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자본주의 -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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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현상들 자체는 이미 많은 한국인들 역시 일상에서 겪고 있으며 상당히 공론화가 되어 있다. 감정노동, 각종 채용 과정에서 인적성 시험의 도입힐링 열풍, 부부 관계 및 교육에서 치료적(therapeutic) 담론의 도입 등은 에바 일루즈가 감정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이 책에서 분석하고 있는 변화상의 일부를 이룬다. 관료제와 반복 노동 속에서 감정을 메마르게 하는 것으로 지목되곤 했던 자본주의가 오히려 감정을 자신의 주요 구성요소로 포섭해낸 변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시의성이 있다. 또한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고 이것에 적절히 대처하는 방법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덕목으로 부상함과 동시에 감정을 대하는 행위들이 도구적 기술로 전락하는 역설 또한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여자어, 픽업 아티스트 등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감정 자본주의는 여러 감정 문화들을 재배치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적 자아를 감정적이 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들을 좀 더 도구적 행위에 종속되게 만들었다.”(55) 회사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잘 고려하는 리더가 되거나 자신의 멘탈을 잘 붙들 수 있는 것이 주요한 역량으로 여겨지게 되며, 이 과정에서 억눌리고 소모된 감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징징대며 털어놓고, 이를 들어주는 사람은 공감의 기술을 발휘하며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감정이 표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정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소통 모델로 인정에 이르기는 어려울 것임을 에바 일루즈는 잘 지적하고 있다(81). 엄기호가 단속사회에서 곁이 없고 편만 있는 사회라는 표현으로 지적하는 사태가 바로 이와 같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감정화, 친밀관계의 도구화가 이루어짐에 있어서 심리학과 페미니즘 등의 담론이 합류한 것을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조직 내에서 개인의 감정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조건으로 발전한 동시에, 감정적 맥락에 고도로 의존해 있기도 하였다. 시킨 것만 하지 말고 윗사람의 뜻과 의도를 잘 헤아리라거나, 눈치가 사회생활의 핵심이라는 등의 덕목이 그렇다. 감정에 대한 억압과 복잡한 고려가 동시에 작동한 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이기도 했다. 감정에 대한 고려가 과학화된 담론을 통해서 동원된 것은 최근의 일로, 이전의 한국적 특수성과 기묘하게 결합되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에서 감정과 자본주의의 문제는 이 책에서 시도된 분석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악셀 호네트의 초청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행한 아도르노 강의를 엮은 것이다. 비판이론의 심장부인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판이론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는 호네트의 초대로 비판이론의 선구자인 아도르노의 이름을 내건 강의인 만큼 비판에 대한 언급이 없을 수 없었다. 주최측에 대한 나름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인 일루즈는 비판의 기획을 방기하지 않으면서도 비판이론의 전통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가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은 기존의 비판이론이 비판대상과 분리되어 있는 순수한 규범적 토대 위에서 비판을 행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논리들을 순수한 비판론이라 명명하면서, 비판 대상에 오염되지 않고 비판을 행할 수 있는 순수한 위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비평가는 고도로 상품화된 전장을 비판하면서도 비평가 자신도 (선택이든 필연이든) 전장 안에 자리매김되어 있고, 그런 만큼 순수성은 더욱 훼손돼야한다는 것이다(179). 기존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대신에 새로운 비판론은 우리가 맞서고자 하는 시장 세력 못지않은 교묘한 해석 전략들을 계발해야하며, 그러한 비판론의 힘은 대상에 대한 친밀한 이해에서나온다는 것이다(179). 하지만 이와 같은 비판론의 구체적인 전략이 무엇인지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한 가지 단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이다.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비판 문법을 일신하려는 논자들은 특정한 문화적 실천이 해방 또는 억압에 기여하는지 판단하기보다는, 그러한 문화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실용적 이유에 주목하자는 주장에 동의한다. 특정한 문화적 실천이 자본주의적 체제 유지에 기여한다는 단죄만으로는 비판적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반성에 따른 것일 테다. 이와 같은 입장의 대표적인 논자로는 뤽 볼탄스키와 그의 동료들을 들 수 있을 텐데, 에바 일루즈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비판 기획에 프래그머티즘의 문제의식을 수용하고 있다. “실용주의의 방법론을 따라 어째서 어떤 의미들이 쓸모가 있는지를 질문하자. 어떤 담론이 유용한 것은 그 담론을 신뢰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기 때문이다. 곧 어떤 담론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 쓸모가 있는 뭔가를 해준다고 하면 그 담론은 계속 사용되고 유통될 것이다.”(133) 특정한 문화적 실천이 해방에 일조하는지 억압에 봉사하는지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는 그러한 문화적 실천들이 행해지는 (실용적) 이유를 내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우선시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비판은 사회 실천들에 대한 두꺼운 맥락적 이해를 통해 해방적인 것과 억압적인 것이 스스로를 드러내게함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181).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선보이고 있는 비판이 이와 같은 새로운 원리를 잘 구현해내고 있는지, 기존의 비판 논리와 구별되는 강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자에 따르면 비판은 거울과 같은 것으로서, 그 거울은 우리 모두 자발적으로 동의하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때 우리 스스로 불러내게 되는 가치들 및 이상들에 호소한다.”(207) 이 인용으로부터 유추해 보건대, 저자가 생각하는 비판의 효과란 역설과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것인 듯하다. 모두들 A라는 가치에 동의하며 이를 추구하고 있지만, 사실 그러한 실천이나 행위가 반대의 결과를 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비판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장의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는 인터넷 테크놀로지가 개인생활 및 감정생활을 빈약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인터넷 테크놀로지가 사회성과 인간관계에 전에 없이 풍요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면서도, 지금까지 사회성과 인간관계들을 지탱해온 감정적신체적 자원을 고갈시킨다는 데에 있다.”(207-208) 관계의 가능성과 기회는 확장되었지만 정작 그러한 사회적 관계를 통해 감정적 자원이 황폐해졌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밖에도 저자는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가 상대방에 대해 제공하는 각종 정보들이 과연 선택을 용이하게 해주었는지 반문하며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임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심리학 담론이 확대되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뒤얽히고 양자가 서로의 작동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일상의 처신을 용이하게 만든 것은 아님을 명시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주지 못함으로써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요컨대, 현재까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프래그머티즘의 비판 전략은 행위자들이 수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실천하고 있는 담론의 실용성을 인정하되 그러한 문화적 실천이 정작 행위자들의 실용적 목적을 충족해주지 못함을 밝혀내는 방식인 듯하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이와 같은 비판 전략은 아도르노나 지젝이 다루고 있는 냉소적 주체, 강박적 주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문화적 실천의 무용성을 밝혀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체제에 따라야만 할 이유가 해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가 모두 실용의 논리를 수용하고서 역설없는 실용의 가능성을 준거로 삼는 일을 여전히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냥 비판이라는 문제설정은 지난 시대의 언어놀이라 인정하고 내재적 이해를 통해 실용의 역설을 밝혀내려는 새로운 언어놀이에는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어떨지... 프래그머티즘의 비판 논리를 좀 더 검토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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