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음은 죽음'인 그대   

소설가 해이수씨의 단편 '몽구 형의 한 계절'은 신춘문예 당선을 향한 갈망을 이야기로 풀어 쓴 작품이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젊은 시절의 재능을 세월에 저당잡혔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아들인 '나'가 대학 학보사 주최 문학상 공모에 당선하자 아들이 자신의 옛날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란다. 신춘문예 지망생인 몽구 형과 팀을 짠 '나'는 그가 성(性) 도착증보다 더 무서운 소설 도착증에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증세도 그 못지않다. 어느 날 우연히 화장실 창문을 통해 여자의 엉덩이를 훔쳐보게 된 '나'는 눈을 떼지 못할 만큼 강렬한 유혹을 느낀다. 소설은 신춘문예를 통과하고 싶은 '나'의 열망을 '엉덩이 목격사건'의 참을 수 없는 유혹에 빗대 표현한 것이다. 몽구 형은 그런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쓰지 않음은 곧 죽음이야."

스무 살 새내기 대학생이던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김인숙씨는 이 '쓰지 않으면 죽음'을 몸으로 실천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올해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씨가 오는 24일 열릴 시상식을 앞두고 수상 소감을 미리 보내왔다. 김씨는 "그동안 너무 많이 써서 이제 와서는 '내 인생 단 한 편의 작품' 같은 말은 입에도 올리지 못하겠다"고 했다. 등단 후 27년간 12권의 장편과 7권의 소설집을 묶었으니 3년에 두 권꼴로 책을 낸 셈이다. 그 모든 작품을 낼 때마다 '내 인생 단 한 편의 작품'으로 느꼈을 테니 더는 쓸 게 없을 것 같은 암담함이 그녀를 짓눌렀을 것이다. 김씨는 그 막막함을 "상은 호된 회초리 같은 것이기도 해서, 또 더 쓰라고 하는 것이다. 더 쓰고, 더 많이 쓰고, 더 기를 써서 쓰라고 하는 것"이라는 다짐으로 극복한다.

11월은 신문사 문학기자들에게는 '대목'이다. 11월 첫 주에 신춘문예 사고(社告)가 나가고 공모가 끝날 때까지 한 달 동안 문학기자들은 신춘문예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 한 달 사이에 전국 방방곡곡, 심지어 해외로부터 1만 편 남짓 응모작이 쏟아져 들어온다. 새해 첫날 신문에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꽤 극적인 등단 방식은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작가 지망생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신춘문예는 문학을 사랑하는 아마추어 애호가와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문예 창작을 배운 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문학의 프로암 대회다. 세계에서 오직 한국만 갖고 있는 문화적 자산이다. 문단의 신인을 뽑는 잔치로 한 해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문명(文名) 얻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긴 문예 숭상의 아름다운 전통을 현대적 방식으로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2011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공모를 알리는 사고가 2일자 종합 1면에 실렸다. 지난 1년간 응모작을 다듬으며 "쓰지 않음은 곧 죽음"을 되뇌었을 그대들이여, 1월 1일자 신문의 주인공이 되시라.


 -김태훈 문화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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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빈 데는 없다  

1920, 30년대는 천재 아니면 수재가 문학 동네를 누비던 시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하던 시절이 내게는 있다. 그 시절의 문학에 경도됐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천재나 수재가 문학하는 시대가 아니다. 내가 이런 주장을 공공연히 펼침으로써 문우를 울적하게 만들었던 것은 1990년대 이후 문학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문인은 급격하게 진행되는 산업시대 안방의 드난살이로 전락했다는 풍문이 떠돌 때였다.

문인도 택시기사도 자리 빈다 한숨

천재나 수재가 하나씩 떠나면서 문학판이 일종의 진공 상태가 되는 사태도 나는 더러 목격했다. 진공 지대로 문학 지망생이 몰려들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고부터 많은 문인이 열악한 생존조건에 시달린다는 울적한 소리 소문이 나돌았다. 어쩌라는 말인가? 그들은 물었다. 나의 반응은 퍽 자조적이었다.
옛날 문인보다 더 많이 읽고(多讀) 더 많이 생각하고(多想量) 더 많이 쓰는(多作)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 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욱일승천하던 시대, 마케도니아군의 창 ‘사리사’의 길이는 4m를 넘었지만 스파르타군의 칼날 길이는 60cm에 지나지 못했다. 이 칼로 어떻게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군대와 싸우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스파르타 어머니는 일렀단다. 몇 걸음 더 다가서서 찌르는 수밖에 없지 뭐.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무수한 문인이 대학 강단으로 떠나면서 문학 동네가 다시 한번 진공 상태가 되어가는 듯하다. 하기야 문인이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는 사태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그 소문 듣고 천재나 수재가 문학판으로 몰려든다면 그것도 참 난처한 일이겠다.

네쿠아쿠암 바쿰(Nequaquam vacuum). ‘빈 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옛말이다. 호로르 바쿠이(Horror vacui)라고도 한다. 기존의 질서 체계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자기네만의 질서 체계를 은밀하게 추구하는 무리를 ‘비밀결사’라고 하지 아마. 인류 역사 책에는 이런 무리가 무수한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정체를 깔끔하게 밝혀낸 예는 거의 없다.

위의 라틴어 옛말은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 여러 번 등장한다. 에코의 주장에 따르면 천지자연은 빈 데를 용인하지 않는다. 천지자연이 빈 데를 용납한다면 비밀결사에 의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천지 만물, 새로운 구세주의 등장도 언제나,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자연이 이것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새 질서 체계를 꿈꾸는 비밀결사의 존재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라틴어 옛말을 처음 대했을 때 엉뚱하게도 노자(老子)의 말씀,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지극한 도(道)는 물과 같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물의 세 가지 본성 중 하나는 늘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일이다. 늘 낮은 곳으로 흘러 빈 데를 채우므로 물의 본성이 지배하는 천지자연에는 빈 데가 있을 수 없다.

어쩌랴, 돈 되는 자리가 한가할까

나는 이 ‘빈 데’라는 말을 ‘진공 상태’로 읽기도 한다. 밀폐된 공간이 아닌 한 진공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밀폐된 공간이 열리면 공기가 순식간에 밀려든다. 그러면 진공 지역은 한순간에 소거되고 만다.

택시 운전기사라는 직업을 예로 들어서 퍽 미안하지만, 글머리에서 내가 속한 문인 집단을 먼저 예로 든 만큼 면죄부를 받았으면 한다. 택시 운전기사로부터 요금이 너무 낮게 책정돼 있다, 연료가 너무 비싸다, 사납금이 너무 많다, 따라서 운전기사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는 불평을 들었다.

나는 ‘빈 데’ 이론으로 소박한 설명을 시도한 적이 있다. 택시 요금이 다락같이 오르면 사람은 자가용 끌고 나올 테고 그러면 택시 공차율(空車率)이 높아질 것이 아닌가? 연료비와 사납금이 내려 운전기사의 수입이 턱없이 많아진다면 상대적으로 고급 인력이 밀려올 것이 아닌가?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좔좔 지껄이는 사람이 이 시장으로 밀려와서 손님을 받아도 당신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노동운동은 물론 약간 과격한 파업까지 되도록 지지하는 편이다.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치면 지금 그들의 자리가 진공 상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위험하다. 여당이 인심을 잃으면 야당이 그 자리를 채워 버린다는 뜻에서 정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나는 연봉 협상에서 승리해 막대한 연봉을 받게 되는 사람을 조금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조직은 가장 먼저 이런 사람을 손보는 법이다.

나는 많은 책을 쓰고 번역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고료와 수고비에 연연한 적은 거의 없다. 만일에 원고료와 인세를 제대로 챙겨 받았다면 나는 지금 부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자가 아니다. 내가 부자가 되고 소문이 돈다면 천재나 수재가 몰려들어 내 자리를 차지해 버릴 것이다. 그러면 천재도 수재도 아닌 나는 어떻게 되는가? 보따리를 싸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천지자연에는 빈 데가 없다.
  

 

이윤기 문화 칼럼(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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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좋아하고 번역에 관심이 많아 깊이 고민하고 있는 요즘, 프로번역가들의 문학세계를 참고하고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경향신문의 지나간 기사를 옮겨 놓는다. 또한 이미 읽었지만 이들이 추천하는 책들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싶다.




문학의 국경이 사라졌다. 고전 중심이던 세계문학이 거의 실시간으로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그 최전선에는 제1독자이자 ‘프로’ 독자인 번역가들이 있다. 그들의 삶과 책읽기를 통해 다양하고 풍성한 문학의 세계를 답사하는 연재를 마련한다.

★그는…
1. 사랑한다, 작가를
2. 답사한다, 책속의 장소를
3. 체험한다, 주인공을 그리고 재창조한다
/이세욱.

베르나르 베르베르, 움베르토 에코, 미셸 투르니에,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안나 가발다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그는 번역서의 품질을 보증하는 한 증표가 되었다. 그것은 물론 원작의 높은 수준과 함께 외국어 문장들의 묘미가 한국어로 고스란히 살아나는 경지를 이른다. 1992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시작으로 50여권의 책을 옮긴 그는 인터넷 팬카페가 두 개나 있을 정도로 인기 번역가이다. 그 이유는 번역에 대한 철저한 직업정신 때문이다.

“한 작가가 이뤄놓은 금자탑에 내 이름을 함께 올리려면 그만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번역은 또 하나의 문학입니다.”

그의 작업과정은 독특하다. 먼저 원서를 읽은 뒤 거기에 나오는 장소를 답사하고 주인공의 행위와 감정을 체험한다. 가볼 곳, 만날 사람, 읽고 보고 들어야 할 책·영화·음악·그림의 목록을 만들어 모두 실행함으로써 작가가 창조한 세계를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야 컴퓨터를 열어 자신이 경험한 그 세계를 한국어로 재창조한다.

이렇게 찾아간 장소는 베르베르의 ‘개미’들이 살고 있는 파리 퐁텐블로 숲에서부터 카트린 클레망의 ‘인도의 사랑’의 배경이 된 인도, 투르니에의 ‘황금구슬’에서 사하라 사막을 떠난 소년이 마르세유에서 파리로 향하는 여정 등 끝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최근 2년 만에 번역을 끝낸 에코의 신작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2004년작)의 무대가 된 이탈리아 북부의 소읍 니차몬페라토(소설에서는 솔라라)라고 한다. 이 소설은 에코라는 한 작가를 구성한 온갖 요소를 재조합한 ‘기호학적 성장소설’이다.

“니차몬페라토는 에코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지요. 올해 초 그곳에서 몇 주를 보내면서 에코가 살던 집, 뛰어놀았던 공간, 산, 포도밭, 그리고 에코가 좋아했던 체실리아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가 이곳을 찾아갔을 때 관청 직원들은 에코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아버지, 삼촌, 할아버지들에게 전화를 걸어 취재를 도왔다고 한다. 이씨가 에코 최고의 작품, 그리고 자신이 번역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신비한 불꽃’은 평생 강단의 천재학자로 지냈던 에코가 만년에 베를르스코니 총리와 대립하면서 비판적 사회참여를 하게 된 뿌리인 어린 시절 레지스탕스 대원들과의 체험이 녹아있다.

이씨는 자신이 번역했던 작가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 번역”이다. 가장 각별한 베르베르는 천진난만하고 천재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 ‘프랑스 스릴러의 황제’라고 불리는 그랑제는 악을 형상화하고 악을 응징하는 냉철한 리얼리스트, 여성 작가인 가발다는 인생의 미세한 결을 포착하는 촉수를 가진 따뜻한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평가한다. 또 모든 작품을 읽은 뒤에야 인터뷰 요청을 할 만큼 존경했던 투르니에는 도저한 철학적 깊이로 자신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과감한 성애 묘사로 화제를 뿌린 카트린 밀레는 번역가를 칭찬과 비난 사이에서 번민하게 했던 작가다.

그러나 그중 최고로 꼽는 작가는 역시 움베르토 에코이다. 누구나 아는 에펠탑을 묘사하기 위해 에펠탑을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면서 며칠 밤을 세우는 에코는 “유럽의 지성사를 어깨에 짊어지고 뚜벅뚜벅 걸어가 자신의 목적지에 이르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씨는 현재 에코의 소설 5편(‘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신비한 불꽃’)의 현장을 답사하고 그의 문학세계를 다룬 책 ‘에코문학기행’을 준비하고 있다. 에코는 2010년 생애 마지막이 될 또 한 권의 소설을 내놓겠다고 했는데 그때는 작가와 상의하면서 번역을 하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번역은 생계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씨는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서울대 불어교육과 80학번인 그는 고교 불어교사를 했으나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된 후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번역을 즐기려고 돈은 다른 데서 벌었다. 프랑스 유학(96~98년) 시절만 빼고는 2003년까지 입시학원 강사이자 과학·국악프로그램 방송작가로 일했다. 불어·일어·영어·이탈리아어를 구사하는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과 함께 나이를 먹은 뒤에는 라틴어를 공부해 중세 서양고전을 번역할 계획이다.

‘프로’ 독자인 그에게 문학작품을 재미있게 읽는 법을 물었다.

“자기랑 가장 잘 맞는, 그러면서도 평생을 따라갈 만한 위대함을 지닌 작가를 찾아 인생의 동반자로 삼으십시오. 그와 함께 늙어가면서 그를 중심으로 문학과 우주를 재편하는 게 좋겠지요. 문학만큼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이세욱이 추천하는 책
■에코의 ‘푸코의 진자’(이윤기 옮김·열린책들)

어마어마한 야심을 갖고 서구의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 연금술, 신비주의를 관통하는 위대한 허구를 간파하고 통렬히 비판한 소설. 파시스트의 선전선동에 휘말리는 우리 정신구조의 취약함을 반성하게 만든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는 이 책의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에코의 ‘거의 같은 것을 말하기-번역의 경험’(Dire quasi la stessa cosa-Esperienze di traduzione)

번역가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번역이론서. 번역가이고 번역된 작가이고 번역이론가이고 기호학자인 에코만큼 번역이야기를 잘할 사람은 없다. 번역 현장에서 부딪치는 풍부한 사례는 소설만큼 생생하며 문학번역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 수 있다.
 


★“독자 억압보다 격려하는 책이 좋아” /유혜자

  책은 물리적으로 볼 때 종이에 잉크를 찍어놓은 것일 뿐이지요. 책의 가치는 독자가 저자와 감응할 때 만들어지는 무형의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를 억압하기보다는 격려하는 책을 좋아합니다.”

독일문학 번역가 유혜자씨(48)는 책에 대해 특별한 철학을 갖고 있다. 그는 “독서라는 힘든 과정에 대해 보상을 주는 책, 독자를 사회적 규범에서 풀어주고 자유롭게 해주는 책”의 힘을 믿는다. 그가 작업 초기에 성인물을 주로 번역하다가 청소년 및 아동문학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 이유도 그것이다. 지난 1986년 첫 번역서를 내놓은 이후 20년 넘게 200여종의 책을 번역해온 그는 98년 독일어권 에이전시 ‘창’을 설립해 1000여권의 책을 국내에 소개했는데 그가 수입을 중개한 책의 대부분이 청소년, 아동물이다.

“처음 번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책과 국내에서 통할만한 책이 일치하는 경우는 한 20%에 불과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 비율이 80%로 역전될 만큼 국내와 해외의 차이가 적어졌어요.”

그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를 내놓으면서 번역가로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다. 스위스 취리히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이후 현지 친구들이 보내주는 책을 하나둘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이 책의 경우 원고를 완성한 뒤 출판사를 찾던 중 이미 판권을 계약한 열린책들과 연결됐다. 그후 ‘콘트라베이스’ ‘비둘기’ 등 쥐스킨트의 책을 몇 권 더 번역했다.

독일어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국내에서 간호전문대를 졸업하고 스위스로 건너갈 당시 독일어를 전혀 몰랐으나 어학연수를 시작하자마자 ‘폭포처럼’ 독일어가 밀려왔다. 석 달 만에 현지에서 간호사로 취업했고 여섯 달 만에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 “내게는 한국어가 단지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였다면 독일어는 모든 감정을 미학적, 분석적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였다”고 소감을 털어놓는다. 처음에는 독문학을 전공할 계획이었으나 “문학은 나를 위한 학문이니까 국가를 위해 경제학을 하자”고 결심하고 진로를 바꿨다. 그러나 결국 독일의 대중 텍스트를 한국 대중에게 전달하는 번역가란 형태로 문학에 복귀했다.

“초창기 번역한 작품 가운데는 ‘호프만의 허기’(레몬드 빈도)란 소설이 묻힌 게 제일 안타까워요. 유대인 외교관의 딸이 육체적 질병,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채 21세기 목전에서 좌절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었어요.”

‘유대인 이야기는 안된다’는 국내 출판계의 징크스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독일 문학과 한국 문학에 대해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마루에 문제가 생긴 것은 밟았을 때 찌걱대는 소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독일 문학이 이런 곳을 밟아주는 문학이라면 한국 문학은 이를 꺼리는 문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과 게르만족의 증오의 역사는 독일 문학의 배경으로 깔려 있는 반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은 그 주제를 다루는 일부 소설에만 들어있다는 것이다.

유씨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또 다른 책은 국내 ‘1318문고’의 시작인 ‘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미리암 프레슬러)이다. 작가의 훌륭함만을 대변하기보다는 독자에게 ‘영양식’을 먹이고 싶다는 마음에서 청소년 대상의 책을 발굴했다. 이 책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독일출판사 측 제안에 따라 에이전시를 시작하게 됐다.

자신의 고향인 대전의 아파트에서 주부로서 남편과 남매를 뒷바라지하면서 번역과 에이전시 운영을 겸하는 그는 오전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꼭 필요한 집안일을 하는 4~5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일하는 ‘워크홀릭’이다. 그 덕분에 독일의 유수한 출판사인 외팅거·파트모스·벨츠 등에 대한 독점권을 갖고 있다. 청소년·아동물 전문가로서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은 전집 출판이다. “전집을 사는 건 독자로서, 소비자로서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유혜자가 추천하는 책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내가 생각하는 독자에 대한 존경심을 담고 있는 책이다. 작가는 자신이 얼마든지 할 수 있음에도 완제품을 만들지 않고, ‘당신은 충분히 할 수 있다’면서 독자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런 절제가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우며 독자로서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관습에 도전 실험작 천착 /정영문

“작가가 겸업하기에는 번역가가 아마 가장 좋은 직업일 겁니다.”

소설가 정영문씨(43)는 1990년대 중반부터 소설 쓰기와 번역을 시작해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끌어왔다. 첫 소설집 ‘겨우 존재하는 인간’(1997년)부터 최근 낸 소설집 ‘목신의 어떤 오후’까지 10권의 소설을 낸 그는 50여권의 번역서도 냈다. 존 파울즈의 ‘에보니 타워’,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어윈 쇼의 ‘젊은 사자들’, 아모스 오즈의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의 지적처럼 여러 작가들이 겸업을 했다. 제임스 조이스, 사무엘 베케트가 그랬고 김수영 시인도 번역을 생계로 삼았다. 최근 소설가 김연수·배수아씨도 종종 번역가로 이름을 올린다.

정씨는 소설가로서 독특한 입지를 갖고 있다. 서사 위주의 소설 관습에 도전하는 그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한 상상, 특유의 조롱과 냉소 등으로 개성을 뽐낸다. 대중성과 거리를 두면서도 새로운 문학을 꿈꾸는 문학도들에게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책을 팔 생각이 전혀 없는 그에게 번역은 창작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터전이다. 동시에 두 가지 작업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 그의 소설 작품은 굳이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고, 번역을 의식한 듯 문장의 잉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번역한 책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존 파울스의 ‘에보니 타워’에 실린 2~3개 단편을 꼽는다. 파울스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작가인데 “모호한 것들에 대해 미묘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문장들이 대단히 좋았고, 번역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요즘은 같은 작가의 ‘마구스’(‘마법사’라는 뜻)란 3권짜리 장편을 연말에 끝낼 요량으로 번역 중이다. 이성적이고 답답한 영국과 자연이 살아있고 삶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그리스를 대비시킨 이 소설은 단편만큼 훌륭하지는 않다고 한다.

요즘 그는 번역가로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출판사의 의뢰가 아니라 자신이 번역하고 싶은 소설가 50여명의 리스트를 만들어 먼저 제안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신의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다.

“다양한 소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영어권의 실험적인 현대작가를 살펴보고 있다”며 ‘미국의 송어낚시’로 유명한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 카프카의 전통을 잇는 여성 작가 에이미 헴펠 등을 예로 들었다. 그가 자주 보는 잡지 ‘뉴요커’나 미국의 유명한 실험작 출판사인 델키 아카이브의 소설비평잡지 ‘컨템포러리 픽션 리뷰’ 등에 소개된 작가의 원서를 구해서 보고 있다. 작가의 명망이나 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에 얽매이는 해외문학 소개 관행을 자신의 방식인 ‘비주류’와 ‘비인습’으로 바꿔보고 싶어서다. 관심을 보이는 출판사들이 좀 있어서 조만간 그들의 소설을 읽게 될 거라는 전언이다.

동시에 그는 원어민 번역가와 함께 자신의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다. 신간 ‘목신의 어떤 오후’에 수록된 단편 ‘브라운 부인’을 번역했는데 이 작품으로 번역지원 신청을 해보고, 안되더라도 해외의 문학잡지에 투고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직접 번역한 소감을 묻자 “논리적인 문장을 쓰는 편이어서 번역하기 쉽다”고 답한다.

“해외에 번역 소개되는 작품이 국내에서의 명망이나 평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외국 문단이나 독자들이 이해하고 좋아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단행본을 내는 것도 좋지만 ‘플레이보이’ ‘하퍼스’ ‘바자’ 등의 잡지에 상당한 수준의 소설이 실리고, 그걸 평론가나 편집자가 눈여겨보는 구조도 이해하고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정영문이 추천하는 책
■사무엘 베케트의 ‘몰로이’

처음 읽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늘, 단연,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 김현의 번역으로, 영어본으로 다섯 번쯤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혼자 웃게 만드는 책이 많지는 않았는데 이 책은 그렇다. 주인공 몰로이가 뭔가를 찾아 길을 떠나는 형식인데 나중에는 뭘 찾는지, 뭘 이야기하는지 모르게 된다. 줄거리와 기승전결이 있는 교과서적인 소설이 아닌 소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소설의 구성 원칙을 반문하고 조롱한다. 이 작품에 비하면 베케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상당히 미숙한 편이다.
  



★즐겁게 읽을 당신을 위해…그녀, 해리포터를 재미없게 읽었다 /최인자

  문학평론가 최인자 씨(42)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번역가로 유명해졌다. 그는 원서가 나올 때마다 출판사와 수많은 독자들의 성화를 받으면서 원서 한 권당 국내에서 네 권 분량으로 나오는 책을 석달 안에 번역해내는 ‘초능력’을 발휘해왔다.

“긴장, 초긴장의 연속이지요. 보통 책 한 권을 번역하는 데 최소 한 달은 걸리는데 ‘해리 포터’는 두 배의 속도로 번역을 해야 했으니까요. 거기다가 독자들의 관심은 또 어떻고요.”

그가 ‘해리 포터’ 시리즈를 맡은 것은 2000년 나온 4권(번역서 2권)을 1~3권의 번역자인 김혜원씨와 공동 작업하면서부터였다. 이후 5권부터 7권까지는 혼자 번역을 했다. “4권을 번역하기 위해 1~3권을 읽을 때는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있나’ 하고 생각했는데 4권부터는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시간을 다투는 작업이었던 데다 시리즈의 특성상 앞에서 잠깐 나왔던 인물이나 장소, 물건의 이름을 통일하기 위해 일일이 찾아보는 수고를 해야 했다. 롤링의 영어 역시 쉬운 듯하지만 말장난이 많아 번역이 까다로웠다.

“지난해 완결편인 7권을 번역하면서 이 작품을 아주 좋아하게 됐어요. ‘해리 포터’는 그저 아이들이 좋아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영생에 대한 갈구라든가 오이디푸스 신화처럼 서구문화의 다양하고 심오한 상징들이 녹아있는 소설입니다.”

최씨는 스나이프가 죽을 때 작업실에 앉아서 엉엉 울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연세대 영문과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인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하일지론이 당선돼 평론가로 등단했다. 미국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공부했던 그는 시평과 해설을 주로 발표했다. 번역가로 일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신춘문예 시상식에 참석한 김종해 문학세계 사장이 기획위원이란 직함을 덜컥 안겼고, 그래서 토니 모리슨의 ‘재즈’란 작품을 추천했는데 마땅한 번역가가 없어 직접 나섰다. 운 좋게도 바로 다음해인 93년에 모리슨이 노벨문학상을 탔다. 그후 V.S.네이폴의 ‘세계 속의 길’, 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사의 비망록’ 등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소설을 비롯,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페라의 유령’ 등 고전을 잇따라 번역했다.

“나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지 번역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돌아보니 번역한 책이 100권은 되더라고요. 이제는 번역가라고 해야겠지요.”

최근 작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진 소설 ‘지혜의 일곱기둥’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 작품을 놓고 아랍의 역사를 자신이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하는 서구 지식인의 위선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맹비난했으나, 최씨는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소설”이라고 평가했다. 영국편을 들어 터키와 싸우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아랍인들을 선동하는 주인공이자 작가 로렌스가 스스로의 행동을 관조하고 반성하는 복합적 사고를 하는데 이것이 매우 뛰어나게 문학적으로 승화돼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가 번역한 앨빈 커넌의 ‘문학의 죽음’ 역시 90년대 이후 문단을 강타한 문학의 위기 담론과 관련, 매우 자주 인용되는 책이다. 최씨는 문학 독자층 확보를 위해 최근 시도되는 뉴웨이브 문학 혹은 중간문학과 관련해 계간 ‘문학의 문학’ 여름호에 오랜만에 평론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장르문학들이 벌써부터 문단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으며 기존 문학계에 순응할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도발하고 더 격렬하게 폭발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여기에는 상상력뿐 아니라 작은 플롯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학성이 높으면 안 팔린다고 쉬운 소설을 지향하는 건 문제가 있지요. 영문과 학생들도 안 읽는다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보더라도 1922년 처음 출간된 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여전히 팔리고 있다는 게 엄청난 대중성의 입증이잖아요. 어설프게 순수문학과 장르 문학을 합치는 시도가 두 마리 닭의 배를 모두 가르는 억울한 시도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최인자가 추천하는 책
■카자르의 사전(밀로라드 파비치 지음·신현철 옮김·중앙M&B)

슬로바키아의 시인이 쓴 역사소설. 내가 읽었던 가장 신비롭고도 역동적이며 특이한 책이다. 놀랄 만큼 훌륭하다. 카자르란 민족이 어떻게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인데 어느 종교로 개종한 뒤 정체성을 잃어버려 멸망했다는 가정을 해놓고 그 과정을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로 나눠 노란책, 초록책, 빨간책으로 써내려갔다. 각 장은 사전식으로 집필돼 있어 전체를 퍼즐 맞추기 하듯이 읽어야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성판, 여성판이 있고 두 가지 책은 단 두 문장만이 다르지만 여성판은 한없는 우주를 한바퀴 돌아 깨달음에 도달하는 경지라면 남성판은 이를 놓친 채 아무 깨달음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판됐다.
  

   

 

* 카자르의 사전은 난해하여 처음엔 읽다가 접어두었던 책이다. 하지만 그 다음 읽고 또 다시 읽었을 때의 느낌은 아주 독특하고 놀라운 인상을 받았었다. 지금도 가끔 인용하는 내가 아끼는 책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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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꼽는 국내작가 중 한 사람인 김연수의 <케이 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 관련된 글이라 옮겨 놓는다.  


〔한겨레〕김윤식의 문학산책

 
소통의 문제의식-작가 김연수 씨의 경우  


국보 1호 남대문을 가진 600년 고도 서울.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쓰러져가는 것들로 가득 찬 좌충우돌하는 이 도시”(<론리 플래닛>)에서 세계 작가 대회가 열렸소. 여기에 참석한 미국 여류작가가 있었소. 그녀의 바람은 따로 있었소. 13년 전에 죽은 한국인 남자의 고향 찾아보기가 그것. 그런데 딱한 것은 그곳의 이름이 Bamme였다는 것. 오직 이 소리로만 기억되었던 것. 지도에도 없는 이 지명을 찾기란 얼마나 난감했을까. 누군가 있어 Bamme란 밤[栗]이 있는 산(山)이니까 ‘율산’을 찾아보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 소리란 의미를 언제나 초월하고 있었으니까. 소통의 첫 번째 난점이 이러했소.

이것은 이 나라의 가장 날랜 작가 중의 한 사람인 김 씨의 가작 <케이 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2008)의 한 장면이오.

대체 소통하기란 무엇인가. 작가 김 씨의 글쓰기의 요점이 이에서 오고 있소. 모든 글쓰기란 ‘밤메’를 모국어로 하는 글쓰기가 아닐 수 없다는 것. 여기에 닿고자 함을 두고 세상은 번역이라 하오. 한국 작품을 영역하기도 그러한 사례. 이대한 영문과 출신 작가 김 씨의 견해는 어떠할까요.

무엇보다 김 씨는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에 주목했소. 영어가 사실적 표현에 기울어져 있다면 한국어는 좀 추상적이라는 것. 한국어는 감정 표현에 능하며, 따라서 산문 정신(소설)에는 부적절하다는 것. 그러기에 한국 소설이 제대로 번역되기만 하면 외국에서도 그 값어치를 알아줄 것이라는 주장에 회의적일 수밖에. 만일 한국 소설이 제대로 영역되려면 영어에 능통한 한국 작가와 영역자의 공동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한국어는 과연 산문 문장에 적합한 언어일까’, 2009). 실제로 이런 일이 가능할까. 김 씨도 동의하듯, 거의 절망적이겠지요. 소통의 두 번째 난점이 이 부근에 있소.

여기까지 오면 이렇게 물을 수밖에요. 작가 김 씨의 소설 쓰기란 새삼 무엇인가가 그것. 다음 세 가지 글쓰기에 대한 거리재기가 아닐 것인가. ① 아주 구체적인 글쓰기(영어 쪽의 소설들), ② 약간 구체적인 글쓰기(한국어 쪽의 소설들), ③ 줄거리뿐인 글쓰기. 이 중 ③은 소설일 수 없으니까 제쳐 둔다면 ①과 ② 사이를 오르내리기가 아닐 수 없소.

그런데 ①에 접근해 가면 한국의 독자들은 어떠할까. 성가셔 하거나 아주 도망칠지도 모르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랴. 그런데 ②에 머물러야 한국 독자에 맞을 텐데, 이 경우 딱한 것은 작품의 구체성이 모자란다는 것이오. 한국인에 제일 잘 읽히는 역작도 영어로 번역하면 저절로 함량미달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 얼마나 섬뜩한 일이랴. 소통의 세 번째 난점이 이 부근에 있소.

남은 문제는, 그러니까 제일 핵심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언어란 진화하는 것인가에 관련될 수밖에. 영어가 한국어보다 혹은 다른 언어보다 진화한 것인가의 여부가 그것. 감성적인 것(신체성)에서 출발하여 세계로, 사물로, 구체성으로 나아가는 것인가의 여부가 그것. 혹은 언어란 저마다 특징이 있어 등가일 뿐인가의 여부가 그것.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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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고민해 오던 문제, 어떻게 쓸 것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가 문제라는 프랜신 프로즈의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가 내 눈길을 잡는다. 그래서 우선 스크랩부터 하기로 한다.

한겨레(09. 09. 26) 명작이 가르치는 '창작의 비법' 

펜클럽 미국 지부장을 맡고 있는 소설가 프랜신 프로즈의 책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소설 창작을 가르쳐 온 그는 “창작 수업은 도움이 된다”면서도 “그러나 비록 그 수업이 큰 도움이 되었기는 해도 내가 글쓰기를 배운 것은 그곳이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그곳은 어디?    

 

소설 창작 수업이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 아니 창작 수업을 이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수업이 학생들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그에게는 큰 딜레마에 해당한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을 소설가들이 어떻게 배우는가’ 하는 것은 작가이자 소설 창작 지도자로서 그가 답해야 할 절체절명의 질문이다. 그 질문의 답은 무엇?

“작가들은 오비디우스에게서 운율을, 호메로스에게서 플롯 구성을,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 희극을 배웠고, 몽테뉴와 새뮤얼 존슨의 명료한 문장을 흡수하며 문체를 가다듬었다.”  
 
‘창작 수업이 아니라 거장들의 작품에서 배우라’는 것이 그의 답이다.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소설 쓰기의 기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뛰어난 소설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안내하는 길라잡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너무 싱거운 조언이 아니냐고?

아니, 사실 우리는 좋은 소설을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판단이다. 그는 플로베르와 카프카, 제인 오스틴과 버지니아 울프, 체호프와 헤밍웨이 같은 서양의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잘 씌어진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문학 창작 수업의 합평회에서처럼 습작 원고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부정적인 방식이 아니라, 잘된 작품의 좋은 점으로부터 배우자는 긍정적인 방식인 셈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밤은 부드러워>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공손한 야자수”라는 표현은 형용사와 그 대상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창조적인 효과를 낳는다. 존 르 카레의 소설 <완벽한 스파이>의 도입부에서 주인공 매그너스 핌은 택시에서 내린 뒤 길에서 시간을 보낸 다음 어느 하숙집의 초인종을 누르는데, 그 소리를 듣고 나온 노파가 이렇게 말한다. “오, 캔터베리 씨, 오셨군요.” 이 대사 한 줄은 매그너스 핌이 그곳에 온 적이 있는데다가 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곤충으로 바뀌는 상황이 비현실적이라고 의심하던 독자들은 잠자의 방에 걸린, 잡지에서 오려낸 여자의 그림이라는 개연성 있는 세목 덕분에 그것이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변신>의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세부 묘사의 중요성이다. “위대한 소설가들은 작지만 의미 있는 세부 묘사로 작품을 구축한다.”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작가 체호프는 “예를 들어 환한 달밤을 효과적으로 묘사하려면 물레방아가 있는 강둑에서 깨진 병에 반사되어 작은 별 모양으로 반짝이는 빛(…)을 묘사하면 될 것”이라고 한 편지에서 쓴 바 있다.   

 

설명보다는 세부 묘사가 중요하다는 지침은 소설 쓰기 강좌나 작법 책에 단골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 프로즈는 ‘상식’으로 굳어져 있는 지침들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서술이 묘사보다 훨씬 효과적인 경우가 많”으며 △하나의 시점을 정하고 그것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의 모든 행동에 분명한 동기와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이란 규칙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규칙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살아 있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죽은 규칙에 매달리지 말고 살아 있는 소설을 읽으라는 것이 지은이의 조언이다. “글을 쓰고 싶다면 책을 읽는 것이, 특히 작가처럼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마지막 문장에서 ‘작가처럼 읽기’(Reading Like a Writer)라는 원제가 나왔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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