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만의 주요 비판 대상이 되는 이론가들은 이른바 일상적 행위자의 실천적 영역을 방법론적으로 존중하는 이론가들이다가핑클을 비롯한 민속방법론자부르디외기든스하버마스 등은 이론가가 사회의 객관적인 모습을 실증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인식론상의 특권적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이들은 모두 행위자들의 일상적 실천을 그 내적 맥락에서 기술이해설명하고자 시도한다문제는 이렇게 해서 도출된 사회학적 결과물과 이들 행위자의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영향관계를 둘러싸고 제기된다저자인 김경만은 아무리 행위자의 실천적 논리와 문법을 존중하려는 이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실천의 차원에서 통용되는 논리와는 다른 사회학적 언어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이론적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듯하다더 나아가이들이 사회학적 작업을 통해서 행위자들의 실천에 개입함으로써 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비판적 기획 역시 논리적으로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다일상적 실천의 세계와 사회학이라는 이론적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민속방법론을 주장한 가핑클과 그의 제자들부르디외기든스하버마스로티 등의 논의를 집요하게 파헤치면서 이들의 입장이 모순적임을 드러내고자 한다일상적 행위자의 실천을 이해하고 비판하려는 이들의 시도가 사실은 학계라는 지적 장의 상호참조체계 안에서 형성된 것이고 이 특수한 장의 언어를 사용할 때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상적 행위자의 실천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실천이라는 차원에 대한 관심과 비판적 지향을 거두지 않는 기존 학자들의 태도가 저자에게는 위선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실천비판해방 등의 명분을 내세우지 말고 사회학이라는 작업이 결국에는 학계라는 특수한 장의 논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이는 사회학자가 실천적 지식인을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이론을 터부시했던 반이론적 문화를 지양하고 학계에서의 전문적 논의에 충실하자는 그의 지론으로 이어진다.

 

저자가 책에서 이른바 비판이론가들을 비판할 때 가장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요구는 이론가들의 작업이 일상의 행위자들에게 수용된다는 전제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라는 것이다사회이론은 상호작용적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이론과 현실 사이의 환류(feedback)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그의 입장을 수긍한다고 해도 위와 같은 요구는 다소 부당해 보인다일례로 그는 낸시 프레이저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녀는 여성주의 이론가들이 자신들의 전문적 용어들을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해서자신들의 지식을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지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번역을 통해여성주의 이론가들이 억압받는 여성들을 설득하여지금까지 당연시해온 사실들을 여성주의 이론의 조명하에서 재해석하게 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만 한다.”고 말한다(278).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이론가 자신이 입증해야 할 사항이라기보다는 번역가저술가교사활동가의 역할이다비판이론가들의 목표는 이론이 다루고 있는 세계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 세계와 대화 및 토론을 하려는 것이지그 과정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이들 이론가에게 그러한 공적 소통과 수용의 과정은 전제되어 있다저자인 김경만은 이 과정이 별다른 논리적 해명 없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하지만 이는 불평 이상의 비판이 될 수 없을 듯하다이들 이론가가 자신의 이론이 모종의 과정을 통해서 해석비판토론수용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어떻게 일상의 행위자로 하여금 비판적 사회학 담론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라는 김경만의 요구는 사회학 담론이 유통되는 공론장이 실재함을 증명하라는 것으로 들린다이 요구는 다소 애처로워 보이는데일상인들이 나름의 교양과 식견 및 경험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사회학적 담론을 해석해내고 수용하여 자신을 성찰해내는 과정을 증명하라는 것은 저자가 그러한 경험에서 소외되어 있었음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자신의 논의가 어떤 식으로든 공론장에서 유통되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하고 신뢰하게 된 사회학자라면 저자의 이러한 문제제기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극적으로 비유하자면동네의 조숙한 형들에게 도대체 섹스라는 게 실제로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야동의 품평에만 집중하자고 제안하는 중학생을 보는 느낌이랄까.)

 

실제로 저자는 사회이론과 현실 사이의 소통이 환상임을 주장하는 논변을 본문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일례로 그는 사회적 관행의 변화는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형성되는 것이지이론에 의해 외부적으로 부과되는 인식론적 교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며 기든스를 비판한다(169).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기든스의 입장을 단순화하여 왜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내가 이해하기로 기든스의 입장은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서 행위자들을 계몽하겠다는 것이 아니다저자의 말대로 사회적 관행의 변화는 공동체 내부의 압력과 문제제기에 의한 것일 수 있지만 그러한 실천들의 근거에는 모종의 사회학적 지식이 수용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기든스가 말하는 이중의 해석학이란 행위자들의 실천을 해석할 때 이들이 이미 사회학적 지식을 근거로 하여 세계를 해석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주문이다그리고 사회학의 비판적 기획은 생활인들의 세계 해석 과정에서 중요한 참고가 됨으로써 사회적 관행의 변화를 야기하는 공동체 내부의’ 변화에 일조하자는 것이다저자는 종종 비판이론가들이 마치 계몽적 지도자의 포즈라도 취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을 묘사한다심지어 부르디외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항상 부르디외가 제시한 분석에 순응하거나 동의하는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 비판되기도 한다(130). 그러나 내가 이해하기에 저자가 비판하는 논자들은 이론가로서 자신의 이론적 관점과 분석 결과를 옹호함으로써 공론장의 토론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충실한 책임을 다하려 할 뿐이지 스스로가 인식론적으로 특권적 위치에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그냥 아무 말이나 하고 보자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이 제기한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다하는 것은 이론가 뿐 아니라 공론장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에게 요구되는 태도이다.

 

또한 저자는 부르디외가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설명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다면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이론이 실제 세계의 사태와 일치함을 증명해야 했다고 주장한다(118). 이러한 요구를 하는 이유는 사회적 실재에 대한 자신[부르디외]의 서술이 실재를 재현하는 유일하게 옳은 방법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저자가 확신하기 때문이다(119). 부르디외가 자신의 이론을 사회세계와 행위자에 대한 유일하게 타당한 이론이라고 주장했는지는 논쟁적이라 생각하는데저자의 말을 따라 이를 수긍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세계 및 행위자들의 실천에 대한 이론의 타당성은 이론가 스스로가 절대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론장에서 상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이론가가 나름의 자료와 방법론을 토대로 자신의 논의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이를 자기 이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이론가는 자신의 것과 다른 이론이 존재할 가능성에 항상 개방적이어야 하지만 자신의 이론이 갖는 타당성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옹호해야 한다. 이 자신감과 겸손함을 겸비한 태도를 나는 푸코와 루만에게서 본다. 푸코, 특히 고고학 시기의 푸코는 서양의 사유체계가 특정한 에피스테메에 의해 단절적으로 규정됨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려낸 고고학적 풍경이나 에피스테메의 변화가 절대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른 방식의 고고학 역시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임상의학의 탄생의 부제는 의학적 시선에 대한 하나의 고고학(une archéologie du regard médical)’이었으며, 말과 사물의 부제 역시 the archaeology of human science’가 아니라 an archaeology of human science’였던 것이다. 그는 서양 근대 이성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그보다 더 우월한 이성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저서가 책을 구성하고 있는 문장들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를”, “글의 지위에 오르지 않고 경쾌하게 담론의 지위에 머무르기를소망했다(36-37). 하지만 푸코가 자신의 작업과는 다른 역사 서술의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둔 것은 오히려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자신감의 소산이었다. 자신의 고고학적 작업이 어떻게 방법론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입증해 보라는 요구들에 대해 그가 대응한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 이론의 인식론적 우월성을 입증해 보라고 압박하는 똑똑한 바보들을 위하여 푸코는 철학적 웃음을 예비해 두었다(469). 루만 역시 자신의 이론이 하나의 진리주장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의미론을 사회구조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명한다는 루만 자신의 이론 역시 하나의 의미론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이론이 다른 어떤 이론보다 설명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론이 제시하는 세계 이해의 방식을 폄하하는 자들에게 루만은 이렇게 말한다. “달리 해보시오. 하지만 최소한 마찬가지로 잘 해야 하오.”(1294)


 







사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입장의 강경함이나 단호함보다도 독서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곳곳에 뒤범벅되어 있는 그의 인정욕구와 자존심콤플렉스였다학문은 학계라는 장 속에서 전문적인 이론을 두고 이루어져야 하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기고하고 편집을 맡는 자신보다도 비판과 실천을 내세우는 학자들이 더 인정받는 현실이 그로서는 불만이었을 수 있을 것 같다그리고 비판과 실천을 내세우는 학자들이 거짓이고 위선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그리하여 모두들 실천적 개입 같은 것 그만두고 학계 내에서 이론으로 정면승부를 하면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부심을 곳곳에 내비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스티븐 터너랜달 콜린스데이비드 블루어지그문트 바우만 등 세계적인 사회학자의 논평을 부록으로 실은 것 역시 의도가 없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그의 자신감은 오히려 그가 오랜 시간 인정에 목말라 있었음을이 책을 쓰게 된 근본적 동인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공부를 계속 할수록 고립되지 않을 것을내가 인정하지 않는 이에게 먼저 말을 건넬 것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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