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마라의 죽음을 표지그림으로 한 1996년 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나에게 첫사랑과 같은 책이다. 1996년 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 책을 다섯 번 이상 읽었다. 처음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할 당시 나는 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정해진 규율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던 나였기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목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매번 읽을때마다 새로운 구절, 새로운 감동으로 밀려왔으며, 지금까지도 나에게 첫사랑의 기억과 같은 책으로 남아있다. 그랬기에 그후 김영하의 신간이 나오면 매번 놓치지 않고 찾아 읽게 되었다. <호출>이 그랬고,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오빠가 돌아왔다>, <랄랄라 하우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영하의 책에서 아무런 재미도 느끼지 못하게 된 <퀴즈쇼>까지.
그후로 나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만큼의 감동을 김영하의 다른 책에서는 느끼지지 못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김영하의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기를 멈추지는 않는다. 단지 그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작가이기 때문에.
오랫만에 출간하는 김영하의 산문집 <보다>를 발견하는 순간 다시 가슴이 뛰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 구매를 하고 기다린지 일주일만에 친필 사인본을 받았다. 직접 사인했을 것이 분명한 친필 사인본임에도 나는 받아들자마자 바로 실망하고 만 <보다>.
일단 책이 너무 가벼웠다. 책이라는 물체로서의 무게도 가벼웠지만, 그냥 휘리릭 넘겨본 책에 대한 첫느낌이 그랬다. 책에 영혼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선물꾸러미와 함께 돌아온 김영하의 산문집은 그렇게 가볍게 휘리릭 넘기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휘리릭 넘겨읽어야만 하는 그런 정도의 책이다.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는 소설가는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메세지를 전하면 그뿐인 것인 줄 알았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변했고, 제대로 된 메세지를 송출하기 위해 이제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 탐침을 깊숙히 찔러 넣으려 한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에서 그의 그런 다짐을 전혀 발견할 수 없어 나는 실망했다. 그는 여전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쓸 무렵의 불손한 아웃사이더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때는 그의 그런 파괴적인 본능이 나에게 썩 매력적이였지만, 그래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지금도 여전히 첫사랑과 같은 책으로 남겨두고있지만, 그러나 지금의 그는 그때의 그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작가는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나 송출하는 방관자 아니라, 오히려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광경에 대한 목격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김영하는 전혀 우리 사회 깊숙히 발을 담그고 있지 않다. 그 스스로 그 자신은 무엇에도 크게 분노하지 않는 유순한 인간이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점에서 언제라도 그가 담근 발을 쑥 뽑아 버릴 것만 같은 불안정을 나는 <보다>를 통해 느낀다. 또한 그것이 김영하라는 작가에게 내가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이십대에 만났던 관상쟁이가 그에게 말과 글로 먹고 살 대운이라고 했다는데, 좀 솔직해보자. 먹고살 문제를 고민하기에 그는 이미 너무 유명해져버렸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그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시절의 김영하를 넘어서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가. 좀더 심하게는, 먹고살 걱정이 없는데 이렇게 피상적인 글로 김영하 라는 이름을 팔아먹다니! 라고 비약하고 싶어진다.
<보다>는 <읽다>와 <말하다>로 곧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읽다>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쓴 작가가 읽은 독서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약간 끌린다는 것 외에, 이어질 두권에 대해 별다른 기대는 없다. <보다>의 다른편일 뿐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