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 베이징에서 마주친 젊은 저항자들
홍명교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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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중국의 진보적 학생들은 한국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자운동에 관한 책과 영화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과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중국어 번역본을 대학생과 활동가가 많이 읽는다. 전자는 해적판이고 후자는 정식판인데, 실제로는 두 책 모두 PDF파일로 돌아다닌다. - P21

"이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자는 얼마나 될까? 있긴 할까? 이들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전시‘와 사회 모순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생각할까?"
두 번째 전시 구역의 풍경은 특히 어색했다. 거대한 폭의 그림을 지키는 보안 노동자들 때문이었다. 시꺼먼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그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그들의 표정은 활기차게 웃고 떠들며 단체사진을 찍는 공산당원들과 달랐다. 마르크스가 제1인터네셔널(국제노동자협회)로 짐작되는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그린 거대한 그림 앞에 오랫동안 서 있던 쉐린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저 보안원들은 다 임시직일 거야."

전시 공간 끝에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의 국가주석 역임 당시 사진들이 연이어 있었다. 쉐린은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사진이 2장씩이지만, 시진핑 사진은 5장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 P137

텐진에 가면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설계로 세계적 명성을 떠친 빈하이 도서관이 있다. 개관 당시 도서관에서 배포한 사진에는 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빈하이 도서관에 갔을 때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서 의아했다. 안에 들어가서 그 이유를 알았다. 진짜 책은 없고 책 표지 사진만 가득했다. 그러나 이 도서관에 수백 권씩 꽂혀 있는 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시진핑 선문집이었다. - P137

그즈음 일면식 없는 친구가 위챗으로 말을 걸어왔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여산의 노래를 빈 배 끄는 어사 노씨에게 보내노라‘의 첫 구절에서 따온 ‘초나라 미치광이랍니다‘라는 닉네임을 가진 여성이었다. 알고 보니 고향이 초나라가 있던 장시성이었다. - P187

나이 든 농민공들에게 체념과 절망이 깊게 배어 있었다. 학생들은 노동자들과 관계를 맺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같이 그런 아이러니와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인생경험이 적었고,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노동자와 함께하는 영화상영회를 열어 가유희사라는 홍콩 영화를 봤다. 장국영, 주성치, 장만옥이 주연한 영화로 1992년 한국에서도 개봉한 적 있다. 결혼 관련 내용으로 어렵지 않고 유쾌하면서도 교훈적인 영화라 나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함께 보던 여성 노동자들이 하나같이 집중하지 못했다. 절반 이상은 도중에 자리를 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한 노동자가 말했다. "우리 그냥 전쟁 영화 보자."
15년쯤 전에 만들어진 홍콩 멜로영화조차 지루해할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제 스마트폰 게임은 야학의 최대 경쟁자가 돼버렸다. 문득 노동조합 집회 내내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 P208

20-30대만 돼도 중국의 대다수 노동자들은 퇴근하기 무섭게 허름한 숙소 침대에 누워 게임을 하고 싶어 하지, 야학 수업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 P208

흔히 한국 언론은 중국 여론을 보도할 때 가장 극단적인 현상이나 목소리만을 옮기곤 한다. 섬뜩하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차분하고 중립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전파력이 강하며, 그 전파력에 기대 페이지뷰와 트래픽을 늘려야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는 계획적이라기보다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이다. 이런 트래픽 장사는 다시 대중 여론에 영향을 미쳐 상호 증폭을 반복한다. - P261

"난 그게 항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는 충분히 유의미하게 싸웠고 전 세계에 이런 모순을 알렸잖아. 하지만 지금은 역량을 보존하고 미래를 기약해야 하지 않을까?" - P228

개혁개방 이후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국가신자유주의 개혁 과정에서 중국은 노동자를 극한 착취의 늪에 빠뜨렸다. 동시에 중국 사회주의 역사가 남긴 집단성과 자기희생이라는 주체성은 착취를 감내케 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한 세대가 지나 출현한 신세대 농민궁에겐 기성세대가 지녔던 집단주의적 열정과 희생정신이 없다. 그들은 시장화된 사회의 거대한 사막 위에서 아무런 보호막 없이 생존해야 한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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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픽션 - 당신이 사랑한 작가들은 모두 이 책으로 소설 쓰기를 배웠다
재닛 버로웨이 지음, 문지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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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글을 쓰는 건 쉽다. 쓰지 않는 것이 어렵다. - P49

대화를 쓸 때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맣은 것을 의미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 의미심장한디테일이 감각적 이미지와 ‘의미‘를 모두 불러와야 한다면, 등장인물의 말은 아마도 무언가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이미지, 성격, 그리고 감정까지 암시할 수 있어야 한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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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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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몇 종류가 있는데 사람은 그중에서 자기 몸에 맞는 행복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 잘못된 행복을 으면 그건 손바닥 안에서 금세 불행으로 바뀌어버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이 몇 종류인가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자기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는 거지. 정말로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면, 그건 너무 잘 맞아서 쉬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행복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 P25

소네는 냉정한 사내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소네는 자기 삶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인간에게는 속아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있을지 모르는데. - P50

노세 씨가 내 생활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한 순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아픔이,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엄청난 아픔이 내 가슴을 조여오더라. 그때야 나는 내가 노세 씨의 사상과 행동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았지. 토론하는 그의 뜨거운 몸짓을, 여유로운 밝은 웃음을, 문득 고개를 들 때 보이는 턱선의 젊디젊은 윤기를, 그리고 뺨과 목덜미에 보송보송한 아직 어린 그의 솜털을, 그러니까, 여름 아침의 산들바람, 가을 저녁 은행나무의 긴 그림자, 이른봄 새벽의 떨리는 공기처럼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야. - P163

2층 창가에 선 당신의 얼굴에 아래에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비치고 있었어. 빛 그림자 탓일까. 반쯤 열린 유리창에 먼산을 보는 당신의 옆얼굴이 뜻밖에 또렷하게 비치는 거야. 아주 차가우면서도 쓸쓸한 시선으로 끝없는 저 너머를 보는 듯한 옆얼굴이었어. 그걸 보았을 때, 나는 문득 내 속의 피로를 느꼈어. 아, 피곤하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니 그 피로감이 갑자기 무거워져 온몸에 가라앉는 것 같았어. 속옷을 챙겨 입는 것조차 귀찮은 기분이 들더라고. 간신히 옷을 다 입고 돌아보니, 당신은 아직 담배를 피우면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런 피로는 그후 줄곧 나를 떠나지 않았어. 당신 품속에 나를 맡기고 녹아드는 안도감 속으로 빠져들 때도 역시 내 몸속 어딘가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거야. 아무리 깊은 잠도 그것을 달래주지 못했어. 되레 그것은잠 속까지 들어왔고 잠에서 깬 뒤에도 내 몸에는 피로감이 무겁게 남았어. - P174

나는 내게서 떠나지 않는 피로감의 의미를 깨달았어. 우리 사이, 우리의 생활은 무에 지나지 않는다. 날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생은 각자 다른 사실과 현상이 우연히 연속해서 일어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무의미함 속에 나는 지쳐버렸다, 내 생은 마른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기만 하고 있으니 죽음에 임박해서 움켜쥐려는 손에 뭔가 남아 있을 리 없다. - P175

사람에게 과거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야. 그걸 부정한다는 건 그 안에서 태어나 자란 현재의 자신을 모두 부정하는 거라 생각해.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럼에도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어. 그러지 않으면 미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 P177

나는 내가 당신에게, 그리고 예전에는 노세 씨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했다고는 생하지 않아. 우리 인간의 ㅇ활은 늘 아무런 의미도 는 망막한 세상의 심연 위에 노출된 채 빛이 바래가지. 또 자칫하면 그 끝없는 깊이 속에 빠져드릭도 하고. 아니, 그런 망막함 속에 표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생활일지도 몰라. 그럼에도 내 생활은 의미 없는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어. 언제나 상대와 뭔가를 공유하고 싶다, 두 사람의 생활 속에 뭔가 공통된 의미를 갖고 싶다고 바란 것도 망막한 세상에 확실한 못을 박고 싶은, 그것을 한 개 한 개 박음으로써 단조로운 시간의 흐름이 아닌 역사라고 부를 만한 것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었어. - P185

그때 나는 알았어. 비틀비틀 걷기 시작한 내 몸은 이미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내 마음과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 P185

나이를 먹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지만, 역시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우리 세대는 분명 늙기 쉬운 세대다. 늙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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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죽음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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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인 조그만 꽃을 보고 가슴이 뛰어서, 나이 든다는 건 청아한 일이라고 스스로 감동하곤 다. - P29

나도 이제 글렀어. 돈은 있는데 갖고 싶은 물건이 하나도 없지 뭐야. 나이 드니까 욕심이 없어져. 욕심은 젊음인가봐. - P49

인간의 유전자가 제대로 힘을 발휘해주는 시기는 쉰 살에서 쉰다섯 살 정도까지에요. 쉰다섯 이후로는 개인차가 굉장히 크게 벌어집니다. 생활 습관에 따라 상태가 좋은 사람은 건강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점점 나빠져요. 쉰 살까지는 유전자가 생존, 생식 모드로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하게 건강히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쉰다섯 살 이후 종족 보존이 끝나면 사회적으로는 세상을 위해서, 또 남들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일지언정 생물학적으로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 어떤 동물이든 태어나서 생식하고 죽는 게 다잖아요? 그 사이에 다른 일도 하는 건 인간뿐이죠. - P99

여기는 죽어가는 사람뿐인데, 안 괴로워요?

저어, 여기서는 환자분이 돌아가셨을 때 울어도 돼요.

누가?

제가요. 일반 병원에서는 반드시 프로답게 굴어야 해요. 환자분이 돌아가셔도 절대로 울지 않도록 교육받죠.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우고요. 하지만 여러 환자분이 계시잖아요. 그중에는 마음이 무척 잘 통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 분이 돌아가실 때면 정말로 슬퍼요. 그래도 울어서는 안 되죠. 전 여기서도 처음에는 참았어요. 전에 있던 병원에서처럼요. 그러자 수간호사님이 울어도 된다,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도 된다고 마씀해주셨어요. 그래서 울었더니 정말로 기ㅜㄴ이 좋았죠. 울면 편해지잖아요. 그게 가장 기뻐요.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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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교양 -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지식 11강
스가쓰케 마사노부 지음, 현선 옮김 / 항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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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일본이 왜 이 모양인지 잘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대담집. 각 분야의 탑이라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뜬구름 잡는 소리나 언뜻 보면 번지르르하지만 실체가 없는 말을 하고 있다. 격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요지부동하며 뒤쳐지는 일본의 현재를 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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