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85
볼레스와프 프루스 지음, 정병권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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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아가씨에게 ‘세상은 무엇이고, 아가씨는 누구냐?‘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아가씨는 틀림없이 세상은 마술 정원이고, 마술로 가득 차 있는 성이며, 자기는 육체에 갇힌 여신이거나 요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자벨라는 요람에서부터 초인간적일 뿐 아니라 초자연적인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았다. 잠은 오리털 이불 속에서 잤고, 비단옷과 뜨개질한 것을 입었으며, 흑단 혹은 자단 목재를 조각해서 속을 넣은 의자에 앉았으며, 크리스털 잔으로 마셨고, 식사할 때는 금만큼 비싼 은이나 자기 그릇을 썼다.
이 아가씨에게는 사계절이 없고, 항상 부드러운 햇빛,생생한 꽃들과 향기로 가득한 봄만 있다. 밤과 낮의 구별도 없어서 어떤 때는 한 달 내내 아침 8시에 잠자리에 들고, 점심은 새벽 2시에 먹는다. 지리적 차이도 없다. 왜냐하면 파리, 빈, 로마. 베를린 혹은 런던에서도 같은 사람들이고, 관습도 같고, 가재도구도 같은 것들이며 심지어 음식도 동일하다. 태평양산 해초, 북해에서 딴 굴, 대서양이나 지중해산 생선, 모든 나라에서 온 야생 고기, 전 세계에서 사 온 과일 등. 이 아가씨엑는 중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자에 앉을 때는 다른 사람이 부추겨서

히고, 접시도 다른 사람이 들어서 놓아주고, 거리에서는 다른 사람이 태워 가고, 계단은 다른 사람이 부축해서 내려가고 위로 돌라갈 때는 다른 사람이 들고 간다.
휘장으로 바람을 막고, 황마차로 비를 막고, 검은담비 모피로 추위를 막고, 햇빛은 양산과 장갑으로 막았다. 이렇게 사람들 위에, 자연의 법칙 위에 매일, 매달, 매년을 살았다. 그녀는 폭풍우를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알프스에서, 다른 한 번은 지중해에서. 당시 용감한 사람들도 겁에 질렸지만 이자벨라는 바위가 갈라지고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즐거운 듯 웃었다. 그것이 위험할 수도 있음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처럼. 이 아가씨에게 자연은 번개, 바위, 바다의 소용돌이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현상이다. 자연은 다른 때에는 이 아가씨에게 제네바 호수 위의 달을 보여 주고, 해를 가리고 있는 라인 강 폭포 위의 구름을 흩어지게 한다. 그것은 마치 무대 연출가가 하는 작업 같은 것이다. 신경이 예민한 귀부인들도 그것을 보고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고마워해야 할 거야. 내가 그 사람에게 미치지 않았다면 재산도 모으지 못했을 것이고, 가게 계산대 뒤에서 썩어 가고 있었을 거야. 그러나 그런 동경, 절망, 희망이 없으니 이제 슬퍼지겠지...어리석은 인생! 지상에서는 각가 가슴 속에 담고 있는 환상을 좇다가, 저세상에 가서야 그것이 미친 짓이었음을 알게 되겠지.

-마흔다섯이라...사랑을 하기엔 마지막 나이인데, 최악의 시기지.
-전문가들은 첫사랑이 최악이라고 하던데
-틀린 소리야. 첫사랑 다음에 백 가지 다른 사랑이 자네를 기다리지만, 백한 번째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어. 결혼해. 그것만이 자네의 병을 치료할 수 있어.

그는 항상 행동하는 사람이지요. 그는 머리나 가슴으로 무엇을 느끼면 그것을 바로 실행했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을 때 대학에 들어갔고, 돈을 벌기로 결정했을 때 돈을 벌었잖습니까. 그래서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역시 물러서는 법 없이 아주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고 말아요. 그는 그런 사람입니다. 놀랄 것 없어요. 그의 안에는 두 사람이 녹아 있어요. 1860년대 이전의 낭만주의자와 1870년대의 실증주의자. 밖에서 보는 사람에겐 모순으로 보이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완벽한 일관성을 갖추고 있어요.

그들에게는 의지가 부족합니다. 의지의 병...이 병이 전체 계급에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 칭호, 존경, 심지어 여자 복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겐 추진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야심 있는 사람들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보쿨스키는 사람들을 잘 안다. 그래서 자주 그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어디에서든 도처에서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점원으로 일할 때도 밤에는 잠을 안 자고 공부했고, 가난을 이기고 대학생이 되었고,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군인으로 살아남았고, 추방되었을 때에도 점토로 지은 오두막에서 눈을 맞으면서도 학문을 연구했다. 그에게는 항상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급급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아! 갈증이 심한 사람은 우물에서 물러나지 않아. 죽어야 한다면 마시면서 죽겠어.

만일 보쿨스키가 그런 여행가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10년 동안 땅속에 살면서 수백만 달러를 모은 광산가였다면! 그러나 그는 상인에 불과하다. 그것도 액세서리를 취급하는 상인이지 않은가! 그는 영어도 모르고, 그에게는 늘 벼락부자 티가 난다. 그것도 젊은 날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손님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은 기껏해야 좋은 조언자, 심지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방문객이 없을 때에 한해서)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면 매우 불행해질 것이고, 애인으로는....한마디로 웃기는 일이다.

심지어 동물들 중에도 인간들과 같은 그런 비열한 동물은 없지. 자연계에서는 서로 마음에 드는 암컷과 수컷끼리 짝을 이루게 되지. 그래서 짐승들에게는 바보가 없어.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나는 유대인이니까 기도교인을 사랑해선 안 되는 거야. 그는 상인이니까 백작 아가씨를 사랑할 권리가 없는 거야. 자네는 돈이 없으니까 여자를 가질 권리가 없는 거야. 자네들의 그 잘난 문명이라는 것이 그런 거라네...!

-성격이라고요? 그는 사랑에 빠질 사람이 아닌데.
- 그 성격 때문에 그가 파멸하는 거요. 10만 킬로그램의 눈 덩어리도 가볍고 엷은 눈송이로 나뉘어 떨어지면 가장 작고 연약한 풀조차 상하게 하지 않지요. 그러나 눈사태로 내려오는 10만 킬로그램의 눈은 가옥을 파괴하고 사람들까지 희생시킵니다. 만일 보쿨스키가 일생 동안 일주일 단위로 다른 여인들을 사랑한다면, 그는 꽃봉오리처럼 보일 것이고, 생각도 자유로워질 것이고, 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수전노처럼 사랑의 자본을 모았는데, 그 결과는 우리가 보다시피 어떻습니까? 사랑은 나비와 같은 매력을 가질 때 아름다운데, 오랫동안 가사 상태에 있다가 깨어나면 호랑이처럼 되어, 보는 사람도 재미가 없지요. 입맛이 좋은 사람과 배가 고파서 속이 뒤틀린 사람은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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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초상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8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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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보다 높은 곳에 가 본 적이 없는 걸. 여자는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과 같아." 이사벨이 교훈적인 어조로 말했다.

- 그렇다면 그분 취향이 정교한 게 다행이네
- 사실 정교하지. 그래서 널 신부로 택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취향이, 사실은 정교한 취향이 구겨진 걸 본 적 있어?
- 난 남편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할 위인은 결코 되지 않을거야.

이 말을 듣고 랠프가 격한 말을 했다.

- 아 그것 참 제멋대로인 생각이군. 너답지 않아! 넌 그렇게 측정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거든. 넌 따분한 딜레탕트의 비위나 맞추는 것보다는 더 나은 일을 해야 할 사람이야.

스스로 패배를 인정한다고 해서 어려운 세상살이가 더 쉬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겐 삶에 대한 분명한 시각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저를 싫어하는 건 전적으로 그분 자유겠죠. 전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오히려 사람들이 절 좋아한다면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거예여. 기자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정도가 아니면 좋은 기사를 쓸 수 없거든요. 기자라는 직업이 바로 그런 거예요. 여기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 결혼한 여자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 좋은 남자들은 모두 그런 짓을 한답니다. 당신도 결혼하면 알게 될 텐데!

난 몇 년간 그 사람을 연구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어. 그의 인간 됨됨이는 훌륭한 사업 설명서처럼 뚜렷해. 그는 지성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지성을 높이 평가해. 반면에 지성을 갖추었다고 과장하지는 않아.

이사벨, 살아 있는 게 더 좋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랑이 있으니까. 죽음도 좋지만, 죽음에는 사랑이 없어.

가급적 당신의 인생을 지켜야 돼요. 일부분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체까지 잃어선 안 돼요. 겉으로 보이는 상황,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 세상의 형편없고 우둔한 짓거리 따위를 걱정하는 건 당신 자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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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초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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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행은 끝났고, 영원한 휴식이 오기 전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말끔히 면도한 갸름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균형 잡혔으며, 평온하지만 예리한 표정을 담고 있었다. ...그 얼굴은 그가 성공한 삶을 살았지만 남들의 시샘을 받을 만큼 성공만 한 것이 아니라, 해롭지 않은 실패도 상당히 경험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는 분명 남자로서 대단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많은 일들이 발생한 집을 좋아한다면 피렌체로 가야지. 특히 죽음이라면 더 그래. 난 세 사람이 살해되었던 오래된 대저택에 살고 있거든. 알려진 것만 세 명이고, 그 밖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있는지는 몰라.

글쎄, 난 원서를 좋아하지 않아. 번역본이 좋지. 이사벨은 외국어로 씌었어.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겠소. 아마 그녀는 아르메니아 사람이나 포르투갈 사람하고나 결혼해야 될걸.

지금의 방식대로 산다는 건 형편없이 번역된 양서를 읽는 것과 같았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게 될까 아니면 미워하게 될까?
-어느 쪽이든 그 친구는 전혀 상관 없을 거야. 남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까.
-그렇다면 남자로서 난 그 여자를 싫어해야 할 것 같은데. 괴몰 같은 여자겠지? 꽤나 못생기고.
- 아니, 무척 예뻐.
- 여성 기자라. 스커트를 입은 신문 기자란 말이지? 빨리 만나 보고 싶은걸.
- 그 친구를 비웃는 건 쉬워도 그녀만큼 용감해지는 건 쉽지 않아.

나 자신을 속박하지 않겠다는 소원에는 어떤 잘못도 없다고 생각해. 난 결혼을 통해 인생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 여자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들도 많으니까. ...난 다른 젊은이들이 하듯이 인생을 찾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나 자신에 대해 살펴보고 싶을 뿐이야

- 너 좋을 대로 하자꾸나. 그런데 그게 좋은 일인지 의문이구나. 넌 그 아이의 돛에 바람을 불어넣고 싶다고 하는데, 너무 많이 불어넣는 것 아니냐?
- 순풍에 돛을 달고 항해하는 걸 보고 싶은걸요!
- 단지 네 즐거움을 위해서로구나
- 즐거움이죠. 커다란 즐거움이 될 거예요.
- 글쎄, 난 모르겠다. 요즘 젊은이들은 내가 젊었을 때와 사뭇 달라. 나는 젊었을 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거든. 그런데 넌 내게 없었던 망설임이 있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걸 생각하는구나. 그러니까 이사벨은 자유인이 되고 싶어 하고, 그 아이가 부자가 되면 돈 때문에 결혼하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지. 그렇게 할 아이라고 생각하니?
- 그럼요. 하지만 이사벨은 과거 어느 때보다 돈이 없어요. 그녀의 아버지가 돈을 낭비하는 습성 때문에 모두 써 버렸대요. 지금 그녀가 먹을 거라고는 성찬에서 남은 빵 부스러기뿐이고, 남은 재산이 얼마나 변변찮은지도 모른대요.

- 집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 그건 좀 모자라는 말이군요.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모든 인간에겐 껍질이 있다는 것을 참작해야 한다는 걸 알게 돼요. 껍질이란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을 말하는 거예요. 이것으로부터 고립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답니다. ‘자아‘라는 건 뭐라고 해야할까요? 그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 걸까요? 자아는 우리에게 붙어 있는 모든 것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다시 흘러나와요. 나는 나 자신의 대부분이 내가 골라 입는 옷에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물건을 아주 소중히 여긴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개인의 자아는 자신을 스스로 표현한 것이거든요. 집이며 가구, 옷, 우리가 읽는 책, 사귀는 친구, 이 모든 것이 모두 자아를 표현하지요.

-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이모부님이 내게 그토록 많은 돈을 남기시려고 했던 것을 알고 있었어?
- 이사벨, 내가 알았든 몰랐든 무슨 문제겠어? 아버지는 고집이 센 분이셨는데.
- 왜 그런 일을 하셨을까?
- 칭찬하는 차원쯤 되겠지.
- 무엇에 대한 칭찬?
- 네가 너무나 아름답게 살아 준 것에 대한 칭찬.

이사벨은 얼마 동안 이모 곁에 있기로 했다. 이상한 충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반적으로 품위 있게 여겨지기를 무척 바랐고, 친척이 없는 젊은 숙녀란 잎이 떨어진 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것이 너에게 좋은 건지 아니면 저것이 좋은 건지 지나치게 생각하지 마. 양심을 너무 혹사하면 안 돼. 그러면 손끝으로 친 피아노처럼 엉망이 돼 버릴 거야. 보다 소중한 기회를 위해 양심을 보존해야 돼. 네 성격을 다듬으려고 너무 애쓰지도 말고. 그건 마치 팽팽하고 부드럽고 어린 장미꽃 봉오리를 잡아당겨 억지로 꽃을 피우게 하는 것과 같아. 너 좋은 대로 살다 보면 성격은 저절로 형성되는 거야.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
오스먼드는 감정이 거의 배제된 신중한 어조로 사랑 고백을 되풀이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지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말이었다.

그녀는 영리하고 너그러웠으며, 고상하고 자유로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할 셈인가? 이런 질문은 잘못되었다. 여성 대부분이 이런 질문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아한 모습으로, 다소간 수동적인 자세로, 남자가 들어와 어떤 운명을 제시해주길 기다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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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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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소 난해한 제목의 이 책은 언뜻 보면 자기계발서 같은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기계발서'의 형식을 차용한 '소설'이라고 한다. 21세기 소설의 진화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호기심을 안고 상하이 여행길에 가지고 갔다. 급속도로 성장한 상하이 같은 도시에 이처럼 잘 어울리는 책이 어디 있겠냐며...!


저자가 파키스탄인인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자기계발서는 내가 흔히 알고 있는 자기 계발서와는 좀 다르다. 나에게 자기계발서란 시간을 아껴쓰라 채찍질하고 정글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면종복배의 스킬을 전수하는 책인데...이 책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라' '교육을 받아라' 한국에서라면 60-70년대에나 쓸모있었을 조언이랄까? 즉, 이 책이 모티브로 삼고 있는 자기계발서란 한국이나 미국 같이 경제성장률이 둔화된 선진국에서 말하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지금도 연 6-7%씩 성장하는 개도국에서나 읽히는, 파키스탄에서나 읽히는 그런 종류의 자기계발서인 것이다. 나라의 이름은 한 번도 명시되지 않지만 인도나 파키스탄 쯤 되는 그런 나라를 배경으로, 자기계발서의 지침을 따르면 한 인간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출생에서 부터 사망까지 그리고 있다. 

사실 이 책은 작품성의 측면에서는 그리 큰 찬사를 받을 건덕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서술이 치밀한 것도 아니고 문체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며 서사가 흡입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평이라면 이 책은 파키스탄 출신으로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저자가 자신의 모든 장기를 이상적으로 조합하여 만들어낸 하나의 '성공적인 상품'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약한점은 최대한 숨기고(부족한 필력과 스토리 텔링) 자신의 강점은 최대한 부풀리고(개도국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지식) 자기계발서를 소설에 끌어들여 그걸 '실험적 형식'이라는 말로 버무린다. 

만약 이 소설의 배경이 21세기 미국이었다면 이렇게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자기계발서들은 단순히 열심히 살아라 메시지를 전파하는 수준을 넘어 '정신승리'를 내재화 하도록 속삭이는 철학서 수준이기에 그걸 소설과 조합시켜 재미있게 써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배경은 개도국이기에 자기계발서가 하는 말은 단순하고 명쾌하며 소설의 주인공의 인생도 아주 쉽게 전형화된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부모를 따라 도시로 이주하고 시작은 남의 집 종업원이었으나 기술을 배워 자기 사업을 시작하고... 소설이라고 써 놨으면 말도 안될 구멍 숭숭 난 글들이 '자기계발서'와 더해졌다는 이유로 다 용납이 된다. 이 인물은 자기계발서의 정신을 상징하는 하나의 캐릭터이니 이렇게 거칠게 일반화 되어도 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60-70년대가 너무 가까운 과거라서 이 소설을 읽으면 우리 부모 세대의 이야기쯤인거 같고 그래서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데(흔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미국인들에겐 아주 '이국적'으로 받아들여졌을거 같다. 하버드 로스쿨 까지 다닌 저자이니 소 뒷걸음질에 쥐 잡은 건 아닐거고 이런 포인트를 아주 영리하게 캐치하고 작품으로서 기획했으리라 생각한다.

책이 아주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지막 장까지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힘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의 작품(소설)으로 보자면 부족하고 소설이 던지는 메세지는 더 빈약하다. 저자가 파키스탄의 서민 출신이라면 영어로 글을 쓰지는 못했더라도 조금은 더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교육도 미국에서 받고 커리어도 미국에서 쌓은 사람이 쓴 개도국의 이야기에 깊이가 있기는 힘든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강남에서 초등학교만 마치고 조기유학 떠나서 평생 미국생활 한 한국인이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기대와 달리 상하이 여행에 그리 큰 영감을 주지는 못했다. 무단횡단을 하고 새치기를 하고 영어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인들 삶 이면에 있을 많은 스토리를 이 책을 지렛대 삼아 상상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아주 잘못된 기대였던 것이다. 가볍게 읽을 소설을 원한다면 권할 수 있다. 하지만 영리함으로 쓴 소설의 한계는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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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6-12-28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도국을 이용해서 영리하게 돈벌이가 될 책을 쓴 느낌입니다...말씀처럼 진정서을 느낄 수 없는 글 같습니다. 특별히 읽을 이유가 없네요..
여긴 인도계나 중국계가 아주 많은데, 요즘처럼 대륙에서 건너온 중국이민자들이 보기 싫었던 적도 없어요...-_-:: 마트나 어디나 시끄럽고 운전 막 하고, 마트에서 self-checkout 계산 후 물건 담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자기 물건 찍기 시작하더라구요.. 언젠가 한번은 또 계산대에서 돈내고 돌아서는데 바로 뒤에 서있는 중국사람 때문에 넘어질 뻔하구요..-__-:::

이제 2016년이 다 지나가네요....ㅎㅎ 서력기원이지만 곧 맞을 새해엔 더욱 좋은 일 가득하길 기원해요..

LAYLA 2016-12-31 00:58   좋아요 1 | URL
이달 초에 상해 여행을 했는데 겨우 3박 4일의 일정이지만 일정을 마칠 때 즈음엔 그 나라의 시민의식에 피곤해져서 어서 집에 가고 싶더라구요. 어떤 큰 트러블이 있었다기 보다는 마치 가랑비에 몸 젖듯이 영혼이 피곤해졌더랬지요. 대만이나 홍콩을 보면 이건 중국인의 문제가 아니라 발전속도의 문제일 뿐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 피곤한건 피곤한거니까요 흑흑 ㅠㅠ 이 책은 아주 라이트하게 읽어볼 만은 하지만 (개인적으론 미국 사람/평론가들은 이런거 좋아하는구나;;; 하고 알게 되었네요 ㅎㅎ) 책을 공수해서 읽으시는 transient 님께는 굳이 권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transient 님 올해 많이 감사하였고 내년도에 사업도 계획하신 대로 잘 풀리고 독서생활도 아름다운...그런 한 해 되길 바랍니다. 서재에서 계속 만나요~^^
 
나라는 여자 -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새로운 개인의 탄생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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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말 ‘글을 잘 쓰기 위한 비법은 쓰지 않는 것이다‘가 떠오른다. 좋은 에세이가 되기 위해선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야 한다. 용법에 맞지 않는 단어들의 남발은 의아할 정도. 작가의 재능이 아니라 기질로 쓰여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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