이 과정이 별다른 논리적 해명 없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하지만 이는 불평 이상의 비판이 될 수 없을 듯하다이들 이론가가 자신의 이론이 모종의 과정을 통해서 해석비판토론수용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어떻게 일상의 행위자로 하여금 비판적 사회학 담론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라는 김경만의 요구는 사회학 담론이 유통되는 공론장이 실재함을 증명하라는 것으로 들린다이 요구는 다소 애처로워 보이는데일상인들이 나름의 교양과 식견 및 경험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사회학적 담론을 해석해내고 수용하여 자신을 성찰해내는 과정을 증명하라는 것은 저자가 그러한 경험에서 소외되어 있었음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자신의 논의가 어떤 식으로든 공론장에서 유통되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하고 신뢰하게 된 사회학자라면 저자의 이러한 문제제기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극적으로 비유하자면동네의 조숙한 형들에게 도대체 섹스라는 게 실제로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야동의 품평에만 집중하자고 제안하는 중학생을 보는 느낌이랄까.)

 

실제로 저자는 사회이론과 현실 사이의 소통이 환상임을 주장하는 논변을 본문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일례로 그는 사회적 관행의 변화는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형성되는 것이지이론에 의해 외부적으로 부과되는 인식론적 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며 기든스를 비판한다(169).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기든스의 입장을 단순화하여 왜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내가 이해하기로 기든스의 입장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서 행위자들을 계몽하겠다는 것이 아니다저자의 말대로 사회적 관행의 변화는 공동체 내부의 압력과 문제제기에 의한 것일 수 있지만 그러한 실천들의 근거에는 모종의 사회학적 지식이 수용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기든스가 말하는 이중의 해석학이란 행위자들의 실천을 해석할 때 이들이 이미 사회학적 지식을 근거로 하여 세계를 해석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주문이다그리고 사회학의 비판적 기획은 생활인들의 세계 해석 과정에서 중요한 참고가 됨으로써 사회적 관행의 변화를 야기하는 공동체 내부의’ 변화에 일조하자는 것이다저자는 종종 비판이론가들이 마치 계몽적 지도자의 포즈라도 취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을 묘사한다심지어 부르디외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항상 부르디외가 제시한 분석에 순응하거나 동의하는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 비판되기도 한다(130). 그러나 내가 이해하기에 저자가 비판하는 논자들은 이론가로서 자신의 이론적 관점과 분석 결과를 옹호함으로써 공론장의 토론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충실한 책임을 다하려 할 뿐이지 스스로가 인식론적으로 특권적 위치에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그냥 아무 말이나 하고 보자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이 제기한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다하는 것은 이론가 뿐 아니라 공론장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에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또한 저자는 부르디외가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설명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다면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이론이 실제 세계의 사태와 일치함을 증명해야 했다고 주장한다(118). 이러한 요구를 하는 이유는 사회적 실재에 대한 자신[부르디외]의 서술이 실재를 재현하는 유일하게 옳은 방법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저자가 확신하기 때문이다(119). 부르디외가 자신의 이론을 사회세계와 행위자에 대한 유일하게 타당한 이론이라고 주장했는지는 논쟁적이라 생각하는데저자의 말을 따라 이를 수긍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세계 및 행위자들의 실천에 대한 이론의 타당성은 이론가 스스로가 절대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론장에서 상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이론가가 나름의 자료와 방법론을 토대로 자신의 논의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이를 자기 이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이론가는 자신의 것과 다른 이론이 존재할 가능성에 항상 개방적이어야 하지만 자신의 이론이 갖는 타당성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옹호해야 한다. 이 자신감과 겸손함을 겸비한 태도를 나는 푸코와 루만에게서 본다. 푸코, 특히 고고학 시기의 푸코는 서양의 사유체계가 특정한 에피스테메에 의해 단절적으로 규정됨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려낸 고고학적 풍경이나 에피스테메의 변화가 절대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른 방식의 고고학 역시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임상의학의 탄생의 부제는 의학적 시선에 대한 하나의 고고학(une archéologie du regard médical)’이었으며, 말과 사물의 부제 역시 the archaeology of human science’가 아니라 an archaeology of human science’였던 것이다. 그는 서양 근대 이성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그보다 더 우월한 이성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저서가 책을 구성하고 있는 문장들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를”, “글의 지위에 오르지 않고 경쾌하게 담론의 지위에 머무르기를소망했다(36-37). 하지만 푸코가 자신의 작업과는 다른 역사 서술의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둔 것은 오히려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자신감의 소산이었다. 자신의 고고학적 작업이 어떻게 방법론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입증해 보라는 요구들에 대해 그가 대응한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 이론의 인식론적 우월성을 입증해 보라고 압박하는 똑똑한 바보들을 위하여 푸코는 철학적 웃음을 예비해 두었다(469). 루만 역시 자신의 이론이 하나의 진리주장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의미론을 사회구조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명한다는 루만 자신의 이론 역시 하나의 의미론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이론이 다른 어떤 이론보다 설명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론이 제시하는 세계 이해의 방식을 폄하하는 자들에게 루만은 이렇게 말한다. “달리 해보시오. 하지만 최소한 마찬가지로 잘 해야 하오.”(1294)


 







사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입장의 강경함이나 단호함보다도 독서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곳곳에 뒤범벅되어 있는 그의 인정욕구와 자존심콤플렉스였다학문은 학계라는 장 속에서 전문적인 이론을 두고 이루어져야 하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기고하고 편집을 맡는 자신보다도 비판과 실천을 내세우는 학자들이 더 인정받는 현실이 그로서는 불만이었을 수 있을 것 같다그리고 비판과 실천을 내세우는 학자들이 거짓이고 위선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그리하여 모두들 실천적 개입 같은 것 그만두고 학계 내에서 이론으로 정면승부를 하면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부심을 곳곳에 내비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스티븐 터너랜달 콜린스데이비드 블루어지그문트 바우만 등 세계적인 사회학자의 논평을 부록으로 실은 것 역시 의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그의 자신감은 오히려 그가 오랜 시간 인정에 목말라 있었음을이 책을 쓰게 된 근본적 동인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공부를 계속 할수록 고립되지 않을 것을내가 인정하지 않는 이에게 먼저 말을 건넬 것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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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자본주의 -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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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현상들 자체는 이미 많은 한국인들 역시 일상에서 겪고 있으며 상당히 공론화가 되어 있다. 감정노동, 각종 채용 과정에서 인적성 시험의 도입힐링 열풍, 부부 관계 및 교육에서 치료적(therapeutic) 담론의 도입 등은 에바 일루즈가 감정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이 책에서 분석하고 있는 변화상의 일부를 이룬다. 관료제와 반복 노동 속에서 감정을 메마르게 하는 것으로 지목되곤 했던 자본주의가 오히려 감정을 자신의 주요 구성요소로 포섭해낸 변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시의성이 있다. 또한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고 이것에 적절히 대처하는 방법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덕목으로 부상함과 동시에 감정을 대하는 행위들이 도구적 기술로 전락하는 역설 또한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여자어, 픽업 아티스트 등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감정 자본주의는 여러 감정 문화들을 재배치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적 자아를 감정적이 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들을 좀 더 도구적 행위에 종속되게 만들었다.”(55) 회사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잘 고려하는 리더가 되거나 자신의 멘탈을 잘 붙들 수 있는 것이 주요한 역량으로 여겨지게 되며, 이 과정에서 억눌리고 소모된 감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징징대며 털어놓고, 이를 들어주는 사람은 공감의 기술을 발휘하며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감정이 표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정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소통 모델로 인정에 이르기는 어려울 것임을 에바 일루즈는 잘 지적하고 있다(81). 엄기호가 단속사회에서 곁이 없고 편만 있는 사회라는 표현으로 지적하는 사태가 바로 이와 같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감정화, 친밀관계의 도구화가 이루어짐에 있어서 심리학과 페미니즘 등의 담론이 합류한 것을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조직 내에서 개인의 감정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조건으로 발전한 동시에, 감정적 맥락에 고도로 의존해 있기도 하였다. 시킨 것만 하지 말고 윗사람의 뜻과 의도를 잘 헤아리라거나, 눈치가 사회생활의 핵심이라는 등의 덕목이 그렇다. 감정에 대한 억압과 복잡한 고려가 동시에 작동한 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이기도 했다. 감정에 대한 고려가 과학화된 담론을 통해서 동원된 것은 최근의 일로, 이전의 한국적 특수성과 기묘하게 결합되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에서 감정과 자본주의의 문제는 이 책에서 시도된 분석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악셀 호네트의 초청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행한 아도르노 강의를 엮은 것이다. 비판이론의 심장부인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판이론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는 호네트의 초대로 비판이론의 선구자인 아도르노의 이름을 내건 강의인 만큼 비판에 대한 언급이 없을 수 없었다. 주최측에 대한 나름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인 일루즈는 비판의 기획을 방기하지 않으면서도 비판이론의 전통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가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은 기존의 비판이론이 비판대상과 분리되어 있는 순수한 규범적 토대 위에서 비판을 행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논리들을 순수한 비판론이라 명명하면서, 비판 대상에 오염되지 않고 비판을 행할 수 있는 순수한 위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비평가는 고도로 상품화된 전장을 비판하면서도 비평가 자신도 (선택이든 필연이든) 전장 안에 자리매김되어 있고, 그런 만큼 순수성은 더욱 훼손돼야한다는 것이다(179). 기존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대신에 새로운 비판론은 우리가 맞서고자 하는 시장 세력 못지않은 교묘한 해석 전략들을 계발해야하며, 그러한 비판론의 힘은 대상에 대한 친밀한 이해에서나온다는 것이다(179). 하지만 이와 같은 비판론의 구체적인 전략이 무엇인지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한 가지 단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이다.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비판 문법을 일신하려는 논자들은 특정한 문화적 실천이 해방 또는 억압에 기여하는지 판단하기보다는, 그러한 문화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실용적 이유에 주목하자는 주장에 동의한다. 특정한 문화적 실천이 자본주의적 체제 유지에 기여한다는 단죄만으로는 비판적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반성에 따른 것일 테다. 이와 같은 입장의 대표적인 논자로는 뤽 볼탄스키와 그의 동료들을 들 수 있을 텐데, 에바 일루즈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비판 기획에 프래그머티즘의 문제의식을 수용하고 있다. “실용주의의 방법론을 따라 어째서 어떤 의미들이 쓸모가 있는지를 질문하자. 어떤 담론이 유용한 것은 그 담론을 신뢰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기 때문이다. 곧 어떤 담론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 쓸모가 있는 뭔가를 해준다고 하면 그 담론은 계속 사용되고 유통될 것이다.”(133) 특정한 문화적 실천이 해방에 일조하는지 억압에 봉사하는지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는 그러한 문화적 실천들이 행해지는 (실용적) 이유를 내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우선시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비판은 사회 실천들에 대한 두꺼운 맥락적 이해를 통해 해방적인 것과 억압적인 것이 스스로를 드러내게함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181).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선보이고 있는 비판이 이와 같은 새로운 원리를 잘 구현해내고 있는지, 기존의 비판 논리와 구별되는 강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자에 따르면 비판은 거울과 같은 것으로서, 그 거울은 우리 모두 자발적으로 동의하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때 우리 스스로 불러내게 되는 가치들 및 이상들에 호소한다.”(207) 이 인용으로부터 유추해 보건대, 저자가 생각하는 비판의 효과란 역설과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것인 듯하다. 모두들 A라는 가치에 동의하며 이를 추구하고 있지만, 사실 그러한 실천이나 행위가 반대의 결과를 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비판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장의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는 인터넷 테크놀로지가 개인생활 및 감정생활을 빈약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인터넷 테크놀로지가 사회성과 인간관계에 전에 없이 풍요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면서도, 지금까지 사회성과 인간관계들을 지탱해온 감정적신체적 자원을 고갈시킨다는 데에 있다.”(207-208) 관계의 가능성과 기회는 확장되었지만 정작 그러한 사회적 관계를 통해 감정적 자원이 황폐해졌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밖에도 저자는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가 상대방에 대해 제공하는 각종 정보들이 과연 선택을 용이하게 해주었는지 반문하며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심리학 담론이 확대되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뒤얽히고 양자가 서로의 작동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일상의 처신을 용이하게 만든 것은 아님을 명시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주지 못함으로써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요컨대, 현재까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프래그머티즘의 비판 전략은 행위자들이 수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실천하고 있는 담론의 실용성을 인정하되 그러한 문화적 실천이 정작 행위자들의 실용적 목적을 충족해주지 못함을 밝혀내는 방식인 듯하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이와 같은 비판 전략은 아도르노나 지젝이 다루고 있는 냉소적 주체, 강박적 주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문화적 실천의 무용성을 밝혀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체제에 따라야만 할 이유가 해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가 모두 실용의 논리를 수용하고서 역설없는 실용의 가능성을 준거로 삼는 일을 여전히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냥 비판이라는 문제설정은 지난 시대의 언어놀이라 인정하고 내재적 이해를 통해 실용의 역설을 밝혀내려는 새로운 언어놀이에는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어떨지... 프래그머티즘의 비판 논리를 좀 더 검토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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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 침잠의 능력과 수호신에게 순수하게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또 우리 시대로부터 도망간 악령을 불러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충분히 가진 인간을 우리는 여기서 어떤 등불을 들고 찾아야 하는 것인가!"(230)





"오직 과업에만 내적으로 몰두하는 자는, 이를 통해 그 자신이 헌신하는 과업의 정점에 오르고, 또 이 과업의 진가를 보여주게 됩니다."(39)

"각자는 자기에게 있어서는 무엇이 신이고 무엇이 악마인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모든 질서들에 걸쳐서 그렇습니다."(69)

"각자가 자신의 삶을 조종하는 데몬을 찾아서 그에게 복종한다면, 일상의 요구란 소박하고 단순한 것입니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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