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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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번역된 제목이 무척 아름답고 원서의 타이틀보다 더 적절하게 소설의 분위기와 주제를 담아낸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이제 갓 건축 사무소에 입사한 한 젊은 청년이 대표 건축가의 여름별장에서 사무소 직원들과 함께 기거하며 국립 도서관 경합을 준비하는 시간들을 차분하게 그려낸다. 배경이 되는 가루이자와는 여름에도 고도가 높아 서늘한 곳으로 이 소설의 문체 그리고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주인공의 성품과도 무척 잘 어울리는 곳이다. 전체적인 소설의 문장이나 흐름도 괜찮은 편이고 모든 것이 결정된 수십년 뒤의 시점에서 그 단 한번의 여름을 회고하는 마지막 부분은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잘 어울리는 멋진 구성이다. 그런데 평생 글을 감별하는 편집자로 커리어를 쌓은 저자가 쓴 글이라고 믿고 싶지 않을정도로 어처구니없고 시대착오적인 부분이랄까 실수랄까 오점이랄까 하나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왜 이 글에 등장하는 젊은 여자들은 주인공에게 이유없이 빠져드는가? 


글의 내용으로 보아 주인공은 건축가가 되겠다는 고집과 올곧음은 가지고 있는 인물이나 딱히 남성으로서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타입은 아니다. 이는 자신이 대표 건축사가 점찍은 조카사위라는 소리에 아무런 주체적인 의견 없이 '그런건가' 하며 순응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하여튼 그는 그 여름별장에서 대표 건축사의 조카딸에게 구애를 받고 또 동료로 일하는 다른 여성 건축가의 은밀한 호감도 받게 된다. 그렇다. 일본 남성작가들이 창조하는 그 전형적인 하렘물 설정이다. 단지 그 배경이 고상한 일본 귀족들의 여름별장지라는 점이 특이할 뿐,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버리 청년일 뿐인데 아름답고 똑똑하고 조건 좋은 처녀들이 먼저 달려든다는 설정은 여기저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여성캐릭터가 너무나도 납작하다는 피시함의 측면에서 제기하는 문제가 아니라(물론 그것도 사실이다) 그냥 도대체 왜 뭣하나 부족할 것 없는 여자들이 그 너드 남자를 좋아하는지 소설의 개연성 측면에서 이해가 가지 않고 이것이 소설의 퀄리티를 떨어뜨린다. 무라카미 하루키 식으로 갑자기 밤에 여자가 남자 방문을 똑똑 두드리고 나체로 나타나 섹스를 한다는 수준은 아니지만 아쉬움의 탄식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평생을 글을 보며 쌓은 그 안목과 절제력으로 이 기나긴 소설을 써놓고 이거 하나를 못 걷어내어서... 


젊은 처자 둘이 어리버리한 총각 하나를 좋아한다면 그 이유를 납득이 가게 묘사를 했어야 한다. 대표 건축사의 조카딸은 삼촌이 자신의 남편감으로 주인공을 고려한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주인공에게 먼저 입맞춤을 하며 달려드는데 결국 종내는 자신은 가업을 이어받아야 한다며 남자주인공과 헤어진다. 어른이 정해주는 남자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여자와 남자에게 먼저 키스를 요구하는 여자의 캐릭터가 중첩이 되는가? 가업을 이어받는다는 것도 당찬 여사장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다는 조의 흐름이다. 결국 아름답고 순종적이며 때에 따라 요부가 된다는, 지극히 남성중심주의 시각으로 창조된 여자 캐릭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부분은 이 소설이 전체적으로 쌓아올린 고아하고 청량한 여름 분위기에 하나의 오점이다. 그리고 소설이란 것은 100점 만점에 5점짜리 하나 틀렸으니 95점 뭐 그런 식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이 오점 하나로 완벽한 소설에서는 크게 멀어지고 만 것이다. 안타깝다.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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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6-26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라일라님. 저도 이 소설은 제목과 분위기가 진짜 다 한것 같단 생각을 했어요. 그랬는데 병맛 캐릭터가 망쳐버렸다능...

저는 이 책을 읽고 이런 페이퍼를 썼습니다. 자기 글 자기가 링크하는 거 뻘쭘하지만;;

http://blog.aladin.co.kr/fallen77/10159382

2018-06-27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26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27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27 0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