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나의 삶에서 내가 그대 삶 속의 그대에게 씁니다
이윤 리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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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산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비포 앤 애프터라는 글자 아래 확연한 변화를 보여주는 체중 감량 프로그램, 치아 미백 스트립, 탈모 치료, 혹은 성형 수술 광고를 보면 순간 들뜬다. 그 어떤 불만이나 불행에도 해결 방안이 있다고 확언하는 듯한 그 광고들에 혹하면서도 당혹스럽다.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시간을 분리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 논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시도만큼이나 가당찮다. 새로운 풍경은 기껏해야 주의를 분산할 뿐, 결국에는 오랜 습관이 나타날 새로운 배경에 불과하다. 시간이 흘러도, 장소를 바꿔도,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일관성이 없는 사람도 일관적으로 자기 자신이다. - P12

우리의 기억은 과거보다 현재를 더 많이 드러낸다. 물론 과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사진, 일기, 편지, 오래된 여행 가방 등 증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 차고 넘치는 증거 중에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어울리는 것들을 고르고 나머지는 버린다. 과거를 짊어지는 법은 여럿이다. 미화해서 해석하거나, 없던 일로 치거나, 각색하거나 혹은 완전히 허구로 꾸밀 수 있다. 현재는 그처럼 쉽게 조작할 수 없다. - P13

무언가를 숨길 때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혹은 지키고 싶어서. - P16

나는 장래 면역학자로서 미국에 왔다. 면역학을 선택한 이유는, 중국을 떠날 핑계와 먹고 살 기술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제외하면, 면역계의 작동 원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면역계는 비자기물질을 발견하고 공격해서 제거하는 임무를 맡는다. 면역 세포는 기억하는 능력을 지녔는데, 어떤 세포는 자신이 생성된 시점부터 모조리 기억한다. 때로는 오류가 생겨 선택저으로 기억하거나, 더 위험한 경우에는 무분별하게 기억해서, 면역계가 자기를 마치 제거돼야 할 비자기로 잘못 인식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Immune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영단어 중 하나이다. 면역으로 방어하는 대상이 무엇이건, 질병이건 어리석음이건 사랑이건 외로움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사그라들지 않는 고통이건, 나는 면역을 원했고 내가 창조한 인물들에게도 면역을 주고 싶었는데, 헛된 바람이라는 사실은 내심 알았다. 생명이 있는 한, 삶에 면역이 될 수 없다. - P23

나는 늘 믿어왔다.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다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그 순간에,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해하는 모종의 비밀이 있다고. 나도 그 비밀을 알고 싶다. - P67

우리는 타인이 겪은 불행의 깊이를 슬쩍 들여다보고 고통을 잴 수 있다는 희망에 매달린다. 더 슬픈 슬픔이 있고, 더 절망스러운 절망이 있다고. 타인의 고통을 알아보는 순간 자신의 고통을 마주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피하려고 고통을 잰다. 뭐, 적어도 이 점을 강조한다. 남을 위로하는 마음의 크기는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의 크기를 넘지 못한다. - P75

체념을 습득하며 슈테판 츠바이크는 고통을 잴 수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았다. 고통에는 등급이 없다. ... 자살하기 며칠 전에 리오의 축제에 다녀와서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폭탄에 죽어나가는 와중에 즐거움이 폭발하는 현장에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다"라고 말한 슈테판의 절망과, 중국의 한 마을에서 감옥에 갇힌 듯한 자기 삶을 비관하여 제초제를 먹고 자살한 열다섯 살 여자아이의 절망을 비교할 수 있을까? - P76

어떤 비평가들은 내 소설에 정치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낭독 자리에서 한 젊은이는 내가 정치적 글에 무관심한 이유를 따졌다. 중국의 한 기자는 대부분 작가는 자기 시대에 역사적 책임 의식을 느낀다고 내게 말했다. 그들은 묻는다. 왜 당신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나요?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중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나는 주어진 각본에 맞추어 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타인의 뜻에 내 삶을 맞추기를 거부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정치적 선언입니다. - P80

팬케이크와 맥피어슨의 우정은 서로 이해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결별하는 양상을 띠고, 이것이 나의 마음을 몹시 어지럽힌다. - P89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매일 전화한 친구는 내가 퇴원한 뒤에도 매일같이 전화해주었다. 때로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글을 써, 친구는 매번 말했다. 못 쓰겠어. 나는 말했다. 네 인물들은 살아갈 자격이 있어, 친구는 말했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 나는 말했다. 나는 아직 그들에게 관심이 있어. 친구는 말했다. - P106

"아, 친애하는 톨스토이, 내가 얼마나 막막하고 슬픈지 자네가 안다면!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흘려보낸 듯한 기분을 자네는 부디 느끼지 않기를 바라네." 투르게네프가 편지에 썼다. 그는 마흔 살이었다. 그가 대표작들을 쓰기 전이고, 수십 년이나 지속될 톨스토이와의 다툼도 일어나기 전이다. 오 년 후에 그는 플로베르를 만나 친구가 되고, 아니 거의 가족처럼 친해지고, 플로베르가 죽기까지 십칠 년 동안 친분을 유지한다. - P108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과 살면서 후회나 갈망이나 미련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파리코뮌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투르게네프는 플로베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 우리같은 사람들이 살기 힘든 시대네. 우리처럼 타고난 구경꾼들 말일세." 그러나 구경꾼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선택이다. 살고자 내리는 선택이다. - P111

"우리는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씁니다.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투르게네프가 젊은 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언했다. 나도 그것을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증명하는 일은 설사 실패하더라도 명확한 결론을 내줌으로써 안도감을 선사하는데, 안도감을 주는 것들을 우리는 습관적으로 또 중독적으로 찾는다. 나는 참으로 야심만만했다.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모든 미련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또 내가 누군가에게 미련을 남기지 않도록 모두에게서 거리를 둔 채로 살 수 있다고 증명하려 했다. - P126

다음 날에 나는 대영박물관에 갔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잊기에 좋은 곳이다. - P139

고독은 고귀하지만, 고독에서 빠져나올 힘이 없는 예술가에게는 치명적이다. 예술가는 반드시 자기 시대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요란하고 불순한 시대이더라도 말이다. 예술가는 끊임없이 주고받고, 주고 또 주고, 또 받아야 한다.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 P193

인생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끝내 선택하였으며 돌아설 수 없는 방향이 우리라는 사람을 정의하듯이, 우리가 결국 선택하지 않은 길은 한때 고려된 가능성으로서 우리에 관한 무언가를 말한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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