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 서울민국 타파가 나라를 살린다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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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8 / 10

하고 싶은 말이 많다.

1.
앤서니 기든스의 「기후변화의 정치학」을 읽고 나서, 나는 사회과학자가 왜 세상에 필요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뛰어난 사회과학자는 사회의 의사 역할을 한다. 다양한 도구로 사회를 관찰하고 냉철한 분석으로 진단하고 정밀한 예측으로 처방을 내놓는다. 가치 있고 귀중한 역할이다. 그 전까지 나는, 나의 좁은 견문탓에, 사회과학자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 내가 알던 사회과학자는 손톱만 다루거나 만병통치약을 들먹이거나 그도 아니면 의사 노릇을 할 마음이 없었다. 앤서니 기든스는 ‘기후변화‘라는 전지구적 문제를 통해서 인류가 처한 위험을 경고하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했다.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허언이 아니더라. 나는 그가 보여준 거장의 면모에 깊이 감복했고 또한 한국에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알지 못함에 깊이 슬펐다.
강준만은 한국 사회의 의사 노릇을 톡톡히 하는 헌신적인 사회과학자다. 물론 그의 진단과 처방이 모두 옳다는 뜻이 아니며 그가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라는 것도 아니다. 강준만의 미덕은 줄기차게 문제를 지적한다는 점이다. 이건 솜씨가 아니라 도리의 문제다. 아픈 환자를 모른척하는 것은 의사의 도리가 아니다. 설령 치료법이 없더라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고민을 거듭해야 치료법도 생기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강준만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책임감이 돋보인다.
또한 어떻게든 실현가능한 수준에서 대안을 제시한 점을 높이 산다. 비판과 성토에는 열을 올리면서 막상 해결법은 함구하는 치들이 많다. 아니면 ‘사람들의 의식 개선이 필요하다‘거나 ‘향후 논의할 필요가 있다‘면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다. 구체적인 대안을 거명하는 경우더라도, 대개 거대한 제도 개혁이라서 당장 뭘해야할지를 모르겠으며 마치 그것만 바꾸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는 듯 결정론적이다. 이에 반해 강준만은 독자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대안을 그리고 당위로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동창회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활성화된 모임임을 부정할 수 없으니 차라리 공공적 성격을 가미하자(기부나 봉사활동을 유도), 학력서열을 단번에 해체할 수 없으니 차라리 SKY 입학정원을 대폭 줄여서 엘리트의 책무를 공식화하자, 지방신문은 빈곤할 뿐더러 지방민의 신뢰가 바닥나 있는 상태니, 돈도 많이 들고 눈치도 많이 보이는 비판·폭로보다는 민원 기능이나 홍보 기능을 특화시켜보자는 대안이 특히 흥미로웠다.

2.
누가 독서를 간접경험이라던가. 독서는 독자의 직접경험과 텍스트의 묘사가 결합하여 지적 자극을 일으키는 행위다. 텍스트의 묘사가 부실하거나 독자의 경험이 부족하면 감동은 전해지지 않는다. 간접경험이라니, 어디 한평생 기행문만 읽으셨나. 독자가 문제의식이 없으면 사회 비판은 허공에 흩어지고, 독자가 인간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소설은 그냥 가십이 되고 만다.
지방에서 나고 자랐으며 지방국립대까지 졸업한 나에게 이 책이 다루는 이야기는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서울에 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풀죽어 있는 이를 얼마나 보았던가. 단지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젠체하는 이는 또 얼마나 보았던가. 좋은 일자리도 다양한 문화생활도 하다못해 친구까지도 죄다 서울에 몰려있는 현실은 얼마나 안쓰러운가. 치여사는 서울의 삶을 동정하면서도 내심 직장생활은 서울에서 하고 싶고, 중앙의 소식은 꼬박꼬박 뉴스로 챙겨보면서 정작 지방 소식은 입소문으로 듣지 않는가.
강준만에 따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지방자치단체는 ‘지방인재육성‘이라는 명목으로 우수한 중·고등학생을 합숙시켜가면서 수도권 대학진학률을 높인다. 수십 억을 들여 서울에 학숙을 지어 출신 학생들에게 싼값에 배정한다. 그런데 졸업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리잡는 비율은 8% 남짓. 인재를 서울로 많이 보내는 것이 정말로 지방에 이로운가? 지방에 남아있는 이들은 방치하고 떠날 이들을 우대하는 시각은 정상적인가? 우수한 인재를 유치해서 어떻게든 활용해보려는 방안은 왜 거론조차 되지 않는가? 뼈아픈 지적이다. 한편으로 화가 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침울해질 따름이다.

3.
「지방은 식민지다!」가 2008년에 나온 책이고,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은 2015년에 나온 책이다. 강준만 본인은 머릿말에서 ˝처음엔 ~ 개정판을 쓰려는 생각으로 출발한 일이었지만 ~ 책의 구성을 완전히 바꾸는 등 사실상 새로운 책을 쓰고 말았다˝라고 밝혔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사실상 개정판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전작은 독립적인 기고문을 엮은 느낌이 완연했지만 신작은 그것을 좀 더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다듬었다는 것 정도. 한 마디로, 좀 더 단행본 같아졌다. 그러나 실질적인 내용-주장과 근거, 논리, 대안, 인용문-은 큰 틀에서 같다(다만 업데이트가 좀 되었다). 그러니 굳이 순서대로 읽기보다는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만 보아도 충분하겠다.

4.
여담이지만, 강준만의 책을 읽는다고 했더니 주변에서 격려(?)를 받았다. ‘너는 냉소적인 마음과 야박한 어투를 가지고 있으니 분명히 강준만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강준만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냉소가 아니라 일종의 투지(鬪志)였다. 나의 냉소에는 비아냥이 섞여 있다. 아무리 곱씹고 다듬어도 내가 쓴 글은 어딘가에 가시가 박혀 있다.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없애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경멸, 혐오, 조롱, 비아냥, 냉소 같은 가시돋힌 감정들이 내 정서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게다.
반면, 강준만은 날카롭고 거친 표현을 쓰기는 하지만 그 기저에는 분노가 그리고 그 분노의 바탕에는 애정이 어려있다. 사회를 좀먹는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는데 막상 문제의 존재조차 공론화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분노. 싸워도 좋고 욕 먹어도 좋으니 논의라도 해보자는 투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시작해보려는 애정. 나보다야 훌륭한 취지와 부지런한 삶의 소산이다. 비견될 수 없다.

5.
지방의 문제는 이중 삼중으로 꼬여있어서 문제 해결은 커녕 정확한 인식과 진단조차 어렵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조명하고 논의를 진작시키고 실천가능한 대안을 제시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함께 읽어봤으면 하는 책(8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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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7-12-2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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