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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개청춘 - 대한민국 이십대 사회생활 초년병의 말단노동 잔혹사
유재인 지음 / 이순(웅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이거 왜 이래,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오전에 나는 동료들로부터 회의 자료를 취합해 복사해서 붙여 넣고 각 자료의 폰트를 하나로 통일하는 작업을 했다. 회의에 들어가서 팀장님에게 지난주 매출과 이번 주 매출의 차이를 보고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내가 한 가장 중대한 의사결정은 맑은고딕체와 휴먼명조체 중에서 맑은고딕체를 선택한 것이고, 가장 어려운 사고행위는 지난주 매출액 빼기 이번 주 매출액을 계산해낸 것이었다. 오후에는 전년도 세금계산서를 누락시킨 건으로 감사실에 불려가 꾸지람을 들었다. 터벅터벅 사무실로 돌아오니 차장님께서 내가 혼나는 소리를 들었다며 업체에서 받은 마우스를 선물로 주셨다. 불쌍하다고.
그 마우스를 보고 있으려니 서러움이 밀려온다. 이거 왜 이래. 나 이대 나온 여잔데. 커뮤니케이션 이론도 배웠고 실존주의도 사색했고 푸코도 들뢰즈도 읽었는데....이런 감정은 자기애 과잉이라고, 쪽팔리는 미성숙의 징표라고 이성적으로 분석해보지만 마음은 쉽사리 진정이 안된다.
언론사 시험에 3년 내리 낙방하고 닥치는 대로 원서를 넣어 취업에 성공하였지만 자잘하게 쪼개진 노동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정액제 월급 뿐이다. 신의 직장이라더니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대신 문서 첫 줄 띄어쓰기를 3칸 하지 않았다고 닥달하고 영수증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고 징계위원회를 소집한다. 비합리적 행정절차와 이를 근엄하게 포장하는 조직사회의 암묵적 룰에 대한 저자의 신랄한 조소는 국수가락처럼 튀어 오르는 글빨로 독자들을 웃게 만들지만 바로 그 글빨이 또한 독자들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왜 글 쓰는 직업을 얻지 못했단 말인가. 삼년이란 시간 동안 글 쓰는 업을 얻어 보고자 마늘과 쑥만 먹으며 동굴 속에 은거하던 곰처럼 싼 것만 먹으며 빛이 들지 않는 고시실에서 소리죽여 공부했건만.
저자는 행정문서에 치여 절라 살기 힘든 이십대의 청춘을 개청춘이라 부르겠다 자조하지만 사실 그녀의 글에선 이십대의 냄새를 맡기 힘들다. 세상은 아름다우며 노력하면 언젠가 꿈이 이루어진다는 명제에 대해 이십대에 머무르고 있는 자라면 예의상 쥐똥만큼은 보여줘야 할 긍정의 그 무언가가 그녀의 글엔 한 점도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만사 팔자대로 풀리는 것이니 그저 묵묵히 따라가겠다는 말은 언뜻 낭만적 운명론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확실히 팔자와 운명은 그 어감부터가 다르다.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란 점에선 같은 말이지만 팔자라면 드세고 억세고 그저 인고의 정신으로 꾹 참고 견뎌내야 하는 것 같고, 운명이라면 달고 드라마틱하고 눈물과 고난과 역경마저 마지막의 해피엔딩을 위한 설정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운명보단 팔자한탄에 가까운 개청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지라 착찹하고, 아직은 아슬아슬 놓치지 않고 있는 노동에 대한 기대가 결국 이렇게 팔자론으로 귀결되어서야 내 삶의 일부로 납득되는 것일까 싶어 20대 독자의 가슴을 천근만근 무겁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책은 역설적으로 그런 자조와 자기연민이 바로 팔자를 운명으로 전환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맑은고딕체와 휴먼명조체 사이에서나 갈등하는 지리하고 무미한 일상이지만 스스로를 측은히 여기는 자는 최소한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끊임없이 목말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불타는 속을 글로 게워내고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공감을 끌어내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책도 내고 에세이스트라는 명함도 파고 합격 못한 애증의 신문사에 프리랜서의 자격으로 글도 한 토막 실을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 세상에 행복한 임금노동은 존재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좌절하거나 노하지 말고 자신에게 계속 기회를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보면 언젠가는 들뢰즈나 부르디외를 써먹을 쨍 하고 해 뜬 날 찾아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팔자라고 잠시 스스로를 토닥이는 것 역시 해피엔딩으로 달려가는 한 부분이라고 믿고 싶다. 쉽지 않겠지만, 쉽게 포기하지 말자. It ain't over till it's 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