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 시절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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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여러가지 생각으로 혼란해 있는 동안 정숙과 희철 사이의 문제도 점점 커져갔다. 나아지지 않는 친정집의 형편, 치료비가 없어 방치하는 동안 점점 악화디어가는 남동생의 사정, 그 모든 것에 대한 부담감과 조급함, 게다가 오직 사랑밖에 모르는 너무도 단순한 남자친구. 정숙은 그들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려는 데 다다랐고 희철은 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아무런 변화의 조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항상 그게 문제지. 상대방은 순간순간 흔들리고 생각이 변하는데, 그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남자라는 족속은 시작이 바로 결과라고 유추하는, 현실에 대해 총체적으로 방심하는 한심한 군체였다. 희철이 그랬고 무군이 그랬다. - P155

회사 마당의 밤하늘에는 연 며칠 동안 전에 없이 달무리가 졌다. 나는 아침마다 부스스 수탉 꽁지처럼 일어서는 무군의 더부룩한 머리카락을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국을 떠먹을 때마다 내는 후루룩 소리와 약간 엎어질 듯이 앞으로 기운 걸음걸이를 관찰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욱 낯설고 이상했다. 왜 전에는 몰랐지? 무군이 저렇게 말을 하고 저렇게 웃었단 말인가. 나는 그런 느낌들이 곧 사랑이 떠나가는 전조인 줄 알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은 음식에 가해진 ‘알맞게 뜨거운 열기‘였다. 사랑이 떠나면서 가지고 간 그 열기는 음식을 냉랭하게, 더이상은 맛없는 요리로 만들어버렸다. - P160

무군은 그날 온종일 토라져 있었다. 분을 내고 설득을 하다가 포기했는지 오후부터는 혼자 맥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당장에 필요한 옷가지와 생활용품만 챙겼다. 내가 여기저기 물건들을 뒤져내는 동안 무군이 만든 탁자, 옷걸이, 작은 걸상, 그리고 둘이 월급을 합쳐서 산 소파, 옷장 같은 것들이 갑자기 소곤소곤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무군이 너를 위해 만든 걸상이잖아, 너랑 무군이랑 매일 붙어앉아 있던 소파잖아... 그것들도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눈치를 챈 듯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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