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문학은, 도저히 열 수 없는 ‘납 상자’일지도 모르나 끝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달콤하고 고통스런 유혹이다. 꿈의 선물상자이다. 또한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내게 문학은 그와 같다. 물론, 아직까지 ‘아무리 먹어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우습게도 그래서 아직은 그만큼의 희망이 남아있다 여기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실비 제르맹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말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공간 속으로 끝없이 탐험해 들어가는 일이다. 글을 뚫고 이미지를 심는 것,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는 어떤 일을 추구해 나가는 것, 앞으로 나아가지만 지평선을 향해 걸어갈 때처럼 항상 미완성 상태일 뿐이라서 가면 갈수록 지평선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그리고 샘 새비지의 「소설 쓰는 쥐 퍼민」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늘 이렇게 상상해왔었다. 만일 내가 그 이야기를 쓸 때가 온다면…’ 이어서 또, ‘만일 그때가 온다면!’(은) 가망이 없다는 것. 지워 없애자.
이 얼마나 뼈에 와 닿는 말인지!
가망이 ‘있다’와 ‘없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만일 그때가 온다면…' 이라는 희망에 붙들려 있는 것이 얼마나 슬픈 고통인지 겪어본 사람만이 알 터이다.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검증되지 못하는 투쟁만큼 고독한 싸움은 없다.
소설의 주인공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어제는 까마득히 멀어지고, 내일은 순식간에 다가와 있다. 내 일상에서의 시간과 공간 개념은 완전히 삭제되고 그들의 삶과 인생을 함께 살게 되는 까닭이다. 그들과 함께 숨 쉬고, 함께 마음 졸이고,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울고 웃으며… 또 한편으로는 작가들의 재능과 창작세계를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그러면서 희망을 품고, 호기롭게 몇 문장을 써보다가 지독하게 형편없음에 금세 좌절하고… ‘작가의 DNA’는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환경의 영향인가, 라는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이유를 찾아 헤매면서… 그러기를 수없이 되풀이한다.
한마디로 고통이다.
오, 그 지독한 고통이라니! 복통이 요동치는 창자들을 훑고 지나가는 동안 몸속으로 파고들어 쥐어틀며 점점 더 세차지는 그 긴 경련. 지금도 나는 그 거듭된 고통이 내게서 종이 씹는 버릇을 영영 버리게 하지 못한 것이 놀라울 뿐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나는 고통이 자나가기만을 기다렸다가 다시 씹기 시작했고, 때로는 그만큼도 기다릴 수 없었다. -<소설 쓰는 쥐 퍼민 중에서>
이보다 더 지독한 짝사랑은 없다. 정확한 실체를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슬픈 사랑이다. 혼자 상상하고 혼자 기뻐하고 혼자 아파하고, 또 괴로워하면서도 결코 단념할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이 나의 문학이다.
퍼민은 ‘책들의 멋진 한 가지 맛은, 커피 냄새가 나는 맛이다!’라고 했다. 근사한 표현다.
그러한 책들의 향기 속에서 오늘도 나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