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기의 정석 -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 / 프로파간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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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6.5 / 10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책이다. 본래 글에도 ‘재료빨‘이란 게 있어서 쉽게 접하기 힘든 분야를 소개하는 책,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영역을 개척하는 책 혹은 너무도 강렬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다루는 책은 그 서술이 약간 빈약하더라도 용서되기 마련이다(때로는 문체가 유려하지 않다는 사실이 내용의 진실성을 보증하기도 한다). 담고 있는 내용이 워낙 귀중하여 그것을 전달한다는 의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기로는 뭘 만들어도 대개 맛있고 채소로는 뭘 만들어도 대개 맛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이 책은 특이하지도 특별하지도 강렬하지도 않은 주제인 ‘연필 깎기‘를 재료로 놀랍도록 풍부한 결과를 선보인다. 세상에, 채소로 만든 돈까스를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솔직히 내용의 깊이는 별로 없다. 그저 어떻게 하면 연필을 더 잘 깎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과 그 방법이 전부다. 영락없는 채소인 게다. 그런데 그 주제를 펼치는 방식이, 서술하는 문체가, 짐짓 진지한 그 태도가 채소에 ‘씹는 맛‘을 더해준다. 신기하고 또 재밌는 책이다.
나의 평가기준은 언제나 ‘타인에게 읽기를 권하겠는가‘를 자문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추천 여부는 책이 다루는 내용에 의해서 결정되었는데, 이번은 내용이 아닌 형식을 이유로 추천한다. 이 세상 모두가 연필 깎기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연필 깎이를 다루는 이 책이 너무나 유쾌하고 재미있어서 추천한다. 6점은 ‘권함‘ 영역의 기준점이고 거기에 반점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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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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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4.5 / 10

책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책이 언급(인용)한 다른 책을 따라서 읽는 것이다. 특히 한 책이 여러군데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긍정적인 신호다. 그 책이 워낙 유명해서 대중적으로 읽혔거나 아니면 이후에 작가가 될 잠재력 있는 사람들에게 짙은 인상은 남겼다는 것이니까. 어느 쪽이든지 다음에 읽을 책으로 점찍어 두기에 무리가 없다. 대개 이렇게 고른 책은 실패하는 일도 적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여러 책에서 너무 많이 만나서 이젠 이름마저 익숙해진 책이었다. 그래서 언젠간 읽어야지 하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내 펼쳐든 것이다. 그런데 책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기본적으로 일기 형식이라서 특정한 주제 없이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그저 짤막하게 소개하고 평하고 있을 뿐이다. 독자가 보기에는 산만하다. 또 내용은 당시(1980년대 후반) 발표된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해 평론가로서 첨언한 것이 대부분이다. 당시 작품도 잘 모르고 문학 이론에도 어두운 나로서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세태나 인생에 대한 내용도 일부 있고 거기에서는 제법 울림 있는 글귀를 만날 수 있었지만 그게 다다. 온종일 시달리고선 자기 전에 예쁜 별을 보았다고 ‘오늘은 정말 최고의 날이야‘라고 말할 수 있나.
보다 근원적으로는 그 시대의 풍조, 특히 80년과 87년 민주화 운동에 대한 공감 그리고 그 세대의 정서에 내가 해당되지 않아서인듯 하다. 저자는 종종 ‘4.19세대인 나로서는 80년 세대의 작가들이 불가해하다‘고 표현한다. 아마도 민주화 운동을 겪은 세대의 정서가 당대의 문학작품에 반영되고,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관찰자의 시각에서 그것을 명징하게 드러내준 것 같다. 물론 나로서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추측일 뿐이지만. 어쨌든,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인 것은 알겠으나 나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읽었을 때 좋았던 책을 칭찬하고 널리 알리자는 내 평가 시스템에는 단연 불리하다. 권하지 않음 영역의 최고점(4점)을 주되 아쉬움이 남아서 반점을 더했다.
혹은 이러한 아쉬움이 그 내용이 아니라 일기라는 형식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왕성하게 활동하던 저자에 대한 전반적인 숭앙이 유고작에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앞에 출간된 공식적인 에세이·평론집(말들의 풍경, 두꺼운 삶과 얇은 삶, 책읽기의 괴로움 등)을 다시 시도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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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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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7 / 10

사회적 요인이 사람의 건강을 해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유전자·병력·체질·운동·흡연 등의 개인적인 요인 말고, 가난·차별·해고·외로움과 같은 사회적인 요인이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들까? 저자는 ‘사회역학자‘로서 그것을 탐구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사회학적 관점에 익숙한 소위 ‘문과 계열‘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문과적(?)인 주장들은 대개 소외나 행복 같은 관념의 차원에서 논의할 뿐이어서, 나는 항상 주장의 타당성에 비해 근거가 좀 빈약하다고 느껴왔다. 반면 의학을 전공한 전문가로서 저자는 어떤 사회적 요인이 어떻게 건강을 악화시키는지 그리고 특히 어떤 사람들이 그 피해를 입는지를 섬세하게 설명한다. 때로는 저명한 학술연구를 가져와서 또 때로는 한국에서 직접 측정한 통계자료를 가지고서 우리 사회의 누가 어떻게 아프다는 것을 꼭꼭 짚어서 보여준다. 구체적인 근거와 과학적인 설명(그리고 빽빽한 인용과 참고문헌 목록까지)을 동원한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십수개가 넘는 챕터에서 결국은 어렵고 힘들고 소외된 사람일수록 더 아프다는 결론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왜 정의로운 체제, 합리적인 제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해야하는가? 합리·효율·견제·투명·행복·존엄을 들먹이던 그 모든 기존의 대답에 이제 건강이라는 새로운 이유를 추가해야 될 때가 왔다. 내용이 탄탄할 뿐더러 장차 우리 시대의 새로운 상식이 될 내용을 담고 있다. 읽으면 좋을 양서(7점)다.

ps. 여담이지만, 정치학의 미래가 참으로 암담하다. 경제학·사회학·행정학과 연구분야를 놓고 아웅다웅하다가, 최근에는 언어학(조지 레이코프)과 심리학(조너선 하이트)에 뺐기더니, 결국은 의학에도 일정 부분을 떼어주게 생겼다. 분과학문의 독립성은 고사하고 통섭에서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
아니다. 정치학의 미래는 찬란하고 풍요롭다. 어두운 건 정치학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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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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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7 / 10

신경정신학자의 진지한 연구서적이자 임상기록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따스한 관점을 잃지 않으며 비전공자도 능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였다. 이 책은 다양한 종류의 정신병 환자들을 다룬다. 그들의 병은 신경학적인 장애에서 비롯된다. 몸 속의 어딘가에 물리적·화학적·신경학적인 문제가 생긴 것이다(책은 그것을 ‘기질적인 요인‘이라고 표현하던데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기질은 성격 같은 추상적인 느낌이니까). 그들의 병은 현재의 지식과 기술 수준으로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고 불행하게도 환자 본인은 그것을 설명할 수도 없는 상태다. 의사인 올리버 색스는 그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그들의 병에 대해서, 그들의 병이 빼앗아 간 것에 대해서, 병을 얻은 뒤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 이윽고 병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
처음에는 기상천외하고 해괴한 그들의 병이 신기했다. 서커스를 구경하는 관객처럼 읽어나갔다. ‘세상에 이런 병도 있구나‘하는 마음으로.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장엄한 풍경사진을 보면서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하고 느끼듯이. 그러나 사연(사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애잔하다)을 하나씩 읽어가면 내면의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단지 병의 징후라고 하기에는 너무 인간적인 것들, 그저 병을 극복했다나 병에 적응했다 하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인간의 의지와 생명의 충동들. 오히려 병이 심각하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의 내면이 더욱 아름답고 귀하게 드러난다. 감동적이다.
읽다가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기도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환자들은 인지와 신경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행동을 한다. 희귀한데다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기초적인 능력이 상실된 것이기 때문에, 대개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단다. ˝상대가 맹인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근심 어린 동정을 보낸다. 우리는 그들의 상태를 상상할 수 있고 그것에 따라 그들을 대한다. 그러나 크리스티너가 비틀대는 동작으로 어설프게 버스를 타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잔뜩 화가 난 모욕적인 언사가 퍼부어질 뿐이다.(p.97)˝ 이해와 공감과 사람을 대하는 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의 기회를 준다. 읽으면 좋을 양서(7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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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내전 - 생활형 검사의 사람 공부, 세상 공부
김웅 지음 / 부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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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8 / 10

이상한 일이다. 지독한 개인주의자인 나는 남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물론 호기심에 살짝 찔러보거나 교양 수준에서 기웃거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관심 없는 분야는 깊게 파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도 최근 나는 은연중에 법조계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책을 계속 탐독해왔다. <불멸의 신성가족>, <개인주의자 선언>과 <판사유감>, 판사 출신 추리소설가인 도진기의 작품들, 이번에 읽은 <검사내전>까지. 왜 그런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법조계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법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도 아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일전에 로스쿨 준비한다고 법썩을 떨던 지인을 보고 의아해했던 정도? 그는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므로 응당 그 선택을 응원해주어야 했지만, 삐딱했던 나는 ‘그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인생을 거느냐‘하는 식으로 말해버렸다. 그래, 글을 쓰다보니까 그 때문인가 싶다. 미안함이 남았나보다.
그러나 일련의 책들을 읽고 나서 내가 느낀 점은 역시나 법조계가 그다지 좋은 직업이 아닌 것 같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법조인의 일은 대단히 지적이고 고귀한 업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판사유감>이나 <검사내전>에서 묘사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가장 비열하고 추한 모습을 보았다고 말한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 남을 등쳐먹은 사기꾼, 약자를 겁박하는 폭력배, 상습적인 도박중독자들과 계속 마주하는 직업이다. 그게 아니라면 억울하다고 악다구니 쓰는 피해자거나. 그러다보면 점점 남의 말을 믿지 못하게 되고 나중에는 애초에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채 사람을 대하게 된단다. 슬픈 직업이다. 그 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세간의 평가에 혹해서 쉽게 선택할 만한 진로가 아닌 듯하다. 미안한 마음 때문에 알아본건데 어째 더 미안한 결론이 나와버렸다.

앞에서 다소 우울한 이야기를 했지만 <검사내전>은 정말로 괜찮은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다 들어있다. 경험에 기반한 사실적인 묘사, 풍부하되 과시적이지 않는 교양, 냉소적이면서 솔직한 표현, 상대를 가리지 않는 신랄한 비판, 예상되는 반론을 미리 쳐내버리는 치밀함까지. 특히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강조한 대목과 법원의 재판을 대상으로 헌법소원을 주장한 대목에서는 그 패기에 감탄했다. 본래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과 남의 집안 일에는 목소리를 높이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 그걸 해낸거다. 목차 구성도 알차다. 1,2장에서는 직접 처리했던 사건을 통해서 인간세상 이야기를 풀어내고, 3장에서는 검찰 조직에 대해서, 4장에서는 한국 사법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에세이집은 대개 별 이유 없이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글을 같은 장으로 묶곤 하는데, 이 책은 보다 체계적인 구성이라 눈에 띄었다.
검찰이라는 생소하고도 매력적인 주제를 다룬데다가 구성, 내용, 표현이 모두 빠짐없이 수준급이다. 게다가 문체가 딱 내 취향이다. 함께 읽어봤으면 책(8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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