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에 빈 데는 없다  

1920, 30년대는 천재 아니면 수재가 문학 동네를 누비던 시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하던 시절이 내게는 있다. 그 시절의 문학에 경도됐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천재나 수재가 문학하는 시대가 아니다. 내가 이런 주장을 공공연히 펼침으로써 문우를 울적하게 만들었던 것은 1990년대 이후 문학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문인은 급격하게 진행되는 산업시대 안방의 드난살이로 전락했다는 풍문이 떠돌 때였다.

문인도 택시기사도 자리 빈다 한숨

천재나 수재가 하나씩 떠나면서 문학판이 일종의 진공 상태가 되는 사태도 나는 더러 목격했다. 진공 지대로 문학 지망생이 몰려들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고부터 많은 문인이 열악한 생존조건에 시달린다는 울적한 소리 소문이 나돌았다. 어쩌라는 말인가? 그들은 물었다. 나의 반응은 퍽 자조적이었다.
옛날 문인보다 더 많이 읽고(多讀) 더 많이 생각하고(多想量) 더 많이 쓰는(多作)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 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욱일승천하던 시대, 마케도니아군의 창 ‘사리사’의 길이는 4m를 넘었지만 스파르타군의 칼날 길이는 60cm에 지나지 못했다. 이 칼로 어떻게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군대와 싸우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스파르타 어머니는 일렀단다. 몇 걸음 더 다가서서 찌르는 수밖에 없지 뭐.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무수한 문인이 대학 강단으로 떠나면서 문학 동네가 다시 한번 진공 상태가 되어가는 듯하다. 하기야 문인이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는 사태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그 소문 듣고 천재나 수재가 문학판으로 몰려든다면 그것도 참 난처한 일이겠다.

네쿠아쿠암 바쿰(Nequaquam vacuum). ‘빈 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옛말이다. 호로르 바쿠이(Horror vacui)라고도 한다. 기존의 질서 체계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자기네만의 질서 체계를 은밀하게 추구하는 무리를 ‘비밀결사’라고 하지 아마. 인류 역사 책에는 이런 무리가 무수한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정체를 깔끔하게 밝혀낸 예는 거의 없다.

위의 라틴어 옛말은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 여러 번 등장한다. 에코의 주장에 따르면 천지자연은 빈 데를 용인하지 않는다. 천지자연이 빈 데를 용납한다면 비밀결사에 의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천지 만물, 새로운 구세주의 등장도 언제나,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자연이 이것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새 질서 체계를 꿈꾸는 비밀결사의 존재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라틴어 옛말을 처음 대했을 때 엉뚱하게도 노자(老子)의 말씀,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지극한 도(道)는 물과 같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물의 세 가지 본성 중 하나는 늘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일이다. 늘 낮은 곳으로 흘러 빈 데를 채우므로 물의 본성이 지배하는 천지자연에는 빈 데가 있을 수 없다.

어쩌랴, 돈 되는 자리가 한가할까

나는 이 ‘빈 데’라는 말을 ‘진공 상태’로 읽기도 한다. 밀폐된 공간이 아닌 한 진공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밀폐된 공간이 열리면 공기가 순식간에 밀려든다. 그러면 진공 지역은 한순간에 소거되고 만다.

택시 운전기사라는 직업을 예로 들어서 퍽 미안하지만, 글머리에서 내가 속한 문인 집단을 먼저 예로 든 만큼 면죄부를 받았으면 한다. 택시 운전기사로부터 요금이 너무 낮게 책정돼 있다, 연료가 너무 비싸다, 사납금이 너무 많다, 따라서 운전기사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는 불평을 들었다.

나는 ‘빈 데’ 이론으로 소박한 설명을 시도한 적이 있다. 택시 요금이 다락같이 오르면 사람은 자가용 끌고 나올 테고 그러면 택시 공차율(空車率)이 높아질 것이 아닌가? 연료비와 사납금이 내려 운전기사의 수입이 턱없이 많아진다면 상대적으로 고급 인력이 밀려올 것이 아닌가?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좔좔 지껄이는 사람이 이 시장으로 밀려와서 손님을 받아도 당신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노동운동은 물론 약간 과격한 파업까지 되도록 지지하는 편이다.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치면 지금 그들의 자리가 진공 상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위험하다. 여당이 인심을 잃으면 야당이 그 자리를 채워 버린다는 뜻에서 정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나는 연봉 협상에서 승리해 막대한 연봉을 받게 되는 사람을 조금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조직은 가장 먼저 이런 사람을 손보는 법이다.

나는 많은 책을 쓰고 번역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고료와 수고비에 연연한 적은 거의 없다. 만일에 원고료와 인세를 제대로 챙겨 받았다면 나는 지금 부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자가 아니다. 내가 부자가 되고 소문이 돈다면 천재나 수재가 몰려들어 내 자리를 차지해 버릴 것이다. 그러면 천재도 수재도 아닌 나는 어떻게 되는가? 보따리를 싸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천지자연에는 빈 데가 없다.
  

 

이윤기 문화 칼럼(동아일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놀라운 소식이 떴다. 

번역가, 신화학자 이윤기 씨 별세.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번역가로 더 인상 깊었고, 아울러 나를, 움베르토 에코,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 신화에 빠져버리게 했던 분이다.

그의 번역책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최초로 접한 이후 그가 번역한 소설이라면 거의 닥치는 대로 읽었다.  가장 존경하는 번역가이며 감히 닮고 싶은 분이다.

얼마 전 양수리를 바쁘게 지나치면서 근처에 이윤기 선생님이 사신다는 말을 듣고, 다음에 오게 되면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신화 속으로 사라지셨는가!

참으로 안타깝고 아프다.
 

삼가 신들과 함께 평안하시길!


2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10년 08월 27일에 저장
구판절판
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15,800원 → 14,220원(10%할인) / 마일리지 7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08월 27일에 저장

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15,800원 → 14,220원(10%할인) / 마일리지 7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08월 27일에 저장

기적의 시대
보리슬라프 페키치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12,800원 → 11,520원(10%할인) / 마일리지 64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3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0년 08월 27일에 저장



2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오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여름이 길게 꼬리를 끌고 있다. 

방향을 잃은 게 틀림없다. 

그래도.... 

벌레들은 안다. 

안다고 저리도 소란이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세상은 균형을 잡는다.

나는 앉아서, 

가을을 생각한다. 

나뭇잎을..... 바람을..... 하늘을.... 

그리고...... 

떠남! 

 

*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가끔은 세상의 균형을 유지시켜준다.
어떤 중요한 것이
저울의 빈 접시에 올라감으로써.
  

- Roberto Juarroz -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별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08월 20일에 저장

희미한 풍경
페터 슈탐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2010년 08월 20일에 저장
절판

내 우울한 날들에게
마이클 킴볼 지음, 김현철 옮김 / 갤리온 / 2010년 8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0년 08월 20일에 저장
품절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0년 08월 20일에 저장
품절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변화에 대한 기대를 조롱이라도 하듯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갑니다. 계획했던 일들을 반도 해내지 못하고 날씨 탓만 하며 헉헉거리는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자괴감마저 듭니다. 하고 싶은 것들과 해야 할 것들 사이에서 갈등하며 매일 순서를 재정리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매 일반입니다. 내일은 다른 날이길 바라며 초조하게 동동거립니다. 그런 와중에도 어제의 실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괴롭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말은 필요 없는 말이었는데……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왜 좀 품위 있고 세련되게 행동하지 못했을까, 따위의…… 어쩌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무의미한 것들로 인해, 설령 의미가 있다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어제로 인해 지금을 허비하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그 때 초인종이 울리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상품이 배달됩니다. 대수롭지 않은 소품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주로 책이나 작은 물건들을 구입하던 터였습니다.

무겁지 않은 조그만 상자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든 청년이 문 앞에 서있습니다. 대부분은 문이 열리자마자 물건만 불쑥 들이밀고 얼굴도 볼 새 없이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거나, 아예 올라오지도 않고 경비실에 맡겨놓고 찾아가게 하기 일쑤였는데, 용모도 단정한 이 청년은 미소까지 띠고 서있습니다. 바라보는 눈빛이 선량해 보입니다. 물건을 건네고 고개 숙여 깍듯이 인사하고 떠납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른 그 모습에 오히려 어색해진 나는 미처 그가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서둘러 문을 닫습니다.

박스를 뜯어 안을 들여다보고 또 한 번 놀랍니다. 펜으로 또박또박 눌러쓴 판매자의 감사의 메모였습니다. 알록달록한 과자도 한 봉 들어있습니다. 깔끔하고 꼼꼼하게 포장된 상품에서 정성이 느껴집니다. 내가 산 물건임에도 아주 귀한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타성에 젖은 채 바쁘고 숨 가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그 속에서 휩쓸리며 살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안고 사는 나. 자주 불안하고, 자주 우울하고, 그러다 지쳐서 주저앉아 지레 낙담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마땅치 않게 여기면서도 모두가 묵인하여 당연해진 것들을 별도의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고도 새롭고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비록 작기는 해도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이 그런 거라고, 눈에 보이는 것만 좇아 무시하고 지나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기쁨이 될 수 있는 거라고, 얼핏 스치기만 하고 다시는 볼일 없다 해도 오래도록 향기로 남을 수 있는, 그런 게 바로 고급스러움과 세련됨이라고 말입니다.

과자를 하나 입안에 넣습니다. 달콤합니다. 어느새 복닥거리던 마음은 가라앉고 슬며시 미안해지는 마음에 낯선 행복이 스며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공기가 온통 펄펄 끓는다. 뱀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온몸에 휘감긴다. 도무지 벗어날 방법이 없다. 목덜미에 퍼붓는 선풍기 입김이 달아오른다. 더위가 뇌의 절반을 파먹고 들어간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냐! 이따위 열정은 제발 사양하고 싶다고!’

반쪽짜리 뇌가 안간힘을 쓰며 이빨 사이로 으르렁 댄다. 목소리가 빈정거린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 절대 알 리가 없지. 어떻게 알겠어? 반쪽짜린데. 그것도 곧 뭉개져버릴 젤리처럼 흐늘거릴 뿐인 걸. 그래도 방법이야 있지 않겠어? 한 번 찾아봐. 남은 반쪽마저 아예 뭉개져버리기 전에…’

‘제발 그만하자. 쏟아낼 기력도 없다.’

반쪽짜리 뇌는 이내 온몸의 힘을 쭉 빼내버린다. 목에도 어깨에도 손목에도…

눈을 감는다. 그리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는다.  

 

눈으로 한없이 뒤덮인 시베리아 벌판,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온몸으로 듣던 덜컹거리는 기차 바퀴의 울림, 거뭇한 관목들의 그림자가 드문드문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던 밤풍경, 달빛과 눈빛이 어우러져 눈을 시리게 하던 그 날 밤, 슬픔인 듯 알 수 없는 감정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찰랑찰랑 차올라 목 줄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던… 뚝뚝 끊기는 기억의 단편들… 나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  

 

도저히 안 되겠다. 어제로 끝냈어야 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온갖 허접한 잡동사니뿐이다. 온전한 게 하나도 없다. 여전한 꼬락서니하고는… 들쭉날쭉 뻗친 머리, 꾀죄죄한 몰골, 덕지덕지 들러붙은 찌꺼기, 핏발사이로 엿보이는 불투명한 시선… 가관이다. 그만 정신 좀 차리지? 누구? 아니면 무엇? 기를 썼는데도 고작 이것뿐이었나?

대낮인가 했는데 캄캄하다. 하늘이 박살나는 소리, 이어서 쏟아지는 물소리. 달궈졌던 대지가 훅! 열기를 뿜어낸다. 지겨워! 냉동관棺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싶다. 꽁꽁 얼어버리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