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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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해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엔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첫 한 줄만 나와 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하지만 이젠 안다. 결국에는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상념밖에 없다는 것을. - P46

나는 그런 공기 덩어리를 몸 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72

나가사와는 몇 가지의 상반되는 특질을,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써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때로는 나조차 감동하고 말 정도로 친절했지만, 그와 동시에 더럽게 심술궂은 데가 있었다. 깜짝 놀랄 만큼 고귀한 정신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별수없는 속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이끌어 낙천적으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면서도, 그 마음은 고독하게 음울한 진흙 구덩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그의 이율 배반성을 처음부터 명백히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이 어째서 그의 그러한 면을 보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나이는 이 사나이 나름의 지옥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 P83

네가 이런 걸 허무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네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증거고 아주바람직한 일이야.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자고 다녀 봤자 얻는 건 아무것도 없지. 피곤하고, 자신이 싫어지게 될 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구.

그럼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겁니까?

그걸 설명하기란 어려워. 왜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에 관해서 쓴 것 있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즉 말이지, 가능성이 주위에 충만해 있을 때, 그것을 그냥 두고 지나간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 그걸 알겠어? - P87

부자의 최대 이점이란 게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 P130

내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악착같이, 허리가 휘도록 이랗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까?

그건 노력이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더 주체적이고 목적적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거야. - P338

하지만 최근에 이것으로 좋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이게 우리 자신을 위한 본래의 생활이라고. 그러니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한껏 기를 펴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불안해써요. 몸이 이삼 센티미터 가량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이건 거짓이다, 이렇게 편한 인생이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얼마 얼마 안 있어 ㅇ게 완전히 뒤집혀 엎어지는 날이 있을 것만 같아 둘이서 긴장을 풀지 못했어요. - P407

우리는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에요. 자로 깊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나갈 순 없어요.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말아야.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요.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와타나베 군은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어들이려고 해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 봐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고 생각하고 산다구요. 정말이에요, 그건! 그러니 와타나베 군도 더욱더 행복해져야 해요.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해봐요. - P434

와타나베 군은 누구도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행복해지도록 해요. 경험에 의한 나의 생각이지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세 번 밖에 없고, 그것을 놓치면 일생을 후회하게 돼요.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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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1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오래전에 읽었는데 남자가 여러 여자와 잠을 잤다는 것만 생각나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문장이 있었군요.
(즉 말이지, 가능성이 주위에 충만해 있을 때, 그것을 그냥 두고 지나간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 그걸 알겠어?- P87)
자제력을 갖기 어렵다는 걸 멋지게 풀어서 쓴 것 같습니다.

LAYLA 2020-10-19 17: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페크님
무라카미 소설은 밑줄긋기가 무척 적은데(작가도 밑줄긋기 당하는(?) 소설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구요) 이 책은 초기작이라 그런지 그런 종류의 문장이 그래도 꽤 있더군요. 독자들에게 그게 더 쉽긴 한 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