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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자서전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영국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당연하게 최고의 엘리트 의대 교육을 받은 올리버 색스는 전쟁의 혼란속에서 징집을 피하고자, 또 한편으론 고스펙 의사가 넘쳐나는 런던에서 굳이 고생하기보다는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자 캐나다로 건너가게 된다. 이 자서전은 색스가 기억하는 어린시절부터 기록하며 자신이 어린시절에 가졌던 과학에의 지적 호기심도 꽤 열성적으로 서술하지만 부모의 둥지 아래 어린 시절이란 움직이지 못하고 묶여 있는 배 같은 그런 신세이니까, 그의 인생이 그리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건 부모를 떠나 신대륙으로 건너가고 나서부터이다. 인생이 풀린다. 나는 어른들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그 표현을 쓸 때 나는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뭘 해도 인생이 풀리는 시기, 나아가는 시기, 되는 시기. 개인의 노력과 운명과 운이 모두 합이 맞아 떨어져야 하는 그런 기적같은 일. 누군가는 그런 시기를 인생에 한 번쯤 가진다고 하더라. 색스는 당대의 최강대국 중 하나에서 상류층 가정의 일원으로 그것도 백인 남성으로 태어났다. 그런 그가 60년대 황금기에 캘리포니아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경험한 이야기들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으며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라는 것을 글로 체화시켜 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거대한 시대의 물결이 휘몰아 칠 때 잘난 개인은 그 파도 위에서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짜릿하게 파도를 타고 있었구나 하는 그런 느낌.
"1965년 무렵부터 교통체증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동부는 특히 더했다. 모터사이클 타고 달리던 길 위의 삶, 캘리포니아에서 누렸던 자유와 환희는 거기서 끝났다."
교통체증이란 말이 존재하기도 이전의 세상. 색스의 자서전만큼 생생하게 그 시대를 들려준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색스 주변의 사람들이 에이즈와 약물과 각종 사고로 계속 죽어가는 것마저 그 시대의 증거들로 보였다.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사람이다 보니 자서전엔 그가 어떤 고민으로 삶의 경로를 선택했고 어떻게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류의 이야기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전반적으로 큰 고민 없이 물길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 보인다. 의사인 부모를 보고 자라 당연하게 의대에 진학했고, 군대에 가기 싫어 자연스레 연방국인 캐나다로 건너갔고, 또 거기서 우연히 소개를 받아 캘리포니아에서 인턴자리를 얻고... 별 다른 이유가 없이 그의 인생은 계속 흘러간다. 나이가 들어 되돌아보면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일까.
크게 걸림돌 없는 색스의 인생에 단 하나의 골칫거리라면 그의 성정체성이다. 50년대까지도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섹스는 부모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함을 안고 살아간다.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만나는 일도 쉽지 않다. 사실 거의 완벽에 가까워 보이는 그의 일생에 하나의 빈 구멍이라면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 해로하지 못했다는 것일텐데 색스는 그 마저도 그의 솔직함으로 유쾌하게 정리해버린다. "40살 이후로 35년간 섹스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35년간의 금욕 굴욕마저 모두 덮어버리는 그의 황금 해피 엔딩. 일흔다섯의 나이에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보통의 부부들처럼 일상을 공유하고 한 사람이 책을 읽으면 다른 한 사람은 기대어 가만히 온기를 나누는 그런 삶을 경험하게 된다. 시대의 측면에서 거시적으로만 읽히던 그의 인생이 미시적으로 빛난다고 느껴졌던 부분이다. 그가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앞의 75년 인생과 400쪽에게 미안하게시리.
올리버 색스의 이야기는 평전 작가가 쓴 것도 안니고 본인이 주섬주섬 쓴 이야기라 시시콜콜하기도 하고 정말 일기장 모아놓은 듯한 투박함도 가끔 눈에 띄지만 내 귀한 시간 아깝지 않은 정말 멋진 자서전이었다. 파도가 밀려올 때 아름답게 서핑을 한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읽혀지고 후대에 남겨질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