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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염천 -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터키 여행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스의 아토스 반도는 그리스정교의 성지로서 수 세기 동안 단 한명의 여자도 살고 있지 않으며 출입도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하루키는 '여자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장소가 전 세계에 한 군데쯤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장소가 어딘가에 있다고 해도 나는 별로 화나지 않는다'고 쿨싴하게 말하지만, 내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갈 수 없고 밟을 수 없는 땅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역시 억울하고 분한 일이다. 하루키가 그렇게 원통한 이 세상의 여자들을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키는 누군가를 위해서 무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 책으로 나 같은 여자들의 원통절통함을 어느정도 덜어주게 되었다.
좋은 여행기란 주관이 충만한 문장만으로 독자들을 홀리되 독자가 스스로 그 장소를 찾아가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싶단 마음이 들도록 아주 약간의 공백을 남겨두는 글이라 믿는다. 그럴듯한 사진으로 부족한 문장력을 가리고 잠시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하는 여행기는 비겁하다. 하지만 아토스는,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이므로 예외로 칠 수 밖에 없다. 내가 아토스를 내 육감으로 느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현실에서는 여행기로나마 그 곳을 100% 느끼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천염천의 이 모든 사진들은 용서가 된다. 마쓰무라씨가 촬영하였다는 사진들은 요즘의 포토샵 사탕발림 사진들과 달리 담백하고, 글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문장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여행기의 일부로서 존재하기에 글을 읽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우천염천에 대한 평(별점)은 먼 북소리나 슬픈외국어에 비해 낮은 편인데,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 여행기에 여행지에 대한 짜증과 신경질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수도원에서 주는 곰팡이 핀 빵을 먹으며 수도원 미슐랭 가이드가 있다면 별 0개를 받을 수준이라 평하고 '이런 곳에 하루 더 처박혀 다시 곰팡이 빵 따위를 먹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죽어버릴 것이다'라고 일갈한다. 고생한 이야기만 내내 이어지니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낭만적인 여행기를 기대한 독자들이라면 실망스러울만 하다. 하루키가 원래 여행지에 대한 판타지를 선사하는 작가가 아니기는 하지만, 로마와 미국동부에서 살며 쓴 글들을 보면 그만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느껴진다. 하지만 우천염천에는 그런 낙관이 없다. 크게 소란 떠는 작가가 아니니 그렇다고 나 죽겠소 엄살을 부리지도 않지만, 확실히 그의 태도가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그런게 진짜 여행 아니겠는가? 하루키도 인간인데 발에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흔들릴 때까지 걸으며, 게릴라가 나타나는 흔적뿐인 국도를 달리면서도 언제까지나 초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념의 여행이 아닌 실제의 여행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감정이 짜증과 신경질이라는 진실을 떠올려 보면 이 여행기는 다만 솔직할 뿐이다. 너무나 담담해서 가끔은 인간같지 않은 하루키도 이렇게 화가 치밀어 오를때가 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기도 하였다. 아토스반도에 대한 여행기가 마무리되면 책의 후반부는 터키 여행기에 할애하고 있다. 지금의 터키와는 전혀 다른 20세기의 총검이 지배하던 터키의 이야기. 그래서 여행기이자 동시에 기록으로서의 성격도 강하게 느껴진다. 납득할 수 없이 낙후된 기반시설과 지저분한 호텔에 대한 하루키의 불평은 이어진다.
아토스반도 여행기가 물리적으로 갈 수 없는 장소에 대한 글이라면 터키 여행기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1980년대란 시간에 관한 글이기에, 이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는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하루키의 안내로만 당도할 수 있는 여행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그의 투덜거리는 안내가 즐거울 것이다. 아직 팬이 아니라면 먼 북소리를 먼저 권하고 싶다. 하루키는 하루키이지만, 우천염천의 거센 비 내리고 뜨거운 해 뜨는 고단한 여행은 우선 사랑에 빠진 다음에 같이 해도 늦지 않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