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죽고 난 뒤에 아침에 눈을 뜨면 불안해서 등 뒤에 소름이 돋았다. 오늘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사무실에 나가면 돈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직원들은 이건 어떻게 해야 하냐 저건 어떻게 해야 하냐 내 입을 바라보는데 나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떼인 돈 또한 많았다. 사람들은 엄마아빠의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입장을 바꿨다. 늘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지식이란 단단한 근거 위에서 판단을 내리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밤이면 이대로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며 잠들었다. 그리고 눈이 떠지는 순간 공포로 온 몸이 차가워졌다. 의사는 항불안제를 처방해줬는데, 그래서 그 뒤로 나는 눈을 뜨자마자 먼저 약부터 삼키고 불안을 가라앉히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 뒤로 어떻게든 시간이 흘러가며 나는 내가 변할것임을 알았다. 나름 똑똑하고 메타인지가 있는 사람이니까. 시간은 나를 살려주겠지만 동시에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겠지.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 소송이 주는 압박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을 수소문하고 두드리는 절박감과 초조함. 아무리 숫자를 맞춰도 필요한 돈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카페에 앉아 눈물만 뚝뚝 흘리기도 했다. 사업장에 불이 났을 땐 불을 보러 나온 마을 주민들 앞에서 울면서 뒹굴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제가 뭔 죄를 지었다고요. 연극 배우나 할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경매에 들어간다고 법원 문서를 받아보던 날 아침에는 쿵, 심장이 떨어지며 등 뒤 뿐만 아니라 두피까지 삐죽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지. 사실 나는 지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순간순간 모든 기운과 지력을 닥친 일을 해결하는 데 사용한 나머지 기억을 저장할 여력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과거를 떠올리면 막연한 고통만이 느껴질 뿐이다.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고통. 전화기를 붙잡고 변호사에게 매달리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도 간절히 매달리고, 상대의 헛점을 찾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분야의 소송기록을 밤새도록 보고 또 보고.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기적같이 상황은 나아져갔다.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정말 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직도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빚이 남아있지만 빚을 다 갚을 날을 고대한다는 점에서는 빚을 다 갚지 못하고 평생을 보낼 수 있다는 공포에 압도되었던 지난 날에 비하면 호사스런 처지이다.
작년 건강검진을 받으며 의사가 보호자가 같이 왔냐고 물었을때 아니라고 답했다. 보호자가 병원에 동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냥 나에게는 보호자가 없는데. 어쨌든 당시의 소감이라면 놀라움이나 두려움, 서러움이 아니라 담담함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은 그런 심정. 보통의 사람이라면(예전의 나라면) 일 년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한 극도의 긴장, 큰 시험을 앞두었을 때나 하는 그런 강도의 긴장을 나는 매일 하며 살고 있고 그러니 암에 걸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여러 추가검사 결과 나는 암은 아니었지만 신체의 여기저기에서 암으로 진행중인 비정상적인 조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네. 이젠 암이 되기도 전에 다 발견하다니. 나는 여전히 담담했고 아프면서 오래 살고 싶진 않다고 생각했고 내가 죽은 뒤 현실의 문제를 처리할 사람에게 당장 현금이 필요할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금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언젠가는 돌아버릴거 같은데, 그 예언 또한 서서히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요즈음 느낀다. 냉소, 괴팍함, 예술에는 흥미가 떨어지고 어떤 책을 봐도 그다지 읽고 싶지가 않다. 글을 쓰고 싶지도 않고 써봐야 무언가 이상하다. 맞지 않는 블럭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춘듯. 이 또한 그다지 슬프지 않다. 예정했던 일이 예정했던 시기에 일어나는 것처럼, 아 역시. 그렇구나 싶을 뿐. 그렇지만 올해의 김승옥 문학상 수상집이 나왔나 검색을 해보다 이제는 아는 이웃들이 모두 떠나가고 조용하고 텅 빈 서재브리핑을 보다가 옛 이웃들이 궁금하여 글을 써본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예전에 내가 사용하던 비밀의 대나무숲 이곳에. 저는 아직 이렇게 살아있고 나의 이웃들도 모두 안녕하시길.
*보시는 오랜 이웃님들이 계시다면 잘 지내시는지 댓글을 남겨주세요. 아마 이 글은 곧 비공개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