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에 연설하러 오지 않았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노벨상 수상연설인 <라틴 아메리카의 고독>은 엄청난 울림이 있고, 알바로 무티스에 대해 쓴 <내 친구 무티스>는 그야말로 낄낄대며 읽었다. 빌려 읽었으나 사다놓고 몇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분업론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14
에밀 뒤르켐 지음, 민문홍 옮김 / 아카넷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불어를 읽을 수 없기에 영역본과 대조하며 살펴본 결과, 영문과 국문 둘 중 한 번역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나는 영역본을 신뢰하기로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정희 평전 -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행동에 관한 전기적 연구
전인권 지음 / 이학사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인권 박사의 책들을 몇 권 읽었는데 그의 장점은 기성학계에서 잘 소화하지 못하는 소재와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언제나 문제의식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책 역시 비슷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료제 유토피아 - 정부, 기업, 대학, 일상에 만연한 제도와 규제에 관하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김영배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두 가지 아이디어가 흥미로웠다. 


첫째, 권위(주의)가 무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재발 방지를 위해 정말로 뭐가 잘못됐는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을 떠맡은 사람은 정작 고용이나 해고에 대한 권한이 없는 종업원들이다. 이와 동일한 일이 지속적인 관계망 속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하인들은 대개 자기네 주인의 가족들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반대 현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식이다. (113)

조직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이들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동학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조직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이들의 견해를 상상해야 하는 것을 포함해―를 하는 데 엄청난 상상력의 에너지를 써야 한다. 반면, 위로 올라갈수록 그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의 많은 부분에 대해 거의 의식조차 하지 않은 채 이리저리 어슬렁거릴 수 있다. 즉, 힘없는 이들은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육체적인 노동의 대부분을 감당해 내야 할 뿐만 아니라, 해석노동의 대부분 또한 담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126)

불평등과 지배의 구조―말하자면, 구조적 폭력―는 상상력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구조적 폭력은 지루하고 생각을 마비시키며 기계적인 일자리로 노동자들을 좌천시키는 상황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는 오직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창의적인 노동에 가담할 수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스스로의 노동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그들의 실제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것은 또한 왕, 정치인, 유명인사 또는 최고경영자(CEO) 같은 사람들이 자기네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는 것과 유사한 사회적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부인, 하인, 부하 직원, 참모들은 환상 속에 빠져 있는 그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업무에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143-144)

인지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 총체적 지성 즉,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가능한 대안과 절차들을 떠올리며,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상당한 수고를 동반한다. 이들을 해석노동, 상상노동, 감정노동 등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이다. 이처럼 지성이 곧 노동이라면 지성을 발휘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반지성적 특권을 가진 이들이 (심지어 때로는 전문가라는 직함으로) 자문을 하고 사업을 기획하고 결정권을 갖고 있을 때 어떤 부조리한 결과들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는 세월호와 메르스 같은 참사 국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하는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와 참사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해석노동, 상상노동, 감정노동을 담당해 왔던 계층에 속해 있었다. 문제가 되는 주변의 상황을 굳이 알고자 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태도는 "감히 알고자 하라!"는 칸트적 의미의 계몽과 완전한 대척에 있다. 일상의 매순간마다 지혜를 발휘하며 살아왔던 이들이 이러한 반계몽적 집단의 무지 탓에 희생당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의 일에 대해 무지해도 되는 이가 없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성을 발휘할 의무에서 그 누구도 면제되지 않도록 하는 것. 반지성주의는 불평등과 권위주의에서 비롯되며 민주주의와 평등은 그 해법이다.



둘째, 신자유주의 이후 기업과 대학의 연구가 오히려 관료적 질서에 종속되었다는 것 (이 부분은 본문 내용을 따라가며 정리하는 것으로 한다.)


문제의 출발점은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이다. 21세기에는 실현되었으리라고 상상했던 일들(teleportation, 화성 식민지, 노화방지 약물, 투명 망토 등)은 왜 여전히 요원한 미래에 혹은 어설픈 상태로 남아 있는가?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기술적 경이나 시적인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1970년대 이후에 보았던 기술적 진보는 대체로 정보기술들, 모의실험(simulation)의 기술들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167). 왜 그런가?

 

이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우주개발 경쟁에서 소련이 패한 이후 미국의 R&D 방향이 보다 시장성 있는 제품을 연구하는 쪽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버가 보기에 이러한 설명은 명백히 틀렸다.”(191) 첫째, 민간 부문에서 기업들이 수행한 연구가 줄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법인세 인하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세율이 높았던 때야 국가에 돈을 갖다 바치느니 노동자들 임금 올려주거나 (이전까지 기업 본연의 목적이라 여겨졌던) 연구에 투자하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법인세 인하로 그러한 유인이 약해졌고, 게다가 경영자들의 보수가 스톡옵션 형태를 띠면서 장기적인 투자보다는 단기적인 수익을 창출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둘째, 미국 정부는 국가 주도의 기술개발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개발 계획의 강조점을 우주개발 프로그램 같은 민간 프로젝트에서 군사적인 연구의 방향으로 단순하게 이동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192). 인터넷은 이러한 군사적 개발의 부산물이다. 더욱 암울한 설명도 있다. 이에 따르면 IT 및 의학에 대한 연구개발 역시 시장 주도의 소비자 요구에 부응한 것이 아니라 기술적 천대에 따른 것이다. “새로 출현한 기술들은 거의 대부분 감시, 노동 규율, 사회적 통제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드러난 그런 부류였다. 정보기술은 자본의 금융화를 가능케 했고, 이는 노동자들을 점점 더 빚더미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반면에 고용주들은 그 덕분에 유연한새로운 노동 체제를 창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직업 안정성을 파괴했고, 거의 모든 부문에서 전반적인 노동 시간의 막대한 증가로 이어졌다. 전통적인 공장들이 해외로 속속 이전됨에 따라, 노동조합운동을 궤멸시켰고, 이로써 노동자 계급의 효과적인 정치 가능성마저 없애 버리고 말았다.”(193) 이 과정에서 발달한 의약기술이라는 것 역시도 완전한 감기 치료제를 개발하지 못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연구비의 전반적인 수준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같이 획기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레이버는 온갖 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가 정치적, 행정적 그리고 판매촉진의 과제에 의해 주도되는 것을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199). 대학을 비롯한 연구기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업은 그것의 효율성을 증명하도록 요구받았고, 그에 따라 마케팅과 홍보 작업, 즉 문서작업의 부담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련에 대한 미국의 승리는 시장의 지배로 귀결된 것이 아니라 보수적 관리직 엘리트들의 지배로 이어졌으며, 이에 따라 혁명적인 함의를 가진 연구는 억눌리고 경쟁적이고 손익을 맞추는 단기적 연구만 이뤄지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그레이버는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전제들이 수정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관료주의에 적대적이지 않으며, 기술적으로 진보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논자들 역시도 자본주의가 최선이라기보다는 현대의 기술적 발달과 복잡성을 감당할 수 있는 그나마 가능한 유일한 체제라는 정도의 수세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그것을 존속시키는 기술적 토대에서 정당성을 찾고 있다면, 이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다른 기술적 미래에 대한 발상을 억누르려는 정치적 유인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기술적 혁신을 단념한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기술의 발달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을 주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 등 기술적 돌파구가 필요한 디스토피아적 상황에서 실질적인 혁신 없이 유토피아적 전망만을 심어주는 모순적 전략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그 동맹국들보다 창조적 사고를 덜 억압하며 덜 관료적인 지역에서 기술적 혁신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적 형식을 모색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상상력이 다시 한 번 더 인류 역사에서 물질적 힘이 되도록 하기위해서는 기존의 관료적 구조를 무너뜨려야 하며, 기술적 혁신은 (자본주의에 비해) 부와 권력의 분배가 훨씬 평등한 체제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2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한나 아렌트 지음, 서유경 옮김 / 텍스트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거의 전적인 무지 탓에 책을 읽어나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이따금씩 등장하는 주옥같은 구절들을 만나게 되면 몇 번을 되풀이하여 읽지 않을 수 없다. 


나로서는 이번 독서를 통해서 공적 삶과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한 문장을 찾은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이것이 혼자만의 삶으로 도망치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다. 그것은 상대가 변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187)


번역이 나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영문판의 문장을 읽을 때 의미가 더 풍부하게 다가온다는 느낌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