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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저혼자 아름답고 - 감성 충전 캘리그라피 라이팅북
이호준.이화선 지음 / 북에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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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 아름다운 글과 감성, 저혼자 아름다운 사랑이 내게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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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참 편리하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라도 상관없고 무릎 나온 추리닝 차림이라도 괜찮다.

햇볕이 부담스럽다면 모자 하나 눌러 쓰면 그뿐.

 

작정 없이 들길을 걸었다.

때로는 아카시아가 흘리는 향기에 젖어서, 때로는 목덜미가 뜨거워질 때까지 그늘 없는 흙길을 터벅터벅, 또 때로는 열기에 피어오르는 외양간 거름냄새에 코를 막다가도 싱그런 바람이 코끝에 스치면 '보리밭 사잇길로……' 콧노래 흘리며, 

멀리 보이는 길을 가늠하며 숲길을 걷다가 더는 갈 수 없는 길임을 알고서야 가던 길 되돌아오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지금 걷는 이 행위가 인생과 꼭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 인생이 뭐, 별건가. 죄다 해석하기 나름인 것을.

 

멀리서 바라본 풍경은 한가롭다 못해 나른하기까지 하다.

그 삶을 들여다보면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힘들고 고달플 수도 있겠으나

사람살이란 기껏해야 한 치의 차이일 뿐이라 여기면

다소 불만족스럽다 해도 적응하는 데 큰 지장은 없을 터이다.

 

지금은 비록 흐린 물에서 먹이를 찾아야 하는 외로운 날개 짓이 서럽다 해도……

 

새파란 앵두 알, 머지않아 구슬처럼 붉어지면, 그땐

아름드리 정자나무 짙푸른 그늘 아래 정든이들 불러모아 잔치라도 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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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대관령에서

어제는 안목 바다에서,

오늘은 경포 바다와 호수에서...

침묵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고독했다. 눈이라도 쏟아지길 바랐지만,

파랗게 멍이 든 바다도 하늘도 시리기만 했다.

눈물이 나도록 아팠다.

새들은 깃을 모으고 바람이 오는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바람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겨울밤을 건너는지 알 도리도 없었거니와

나 또한 어디로 가야할 지 알지 못했다.

끝내, 나는 겨울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고

침묵의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기엔 얼음장처럼 깨지는 심장소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

길바닥에 금빛을 토해놓고 막 산을 넘는 저녁 해가

피처럼 붉었다.

수도 없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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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월이다.  일월이 꽝꽝 얼었다. 

꽝꽝 언 길을 미끄러지지도 않고 날은 벌써 열 발짝이나 성큼 걸어갔다. 

 

일월의 첫날, 나는 동해바다에 있었다.

부서지는 파도가 섬처럼 밀려왔다. 뒤집힌 파도를 향해 광기에 휩싸여 내리꽂히던 갈매기들처럼 내 마음도 갈피를 풀어헤치고 달아났다. 갈퀴를 흩날리고 발굽소리 천둥처럼 울리며 달려오던 파도에, 바다는 속수무책 허공에 부서져 흩어졌다. 그리고 나도…

부서져 허공에 흩어지는 바다 속으로, 비늘을 쏟아내는 칼바람 속으로, 하늘과 땅, 바다의 경계를 지워버린 잿빛 구름 속으로, 눈보라의 난무 속으로……

달아난 마음을 두고 빈껍데기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길은 멀어도 상관없었다. 세 시간 가까이 대관령에 갇혀있는 동안 세상의 풍경을 모두 지워버리며, 마치 거위 털 가득 든 하늘만한 자루가 터지기라도 한듯 쏟아지던 눈보라에, 또 그 속에서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섰다가 아닌 듯 얼른 눈옷을 두르던 자작나무들에 넋마저 빼앗겨버렸으니까.

덕분에 나는 돌아와 며칠을 열병을 앓아야 했다. 은유가 아니라 진짜 열에 들떠 몸살을 앓았다. 달아났다 지친 마음이 돌아올 때까지……

춥다. 춥다는 표현마저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처럼 눈발이 날리고 있다. 또, 한, 밤을 불면으로 지새울 가로등 주위로 눈발이 뱅뱅 돈다. 그러다 웅크리고 엎드려 잠든 자동차들 위에 침묵으로 내려앉는 밤이다. 독주라도 마시고 흠뻑 취하고 싶다. 그거 말고는 목구멍을, 위장을, 뇌를, 심장을 뜨겁게 해 줄 게 아무것도 없지 싶다. 오늘 같은 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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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 줄을 이해하기 위해 두텁고 지루한 책을 다 읽어야 할 때도 있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단 한 문장이라도 내 의식을 건드리는 무엇이 있다면 그 책의 존재가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책이라도 그만의 존재의미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책들의 운명도 여느 존재의 운명과 마찬가지다. 몇 세기를 걸쳐 주목을 받으며 장수하는 책들이 있는가하면, 사는 동안 온갖 고난을 당한 책들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죽어버린 책들도 있으며, 반짝 빛을 내며 타버린 책들도 있다. 하지만 누가 알까. 태어나자마자 소멸해버린 그 책 속에 평생을 찾아 헤매도 찾지 못한 보물이 들어있었을지……  

 

해마다 되풀이 되는 연말의 감정에 휘둘리며 방황하다 기어이 딛고 선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유난히 춥고 아프다. 겨울은 아직 초입인데, 이 남루하고 헐벗은 마음에 따뜻이 지펴줄 불씨는 어디에 있는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보통 책들은 유성과 같다. 각각의 책들에는 단 한순간, 마치 불사조처럼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르는 단 한순간, 모든 책장이 불타오르는 한순간이 있다. 그 한순간을 위하여, 비록 곧 재로 변할지라도, 우리는 책들을 그 후로도 영원토록 사랑하는 것이다. 씁쓸한 체념을 느끼며 우리는 가끔 깊은 밤에 나무로 된 묵주의 구슬처럼 그 돌같이 죽어버린 메시지를 전하는 멸종된 책장 사이를 방황한다.”

오늘도 이렇게 부르노 슐츠의 말에서 '책'을 '사람'으로 바꿔 되뇌며 행간 사이의 미로를 헤매고 있다. 표현 너머의 표현을, 말해지지 않은 말을, 침묵에 감춰진 의미를 엿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침묵의 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 후에야 ‘바벨’은 침묵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깨달았다. 음악을 들을 때 그는 더 이상 음표를 듣지 않고 그 사이의 침묵을 들었다. 책을 읽을 때 오로지 쉼표와 세미콜론, 마침표와 뒷문장의 대문자 사이의 여백에 집중했다. 방 안에서 침묵이 모이는 곳도 발견했다. 커튼 주름이 접힌 곳, 움푹 파인 은식기. 사람들이 그에게 말할 때 그는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을 들었다. 어떤 침묵의 경우는 그 의미를 해독하게 되었다. 단서는 없고 직관만 있는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는 것과 비슷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선택된 직업에서 다작을 하지 않았다고 아무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침묵의 완전한 서사시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당신의 아이가 하느님이 존재하느냐고 묻거나 사랑하는 여인이 당신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침묵을 지키기란 어려웠다. 처음에 바벨은 ‘예’와 ‘아니오’라는 두 단어만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단어만 말하더라도 침묵에 담긴 그 미묘한 유창함을 잃어버리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그를 체포하고 빈 여백뿐인 그의 원고를 모조리 불태운 후에도 그는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이 머리를 한 대 치거나 군홧발로 사타구니를 걷어차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마침내 총살대가 눈앞에 다가오자 작가 바벨은 자신이 실수했을 가능성을 감지했다. 총들이 그의 가슴을 겨냥할 때 침묵의 풍요로움이 실은 말하지 않은 빈곤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침묵이 무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총에서 총탄이 터져 나올 때 그의 몸은 온통 진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의 일부는 통렬히 웃었다. 늘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침묵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 중에서>  

 

가슴이 서늘하다. 어떤 식으로도 말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침묵. 그 침묵의 소리를 들어야겠다. 이 겨울 동안은. 깊은 산속에라도 들어 눈 덮인 산을 건너온 바람이 전하는 소리를 이해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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