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누군가 물었다. '행복'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눈을 감고 행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푸른 하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푸른물이 뚝뚝 떨어지는... 비상식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푸른 하늘...  

오늘 하늘도 그렇다. 푸르러서, 너무나 푸르러서 약간은 슬프기도 한,  

거기에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작성하는 이 만족감이라니..  

행복하다.  

 

 

 

 

10월에 읽고 싶은 책 목록 중 가장 기대되는 책으로,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꼽는다. 소설 <동물농장>, <1984>와 스페인 내전을 다룬 <카탈로냐 찬가>, 파리와 런던에서의 노숙자 생활을 기록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인상깊게 읽었다.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오웰의 세세한 삶을 읽고 싶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으로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가 있다. 남이 내게 해주길 바라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김두식 교수의 인권 강의가 귓전에 아직 쟁쟁해서 그런지 <집은 인권이다>라고 외치는 듯한 책 제목에게 강하게 끌렸다. 재주가 없어 남들 다 하는 집불리기도 못하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는 책이지 싶다. 집은 재산이 아니라, 인권이다! 

 

 

  

 

 

신문의 오늘의 신간안내에서 만난 책, 세계화의 그늘 속 생활에 잠입한 암행기자 취재기라니 더더욱 기대된다. 인간의 양면성은 흔히 '인간이니까'라는 한마디에 덮이곤 한다. 귄터 발라프에 의해 까발려지는 인간의 이중성은 곧 내 모습이기도 해 불편하겠지만, 알아야 부끄러움이라도 느끼겠기에 이 책이 읽고싶다. 

 

 

배추 대란, 거기다 중국배추를 수입해 서민 밥상에 김치를 올려주겠다는 정책이라니, 한마디로 입이 쩍쩍 벌어진다. 어제 점심시간, 가정식 백반집 반찬에는 배추김치가 쏘옥 빠져있었다. 그리고 같이 밥을 먹으러 간 동료들은 중국배추에 대해 다들 한마디씩 보탰다. 결론은 알고 먹으면 병이니 그냥 대충 모르는척 먹고 넘어가자고.... 알고나면 정말 먹을 것이 없는 세상이다. 이것도 먹지마라, 저것도 먹지마라, 공포를 주기보다 먹어야 할 것들에 대한 긍정적 정보를 주는 책이라기에 골랐다. 아이들을 교육할때도 하지말아야 할 것보다는 해야할 것을 강조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모두가 다 아는 고전이지만, 모두가 다 읽은 고전은 아니다. 나만해도 이 책에 등장한 고전들을 손꼽아보지만 손가락이 채 다섯개가 접히질 않는다. 모두가 다 안다해도 나는 모르기에 크리스토퍼 베하의 눈을 통해 겉이라도 핥아보려는 욕심으로 이 책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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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배추 대란 때문에 사회가 시끄러운 것을 보면 저도 무언가 씁쓸한 생각이 들더군요.
음식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비의딸님이 소개한 <살림의 밥상>을 읽으면
살아가면서 혹은 미래의 아이들에게 먹거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거 같네요^^ 좋은 신간도서 페이퍼 잘 봤습니다^^ㅋ

비의딸 2010-10-06 08:52   좋아요 0 | URL
cyrus님 댓글을 읽다보니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
 
<더 커피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더 커피 북 - 커피 한 잔에 담긴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니나 루팅거.그레고리 디컴 지음, 이재경 옮김 / 사랑플러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아빠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당신이 암이라는 걸 아시고, 또 생이 얼마 남지 않은걸 아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커피 끊어라...." 그랬다. 아빠는 커피광, 맥주광이셨다. 당신이 위암이라는 병을 얻고보니 광적으로 좋아했던 커피와 맥주를 후회하시는 것 같았다. 당신의 커피에 대한 집착을 딸인 내가 물려받은 것이 걱정이신지 아빠는 마치 유언처럼 내게 커피를 끊으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나 나는 아빠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신건 커피 탓이 아니라고 지금까지도 믿고 있다. 커피가 무슨 죄가 있으랴. 있다면 맥주... 라고 나는 혼자 굳건히 믿고있는 것이다. 그만큼 나역시 커피광이다. 하루에 대여섯잔을 마셔도 잠잘꺼 다 잘 만큼 카페인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 

아침마다 별다방에 들러 텀블러를 내밀며 카레멜 마끼야또를 주문한다. 일회용 컵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환경을 보호하는데 크게 한 몫하는 것 같아 무척이나 뿌듯한 순간이다. 그러나 뿌뜻한 한 편으로는 몇 집 건너있는 영세 커피 하우스가 아닌 자본주의의 상징 별다방 커피를 포기 못하는 것이 켕기는 순간이기도 하다. 몇 번 저렴한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담아보기도 하지만 뭔지 부족한 커피 맛이 매번 나를 별다방 쪽으로 향하게 한다. 내 돈내고 커피를 마시면서도 꺼림직한 마음이 드는 것은 커피 한 잔 값이 점심값보다 비싼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형 브렌드의 중간상인을 통한 유통으로 커피 생산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알면서 행하지 못하는 죄이니 매번 커피를 받아들고 별다방을 나서는 내 뒤꼭지가 서늘하리만치 부끄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별다방을 포기 못한 것은 커피 맛에 중독된 탓일까, 자본주의에 중독된 탓일까.

이 책엔 표지글 그대로 커피에 담긴 거의 모든 것이 씌여있다. 커피에 얽힌 역사와 농장에서 수확되어 내 잔에 담기기까지의 유통과정, 커피 업체들 이야기, 불공정한 커피 무역 이야기, 그리고 별다방 이야기, 공정무역 커피 이야기.... 무척이나 일상적이고 무척이나 습관적인 커피를 마시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 또 돌아가신 우리 아빠처럼 커피가 건강을 헤친다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 그러나 커피가 건강에 그렇게 해롭지는 않은 음료라고 이 책에 씌여있다. 나는 아빠가 커피때문에 암을 얻었다고 믿지 않지만, 커피가 건강을 헤치지 않는다는 말 또한 믿지않는다. 무엇이 좋고 나쁘다는 것은 진실보다는 그로인해 득을 얻는 세력들에 의해 진실은 늘 뒤집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저, 나는 커피를 좋아할 뿐이고 마실 수 있는 동안은 즐기고 싶을 뿐이고.... 다만 한가지 이 책을 읽은 후, 이다지도 즐기는 커피가 내 잔에 담기기 까지의 불공정한 과정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뒷꼭지가 조금 서늘할 지언정 나와 직접 관계없는 일이니 모르는 척 하고 싶었던 내 마음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렇다고 늘 한결같은 커피맛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이제 뭔가 대안을 생각해 볼 때이다. 계절도, 내 주머니도,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때에 날마다 별다방에 들르는 대신 공정무역 커피의 티백이라도 준비해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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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의 거짓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9시의 거짓말 - 워렌 버핏의 눈으로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말하다
최경영 지음 / 시사IN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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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2월 엄기영 MBC 사장의 사임이 논란이 되고 있던 때, 김주하 아나운서는 트위터에  "저를 지키고 싶습니다. MBC를 지키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지키고 싶습니다."란 글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피할 수 없는 어떤 힘의 폭풍으로 부터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절박함이 배어있는 이 짧은 글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고, 그를 응원했다. 그가 어떤 인간성을 지니고, 어떤 신념으로,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언론인으로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나는 아는 것이 없으나 그가 추구했던 것은 ’매우 객관적인 진실’이었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킬 언론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언론이 매우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여기서 부터 문제는 출발한다. 언론의 비개관성을 누구나 다 알 것이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일부의 생각일 뿐이다. 많은 이들은 뉴스에 나오는 것은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대량 해고에 의한 가난한 실직자’가 아니라 ’빨갱이 노동자’로 인식되기는 매우 쉽다. 언론에서 주장하는 ’국익’이 부자와 권력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국가적 이익으로 변질되기는 너무도 쉽다. 본질을 흐리는 꼼수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쉽게 넘어간다. 대중이 그토록 믿는 뉴스에 나온 사실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왜곡된 언어를 통해 대중의 의식을 흐리고 개인적 이익은 몹시도 사악한 이기주의자의 욕심이라고 대중을 호도한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가. 

방송의 목적을 영리에 두지않고, 시청자로부터 징수하는 수신료를 주재원으로 하여 오직 공공의 복지를 위해서 행하는 방송을 공영방송이라 한다. KBS는 공영방송이다. 그러나 때때로 KBS는 정부가 운영하는 국영방송 같기도 하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영방송이라니 말이 될 법이나 한 이야기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공공의 복지와 공공의 이익은 일부 권력층의 이익과 권리를 대변하고 있는듯 하기 때문에 KBS가 국영방송 같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 최경영은 KBS가 국영이 아닌 공영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방송이 되길 소망하고 있다. KBS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일그러진 언론의 가치관에 대해 언론인으로서 솔직히 고해하고, 조직 순응주의 성향이 강한 회사원으로 전락한 언론인과 극히 일부의 이익을 대변할 뿐인 언론의 가치관을 지극히 자본주의적 인생을 살았지만 매우 원칙적인 워랜 버핏의 가치관과 비교하며 글을 풀어가고 있다. 

이 글은 저자의 분노와 답답함과 부끄러움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책의 첫장에는 ’인우와 지우에게’ 라고 씌여있다. 어디에도 인우와 지우가 저자의 아이들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나는 인우와 지우가 그의 아이들이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우와 지우가 살아갈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조금더 공정하고 조금더 민주적인 사회가 되길 열망하는 그의 마음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뿐더러 이 책이 자신의 아이들 이름을 걸고 써내려간 진실이며 고통이며 소망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언론인의 사명해 대해, 공공의 이익에 대해 고민하고 고발하며 고뇌하는 저자와 같은 언론인이 있는 한 공정한 대한민국은 요원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을 지키고, 사회를 지키고, 나아가 국가를 지킬 사명감을 몸소 느끼고 실천하는 언론인들이 많은 사회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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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꼬르뷔지에의 동방여행>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여행
르 코르뷔지에 지음, 최정수 옮김, 한명식 감수 / 안그라픽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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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파리지앵 다이어리>(조수정. 지상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조수정은 건축학도로 파리에서의 유학기간동안을 에세이로 적었다. 책의 뒷부분에 그녀가 석사논문 마감 열흘 전 롱샹을 찾는 이야기가 있다. 건축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들이라면 너무나 익숙하고 자신도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하는 동안 사진으로 백 번도 넘게 봤다는 롱샹 성당을 석사논문 마감 열흘전에 끝내지 못한 과제를 마무리하듯 찾은거다. 석사논문 열흘전이라면 언뜻 생각하기에도 한나절은 커녕 반나절의 시간조차도 허비할 수 없는 절박한 시기인데 하루를 꼬박 투자하고 일부러 찾아보아야 할 만큼의 무엇이 롱샹엔 있었던 것이다. 롱샹성당은 근대 건축의 아버지 르 꼬르뷔지에의 마지막 작품이다. 건축학도에게 르 꼬르뷔지에는 의학계의 히포크라테스다. 

<파리지앵 다이어리>에 실린 롱샹 성당의 모습을 본다. 르 꼬르뷔지에의 천재성과 건축 철학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건축물이라고 소개되어있는데 내 눈에는 그저 거대하고 딱딱한 마른 버섯처럼 보인다. 흔히 생각하는 고고한 성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거대한 근대적 구조물이 안개속에 뿌옇게 녹아있다.  만일 내가 아름다움이란 크기나 규모, 높이 혹은 거기에 사용된 돈의 액수나 연극적 효과가 아니라 무엇보다 조화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면.......(본문 19쪽)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신조를 갖었다는 르 꼬르뷔제의 건축은 내가 보기엔 너무 날카롭고 너무 건조하고 너무 세련되었다. 건축물에서 인간미를 찾는다는 것은 모순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보는 그는 무척이나 시멘트스럽다. 아마도 건축은 차치하고라도 예술적 감각이 내게는 몹시도 부재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 책 속에서 만나는 젊은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르 코르뷔지에의 본명)는 도도하면서도 인간적이다. 드레스덴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아테네에서 폼페이로 여행하면서 쓴 여행일기에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겠다는 목적으로 전통을 부정하는 세태나 몰 취미하게 돈만 쏟아부은 천박하고 과장된 건축물에 대한 비판과 함께 떼로 몰려 다니며 속물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관광객들에 대한 불평이 쓰여 있기도 하는가하면 주변 경치에 매료되어 무릎 위에 높인 책은 펼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행복과 고요한 기쁨을 느끼는 젊은 날의 르 코르뷔지에의 사사로운 글들을 마주할 수 있다. 사사롭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건축철학이 고스란히 쌓여가는 길목의 감성들이다. 자신만의 감성이 확고하지 못했다면 자신만의 철학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며 자신만의 철학이 없었다면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는 수식어 또한 르 꼬르뷔지에의 이름에 붙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재란 표현할 줄 아는 자가 아닐까 한다. 느낌은 몹시도 주관적이나, 표현은 몹시도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건축의 대가 르 꼬르뷔지에는 표현의 대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의 건축철학의 밑바당인 표현된 감성의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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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 행복한 사회 재건의 원칙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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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겠다고 구입해놓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오늘까지도 책등만 구경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 책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를 먼저 읽게 되었다. 이 책은 1915년부터 1916년에 걸친 러셀의 강연집이다. 첫장 충동과 욕구 편부터 빽빽하게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희안하게도 1915년이라면 지금으로부터 건 100년 전 1차세계대전의 와중에 있었던 강연인데 어째서 지금도 유효하게 들리는 것일까. 이토록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이다지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이란 본시 자기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희생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일까...

한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욕구라고 배웠다.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5가지 차원의 단계로 나누고 생리적인 기본적 욕구부터 가장 윗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기까지는 하위단계의 욕구부터 차근이 채워가지 않으면 상위의 욕구는 행동의 동기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자아실현을 꿈 꿀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러셀은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욕구보다는 충동이라고 한다. 인간을 행동에 이르게 하는 인자는 욕구보다는 충동에 가깝다. 충동은 맹목적인 본능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는 것은 욕구이기보다는 충동이다. 먹는 행위도 욕구보다는 충동에 가깝고 허풍을 떠는 것도 어떠한 목적을 갖은 욕구이기 보다는 그저 충동에 의한 것이라고 러셀은 주장한다. 이를 내 자신에 대입시켜보아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욕구보다는 눈 앞에 있는 빵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그저 본능적인 충동이다. 지구를 반바퀴돌아야 해소된다는 크림을 커피에서 쏘옥 빼내지 못하는 것 또한 날씬하고 싶다는 욕구보다는 그저 먹고싶다는 충동이다. 이런류의 충동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뿐더러 목적의식도 없다. 그저 그냥 그러고싶은 맹목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러셀은 변덕스럽고 무질서한 충동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성장을 지향하도록 유도하자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부터 달라져야 한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순종을 강요하는 교육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 순간까지 끝없는 시험과 교과서의 내용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단조로운 사고를 요한다. 이는 직장생활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일이라는 것이 생계를 위한 수단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되지 못한다. 순종적인 인간의 양성. 이것이 제도권이 원하는 인간교육이다. 충동을 달리 해소할 줄 모르도록 교육되어진 순종적인 인간 양성이 교육의 목표다. 100년 전의 그 시대에도 그랬고 더더욱 자본화되고 경제화 되어있는 지금 시대에도 달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포성이 끊이지 않는 세계대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리없는 전쟁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도처에서 ’지속가능’을 외치고 있지만 가끔은 이 모든것이 끝나는 순간이 오리라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자연을 경외할 줄 모르고 신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인간의 이 오만방자함은 조만간 끝나고 말리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오면 내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일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종이컵을 쓰지않고,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고, 세재를 줄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내 아이가 사고할 줄 아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미 제도권 교육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아이를 나 혼자서 어찌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아 그 두려움은 더더욱 커져 가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희망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 또한 그 부분이다.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소유에 집착하는 인간이 아닌 창조적사고를 할 줄 아는 능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충동을 생명과 성장의 방향으로 조절할 줄 아는 인간으로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것, 그것이 ’지속가능’의 열쇠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전쟁에 관한 책이 아닌 지속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행복론'에 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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