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김경만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경만의 글을 읽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의 성찰이 폐부를 찌르듯 날카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끊임없이 내보이며 이를 인정하라고 압박하는 듯한 태도가 피곤해서이다이런 의미에서 그의 글은 스스로 표방하듯 지적 도발이라기보다는 투정에 가깝게 느껴진다. 다만 이번 책을 읽으면서 김경만을 조금 더 이해할 수는 있게 되었다. 특히 이론과 학문의 역할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인식론적, 과학철학적 입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다 잘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논의가 나에겐 큰 설득력이 없었고 그의 입장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일전에 담론과 해방을 읽었을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나름의 평은 담론과 해방을 읽고 썼던 메모(http://blog.aladin.co.kr/726565144/7463168)로 대신하며 여기에서는 추가적인 몇몇 지점에 대해서만 부연한다.

 

그가 자신의 비판 대상들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사항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론가의 앎이 현실을 제대로 재현하고 있으며 객관적 세계에 대한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해보라는 것이다. 둘째, 사회과학적 지식이 일상적 행위자의 실천을 바꿔낼 수 있음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구는 서로 결합되어 지식인의 현실 참여라거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김경만 특유의 회의적 입장으로 귀착된다. 사회과학자의 연구 결과가 일상적 행위자의 사회에 대한 지식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으며, 설령 그렇다 해도 지식인의 언설이 실제로 사람들의 실천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는 없으므로 학자는 현실에 대한 개입을 추구하지 말고 학계 내에서의 경쟁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공감하는 바가 없지는 않다. 사회과학 지식이 현실을 완전히 반영해내는 것은 극히 어려우며 누군가의 연구 결과가 절대적일 수도 없고 계속해서 부정될 수밖에 없다. 사회가 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적 지식이 의미가 있는 것은 사회에 대해서 일상적 행위자들, 즉 각자의 위치에서 물질적, 상징적 투쟁을 벌이며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나도 힘들게 사는데 정부한테 떼쓰며 징징대는 이들이 못마땅해 보였던 사람이라도, 자신과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거나 제도적 문제에 해당하는 것임을 논증한 사회과학적 논의를 접하게 되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느끼게 되고 이는 이전과 다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들 실천이 모이게 되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나는 사회과학이 애초에 온전한 재현이나 완벽한 객관성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사회를 구성해내려는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모든 행위자는 각자의 도식에 따라 사회를 해석하며 그 해석에 입각하여 일상적 실천을 해나간다. 사회과학자는 사회를 해석하는 자신의 도식을 통해 연구를 하고 이를 가지고 사람들의 도식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어 이들의 실천 및 실천들이 구성해내는 사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다. 학자들이 재현해낸 사회의 모습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학계는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가 제출한 사회의 모습을 나름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공간이다.

 

바캉과의 논쟁에서도 드러난 바이지만 김경만의 사회학은 사회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사회학 장에서의 의례에 참여하는 것에 가깝다. 사회과학 장에 축적된 이론사와 논쟁의 구도 속에서 각각의 논리를 검토하고 자신의 독창적 근거를 수립하여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써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사회학인 듯하다. 사회에 대해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알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캉이 김경만에게 왜 우리는 사회과학을 하는 겁니까?”(221)라고 묻는 것은 필연적이고 궁극적이었다. 김경만은 사회에 대해 더 잘 알고자 하거나 연구 결과를 통해 변화를 가져오고자 사회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회학을 한다. 그리고 다른 사회학자 모두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그 역시 나름의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강의를 듣거나 글을 읽고 동의한 학생들은 현실 참여라거나 비판이라는 계기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미련도 버리고 일급의 학술지에 논문을 쓰는 학자가 되기를 꿈꾸며 자신의 생활을 바꾸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역사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수많은 투쟁과 논쟁들을 생각하면 지식이 현실을 바꾸어낼 수 있음을 증명해보라는 그의 공격은 훈련된 무지에 가깝다.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제기될 수 있을 법한 의문이지만 논리에 몰두하다 보니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이론과 실천의 상호작용을 보지 못하는 스콜라적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부르디외의 학문장 분석은 바로 이러한 학자들의 태도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일견 고상하게 보이는 학자들의 행태 역시 실은 상징적 자본을 둘러싼 투쟁임을 폭로함으로써 비판적 효과를 낸 것인데, 김경만의 경우에는 애초에 고상한 척 하지 않고 장 내의 상징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입장에서 당혹스럽긴 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hakyn 2015-07-1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동의하기 어렵네요. 사회과학이 사회를 바라보는 다른 방식을 제공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간접적으로나마 실천적 참여를 하는 것 역시, 그 이론이 갖는 (완전할 수 만은 없는 -이것은 자연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현과 객관성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재현과 객관성이 부족한 만큼 사회과학은 사람들을 오도하게 될 것이고,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이론의 객관성을 위해 노력하는 만큼 그 실천적 가치는 높아질 것입니다. 만약 사회과학이 객관적인 재현과 정말 무관하다면, 그것이 사회참여적인 문학과 갖는 차이는 문체나 쟝르의 문제가 되어버리겠지요.

개인적으로 김경만님의 주장이 그래도 부분적으로나마 유효한 것은 보직 놀음이나 벌일 시간에 이론적 고투를 벌이자는 단말마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국내 대학의 교수임용과정이나 학위논문 심사과정, 그리고 국내 학술지의 심사과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 이 `한국 사회과학계 비판`이 그저 해외 대학 출신 학자의 `신자유주의판 선비정신`의 일환일 뿐이지 않을까하는 강한 의구심은 듭니다만.

청루 2015-07-14 10:59   좋아요 1 | URL
그 이론적 고투라는 것이 진리를 위한 순수하고 고귀한 일이 아니라 학계에서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상징투쟁이라는 것이 부르디외의 폭로입니다. 그리고 김경만 교수는 그 폭로가 무색하리만치 노골적으로 상징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구요.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김경만 교수의 학계 비판은 `토착적` 사회과학을 지향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글로벌화되려는 한국 학문풍토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생각은...
말씀하신 객관성을 모두들 지향하고 추구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검증은 학계와 공론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사회과학이 객관적 재현의 노력을 방기한다거나 그것과 무관하다는 것은 김경만 교수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그는 상대주의적 과학철학을 근거로 하여 애초에 사회과학이 사회현실에 대한 절대적 진리를 산출할 수 없으므로 실천이니 비판이니 계몽이니 하는 의도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