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평점 :
(스포일러)
작가의 전작에서 어쩔수 없는 나이든 남성 작가의 한계(젊고 잘난 여자들이 이유없이 평범한 남자를 좋아함)를 느끼고 실망을 하였지만, 그래도 잔잔한 필력 자체는 좋게 느꼈기에 혹시나 하고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전작보다 더하구만. 느꼈다는 이야기. 사람은 모든 걸 가질 수 없고, 재능과 지력에 한계가 있는 보통사람(보통작가)들을 보면, 젊어서는 밝고 새롭지만 기술이나 테크닉에서 서툴수밖에 없고 나이가 들면 기교는 원숙해지지만 어쩔수 없는 꼰대력이 묻어나니 이거 저거 다 되는 작가가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독자의 입장에서 나는 어떤 작가를 선택해야 할까? 이 책을 읽고나서 그런 고민을 했다.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초반부터 한숨이 나왔다. 고급 북유럽 가구를 컬렉팅 하는 안목있는 편집자 주인공. 자기가 고상하다는 걸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만도 보기 민망한데 자기 아내는 구두나 가방, 코트만 신경쓰는 속물이라는 식으로 돌려까는 걸 보니 그냥 참. 그랬다. 그냥 물질주의자 둘이 잘 만났는데 왜 투닥거리는지? 아내의 명품 펌프스 홍창이 까질까봐 별로 사고 싶지도 않았던 차를 사야했단 사연을 이야기하는데 거꾸로 주인공이 비싼 덴마크제 가구를 사는 바람에 부부는 원래 살 수 있었던 자산가치가 좋은 집을 포기하고 앞으로 값이 오를 가능성이 높지 않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했다. 내가 보기엔 남편(주인공)이 더 노답인데...?
여튼 허영에 찌든 금융업계 종사자 아내 때문에 집에 가방 놔둘데는 있고 책 놓아둘 곳은 없다며 초식남적인 투정을 하던 주인공은 초식남 주제에 감히 바람을 핀다. 그것도 출판사에서 일하며 만난 열세살이나 어린 여자와. 무려 5년이나, 부인을 속이고 어린 아가씨 불륜녀에게도 이렇다 저렇다 답을 주지 않고 희망고문 시키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물론 모든 과정은 '서정적'으로 그려지는데 요즘 한국 여성 독자들은 그런거에 속지 않기 때문에 아이구 아재요 할배요 작가의 정신세계와 판타지가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는 소설이 너무 한심하기만 했다. 결국 40대 중반이 되어, 견디지 못한 불륜녀는 작별을 고하고 그동안 불륜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참고있던 부인도 이혼을 요구하며 주인공은 48의 이혼남이 된다.
"너 (독신생활) 우아한거 아니야? 하지만 50은 넘지 마. 50 넘으면 불쌍해지거든."
살던 집은 아내가 가지기로 하고 새 집을 찾아나선 주인공은 세련된 안목의 소유자답게 이런저런 까다로운 조건의 집을 구하고 그 집을 매개로 삼아 소설이 굴러간다. 그리고 조용히 일하고 퇴근하는 그에게 동료들이 저런 소리를 한다. 애는 다 컸고, 마누라 없고, 혼자 홀가분하게 사는 삶 우아한거 아니냐고. 다만 나이 늙어서 홀애비 냄새나기 시작하면 노답이니까 그 전에는 여자 찾으라고.
주인공은 새동네에서 새로운 삶에 적응해나가는데, 그러던 차에 우연히 옛불륜녀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다들 예상할 수 있다시피, 주인공은 뭐 별다르게 한 것도 없는데, 오히려 조심조심했는데, 상대 여자가 먼저 좋아한다며 은근슬쩍 다가온다. 열세살 어린 직업 번듯한 여자가 도대체 왜 때문에 48남 곧 손주 볼 할배를 좋아하는데요? 상식적인 여성독자라면 이해할 수 없는 흐름으로의 서정적 전개. 그리고 긴 이야기 줄이자면, 불륜녀는 치매에 걸린 70대 아버지를 간병하기 힘들어 주인공에게 도움을 받다가 결국 우리 셋이 같이 살아요 ㅠㅠ 결론으로 마무리 된다는 것. 셋이 가족으로서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는 암시와 함께 주인공은 '우아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며 책을 마무리한다.
한국여자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지에 대한 담론이 넘쳐나는 요즈음인데 이 책을 보고나니 고구마 백개먹은 답답함과 함께, 13살 많은 이혼남도 치매노인 모시는 처지에는 감지덕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폭력적인 시선이 로맨틱하게 그려지는 일본사회에 비하면 한국사회는 그래도 일본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도 앞으로 십년, 초고령화가 진행되면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나도는 그런 흉흉한 곳이 되려나? 여튼 늙은 애비도 돌봐야 하고 늙은 불륜남도 돌봐야 하는 일본 여성들의 삶을 보니 한녀보다 더한 일녀의 삶이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더라는.
책 뒷표지에는 '청춘의 격정이 지나간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그 궁극의 차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라고 써 있는데 젊어서 마누라 속이고 불륜이나 하는 건 청춘의 격정이 아니라 비겁함이고 나이들고 가족이 없어지니 옛 불륜녀와 그녀의 치매아버지랑 같이 살고자 하는건 궁극의 차분함과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냥 살기위한 생존전략 그 이상 이하도 아니랍니다. 작가의 전작에도 남겼듯이 그의 글실력은 참 아까운데 두 권 읽어보니 알겠다. 글이 아까우면 어쩔거냐 쓸 수 있는게 이것이라면... 그냥 이런 글만 계속 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