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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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후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를 데려가는 것은 간교함에 도가 튼 선원들이다. 그들은 능수능란한 솜씨로 여자들을 꼬여내, 마르세유인지 상아해안인지 하는 곳으로 잽싸게 데려간다. 그런 때 우리가 손쓸 도리는 거의 없다. 혹 그녀들은 선원들과 상관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모른다. 그런 때도 우리가 손쓸 도리는 거의 없다. 선원들조차 손쓸 도리가 없다.

- P330

어쨌거나 당신은 그렇게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다. 그리고 한 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 갖췄다 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과 함게 색은 다소 바랠지 모르지만 얼룩은 아마 당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그곳에, 어디까지나 얼룩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얼룩의 자격을 지녔고 때로는 얼룩으로서 공적인 발언권까지 지닐 것이다. 당신은 느리게 색이 바래가는 그 얼룩과 함께, 그 다의적인 윤곽과 함께 생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 P331

그 세계에서는 소리가 울리는 방식이 다르다. 갈증이 나는 방식이 다르다. 염이 자라는 방식도 다르다. 스타벅스 점원의 응대도 다르다. 클리퍼드 브라운의 솔로 연주도 다른 것으로 들린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방식도 다르다. 오모테산도에서 아오야마 1가까지 걸어가는 거리 또한 상당히 달라진다. 설령 그후에 다른 새로운 여자와 맺어진다 해도,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멋진 여자라고 해도, 당신은 그 순간부터 이미 그녀들을 잃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선원들의 의미심장한 그림자가, 그들이 입에 올리는 외국어의 울림이 당신을 불안하게 만든다. 전세계 이국적인 항구의 이름들이 당신을 겁에 질리게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은 연한 색 페르시아 카펫이고, 고독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보르도 와인 얼룩이다. 그렇게 고독은 프랑스에서 실려오고, 상처의 통증은 중동에서 들어온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게 세계란 광대하고 통절한 혼합이며, - P332

그건 그대로 고스란히 달의 뒷면이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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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라이프스타일 기획자들 - 도쿄의 감각을 만들어가는 기획자들의 도쿄 이야기 Comm In Lifestyle Travel Series 2
도쿄다반사 지음 / 컴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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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프리미엄을 창간할 때 저희가 정한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효율이 좋은 것보다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
2. 따끈따끈 새로운 것보다는 두근거리는 것
3. 화려하고 호화로운 것보다는 높은 품질의 것 - P17

저희는 보사노바 바라서 예전에는 음악이나 잡지 관련 업계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요, 아시다시피 지금은 잡지도 씨디도 예쩐처럼 잘 팔리는 시대가 아니라서요. 저희만 해도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손님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지금은 IT업계의 관계자들이 많은 편이에요. 아마존이나 구글, 라인과 같은 기업들이 되겠네요. - P89

긴자 라이온

저는 맥주를 무척 좋아하는데요, 어딘가에서 이런 가설을 들은 적이 있어요. 맥주의 맛이라는 게 천장의 높이와 비례한다고 해요. 다시 말해 아주 좁고 천장이 낮은 곳에서 마시는 맥주보다 넓고 천장이 높은 곳에서 마시는 맥주가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거죠. 그래서 가장 좋은 건 천장이 없는 야외에서 마시는 것이라고 하고요.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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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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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책 한 번 써봅시다'를 읽고 이 책을 읽어서 그럴까. 책 한 번 써봅시다는 글쓰기를 독려하는 내용으로 온화한 장강명의 목소리를 담은 순한맛인데 이 책은 경쾌해보이는 표지와 달리 장강명의 날카롭고 독한 면(?)이 가감없이 실려있다. 대상이 신혼여행이나 글쓰기 수업이 아닌 책 그 자체이기 때문이리라. 장강명은 책에 진심이야. 그래서 이 책은 매운맛이다. 기대 없이 약간은 타임킬링용으로 집어 들었던 지라 부분적으로 비장하기까지 한 장강명의 목소리에 놀라고 말았다. 


나는 문화 산업 전체, 아니 소비재 산업 전체가 지금 팬 장사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먼저 대중음악이 아이돌 산업이 되었고, 뮤지컬이 스타 배우의 팬들에게 의존하게 됐고, 이제는 휴대전화도 그렇다. 사실 출판사들도 이미 그런 기운을 느끼고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 같다. 나는 이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는 무조건적인 지지, 열광, 숭배의 정반대에 있는 행위인데. 내게 책이란 비판, 숙고, 성찰의 도구인데. 


느껴지는가. 장강명의 책에 대한 애정이. 나 역시 장강명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기에(책 리뷰로 찬양리뷰 1개쓰면 까기리뷰 9개 정도 쓰는ㅋㅋ) 공감하며 읽었는데 이런 태도가 요즘의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하게 읽힐지는 사실 의문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장강명은 열심히 읽고, 우울증에 걸릴만큼 높은 기준을 가지고 글쓰기에 임하며, 책을 굿즈로 소비하는 요즘의 세태에 냉소하지 않고 일단 쓴다. 


책, 이게 뭐라고는 장강명 작가가 진행했던 팟캐스트 프로그램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하는데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이보다 적절한 제목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책 따위 '교양 있는 나'의 이미지 치장용 악세사리로 쓰는 시대에 우리는 왜 이렇게 책을 사랑하고 책에 연연하는가. 책, 이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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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7-0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읽고 있는데 별 생각없이 잠시 가볍게 읽으려고 들었다가 생각보다 좋은 문장들이 많아 기분좋게 읽고 있어요. ^^

LAYLA 2021-07-08 12:13   좋아요 0 | URL
앗 바람돌이님 ^^ 수많은 책 중에 우연히 같은 책 읽고 있다니 신기하고 반갑네요 ㅎㅎㅎ 근래에 보기드문 ‘치열한‘ 에세이가 아닌가 했습니다. 장강명 작가에 대한 신뢰가 한층 더 깊어졌어요^^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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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와 윤리는 다르다. 예의는 맥락에 좌우된다. 윤리는 보편성과 일관성을 지향한다. 나에게 옳은 것이 너에게도 옳은 것이어야 하며, 그때 옳았던 것은 지금도 옳아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괜ㅊ낳은 것이 너에게는 무례할 수도 있고, 한 장소에서는 문제엇는 일이 다른 시공가넹서는 모욕이 될 수도 있다. ...예의는 감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무례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윤리는 이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비윤리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비판 의식을 키워야 한다. 전자도 쉽지 않지만 후자는 매우 어렵다.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윤리에 대해서는 보편 규칙을 기대해볼 수 있으며, 온갖 암초 같은 딜레마를 넘어 우리가 어떤 법칙을 발견하거나 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의는 끝까지 그런 법칙과는 관련이 없는, 문화와 주관의 영역에 속해 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란의 상당수는 예의와 윤리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 P55

그렇다면 왜 읽는가? 왜 쓰는가? 개인적인 답변은 허탈할 정도로 간단한데, 그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자는가‘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수면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깨어 있으면 졸려서 버틸 수가 없다. 아무리 즐거운 나날이 이어져도 글을 읽거나 쓰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나는 허무해진다. 그런 허무함은 짧은 몇 문장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내가 읽고 쓰는 글은 단행본 한 권 길이는 되어야 한다. - P156

‘젊은 피‘에 대한 평론가들의 찬사와 요구는 강박에 가까워 보인다. 나는 신선한 피라면 환장는 드라큘라가 아니기에, 그 지점에서 자세한 해설을 원한다. 새로운 얼굴은 새로운 얼굴일 따름이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나타난다. - P181

에세이를 쓰면 치유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내게 에세이 작업의 매력은 거기까지다. 세계에 맞선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세상과 함께 흘러간다는 느낌이다. 긴 장편소설이나 논픽션을 쓸 때 비로소 세계와 싸운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 정신이 훌륭한 문학에 꼭 필요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어느 쪽으로도 확답은 못하겠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다 이런 기상을 담고 있고, 내가 추구하는 문학도 그러하다. - P193

한때는 스티븐 스핖버그처럼 여름에는 대중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겨울에는 진지한 작품을 내놓다는 식의 야무진 꿈도 있었다. 이제는 그런 커리어는 스필버그쯤 되는 천재나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중성과 진중함 중에 내가 어느 걸 더 원하는지 깨닫는다. - P248

세계문학전집에 뽑힌 책이라고 해서 꼭 좋아하고 존경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명단은 주기율표처럼 확정된 것이 전혀 아다. 수많은 문학적 견해가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 최근 어디서 타협했는지를 보여주는 목록에 지나지 않는다. - P266

나는 문화 산업 전체, 아니 소비재 산업 전체가 지금 팬 장사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먼저 대중음악이 이돌 산업이 되었고, 뮤지컬이 스타 배우의 팬들에게 의존하게 됐고, 이제는 휴대전화도 그렇다. 사실 출판사들도 이미 그런 기운을 느끼고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 같다. 나는 이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는 무조건적인 지지, 열광, 숭배의 정반대에 있는 행위인데. 내게 책이란 비판, 숙고, 성찰의 도구인데. - P273

소설을 쓸 때마다 내 글 솜씨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감각이 떨어지는 것도 함께 느꼈다. 집중력과 체력은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머지않아 흐트러질 것이다. 그런 요소들이 다 더해져 언젠가는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게 될 거다. 그게 언제일까?

세계문학전집을 읽을 때면 작가 연표를 유심히 살피게 됐다. 거장들이 의미 있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쓴 것은 언제일까?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발표한 게 53세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59세에 썼다. 스타인벡이 불만의 겨울을 쓴 것도 59세였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고, 괴테나 피카소니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창조적인 80대를 보낸 예술가도 있기는 하지만...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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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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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도 귀를 자르나?"

남자는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씰그러뜨린다.

"목숨은 하나밖에 없어. 귀는 두 개 있어."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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