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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당시 해인사 방장 스님으로 머물던 경허는 한 겨울에 길에 쓰러져있는 여인을 업어다가 기사회생 시킨 후 열흘 가량을 한 방에 머물렀다. 이를 본 경허의 제자 만공은 경허가 방에 여인을 숨겨두고 함께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해인사 경내로 퍼져나갈까봐 전전긍긍하다가 여인을 그만 돌려보낼 것을 스승에게 종용한다. 이때 만공이 본 여인은 얼굴이 코와 눈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뭉개지고, 정신도 온전치 못한 한센병 환자였다. 작가 최인호는 경허 스님의 이야기로 첫장을 시작하며, '너는 그러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온 몸에서 썩는 냄새를 풍기며, 정신마저도 온전치 못한 거렁뱅이 여인을 업어다가 체온으로 몸을 녹여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질해주며 함께 밥을 나눠먹고, 고름이 흘러내리는 몸에 살을 맞대고 한 방에서 머물수 있겠는가. 너는 그러할 수 있겠는가.
이 첫 일화를 읽은 나는 좀 황당했다. 길에서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살려준 것 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정신과 몸이 모두 온전치 못한 여자와 굳이 열흘씩이나 한 방에서 머물 이유가 무엇인가. 더군다나 안팍으로 존경받는 큰 스님의 신분으로.
불교도도 아니고, 불교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읽기에는 좀 당황스러운 이러한 일화는 경허뿐만 아니라 그의 수법제자라는 수월, 혜월, 만공 스님의 일화에서도 종종 소개된다. 기괴스럽게까지 여겨지는 스님들의 행적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냥그냥 책을 읽어나가는 중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는, 그 모든 것이 허울이라는 것이다.
겉모습에 혹은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현상에만 미혹된 나는 경허라는 중이 정신과 몸이 온전치 못한 여자와 열흘을 한 방에서 지냈다는 사실에 걸려 그 의미를 읽지 못한 것이다. 큰 스님이라는 사람이 술과 고기를 즐기다가 말년에는 승려로서의 직분마저 팽개쳐 버리고 저잣거리의 중생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에 취해 정작 경허가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무애인無碍人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경허를 거치고 수월, 혜월을 지나 만공의 일화에 등장하는 화두 '고목선枯木禪'에 이르자, 경허가 품에 안았던 것은 문둥병에 걸린 미친여자가 아니라 불쌍한 영혼을 담고있는 한 중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고목선에 담긴 일화는 이러하다. 한 노파가 조그만 암자 토굴에 공부하는 스님을 모셨는데, 수행을 시작한지 20년이 지난 후 스님의 깨닫음의 정도를 가늠하고자 절세의 미인인 자신의 딸에게 스님을 유혹하게 한다. 그러나 스님은 대수롭지않게 여인을 거절하는데, 이를 들은 노파는 대노하여 스님을 쫓아내고 토굴에 불을 질렀다 한다. 이유인즉, 스님이 수행은 철저히 했으면서도 존엄한 인격체로서 사람을 대할 자비심은 익히지 못했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여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것과 여인에게 빠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파는 20년 동안 자신이 부처가 되기를 소원한 선객이 비록 도는 이루었지만 그 도가 메마른 고목처럼 인정없고, 낱낱이 규율이나 따지고 율법이나 헤아리는 죽어 있는 도임을 깨닫고 암자를 태워버린 것이었다.(264쪽)'
가톨릭 신자인 작가 최인호는 경허 스님을 통해 '내 안의 부처'를 강조하는 불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의미는 율법이 아닌 사랑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편 경허는 조선 말기 국운이 스러져 갈 무렵의 선사로, 꺼져가는 불법의 불씨를 살려낸 우리나라 근대 불교의 선구자다. 그러나 그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율법과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부터도 자유로운 선각자였다.
스스로의 마음의 거름망만 걷어낼 수 있다면 수행의 반은 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