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품절


나는 혼자 살고 싶었다. 내 일생을 바치고 싶었다. 자유롭게...

대학생이 된 후에도 나는 그런 결심을 되풀이했었다.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때로는 소망치 않는 방향과 형식 속에 생이 형성해 놓는다.
논리의 수미가 일관된 생을 우리는 희구한다. 그러나 생의 테제와 안티 테제는 논리에서처럼 당연한 일의적 단계를 밟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생은 너무나 혼돈적이고 어두운 밤의 측면과 꿈과 동경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이 일체가 되고 그와 객체 관계가 지양되는 투명한 순간은 우리에게 그렇게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분열된 의식과 전우주에 대한 고독감에 앓고 있다.
-30쪽

...우주선이 달세계로 가는 시대에 사는 인간은 영혼의 소박함을 잃은 지 오래된다. 사랑도 변형된 호기심인 경우가 많고 사랑의 행위에서도 지적인, 너무도 지적인 것이 현대인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원칙과 독백 속에 감금되어 있다. 자아에 망집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공관 속을 꿰뚫는 것은 현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기적같은 희귀한 몇 개의 순간에서만 우리는 변신을 한다. 헌신과 희생이 가능해진다. 그 순간이 지나면 생은 다시금 어두운 것, 무표정한 것으로 된다.-31쪽

객관적으로 짧은,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지루하게 긴 우리의 생에서 그래도 진주빛 광채를 지닌 기간이 있다면 그것은 유년기리라. 유년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실락원이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라고 어떤 시인이 말했다. 어린 시절은 의외의 놀라움, 신비와 호기심, 감동에 넘친 지루하지 않은 한 페이지다. 그리고 우리는 몇 살이 돼도 그 장을 펼쳐 보고 싶어한다.

어릴 때 우리는 모두 초시간적이고 불사신이었다. 존재의 상처를 모르는 이상주의자였다. 성장한 뒤에도 어린 마음을 상실치 않은 이상주의자, 즉 영원한 유아는 현실과 부딪칠 때 늘 생사를 건 모험을 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어린애로서 즉 이데알리스트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일 뿐더러 정정 파국을 가져온다"
생에 좌초한 '어린애들' 위에 디디고 서서 개가를 올리는 것은 어느 세대에나 영원한 속물들, 인간을 목적으로 알지 않고 수단으로 아는 바리새인들, 현명한 준법자들, 투철한 리얼리스트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이데아가 없다.
따라서 유년기가 없다. -32쪽

나의 지병인 페시미즘을 고쳐 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생명에의 애착을 만들어 줄 사람은 너야. 오늘 밤 이런 것을 읽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자살자의 수기 중의 일구야.
장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 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43쪽

이상과 꿈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에게도 뜻밖인 형태로. 동화같이, 분홍 솜사탕 맛같이 느껴지는 유년기, 인식에 모든 것을 바쳤던 10대와 20대. 타자(사회)와 대면한 이래의 여러 가지의 괴로움, 아픔. 상처로 뒤덮인 20대 후반기... 지금 회상해 보면 한마디로 내가 '어렸었다'는 느낌뿐이다. 꿈이 너무 컸었다. 요구가 너무 지나쳤었다. 나 자신에게 타인에게 우주 전체에게...-155쪽

뮌헨에서 첫 아이를 낳았을 때였다. 나의 입원실에 면회 시간에 찾아온 남편은 커다란 냄비를 들고 있었다. 그 속에는 미역국이 담겨 있었고 호주머니에서 김초밥도 나왔다. 구구을 먹었더니 미역이 잘 안 씻겨서 지금지금 돌이 씹혔고 김밤의 밥은 설었다. 그러나 나는 가능한 한 맛있는 표정으로 끝까지 다 먹었고, 남편은 그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같은 방에 누워 있는 다른 해산부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총집중 되었다. -176쪽

이것이 나의 생활인가 하고 느낄 때 우리는 그 의식의 각성을 소중히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파고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것은 나의 생활은 아닌 것이다. 누구나의 생활에 불과한 것이지 자기를 사물이나 타자의 속에 소외해 버린 일반적인 아무나의 삶이지 그것은 일회적이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184쪽

남녀 또는 부부의 모든 드라마는 그들이 타인이라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이 우리에게 방해되는 존재인가를 매일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한 타인이 둘이 모여서 생활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돌연 행복을 발견해야 할 의무라도 있는 듯한 태도로 임한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충분히 불행했고 여러 가지 문제에 싸여 있던 것이다. 그런 복잡하고 문제에 넘친 불행한 양인이 모였다고 해서 돌연 인간의 행복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일까? -210쪽

우리 영혼이ㅡ 모든 고뇌는 우리가 다시는 유년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인식과 또다시 돌아갈 수 없는 유년기에의 절망적인 향수에 기인하는 것이라 한다. 유년기란 나와 외계가 일체를 이루고 있었고 즉 자와 타자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었던 천국적인 시대인 것이며 우리의 존재에는 죄의 때가 묻어 있지 않았었다. ..이 시대의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어서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254쪽

정화는 만 1년 6개월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못 걷는다. 누가 붙잡아 주면 발자국을 뗄 정도다. 이 정도는 다른 아이는 돌도 훨씬 전에 하는 것이라 한다. 나도 모르겠다. 이 아이가 처음이니까. 정화는 늦되던 올되던 나에게는 절대인 것이다.-266쪽

나는 정화가 엎어져도 절대로 안 일으켜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와 싸워도 절대로 원인을 묻거나 야단치지 않는다. 소란과 싸움 속에서만 어린애는 생을 배우는 것이니까. -282쪽

우리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또 요구할 수도 없다. 아이가 우리에 의한 존재이고 우리의 것이나 동시에 자유로운 의식이고 절대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체성에 눈이 뜬 후의 아이게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정뿐인 것이다. -285쪽

정화가 자라나고 성숙하고 소녀에서 여자로 되고 사랑을 하게 될 날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가슴이 뜨거워진다. 찬란하고 행복한 청춘을 보내게 해주고 싶다. 정화가 의식 못하도록, 내 존재가 정화에게 눈에 띄고 방해되지 않도록 은밀한 방법으로 정화의 행복을 형성해 주고 싶다.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이 나의 소녀 시절에도 있었는가? 감동과 희열과 행복감이! 그것의 전부를 아니 그보다 몇백 배를 정화가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울었던 눈물과 괴로움은 전부 생략시켜야 한다. 절대로 '버림받은 느낌'을 주지 않아야 한다. 어떤 고뇌와 슬픔 속에서도 '무엇인지'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다. 노골적으로는 '어머니'가 있는 느낌, 다시 말하면 이뢰심이 아니고 보다 깊고, 보다 간접적으로 아이의 절망을 도와 주고 싶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293쪽

사랑의 마약 밀매상적 요소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1964.4.1-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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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12-03-2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 전혜린 참 좋죠? 이십대 초반 시절 전혜린에 푹 빠졌던 기억이 나요. 그녀의 삶과 사랑이 모두 연기같고 영화처럼 느껴지며 몹시도 동경했던 기억두 나구요..
좋은 하루 보내요 라일라.

LAYLA 2012-03-23 00:04   좋아요 0 | URL
나이에 얽매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스물 일곱에 전혜린을 읽다니 왜 이렇게 슬푸죠?? 언제 스물일곱이 되어버린 걸까요 무서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