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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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직 구체적인 인생 설계가 세워지지 않았어도,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구실을 둘러대며 단 하루일망정 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 목표를 정하지 못한 자는, 어찌되었든 집을 나선 후에 앞일을 생각한다. 가출이나 다름없어도 전혀 상관없다. 이 경우의 망설임은 목숨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결심이 굳세지 않으면 평생 부모에게 묶여 살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하게 빼앗기고, 사는 참맛을 모르고 죽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부모란 울고 매달리는 데 명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모는 자기바껭 염두에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집에 묶어 두기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하고 그 어떤 수치스러운 짓도 태연하게 한다. 사회로 나가봐야 고생만 할 뿐이다, 집에서 살면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밥값도 들지 않고 청소나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집만큼 마음 편한 곳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정말 좋은 머리에 관해 운운할 때에는, 가장 먼저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의지 여부에 따라 머리의 좋고 나쁨이 갈린다. 그러니 자립의 정도가 그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자립에 반하는 삶의 방식은 곧 명석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자립이란 인간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충분히 곱씹은 후, 강한 인간을 지향하면서 과감하게 분투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독서와 우애, 교양만으로는 그 왕도를 터득할 수 없다. 혼자 힘으로 이 가혹한 세상을 끝까지 살아 보겠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강하고 굳은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몇 번이나 말하는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런 시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다.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렇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생겨난 얄팍한 환영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긴장하고, 그 긴장감에서야말로 살아 있음과 사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나는 어린애니까`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거나, `소년 같은 마음을 지닌 어른이고 싶다`는 따위의 말을 태연하게, 오히려 자랑스럽게 하는 남자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그들은 여자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가장으로서 위엄을 과시하지만, 자신은 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에만 종사하고 나머지는 전부 아내에게 맡기면 된다는 안이한 정신 상태로, 요령을 부려 가며 너절하게 살아간다. 그런 주제에 전진하고 순수한가 하면 절대 그렇지도 않다. 너저분하게 얽혀 있는 조직과 집단에 적극적으로 발을 들여놓아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비열한 힘을 의문 없이 흡수한다. 탐욕스러운 줄다리기와 서로를 헐뜯고 끌어내리는 일에 열을 올리고, 털끝만큼의 가치도 없는 출세와 명예와 돈 몇 푼을 위해,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혼을 미련 없이 팔아넘긴다. 소년의 마음이 들으면 혀를 찰 일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생겨 먹었다는 철칙을, 그 우선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도 동물의 한 족속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같은 유의 자유 속에서 충만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그것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종교는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커다란 장벽 중 하나이다.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립의 정신이 깎여 나간다.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는 한 그런 것들에서 헤어날 수 없고, 헤어나려 몸부림칠 필요도 없다. 살아 있으면서 절대적인 안녕을 얻으려 한다면, 살아 있되 삶을 내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산종장을 지향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신기루를 좇아 봐야 얻을 것은 거짓 평온뿐이다.

나르시시즘의 유전자를 짊어지고 태어난 여자 쪽은, 냉혹하리만큼 현실적인 면도 갖고 있는 탓에 연애를 흠모하는 비현실적인 시기를 일찌감치 졸업한다. 이뤄지지 않을 연애는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눈을 뜨지 못하는 가벼운 남자를 상대하는 것이 갑자기 심드렁해지고, 이벤트와 깜짝 선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른바 진심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딱 일치하는, 연애의 핵심이며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을 싹 무시하고, 자신이 혹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는 연애 놀이는 몇 번을 한들 행복이라는 종착역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게으르게 산 날이 쌓이고 쌓여 별 볼일 없어진 인생을 남녀간의 정사로 치장하면서 양념을 치고 변화를 주려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저질적인 존재 방식이다. 특히 남자가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며 무능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삶은 여자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기생충 같은 인생이다.

...그런가 하면 이리저리 부는 바람에 날려 떨어진 마른 낙엽처럼 거의 우연히 재능이 불쑥 꽃피는 일도 있다. 요컨대 자신을 스스로 단정하면 단정할수록 정답에서 멀어질 뿐, 무슨 일이든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자신 속에 어떤 보물이 잠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도 모른다. 그 보석이 하나뿐이라고도 할 수 없다. 몇 개가 숨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대단한 것이다. 평생을 들여 그 보석의 원석을 갈고닦을 수 있느냐에 삶의 진가가 있다. 그 외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인생이다. 그러니 이제 좋고 싫음이나 자기류의 해석은 모두 무시하고 온갖 일에 도전해 보면서 자기 안에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재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새로이 발견하는 생의 목적과 직결되는 위대한 행위이며, 젊었을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름 아닌 그것이다. 젊음이란 그 때문에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발견할 기회는 늘 변화하고 새로운 나날 속에, 온갖 곳에 무진장하게 널려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심히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는 삶의 공식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할 시간도 거의 주지 않는다.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직한다. 게다가 그 직장에 오래 헌신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는 것을 불변의 이념으로 받아

들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강박관념 비슷한 불안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인생의 초기 단계에 이미 다른 길은 봉쇄되고 만 것이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젊은이들은, 확답을 찾을 여유 없이, 기한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짓눌리는 답답한 조직에 헐값으로 자신을 팔아넘긴다. ...그런 행위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불속에 내던져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고, 정신의 생명이 끝났음을 뜻하기도 한다. 젊어서 이미 죽을 준비를 끝낸 보통 사람들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와 만날 일이 거의 없고, 오래 눌러앉아 있어 봐야 성취감은 털끝만큼도 얻을 수 없으며, 불굴의 정신 따위도 전혀 필요하지 않는 그런 잿빛 코스를 밟는다. 그리고 그 길에서 튀어나와 이탈한 자들을 고립적이고 가엾은 존재로 간주한다.

이들은 깨질 것이 뻔한 천박한 꿈을 좇고, 자신을 위한 노력도 고뇌도 필요하지 않는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안정의 나날에 안주한다.

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맨 마지막에는 정신을 스스로 고취할 수 있는 인간으로 떠나야 비로소 고상한 인생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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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1 - 도둑까치 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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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 하지만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구. 그동안은 죽은 셈치면 돼.

-옛날부터 용기가 없었어요?
-옛날부터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마 그렇겠지.
-호기심은 있어요?
-호기심이라면 조금 있지
-용기와 호기심은 비슷한 게 아닐까요? 용기가 있는 곳에 호기심도 있고 호기심이 있는 곳에 용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 분명 비슷한 점은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네가 말하는 것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호기심과 용기가 하나가 될 수도 있겠지.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간다든지 할 경우에는요
-그렇지. 몰래 남의 집 정원에 들어간다든지 할 때는 호기심과 용기가 함께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리고 때로 호기심은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북돋워 주기도 해. 하지만 호기심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금방 사라져 버리지. 용기 쪽이 훨씬 먼 길을 가야 한다구. 호기심이라는 것은 신용할 수 없는, 비위를 잘 맞춰 주는 친구와 똑같지. 부추길 대로 부추겨 놓고 적당한 시점에서 싹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혼자서 자신의 용기를 긁어 모아 어떻게든 해나가야 한다구.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지나가 버린 후에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앞질러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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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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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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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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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실패 전문가다. 소설이라는게 원래 실패에 대한 것이다. 세계명작들을 보라. 성공한 사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기껏 고생해서 커다란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상어들에게 다 뜯기고 뼈만 끌고 돌아온다.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와 마담 보바리의 보바리 부인은 자살하고 만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옛사랑을 얻기는커녕 엉뚱한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젊은 생을 마감한다.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 때로 위엄 있고 심지어 존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라.

글은 한 글자씩 씁니다. 제아무리 빠른 사람도 글자 열 개를 한꺼번에 뿌릴 수 없습니다. 한 글자씩 한 글자씩 써야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차례대로 쌓여야 글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글자 쓰는데요. 이렇게 써나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축적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트라우마나 어두운 감정은, 숨어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예술가는 될 수 없는 수백가지의 이유가 아니라 돼야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 문학사를 봐도 이민자 출신, 식민지 출신의 중요한 작가들이 참 많았거든요. 일본에서는 재일교포 작가들이 그런 역할을 했고요.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은 두 언어를 사용하는 부모 덕분에 언어적 감수성이 민감할 것이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아가느라 굉장히 예민하게 날카로운 자의식으로 아웃사이더의 시점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볼 거예요. 그에 반해서 토종 한국인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은 지나치게 평준화되어 있어요. 아파트 단지에 사는 4인가족 혹은 3인 가족 속에서 학원에 다니며 아주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삶을 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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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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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에서 늘 걸렸던 건 여성독자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느닷없는 섹스로의 전개. 혹은 여성캐릭터와 관계를 맺는 꿈을 꾼다던지 하는 부분이 채식남 같은 남성화자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전개라고 생각했기에 개연성은 커녕 읽기가 불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은 한 미국친구가 이 책을 말하며 "그런 불편함이 좀 덜한 책"이라 해서 읽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첫 문장에서부터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하루키의 에세이만을 좋아하던 내가 두번째로 하루키에게 반한 느낌. 젊은 시절의 그가 쓰는 문장은 지금의 쿨한 문장보단 미문에 가깝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이제 조금은 더 이해를 할 수 있을 거 같다. 또, 이 책에서도 남자 주인공은 친구인 여자를 보며 참을 수 없는 강한 성육을 느끼고 발기를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문맥이 이해가 되고 어찌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서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심지어 한 챕터의 마지막에선 이쯤에선 자위를 해야 할 것 같은데...란 생각까지 하였다.) 그것이 이 책에 한정된 감상인지, 아니면 독자로서의 내가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기 때문인지는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겠지만 지금 당장의 감상이라면 하루키가 스물아홉에 쓰기 시작한 그의 소설을 나는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겨우 이해를 하는건가 싶은. 어쨌든 그의 모국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가 나의 모국어인 탓에, 원문에 가깝게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였다. 뉴요커 친구가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문판은 분명 내가 읽은 하루키와는 다른 작품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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