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을 돌아다닐 때 동행이었던 프랑스인 친구가 "내가 예전에 데이트하던 남자가 찍은 영화가 개봉했대. 나는 오늘 저녁에 그거 보고 올게"라 말하는 걸 들으며 세상에 저런일도 있구나 싶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 아닌가. 영어권 영화라면 같이 봤겠지만 포르투갈어 영화인 탓에 나는 혼자 시간을 보내기로 했고, 친구는 잠시 스친 남자가 만든 영화를 보고 한껏 들뜬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주 유명한 메인 스트림 무비는 아닐지라도, 아주 잠시 친밀한 사이였다 할지라도, 한 침대에서 깔깔거린 남자가 만든 영화를 낯선 도시에서 돈을 주고 관람하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을테다. 영화는 딱히 준수한 작품인것 같지는 않았지만 여행 중이라는 것 만으로 우리는 이미 신이 난 상태였다. 고양된 기분 탓인지 둘이 함께 시끄러운 바로 가득찬 거리를 걷고 술도 한 잔 마시고 대화인지 독백인지 모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소리 지르며 쏟아냈던 추억이 있다. 


시간이흘렀고 차가운 한국의 겨울 밤, 논문을 쓰려고 새로 산 랩탑 성능을 테스트 하느라 유튜브에 접속했는데 옛날에 데이트한 남자가 찍은 4K 영상이 추천영상으로 뜬다. 그렇지 않아도 고화질 동영상이 필요했기에 그 영상을 클릭하고 화질 설정을 720p에서 4K로 바꾼 다음 재생시켜 본다. 옛 남자친구의 영화가 개봉하는 것만큼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이것이 2020년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지금 이 시대의 우연이라던가 낭만이라던가 스침이라던가 그런 단어들의 실현일 것이다. 옛 남자친구가 올리는 영상이 먹방이라던가 전자기기언박싱 같은 거라면 정말 멋없었을텐데, 다행히 이 친구는 예술작품에 가까운 영상을 올려두었다. 니가 보는 세상은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것으로. 팬들의 댓글을 하나씩 훑어보고 팬들에게 단 옛 남자친구의 심플한 답변도 보며 넌 그대로구나 느끼는거. 어릴 적 보며 동경한 어른들의 연애에 이런 풍경은 없었는데,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 낸 예상치 못했던 삶의 한 장면이다.


최근 일 때문에 디자이너, 건축가 등 아름다움 전문가를 찾아 다니느라 또 그분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런데 그 고생 중에 내가 예술에 대해 무척 수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난 그 분야는 전혀 모르니 알아서 해주세요. 전 못해요." 사실 나는 어릴 적 화가가 꿈이었고 예고진학을 고민했으며 의류학과도 한 학기 다닌 사람 아니었던가. 전문가는 전문가인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미술시간에 늘 자신만만했던 내가 예술을 어렵게 생각하는 위축된 어른이 되었다는 건 좀 슬픈발견이었다. 이 시대의 예술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옛 남자친구의 독백같은 영상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처럼. 새로운 한 해에는 작은 것이라도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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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1-02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서 나와 많이 비슷한 면을 발견했군요...(내가,,,,ㅎㅎㅎ 혼자 하는 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