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점수 : 6 / 10

중고서점을 기웃거리다가 횡재를 했다. 일전에 김훈의 에세이를 읽은 후 나는 덪에 걸린듯 그의 밀도 높은 문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진지하면서도 무겁고 또 한편으로는 덧없는 문체를 동경했다. 그의 에세이 중 일부는 절판이라서 구할 수 없는데, 중고매장 서가 맨 아래 칸에서 <바다의 기별>을 발견한 것이다. 정가는 1,000원. 하드커버를 감싼 겉표지는 우글우글 울어있었지만 속지는 깨끗했다. 역시 횡재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밥벌이의 지겨움>, <바다의 기별>은 모두 절판이고 재출간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성 싶다. 가장 최근에 나온 <라면을 끓이며>에서 김훈은 위 세 작품의 글을 발췌해서 수록했으며, ˝이 책의 출간으로, 앞에 적은 세 권의 책과 거기에 남은 글들은 모두 버린다˝고 선언했으니까. 막상 읽고나니 <바다의 기별>에서 좋은 글들은 이미 다 <라면을 끓이며>에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읽은 글을 또 읽은 셈이고 이미 가진 글을 또 가진 셈이다. 그럼에도 아쉬움보다 뿌듯함이 내면에서 요동치는걸 보니, 아아 이것은 좋은 글을 만난 교양인의 희열이 아니라 열성지지자의 수집욕이구나, 싶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얻어서 매우 기쁘다. 그러나 그 기쁨과는 별개로 이 책은 추천할 수 없다. 내 또래들은 김훈의 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더라. 한자어에 문어체라서 접근이 힘든 모양이다. 그 무거움이 매력인건데... 아무리 고민해봐도 ‘타인에게도 권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애초에 척도를 그리 정해버렸으니 달리 방책이 없다. 6점, 권함 영역의 최하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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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의 문제 진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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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7 / 10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는 종종 조롱거리가 된다. 무언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면 그 이름 앞에 ‘한국형‘만 붙여서 수백억원씩 홀라당 까먹는 정부기관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형 알파고 개발‘과 ‘한국형 <너의 이름은> 제작 지원‘이 있었다.
학계에서도 ‘한국식‘이라는 수식어에 부정적 인식을 가진 사람이 제법 있다. 이론은 언제나 추상적인 차원에서 정립된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이해관계가 대립된다‘ 이 문장은 어느 국가도 특정하지 않는다. 다만, 전제(assumption)가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권력을 배분할 때‘ ‘모든 행위자가 합리적일 때‘ 등. 설령 그 모든 전제를 충족하는 국가가 한국 단 한 곳뿐이더라도 그것은 추상적 세계 속의 독립적인 이론이다. 그것은 ‘한국의 특수한 현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사회과학 이론‘이지 ‘한국식 이론‘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화려한 말로 포장해도 그건 ‘국뽕‘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한국형 추리소설‘이라는 광고문구를 흘기면서 불신가득한 심정으로 이 책을 펼쳤다. 선물할 책을 고민하는 게 아니었으면, 자의로는 펼치지 않았을 책이겠구나, 하고 되뇌면서 말이다. 그런데 무척 재밌게 읽었다. 그것도 -당황스럽게도- 내가 불신했던 그 ‘한국형‘이라는 부분이 너무 좋았다. 지금까지 내가 접했던 추리소설은 하나같이 외국이나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범죄의 트릭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 배경의 생활과 문화도 함께 이해해야 했다. 나는 그게 여행하는 기분도 들고 배우는 것도 더 많은 장점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막상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추리소설을 읽으니 추리소설이 전해줄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짜릿함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읽은 추리소설은 매우 흥미롭지만 사실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살인이라는건 런던의 어느 뒷골목이나 첩첩산중의 대저택에서 혹은 CCTV도 지문감식도 없던 시절에만 있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제 아니다. 이 책 속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무척 사실적이고 또 친숙해서 정말로 우리 동네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느껴진다. ‘진짜 같은 허구‘라는 소설의 본령을 충족하면서 동시에 추리소설이 주는 쫄깃함(?)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은 기발한 트릭과 극적인 해결을 통해 독자에게 지적인 만족감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등장인물과 배경에 대한 묘사를 통해 한국사회의 풍토와 인간성도 아울러 다룬다. 읽으면 좋을 양서(7점)다. 선물은 이걸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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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 우주 속의 소녀 - 평등한 과학을 꿈꾸다
아일린 폴락 지음,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옮김 / 이새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점수 : 7 / 10

신간 소개를 훑다가 다음 문장에서 눈이 멈췄다. ˝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흔히 다른 여러 분야에도 재능이 있으며, 어떤 재능을 살려야 할지를 결정할 때 보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제공해주는 분야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평소 고민하던 것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결국, 이 한 문장을 찾으려고 책을 펼쳐들었다(344쪽에 나오더라).
유난히 ‘인재가 없다‘고 불평하는 분야가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자못 진지한 인식론적 질문을 품는다. ‘이 사람은 정말 모르는걸까? 왜 모를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분야는 뻔하다. 비전이 없거나 월급이 적거나 문화가 퇴행적이다.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고민은 깊어졌다. 이걸 어떻게 되받아쳐야 골탕먹일 수 있을까하는 삐딱한 고민이 한편, 어떻게 하면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까하는 건전한 고민이 또 한편. 그 질문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똑똑한 사람들이 모종의 이유로 그 분야를 기피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들이 원하는 바인) 똑똑하기 때문에 기피한다고.

이 책은 ‘왜 여성 과학자의 수는 적을까‘하는 진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예일대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소설가로 전업한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가 1-2부(1부는 고등학교까지, 2부는 학부 과정), 과거의 은사와 친구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현재 과학계에 있는 여성들의 사례를 종합해서 소개하는 게 3부다.
이 책이 시종일관 묘사하는 것은 과학계에 존재하는 ‘여성에게 비우호적인 환경‘이다. 그러한 환경은 제도적인 차원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심리적인 차원의 부담을 지속적으로 가해서 결국 여성이 과학을 포기하게 만든다. 과학은 전형적으로 남성이 잘하는 영역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똑같은 (보통) 수준의 재능을 보이더라도 교사는 남학생에게 과학을 권유하고 여학생에게 인문학을 권유한다. 이러한 차이는 과학 수업의 성비에 영향을 끼친다. 수십 명의 정원 중에 단 몇 명만의 여학생이 수강하고(책의 원제는 the only woman in the room이다. (과학)교실의 유일한 여성이라는 뜻이고 저자는 실제로 고등학교 때 그랬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점점 과학에 자신감을 잃는다. 남성의 관점에서 쓰여진 교과서는 적응하기 힘들고, 질문하지 않는 남학생들 틈에서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것을 교정할 기회는 좀처럼 없다. 이 상태로 대학에 입학하면, 물론 갑자기 높아지는 난이도에 모든 학생이 고생하지만, 여성이 가장 쉽게 포기해버린다.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과 우려가 폭발한다는 것이다.

인재 타령하는 게 꼴보기 싫어서 대안논리를 개발하려고 펼쳐든 책이지만 오히려 내가 느낀 것이 더 많았다. 특히 저자가 대안으로 ‘격려‘를 제시한 것이 인상적이다. 나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다. 보통은 ‘고생했다‘ ‘수고했다‘하고 만다. 그건 노고에 대한 인정이지 성과에 대한 인정은 아니니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이렇게 엄격한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한다면 능력을 고양시키는 자극이 되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한대로 특정한 누군가를 계속 기죽이는 환경이라면, 사소한 격려가 그 사람의 진로를 뒤바꿀 정도로 중요하다면, 평등한 무시보다는 적절한 격려가 더 현명한 길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다.
공학을 전공했지만 진로를 바꿔 정치학 대학원으로 진학한 동기가 있었다. 첫 학기에 그 친구는 수업을 정말로 하나도 따라오지 못했다. 보기에 안쓰러워서 개인적으로 도와줬지만 기본소양이 없는 상태에서 대학원 수업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미적분 과제를 해야하는데 사칙연산부터 설명하는 느낌이었다) 본인의 표현대로 ˝문과를 떠난지 10여년˝이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교수님은 종강 때 그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그래도 자네는 attitude가 좋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왔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화가 났다.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면 수업 난이도를 조정하든가(수업을 못 따라온 사람은 그 친구 혼자가 아니었다. 물론 가장 심했지만) 따로 보충을 해주든가 아니면 혼자서 공부할 수 있게 책이라도 추천해줬어야 하지 않나. 수업에서는 배려가 전혀 없었으면서 다 끝난 다음에는 ‘그래도 너는 열심히 하는 태도가 좋았어‘라니, 누굴 놀리는 걸까. 너무 기가 찼던 나는 귀갓길에 그 친구를 넌지시 떠봤다. 아까 교수님이 한 말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런데 그 친구의 대답이 의외였다. ‘교수님 참 좋은 분‘이시란다. 얘는 배알이 없는걸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정 그 친구에게 필요했던 건 마르크스가 누구고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보다는 ‘너는 잘 하고 있고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가 아니었을까. 비록 다른 전공이라서 정치학의 기초지식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려는 의지와 태도를 가지고 있으니 잘 할 수 있을 거야, 하는 격려 말이다. 오히려, 내가 한 것처럼, 모른다고 이것저것 알려주려 들면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 많구나‘라는 인식을 갖게 만드는게 아닐까.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당장 수업을 따라가는 것보다 새로운 진로에 대한 정착이었던건 아닐까. 내 도움은 도움이 되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이 깊어진다. 읽으면 좋을 양서(7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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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7-07-16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읍읍
 
Harry Potter and the Philosopher's Stone (Hardcover)
Rowling, J K / Bloomsbury Paperbacks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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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쓴 책을 완독하기는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뿌듯하다.

처음에는 지하철에서 읽을 거리가 필요했다. 보통 주간지를 읽는데 일주일을 버티기에는 너무 짧았거든. 그렇다고 책을 읽자니 한국 책은 너무 무거웠다. 지하철에서 들고 읽으면 필경 손목터널증후군이 생길 거다. 아니면 거북목이 되거나. 그래서 선택한 게 원서다. 영어공부라는 정당한 명분이 있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가볍다.

문제는 내 영어 실력이 책을(특히나 어휘가 풍부하게 등장하는 소설을!) 읽을 정도로 좋지 않다는 점. 그래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선택했다. 어렸을 때 몇 번씩 읽었던 책이니까 영어로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적어도 해석이 좀 안 되도 답답하진 않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짧은 영어 실력으로도 술술 읽혔다. 음.. 엄밀히 말하면 ‘읽었다‘기 보다는 ‘떠올랐다‘는 편이 더 정확하다. 영어 문장을 더듬더듬 읽어나가다 보면 머릿속에 문득 그 내용이 떠올랐다.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인도한 게다. 전혀 모르는 단어가 수시로 나왔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지장 없었고, 그래서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때로는 내용이 먼저 떠올라서 모르는 단어의 뜻을 추측하기도 했다(그리고 또 때로는 정말로 맞췄다).

‘원서를 읽는 재미‘라는 것도 느꼈다. 오류의 가능성 외에도 번역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정보의 손실이 있다. 대표적으로 볼드모트를 돌려 말하는 ‘그 사람‘은 영어로 ‘You-Know-Who‘다. 직역하자면 ‘그 사람 있잖아‘ 혹은 ‘너도 아는 그 사람‘ 정도다. 이해한다. 이걸 일일이 직역하면 문장의 흐름이 너무 길어질 거다. 아니면 너무 긴 명칭이 볼드모트의 위엄(?)을 훼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 뜻을 전달하기에는 부실하다. 나는 예전부터 말할 때마다 공포감이 들어서 ‘그 사람‘이라고 부르기 싫다는 해리포터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사람‘이 어때서? 나도 가끔 누군가 이름을 부르기 껄끄러운 사람이 있으면 ‘걔가‘ ‘그 분이‘ ‘그 사람이‘로 돌려말한다. 그런데 그게 ‘You-Know-Who‘면 느낌이 다르지. 해리 입장에서는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존재를 두고 ‘너도 아는 그 사람‘이라고 불러야한다면 거부감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마치 모두가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듯한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명칭은 오히려 이 세상 모든 곳에 그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나 같아도 쓰기 싫겠다.

어쨌든, 대단히 얻은 것이 많은 독서였다. 좋아하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예전의 그 기쁨을 느꼈고, 영어 실력도 쑥쑥 늘었고, 원서를 읽었다는 성취감과 자부심도 얻었으며, 원래 표현을 아는 재미도 느꼈다. 앞으로도 종종 시도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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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란 무엇인가? - 장애학 입문
Ronald J. Berger 지음, 박승희 외 옮김 / 학지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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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6.5 / 10

<장애학>에 대한 좋은 입문서다. 여기서 ‘입문서‘라는 표현은 그 의미가 제법 깊다.
첫째로, 장애학은 신생 학문이다. 장애는 언제나 모든 영역의 일부분(혹은 예외적인 부분)으로 또는 정상범주에 도달하지 못한 가장자리로 취급받았다. 장애학은 그 관점을 전복해서 장애를 한복판에 놓는 모든 연구를 일컫는다. 학계의 첨단에서는 연구가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그 흐름이 대중까지는 오지 못한 상태다. 이런 시점에서 입문서를 표방하는 책의 출판은 중요한 사건이다. 학문세계에 누적된 연구들이 드디어 세상으로 흘러넘치고 있다는 방증이니까.
둘째로, 입문서는 말 그대로 입문(入門), 그러니까 문으로 들어가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학문세계에서 이는 곧 기존 연구자들의 논의를 추적해서 살펴보는 것이다. 이 책은 풍부한 참고문헌목록과 성실한 인용 표기로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설명에 충실하다는 게 아니다. 사실 설명은 (내 기준에서 보기에) 좀 부실하다. 전반적인 흐름과 큰 분류를 가르쳐줄 뿐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역할은 문을 알려주는 것이니까. 이게 어디로 가는 문인지 그리고 그 문을 어떻게 찾아가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면 족하다.
개인적으로 4장과 5장이 가장 흥미로웠다. 장애인과 장애가족을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장애아동이 태어날 때부터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기까지 생애주기별로 체계적으로 검토한다. 특히, 인터뷰를 많이 인용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또 동시에 그들의 삶이 때로는 충분히 행복하고 즐겁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읽으면 도움이 될 교양서적(6점)이다. 더군다나 페미니즘을 비롯하여 소외되고 억압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현시대에는 그 중요성이 좀 더 크다(+0.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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