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무들은 - 최승자의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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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다. 피곤하지만 잠은 올 것 같지가 않다. 향수 따위는 없다. 내가 강한가? 그러나 경남이 집에서 경남이와 함께 잘 때 내가 자면서 엄마를 불렀던 것처럼 내가 모르는 내 무의식은 무언가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에 그게 내게는 생애 최초로 겪는 가장 큰 충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은 엄마 꿈 한번 꾸지 않았던 것처럼, 내 무의식이 스스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 같다. 퓨즈처럼, 불이 나기 전에 스스로 끊어져버리는. - P25

‘펑키‘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흑인 사회에서 나온 말이고, 원래의 뜻은 남녀 간의 정사로 인해 이불에서 나는 냄새라고 했다. 흑인 아이들이 (흑인들은 가난하니까 방이 많은 집에서는 살 수 없었을 테고 적은 숫자의 방에서 모여 살면서 부모의 정사에서 나오는 그 냄새를 더 많이 맡았을 것이다)이 빌어먹을 펑키 시트 좀 치울 수 없어요? 하고 항의하곤 했던 배경에서 나온 단어라고 했다. - P47

오늘은 메이플라워 맞은편 잔디밭을 가로질러 아이오와 강변으로 갔다. 잔디밭에 달맞이꽃들이 피어 있었다. 강변 벤치에 누워 오리들이 떠 있는 강물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시 한 구절이 떠오랐다. 그건 로드 맥퀸이라는 싱어송라이터가 쓴 시집 중에 나오는 구절로 대학교 1학년 때 그의 시집을 읽다가 기억해둔 것인데, 이상하게도 몇십 년이 지나면서 그의 다른 시들은 다 잊어버렸으면서도 그 구절만큼은 잊히지 않고 내 기억의 서랍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글쎄, 오늘은 좀 외로웠나, 아니면 나의 앞날이 불안해졌나. 그 구절은 이렇다.

"Lonely rivers going to the sea give themselves to many brooks."

이건 내가 슬며시 외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다시 되살려보곤 하는 구절이다.

"바다로 가는 외로운 강물은 많은 여울에게 저를 내준다." - P49

어떤 나무들은 바다를, 바다의 소금기를 그리워하여 바다 쪽으로, 그 바다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바다 쪽으로 구부러져 자라난다고 한다. - P51

승자에 대해서는 "승자는 행복을 두려워한다."라고 쓰여 있었다는 게 기억날 뿐이다. 내가 보기엔 보이가 행복을 두려워하는(두려워한다기보다는 거부하는) 것 같은데, 바로 그 보이가 나에 대해 그런 말을 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도 우거지상을 하고 다니는건가? - P99

나는 내 나이에 나보다 더 늙은 사람들을 보면 신경질이 난다. 내 나이를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에. - P130

나는 마틴을 볼 때마다 젊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그는 이십대는 아니고 삼십대이긴 하지만. 내가 삼십대라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하지만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이라는 것도 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한다는 것이지 언제 시작하느냐가 아니니까. 이대로 살다가는 아마도 10년 후 오십대에 가서 나는 또 사십대만 되어도 뭐든 시작할 수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이 삶의 염치없음. - P199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수가 갑자기 내게, 너 슬프니 아이오와를 떠나는 게?라고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슬프다라는 단어를 쓸 수 있었을까? 내가 슬픈 얼굴을 하고 다녔나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라, 혼자 사는 여자에게는 가끔 그런 때가 찾아온다, 그것은 심리학적 생리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고, 그것으로 그들과 나 사이에, 특히 쇼나와 나 사이에 묘하게 드리워져 있던 안개 같은 감정이 청산된 것 같았다. - P206

내 생명선이 보통 사람들보다 아주 짧은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관해 집중적으로 물었더니,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고, 내 생명선이 끝나는 부분은 아직 오지 않았고, 아마 쉰쯤이 그 시기에 해당될 터인데 그러나 그때에 죽지는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 P263

나의 이상한 버릇 중의 하나: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나 결정해야만 할 때 얼마간 궁리를 해보다가 그래도 마음을 정하지 못할 땐 결정을 잠에 맡긴다.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하고 하룻밤 자고 나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결정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아니 결정을 내린다기 보다는 잠을 자는 동안 내 무의식이(아마도 내 의식과 내 패배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고서)결정을 이미 내려놓고서 내 의식이 깨어날 무렵 의식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최종 재가를 받기 위하여. 의식은 이미 어젯밤에 결정을 내리길 포기했으므로, 자기를 위해 대신 일해준 무의식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그 서류에 얼른 사인을 해준다. - P332

나는 언제나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언제나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내가 다 늙어서 이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현재가 감옥이라고 생각했고, 미래도 닫힌, 출구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시간이 감옥이라고 생각해왔다. ...이제 나는 이 프로그램을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나는 더이상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게 되었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을 때, 내가 현재를, 미래를, 시간을 더 이상 감옥으로 보지 않게 될 때 나는 어떤 가능성의 입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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