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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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이모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이모에게서 연락이 오면 냉정하게 대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이모도 더이상 엄마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엄마가 이모를 부담스러워했다는 사실은 이모를 아프게 했지만 그만큼이나 엄마 역시 오래도록 아프게 했다. 지금도 엄마는 엄마가 어떻게 순애 이모를 저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 엄마는 생각한다.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이십대 초반의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다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있지, 카로. 한지와 나는 매일 이야기를 나눠. 일하지 않는 시간이 겹치면 수도원 주위를 산책하고 밤에는 매점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나눠 마셔. 자정이 넘으면 수돗가 옆 나무 밑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한지는 나를 알아. 그리고 나는 한지가 코뿔소의 마음을 상상하듯, 한지의 마음을 상상해. 가끔씩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한지의 집 발코니에 앉아 있기도 해.

...쉰다섯 명까지 불어났던 봉사자들이 삼 주 만에 열다섯 명으로 줄어든 것이었다. 늘 시끌벅적했던 거실은 황량해졌고, 아이들이 뜨개질을 하던 바닥에는 뜨개바늘과 털실만 굴러다녔다. 몇몇 애들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를 마시다가 훌쩍대기도 했다. 그 눈물에는 떠난 이들에 대한 감미로운 애정이 담겨 있었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생활을 함께했다는 행복. 그 지속될 수도, 반복될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함께 존재했다는 행복. 그 눈물은 고독이 없었던 시간에 대한 애도였다.

그녀 나이 서른하나.그녀 또래의 이들은 함께 힘을 모아 무엇 하나 바꿔보지 못했다. 세상은 그녀가 온몸을 던져도 실금 하나 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닞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그녀는 그녀의 이십대를 통해 깨쳤다.

수술을 한다고 해도 별 가망이 없으리라고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무녀졌을 말이었지만 말자는 오히려 편안했다. 더이상의 수술도 항암치료도 싫었다. 무엇을 위해 생을 연장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고 어떤 미련도 없었다.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살아 있다는 것도 두렵다는 점에서는 죽음과 진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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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 혼술에서 중독까지, 결핍과 갈망을 품은 술의 맨얼굴
캐럴라인 냅 지음, 고정아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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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사회생활은 알코올 중독자가 걸어가는 길에 표지판처럼 우뚝 서서, 너는 아무 문제 없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그들은 직장에서 능력을 바루히하고 승진을 하고 돈을 벌며 마감을 칼같이 지킨다. 도대체 누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말인가!

나이 들면서 나는 기억이란 미생물과 같은 작은 생명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정착할 곳이 없으면, 기억에 붙여둘 적절한 레이블이 없으면 그것은 어두운 구석에 가라앉아 조용히 지내다가 난데없는 순간에 불현듯이, 혹은 꿈속 같은 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괴롭힌다.

AA모임에 나가면 가장 먼저 듣는 말은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격이 성장을 멈춘다는 것이다. 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려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삶을 구역화한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이중인생 심지어 삼중, 사중 인생까지도 영위하는 것은 하나의 삶을 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삶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선명한 이해에 기반을 둬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술은 진정한 감정과 진정한 공포와 진정한 의문을 마비시킨다. 정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빼앗아간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움켜쥐지 못하고 자꾸만 자기 자신을 괴로운 상태로 몰아넣는다.

집에 오면 곧장 맥주를 들이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쌓여가는 술병은 스타이런이 말했듯이 일종의 동맹군처럼 느껴졌다. ... 그 무렵 나는 끊임없이 마셔대는 맥주와 와인이 내게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나에 대한 뼈저린 의식을 막아주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감당하며 사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알코올 중독자인 루이즈는 20대 내내 획기적 전환을 찾아 헤맸노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획기적 전환이란 어느 날 불현듯이 찾아와서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는 일대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물론 그녀는 약물과 알코올을 사용해서 그런 인생에 도달하려고 했지만 그 밖에 다른 방법도 여럿 시도했다. 루이즈에게 그런 계기는 주로 다른 아파트나 다른 직장, 그리고 다른 도시였다. 한 곳에서 일이 어그러 지면 그녀는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 ...다시 학교에 입학해서 학위나 자격증을 따고, 직업을 바꾸는 식으로. 자기인생의 외부를 구부리면 인생의 내부도 함께 구부러질 것을 기대하는 행동들.

이런 말은 너무도 당연해서 말하자마자 그냥 상투적인 표현으로 여겨지지만, 그 순간까지도 나는 성장이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며, 어른이란 생물학적인 나이가 아니라 정서적인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서적 수준이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임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성숙이 외부에서 불쑥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지냈다. 마치 성숙이라는 것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일 것처럼. ...술을 끊으면 우리는 이제 기다리지 않게 된다.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서 내가 해야 할 성장의 노역을 대신해줄 거라는 끈질기고도 인간적인 소망을 버리게 된다. 술을 끊은 건 아마도 내가 그때까지 내린 결정 가운데 진실로 어른스럽다고 할 수 있는 최초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성장의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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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7-12-1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일라님, 잘 지내시죠?
혹시 몰라서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transient-guest 2017-12-19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나왔을 때 영문판 사놓고 어디엔게 들어가 있는 듯...ㅎ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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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배들이 주인이 작위를 받았느냐 아니냐, 혹은 유서깊은 가문 출신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가졌다면 우리는 주인의 도덕적 지위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내 말은 소위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신사를 섬기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 그 전 세대의 눈에는 유별나게 보일 정도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지체 높은 귀족 출신이라도 클럽이나 골프장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허비하는 신사보다는, 이를테면 출신은 미천했으나 대영제국의 장래 안위에 크나큰 공헌을 했던 조지 케터리지 씨 같은 신사를 섬기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명으로 인식되었다.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있는 분이셨어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고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알겠습니까?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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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미
비페이위 지음, 백지운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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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미는 영화를 좋아했지만, 어머니는 좀처럼 보려 하지 않았다. 전에 위미는 속으로 불평하곤 했다. 어떻게 그 나이가 되도록 영화 볼 생각이 안 난담. 그러나 지금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한다. 사람 많은 곳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실 영화라는 것은 가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흰 천 쪼가리 앞에서 북적거리다니. 그냥 천 쪼가리일 뿐인데. 그것이 춥고 더운 것을 어찌 알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위미는 자신이 나이가 들었음을 느꼈다. 마음이 차가워진 것이다. 마음이 한번 얼면 그만큼 더 자라는 법이다. 사람이란 이런 식으로 한 차례 한 차례 나이를 먹어가고, 마음도 한 차례 한 차례 죽어간다. 세월과는 아무 상관 없이.

긴장이 담긴 어색한 즐거움과 혼란이 알게 모르게 점점 비밀로 발전해갔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 비밀이란 감동적인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따스한 향기처럼 번져나간다. 비밀은 그 비밀의 깊은 곳으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가기를, 천천히 뻗어나가기를 갈망한다. 어느 정도까지 들어가면 비밀은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정돈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간다.

마음을 정하자 오히려 느긋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 하루를 살면 하루치를 번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치고 나니 나중에는 잠도 잘 오고 입맛도 살아났다. 밥도 맛있고 국수도 맛잇고 만두도 맛있고 땅콩도 맛있고 무도 맛있다. 뭐든지 다 맛있었다. 끓인 물도 아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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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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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지 않을 때, 거기에 부모가 반대할 권리는 없다. 반대는 할 수 있어도, 모욕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부모 인생이 아니라 자식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런 폭력의 원인은 대부분 사랑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식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위험에 빠지는 광경을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안락한 감옥을 만들어 자식을 그 안에 가두고 싶어 한다.

‘안전한 삶‘에 대한 기대는 망상이다. 안전띠는 매야 한다. 그러나 운전이 무섭다고 어디든 걸어 다니겠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걸어 다니다가도 차에 치여 죽을 수 있다.

남녀차별이나 성희롱, 음주운전, 공공장소 흡연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맹렬히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결과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왜 학벌이나 결혼 문제는, 그 부조리에 대해 "@이나 까세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는 아마 정체성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허약해서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해 뚜렷한 믿음이 없기에 정체성을 사회적 지위에서 찾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는 대학 간판이나 자식 결혼식장에 모인 하객 수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다들 거기에 집착한다.

동물들의 침묵을 읽다 보니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HJ가 집에서 가져온 여행의 기술을 조금 읽었다. 이 책은 망한 영화 잡지 키노나 합정동의 고만고만한 카페들, 고도로 계산된 포즈로 털털한 척하는 인디 여가수와 비슷했다. 알랭 드 보통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좀 닮았다. 한국에서 아이돌 취급받는 거 하며, 시원하게 까진 대머리 하며, 스스로 대단한 깊이와 성찰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자부심 하며.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나는 금방 책장을 덮어버렸다.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의 정체다.

생각은 현실을 넘어선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생각 덕분에 우리는 애국이니 박애니, 살을 비비며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을 넘어선 거대한 사랑을 상상한다. 구원이니 해탈이니, 근육의 나른함과 위장의 포만감을 넘어선 거대한 행복을 상상한다. 계급이니 국가니, 내가 표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넘어선 거대한 집단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허구를 상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거대한 행복을 얻지 못했으며, 거대한 집단 속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어릴 때는 그런 일들이 매일 일어났다. 하루하루가 열광과 감탄, 발견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10대가 되고 20대가 되자 신세계라고 할 정도의 새로운 경험이 확 줄어들었다. 진짜 새로운 경험은 많지 않다. ...서른이 되자 그런 경험은 거의 남지 않았다. 어떤 신세계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출산이라든가 창업 같은 것.

인간은 열정을 금방 잃고, 섹스의 가능성이 있는 타인을 향해 수시로 한눈을
팔며, 오래도록 한 가지 대상에 충실할 수 없는 존재다. 결혼은 그런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해서 허구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운명적 사랑, 백년해로라는 개념을. 우리는 운명을 구속함으로써 운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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