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채우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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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좋아하시네. 그거야 자기 남편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소리지. 그렇게 돈 잘 벌고 잘 나가는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넙죽 내놓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 배 아파서 순순히는 못 내놓지."
"맞아요, 아가씨. 아가씨가 순진해서 사랑한다는 소리에 쩔쩔매는 거예요. 우리 나이 이제 사십이에요. 지금 우리가 사랑 때문에 살아요 어디? 우리는 지금 사랑타령할 나이가 지났어요. 알고 보면 결국, 돈이에요. 그 여자도 분명히 그럴거에요."

전혜원의 애끓는 호소를 올케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도 없고, 대략난감이었다. 나이 사십이 무슨 인생의 저주이길래, 곱게 자란 이 여인들은 사랑에 이렇게 돌같이 무감해졌는가?-110쪽

성민과 함께 살아온 십년 동안 우리를 정의했던 하나의 단어를 고르라면 그건 '평화'였다. 그 단어가 '사랑'이 아니라서 불만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작은오빠와 우리 미친 가족들이 그렇게 삶을 들까불러댔는데도 그는 끄떡없었다. 내가 낙관과 비관의 양극단을 초 단위로 오가며 진상을 떨어도, 그러거나 말거나 무던하고 평화로운 게 성민이었다. 우리 사이엔 많은 결핍이 존재했지만, 그 수많은 구멍들을 성민은 타고난 안정감으로 훌륭하게 채웠다. 우리 미친 가족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이 바로 그것이었고 나는 바로 그런 성민을 좋아했다. 나는 성민과 한평생을 함께하리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275쪽

삶에는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어지는 그런 지점이 있었다. 그에게 그곳이 나무가 쓰러진 고속도로였다면, 나에게는 산꼭대기에서 붉은빛이 번져가는 이 산성이었다. 그날 그가 전혜원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흘러갔을 것이다. 내가 오늘 성민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흘러갔을 것이다. 시간과 방향의 감각이 없어지는 그런 공간에서는, 인간이 무엇이 부딪쳐 어디로 가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를, 또 산성을 지나쳤다. 한번 지나치고 나면, 또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살게 된다. -297쪽

사람들은 보통 작은오빠가 미쳤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원조는 김덕만 사장이었다. 돈을 잘 버니까 미친병이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빠는 평생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철들 기회가 더 없어서, 미친 증세로 따지자면 작은 오빠의 열 배였다. -310쪽

사람의 마음이란 몸을 덮고 있는 얇은 막을 뚫고 쉽사리 뛰쳐나가는 성질이 있었다. -5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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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하트 -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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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 뒤에 여러 종류의 담배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았다. 냉장고 옆쪽으로 10대로 보이는 남녀가 간이 식탁 위에 컵라면을 올려놓고 같이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입 좀 다물고 먹어. 후루룩 짭짭, 그게 뭐냐? 여자애가."
"남 말 하네. 너 먹는 소리가 백배는 더 크거든요."
"뭐? 너? 이게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너 오빠한테 자꾸 그러면 확, 한 번 더 해버린다."
말과 동시에 남자애가 여자애의 허리를 확 당겨 안았다. 여자애가 꺄악, 소리를 지르며 간이식탁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라면 용기가 떨어지면서 옆으로 지나가던 내게 국물이 쏟아졌다.
"엄마!"
얼른 옆으로 비켜섰지만 이미 추리닝 윗도리에 라면 가락과 야채 조각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뒤였다.
"어머, 어떡해."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애가 남자애 품으로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남자애가 여자애를 당겨 안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서로 꼭 끌어안고 나를 응시하는 남녀. 무슨 대단한 적군이라도 만난 것처럼 서로를 보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애 얼굴은 군데군데 화장이 지워져 있고, 남자애 얼굴에는 자신-470쪽

감이 넘친다. 막 성관계를 마치고 나온 연인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분위기. 인생의 비밀스러운 곳을 함께 탐험하고 온 이들 사이에서만 오갈 수 있는 긴밀하고 친근한 분위기였다. 순간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질투심이 치솟았다. 이 아이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건전한가. 술에 취해 몸을 섞은 뒤 단절로 대응했던 태환과 나보다는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성관계를 암시하는 말을 타인이 알아챌 정도로 함부로 내뱉는 이들이 백배는 더 건강하고 아름다우리라. -4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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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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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바라나시는 유달리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자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거리를 걸어가면 여기저기 일본어와 한국어로 쓰인 간판과 홍보문구가 눈에 띄고 심지어 일본어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장사꾼들도 만날 수 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바라나시가 가지고 있는 신비롭고 영적인 분위기가 동양인들이 그리는 인도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뭉뚱그린 추측을 해보았을 뿐. 그런데 인도의 갠지스 강을 배경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깊은 강'을 읽고서, 적어도 일본인들의 바라나시 사랑에는 이 책이 한 몫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일본인이라도 이 책을 읽고서 바라나시에 가고 싶었을 것이다. 


'구원'을 이야기하는 종교성 짙은 글이라, 처음에 너무 좋아 빨려들어가면서도 결국 뻔한 설교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고통을 설마 신의 은총이란 거짓말 같은 것으로 다 해결해버리는 것은 아니겠지.하는 걱정. 책에는 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죽으며 다시 환생하겠다 말한 아내를 찾아 인도로 온 이소베, 병에 걸려 정신없는 와중에 돌보지 못해 굶겨죽인 구관조를 가슴에 품은 누마다, 전쟁터에서 인육을 먹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기구치, 대학시절 장난으로 유혹했던 찌질한 남자를 잊지 못하고 권태에서 허우적 대는 미쓰코. 가장 흥미로웠던 건 미쓰코의 이야기이다. 그저 놀려먹기 위해, 잠시간의 무료함을 잊기 위해 카톨릭 신자를 유혹하고 당신이 믿는 신이란 게 뭐냐고 놀리고 아무렇지 않게 차 버렸는데 그 뒤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삶의 권태에 부닥칠 때마다 그 답답하고 멍청했던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현대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란 건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었다. 생사가 달린 사건사고라면 차라리 그에 매몰되어 살아지겠는데 부족한 것 없으면서도 마음이 허한 고통, 이유도 없고 답도 없이 생을 덮치는 권태라는 괴물. 


작가는 구원을 이야기한다. 구원이되, 내가 지금껏 본 구원과는 다른 구원. 물 같은 구원, 공기 같은 구원,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구원, 시나브로 스며드는 구원. 신을 믿지는 않지만 이런 종류의 구원은 충분히 존중의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최소한 진짜를 향한 작가의 마음이 책에서 느껴져서, 그래서 그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가트 근처의 길에는 오늘도 아이들 외에 손가락을 죄다 잃은 문둥병 환자들이 늘어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없는 그 손과,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천으로 짓무른 피부를 감춘 남녀가 누마다와 미쓰코에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똑같은 사람인데." 


참다못한 누마다가 울먹이다시피 말했다. 


"이 사람들도....똑같은 인간인데."


미쓰코는 응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관광객인 우리가 무얼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마음 깊숙이 들려온다. 산조나 누마다 같은 값싼 동정은 미쓰코를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았다. 진정한 사랑만을 원했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는다는 절규같은 저 마음가짐이 책에서 읽힌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대가는 자신이 평생 천착했던 구원이란 주제에 대해 보이지 않게 써내려 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그 여운이 아주 오래 갔다. 사진과 그럴듯한 말 몇 줄로 쉬운 감수성 자극하는 책 말고, 가슴이 아파서 갠지스 강을 찾고 싶단 생각을 하게 만든는 이런 책을 가진 일본 국민들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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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8-13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년 봄에 네팔에 갔을 때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스와얌부나트를 들른 적이 있었답니다. 그 때 사원에서 한참이나 머물며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바라나시'를 향해 곧장 발걸음을 옮기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주체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네팔 사람들만 하더라도 인도와 이웃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내세'에 대한 엄청난 확신 때문에, 이승에서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괴롭더라도 '환생 이후의 또다른 삶'을 위해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혹은 그리 큰 희망도 품지 않고) 아무런 불만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사는 듯한 모습들을 보고 정말 많이 놀랐었답니다.

카트만두 시내에도 조그만 강가에 화장터(파슈파티나트, Pahupatinath)가 있었는데,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거길 가보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쉽네요. 언젠가는 비행기 위애서 내려다 보기만 했던 그 거대한 갠지스 강과 바라니시를 가 볼 날이 있겠지요. 바람과 구름과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구원 얘기는 참으로 억지스럽지 않아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LAYLA 2013-08-20 10:53   좋아요 0 | URL
세계인구 기준으로 힌두교 신자가 기독교 신자보다 많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어요.

카트만두에도 화장터가 있군요? 네팔은 가보지 못했는데 전 거꾸로 다음엔 네팔에 가보고 싶네요. 바라나시는 인도에서도 제가 가본 곳 중 가장 더러운 도시입니다. 더러움과 성스러움이 공존하는, 그래서 참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론 별로 였는데 그래도 어쩔수 없는, 제 불호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의 아이콘으로 잡은 장소라 엔도 슈샤쿠를 읽으며 이런 식으로 기억을 곱씹어 보게 되네요 ^^

라로 2021-04-02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이 옛날에 읽으셨군요!! 레일라님이 읽었는데 내가 왜 자랑스럽지? ㅎㅎㅎ

LAYLA 2021-04-03 21:33   좋아요 0 | URL
라로님~! 요즈에 읽으세요? 저는 좋아서 두번 읽었어요^^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산문집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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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사람들

나는 무익한 것도 느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 과감하게 무익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을 존중한다. 우리는 모두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다..... 아주 유능하다. 나는 용기있게 '나' 또는 '아름답고 무정한 권태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같은 말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가능성과 관련하여...'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처럼 구는 사람들은 절대로 높이 사지 않는다. -11쪽

운명

사람들은 언제나 운명이 번개와 번득이는 불꽃, 티파니와 북, 트럼펫을 거느리고 천둥처럼 요란하게 들이닥친다고 믿는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에 부딪히면 그 매너가 훨씬 더 섬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폐암, 빈곤, 굴욕, 아니면 치명적인 사랑이 살며시 나타나 문을 두드리고는 정중하게 허락을 청한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고 나서야 들어온다. -63쪽

연민

동물들은 연민을 안다. 그것은 원시적인 연민, 더듬거리는 외마디 연민이다. 내가 어쩌다 삶이나 문학 논쟁에서 한 방 먹거나 아픈 곳을 찔리면 개는 정확하게 내 상처를 안다. 개는 다가와서 내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다 안다는 듯이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슬기롭게 위로한다. "기운을 내, 곧 다시 좋아질 거야." 개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결코 좋아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동물의 연민은 고매하고 용감하다. 그들은 위로하는 게 아니라 확인할 뿐이다. 이런 객관성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편안하게 한다.-77쪽

당장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이십 년 전부터 구상해온 소설을 드디어 쓰자. 그동안 나는 이 과제를 미루려고 수십 권의 다른 책을 썼다. 또 중국과 그린랜드로 여행을 하고, 가족을 일구어 적어도 아이를 셋은 낳고, 이따금 로빈슨과 카사노바처럼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고, 인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확실한 것을 알려주는 삼사천권의 책을 읽고, 독립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더 독립적이 되기 위해서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포기하고, 죽음과 친근해지고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이제 이런 일들을 더 미루지 말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런 것들을 성취하지 못하거나 소유하지 못한 삶은 덧없고 의미없다. 이 모든 것은 내 의무이고, 또 당장 나한테 필요한 일이다. 인간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출발 오 분 전에야 짐을 꾸리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 여행자처럼 허둥지둥 서두르기 시작한다. 그러니 자, 지금 시작하자. 당장, 우리 삶을 꾸리자. -84쪽

절대로 가격을 흥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삶.-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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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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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는 다시 눈을 치떠 그녀를 더듬듯이 살폈다. 남자란 어째서 결국은 다들 똑같은 걸까. 그녀는 자신이 이 오쓰에게 다른 학생들과 다른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남성들에게 없는 것. 나무의 꿈, 물의 꿈, 불의 꿈, 사막의 꿈.
그녀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오쓰에게 건넸다. 건넬 때 일부러 휘청거리며 걸려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오쓰는 미쓰코의 몸을 떠받칠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겁쟁이잖아." 하고 그녀가 말했을 때, 비로소 그는 오래도록 억누르고 있던 욕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듯 그녀의 몸에 와락 달라붙었다. 그가 내쉬는 숨결에는 학생 식당에서 먹었을 게 분명한 카레 냄새가 났다. 미쓰코는 자기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기다려요."
미쓰코는 그를 두 손으로 밀쳐 냈다.
"샤워 정도는 해야잖아."
-69쪽

썩은 무화과의 악취가 나는 일요일이 그 후로 세 번 이어졌다. 오쓰의 머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미쓰코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푹 빠져 엎디어 있는 건 오쓰일 뿐, 그녀는 방에 걸린 달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 무언가를 찾아서 어디론가 가고 싶다. 확실하고 뿌리 있는 것을. 인생을 붙잡고 싶다. -73쪽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 건) 그때, 미쓰코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의 충동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야)
대학 시절에 몸속을 마냥 치달았던, 자신을 더럽히고 싶다는 그 충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그녀는 사회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 그런 파괴적인 무엇을 자극할 만한 것, 예를 들면 바그너의 오페라나 루동의 그림 같은 것들과는 통 인연이 없고 무관심한 남자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서, 남편과 비슷한 남녀들 속에 자신을 시체처럼 묻어 버리고 싶다고 진심으로 진지하게 바랐다. -77쪽

이소베가 몸을 일으킨 뒤에도 그네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저 홀로 흔들렸다. 마치 그의 아내가 죽고서도 그 말이 남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듯이. 우리들 일생에서는 무엇인가 끝났어도,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171쪽

저는 고독하기 때문에 필시 고독할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습니다. 한심하게도, 저는 고독합니다 .......-185쪽

사 년이나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했으나 고생한 보람 하나 없이 어느 대학의 연구실에도 빈자리가 없다며 거절당한 그는, 여행사 안내원이라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불만을 마음 깊숙이 쌓아 두고 있었다. 솔직히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코스모스 사의 의뢰로 안내해야만 하는 일본인 관광객을 경멸했다. 오로지 감사해하며 불교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노인네들, 히피나 다름없는 방랑을 즐기는 여대생들, 그리고 누마다처럼 인도의 자연 속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남자. 그들이 일본에 갖고 돌아가는 토산품은 늘 뻔하다. 실크 사리, 백단 목걸이, 상감 세공, 스타 루비나 에머랄드 같은 보석, 은 팔찌. 예전에 미국이나 유럽의 관광객들이 휩쓸고 간 가게에서 지금은 일본인이 어정버정대는 모습을, 에나미는 가게 입구에 서서 경멸의 눈길로 보았다. -197쪽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갖춰 입고 복도로 나왔다. 오전 3시 경으로, 캄캄했다. 복도 벽에 갖다 붙인 듯이 도마뱀붙이 한 마리가 찰싹 달라붙어 있다. 밖에서는 벌레들이 홍수처럼 울어 대고 있었다.-223쪽

가트 근처의 길에는 오늘도 아이들 외에 손가락을 죄다 잃은 문둥병 환자들이 늘어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없는 그 손과,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천으로 짓무른 피부를 감춘 남녀가 누마다와 미쓰코에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똑같은 사람인데." 참다못한 누마다가 울먹이다시피 말했다. "이 사람들도....똑같은 인간인데."
미쓰코는 응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관광객인 우리가 무얼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마음 깊숙이 들려온다. 산조나 누마다 같은 값싼 동정은 미쓰코를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았다. 진정한 사랑만을 원했다. -243쪽

복수나 증오는 정치 세계뿐만이 아니라, 종교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은 집단이 생기면 대립이 발생하고 분쟁이 벌어지고,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모략이 시작된다. 전쟁과 전후의 일본 속에서 살아온 이소베는 그러한 인간이나 집단을 싫증나게 보았다. 정의라는 단어도 지겹도록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 깊숙이,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막연한 기분이 늘 남았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 그는 사근사근하게 누구와도 잘 지냈지만, 어느 한 사람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저마다 마음 깊숙이 자신만의 에고이즘이 있고, 그 에고이즘을 호도하기 위해 선의니 옳은 방향이니 주장하는 것을 실생활에서 납득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걸 인정하고서, 풍파 일지 않는 인생을 꾸려왔다. 하지만 외톨이가 된 지금, 이소베는 생활과 인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겨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생활을 위해 사귄 타인은 많았어도, 인생에서 정말로 마음이 통한 사람은 단 두 사람, 어머니와 아내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85쪽

사람은 사랑보다도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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