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를 친 날 친한 동기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다. 다들 맥주 한 잔 하고 기분이 좋을때 즈음 한국인 여자 동생 하나가 중국계 교포 남자애 하나를 붙잡고 갑자기 내 나이 이야기를 꺼냈다.

"레일라는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지에지에(누나)라고 불러야 해"

그러자 영국에서 학부를 마친, 나보다 대충 열살쯤은 어릴 그 남자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닌데? 레일라는 나랑 나이 같아. 그리고 나에겐 메이메이(여동생)야."

그이가 나에게 그 어떤 사심도 없음은 오감과 육감으로 잘 알고 있고,
피시함의 관점에선 저 대답에 꺼림칙한 구석이 있을지라도
젠틀맨의 매너로서 응대하는게 너무 귀엽다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국경을 넘어 나보다 다섯살쯤 어린 지난 남자친구를 만났다.
몇 년만에 만나는 거라, 그리고 최근 공부하느라 내 얼굴이 많이 상했다 느끼고 있었기에 나이든 티가 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그 사람에게 어리광부리는 마음이 남아있는 나는 이런 말이 듣고 싶다 생각했다.

'넌 나이 들어도 예쁘구나.'

같이 차를 마시고 아름다운 그 도시의 야경이 보이는 음악당 계단에 앉았다. 습도 높은 미지근한 밤바람이 불어왔고 노란 불빛이 그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내가 그에게 빠진 그 순간들처럼, 여전히 그 사람의 눈코입은 단정하고 진지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무얼 할거냐는 물음에 내가 답했다.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 그래서 문제야."

아직도 예쁘다는 소리나 기대하고 있던 나에게 그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을 꺼냈다.

"넌 아직도 어려. 뭐가 걱정이니?"

작년, 자전거를 타고 일본열도를 달린 그 친구는 여행길에 동행을 만나 열흘정도 같이 다녔다 한다. 동행은 네덜란드 출신의 중년남성으로, 서로의 일정상 헤어질 때에서 나이를 물어보았는데 아무리 많아봐야 60쯤일거라 생각했던 그 남성은 사실 70대였다고 한다.

"70살인 사람도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위해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어. 넌 아직도 한참 어려. 하고 싶은 건 다 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들었더라면 정말 아무 의미도 없었을 말인데 나보다 어린 사람이 저리 말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혹은 그 사람의 톤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애정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불어오는 바람이 달콤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지멋대로 살고 있는 요즈음, 세상이 여자의 나이에 덧씌운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느낀다. 그런 사람도 있긴 하였다. "누나 운동 열심히 하네요. 역시 몸매 비결이 있었어. 여자들은 30넘으면 20대한테 안 지려고 운동 열심히 하는거 같아요." 많은 여성들이 나이듦을 무서워하는건, 나이 하나로 인해 저런 말도 안되는 평가를 당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일테다. 하지만 직접 당해보니 저런 평가는 나에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못했다. 어리고 잘생기고 매너좋고 스윗한 연하남들과 예의바른 교류를 하고 서로에게 지지를 보내기만도 바쁘기 때문이다. 나도 기대하지 못했던 인생의 베네핏패키지. 한국이 아니라서 가능한 마법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내 인생의 행복은 내가 긁어모아 챙기면 그만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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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1-02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레일라 님보다 두배나 나이가 더 많은 제가 들어도 의미 있어요!!! 저도 70살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세계 여행은 못 가도 일본 여행은 하고 싶네요!!!! 멋지다!! 레일라님도 옛 남친도 , 젊은 그 친구도, 70세에 자건거로 세계 여행을 하는 그 사람도.... 새해부터 좋은 에너지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