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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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개 행복은 본디 여집합이다. 감당해야 할 것들을 감당하고 견뎌야 할 것들을 견디고 났을 때 그제야 존재감을 얻는 것, 그래서 황송하기 짝이 없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저 쉽기만 핟. 이상하게도 그들의 행복 꽃가루는 내 몸속에 행복을 전염시키는 대신 이물질이 되어 나를 가렵게 한다. 노르웨이 청년하고는 마음이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자기 맘을 보여주지 않는다. 맘이 아니라면 몸이라도 보여주든가. 인생의 대부분을 잠으로 탕진하듯이,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원치 않는 사람들과 무의미한 대화를 하며 흘려보낸다. -67쪽

느닷없이 영감님 한 분이 우리 주변의 공기를 들추고 사회적 공간에서 친밀한 공간으로 바짝 들어온다. 그리고 뭔가를 주절거리신다. 띄엄띄엄 단어를 조합해 본 결과, 본인은 사브타트까지 가는 길인데 우리를 태워주고 싶다는 말인 것 같다. 거기 가면 구시가지로 가는 버스가 있고 원한다면 끝까지 태워줄 수도 있다고 하셨다. '끝까지'라니. 거 어감 상당히 안 좋네. 물론 영어의 끝은 목적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아하니 노인네 아직 기운 정정해 뵈시고 혹시나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조그마한 여자애 둘쯤은 너끈히 해치울 기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냥 마음에서 우러난 친절일 수도 있잖아. 그런 사람 앞에서 딴 생각하는 우리가 오히려 사악한 것이 아닐까. 나는 성선설을 믿지 않지만 이런 태양 아래서 흑심을 품을 수 있는 인간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포함하여 인류 역사상 그리 많을 것 같지 않다. 읷의 태양은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묘한 힘이 있다. 그래, 까짓것 기껏해야 암매장이겠지. 이런 곳에 매장되어 다음 세상에는 청초한 히아신스로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120쪽

나는 디센트decent란 단어를 좋아한다. 점잖은 행동거지, 예의바른 말씨, 의젓한 태도, 어지간한 수입, 남부럽잖은 생활, 어엿한 한 끼의 식사, 내가 인생에서 원하는 것들을 모두 이 한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137쪽

평소엔 여자라는 신분이 그리 달감지만은 않았다. 많은 경우 그것은 김칫국물이 흐르는 도시락처럼 난감한 현실이다. 늘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고 욕망을 사려야 하고 본심을 감추어야 한다. 대충 여자 흉내라도 내고 다니려면 싸지고 다녀야 할 짐이 가방 하나 가득이다. 여자의 일생은 지루한 소제 과정이다. 털이란 털은 죄 뽑거나 밀어야 하고 손톱은 적당한 길이로 유지해야 하고 내일이면 다시 해야 할 화장을 매일 밤 지워야 한다. 시치푸스와 맞먹는 노역이다. 물론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평균의 폭력은 외상적이다. 소심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외상의 경험을 피하기 위해 통념에 순응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다르다. 유럽에 온 내가 꼬박꼬박 마스크 팩을 붙이고 발 마사지를 하는 것. 이건 사회적인 맥락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몸부림과 좀 다른 것 같다. 그냥 나 자신을 보살피는 것이 보람차고 재미있다. 아무래도 이건 삶보다 여행을 편애하는 습성 때문인가보다. 여행을 할 때는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솔직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여행은 삶의 일부일 테지만, 분명 그 두 가지는 확연히 다르다. 여행 중에는 처치 곤란한 자아를 -139쪽

그런대로 참아낼 수 있고 때로는 즐기기까지 한다. 산소 같은 여자가 아니라도 뭐 어때. 질소 같은 여자는 어떨까? 뭔가 독해 보이고 치명적으로 느껴지잖아. -140쪽

맥주를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은 태권도, 서울, 불고기에 대해 이야기했고 우리는 U2, 블러디 선데이, 조이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로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언급하고 나니 화제가 툭 끊겨버렸다. ...진은 사업 때문에 세계 곳곳을 두루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두브로브니크에는 형네 가족이 살고 있어서 겸사겸사 들렀고, 독신에 일밖에 모르고 유일한 취미라고는 포커뿐인데 즐기지만 중독자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머리카락 색깔은 옅은 다갈색, 눈동자가 선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긴 처음 보는 여자들 앞에서 눈을 살벌하게 치뜨며 나 이혼 두 번 했고 한다하는 타짜요, 이런 식으로 말할 남자는 없겠지.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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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4-05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소같은 여자~모든 생명의 조직 구조에 필요하고! 특히 TNT폭탄제조에 꼭 필요하다^^
모지랄경우 일단 키가 작고 누렇게 뜬다네요, 산소같은 표현 식상한데 멋집니다~

LAYLA 2010-04-06 14:50   좋아요 0 | URL
폭탄제조에 필요하다니 정말 치명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