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0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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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골은 인간의 약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약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속물성이다.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속물성에 대해 고찰해 보자. 속물성은 자주 웃음과 혐오를 유발한다. 고골은 자기 인물들의 속물성을 곧 그들의 도덕적 결점으로 인정하였다.  속물성은 상투적 생각, 즉 독자적인 내면적 지향을 지니지 못한 인물들의 특징이다. 그것은 창조성과 무관하며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생각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진부한 표현과 속물적 언어의 사용으로 나타난다. 속물성은 중간계급의 보편적 산물이며 순응주의자들의 속성이다. 그것은 집단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가짜다. 그들의 속물적 일상성은 세계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적극적 발언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속물적 인간들의 주요 관심은 주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衣, 食, 住, 性, 富, 명예, 승진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한 물욕에만 관심을 두고 진부한 표현과 속물적 언어를 구사하는 시장과 지방 관료, 그리고 홀레스따꼬프는 대표적인 속물들이라 할 수 있다. -201쪽, 작품해설 중.

러시아의 소도시에 암행 검찰관이 뜬다는 소문을 들은 시장과 관료들은 여관에서 돈이 없어 떠나지 못하는  홀레스따꼬프를 검찰관으로 여기고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극진히 대접하며, 돈까지  바친다. 한편 거짓말쟁이, 사기꾼, 바람둥이 홀레스따꼬프는 자의는 아니였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순순히 이용해 한몫 단단히 챙긴후 마을을 뜬다. 그리고 이어서 마을에는 진짜 검찰관의 도착 소식이 울려퍼진다.

재미있는 것은 이 희곡을 읽는 동안 거짓말쟁이 사기꾼 홀레스따꼬프의 사기 행각이 발각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생기더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초들을 이용하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따끔한 맛을 뵈주었으면, 싶은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되는대로 막 지껄이는 홀레스따꼬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들의 틀 속에 재단하는 부정한 관리들은 홀레스따꼬프의 황당한 거짓말에 두려움의 진위를 판단할 이성조차 잊은채로 두려움을 느낀다.

사기꾼 홀레스따꼬프나 부패한 시장은 같은 종류의 인간들이다. 때문에 나라나 법에 의해 처벌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종류의 속물적 인간에 속아넘어가는 시장과 관료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실에 실소하며 통쾌함을 느꼈다.

 

홀레스따꼬프의 속물성은 홀레스따꼬프시치나(홀레스따꼬프주의)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홀레스따꼬프시치나는 자기 비하와 자기 경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홀레스따꼬프의 거짓말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한한 경멸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거짓말 속에서 그 자신은 말도안되는 여러 인물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고, 홀레스따꼬프와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랄 수 있는 시장 및 그밖의 인물들이 홀레스따꼬프의 황당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 갈 수 있었다.

또한가지 중요하게 볼 점은 고골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풍자적 웃음은 언제나 '누군가를 비웃는 것은 자신을 비웃는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검찰관>의 부제는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라는 속담이라고 한다. 이 희곡을 읽으며 실소하고 통쾌해 하는 독자조차도, 제 속물성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씁쓸하다. <검찰관>에 등장하는 속물적 인간들의 모습은 부정하고 싶지만 바로 내 모습일 수 있으므로.

독자적인 내면의 깊이를 완성하기 위해, 적어도 순응주의자는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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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 박홍규, '에세'를 읽으며 웃다
박홍규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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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몽테뉴의 <수상록>이 학창 시절 필독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학교에서 필독서라고 꼭 집어주던 책들은 몹시도 재미없고, 지루하며, 고리타분했다는 기억이 있고, 덕분에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더더욱 멀리하게 되더라는 청개구리 심보는 잘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꼭 내 청개구리 기질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이를 키우다보니 부모가 혹은 학교에서 좋은거라고 권하는건 꼭 하지않더라는 건 알겠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책 읽기'라는 부제를 단 김운하의 <카프카의 서재>를 읽다가 몽테뉴에 급작스러운 관심이 생겼다. 김운하는 사는게 뭔가 싶은 고독과 우울속에서 집어들게 되는 책이 몽테뉴의 <수상록>이라고 했다. 나로서는 살아야 할 이유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몽테뉴를 읽고 싶어졌다. 그러한 이유로 사다놓은 <수상록>(권응호 옮김/홍신문화사)는 읽기가 쉽지 않다. 어쩐지 책만 집어들면 잠이 쏟아져 한두 페이지를 넘기가 힘겹다. 오랜 세월의 탓도 있겠으나, 문화의 탓도 있겠고, 번역의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서 책장에 곱게 모셔둔 <수상록>을 볼 때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만 깊어지는 듯 하다.

 

정혜윤의 <침대와 책>을 읽으며,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와 홋타 요시에의 몽테뉴 전기를 알았다. 왠일인지 두 책다 절판 된 상태로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었지만 홋타 요시에의 몽테뉴 전기는 도서관에서, 박홍규의 이 책은 중고서점에서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몽테뉴 <수상록>의 해설판과 같은 책이다. 몽테뉴가 에세를 쓰게 된 배경, 몽테뉴의 개인적 이야기, 에세가 의미하는 것, 에세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또 몽테뉴와 현대는 어떻게 조화로운지 등등. 나처럼 몽테뉴의 '에세'가 궁금하지만, 쉽게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참고서 같은 책이다. 이 책의 도움으로 <수상록>에서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를 읽었다. 그러나 역시 몽테뉴의 문장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않다. 그나마 이 책이 없었다면, 그 한꼭지 조차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 같다.

박홍규 교수에 의하면 수상록과 같은 좋은 책이 우리나라에서 좋은 번역으로 출판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나역시 그렇다. 읽기에 버겁고, 펼치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지는 그런 책 말고 읽고싶어지는 그리하여 충실하게 살고 싶어지는, 혹은 죽음을 겁내하지 않게 되는 그런 '에세'가 출판되어 준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박홍규 교수야 뭘 좀 아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자신있게 하는 것일테고, 나는 뭘 좀 모르니까 쉽게 읽고싶을 뿐이다.

 

물론 책을 읽어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는 케케묵은 것인지도 모르나,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그 가능성의 하나가 글쓰기의 문제다. 나는 새로운 글쓰기의 표본으로 몽테뉴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99쪽

 이러저러한 이유로 참고서만 백날 읽은들 소용없는 일 일터. 읽기 쉽고 지루하지 않은 몽테뉴의 '에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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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3-23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저도 있고 박홍규 교수님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저자에요 이 분 책은 매번 사죠
 
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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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날마다 중계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 안의 사람들은 그것이 비극인지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실이, 지켜보는 우리를 더 괴롭게 만든다. 사건 현장에는 경찰이 출동하고, 방송 카메라가 들이닥친다. 인터넷은 비난여론으로 끓어오르고, 사회는 경악한다. 현대의 비극은 그렇게 떠들썩하게 상연된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288쪽/해설/차미령

 

적어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의 불행에 대해. 표면적으로 들어난 조각들을 대충 끼워맞춰 보여주는 언론플레이 외의 사실, 진실에 대해서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고통스러웠는지, 그들이 얼만큼 불행을 느꼈는지, 가끔은 행복하기도 했는지, 결과로 중계되는 현실 사건은 얼마나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일인지.

 

백가흠. 여인인줄 알았더니 꽃미남이다. 책날개에 인쇄된 사진을 들여다 본다. 살짝 숙인 얼굴과 손가락의 각도, 부드럽게 주름진 웃음짓는 눈꼬리와 입꼬리. 백가흠이라는 이름에서 느꼈던 어딘가 당찬 여자, 이를테면 <아웃>의 기리노 나쓰오 같은 타입의 여자일 것이라는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백가흠의 모습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자, 백가흠이란 미묘한 이름이 더더욱 미묘해지고 부드러운 그의 웃음이 약간은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뼈아픈 이야기를 썼지만,

<조대리의 트렁크>에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은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뼈가 아프지는 않았다. 가출 소녀에게 일방적인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아이를 매일 기다리는 폐품팔이 할아버지의 헌신에, 쓰레기와 함게 뒹구는 아직 말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굶주림에도, 옷장안에 숨어 누군가의 자살을 엿보는 한 아이의 비참한 마음도, 권위에의 맹종이 불러온 참사로 꽃게처럼 걷게 된 한 젊은 남자의 비극에도, 나는 가끔 가슴을 쓸며 그저 얼마간의 안타까움과, 혀차기, 그리고 '세상이 뭐이래!' 따위의 불만 한마디면 충분한 것 같았다.

나는 모른다. 폐품팔이 할아버지가 말도 안되는 헌신을 하고도 자신을 비참하게 느끼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아이를 쓰레기더미 속에 방치하면서도 때때로 행복했을 한 어린 엄마의 마음을, 멀쩡한 몸으로 군대를 간 후 꽃게걸음을 걷게 된 아들을 둔 엄마의 찢어지는 가슴을,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살아갈 세월을. 어쩌면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쉬운 연민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정혜윤의 <침대와 책>을 읽다가 <조대리의 트렁크>를 발견했다. <침대와 책>에 의하면, 백가흠은 신문의 사회면을 자주 본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소설보다 현실이 더 가혹한 것 아니냐고 했다는데.... 가혹한 현실을 내 피부로 느끼지 않음을 그나마 감사하며 살고 싶은 소시민적 생각이 든다. 좋은 것만 보고 살고 싶은 나의 이기심을 그저 소심함일 뿐이라고 항변하고 싶다.

아, 눈 감는다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 타인의 고통이여. 그러나 본다고 해서 내 것처럼 느낄수 없고, 사실은 느끼고 싶지 않은 그러나 느낄 수 있어야만 좋은 세상이 되리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있는...

 

동정Sympathy은 상대방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나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슬퍼할 때 나도 같이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동정이다. 그러나 공감Empathy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고통을 깊이 이해한 후에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면 그를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 공감이다. 공감을 하려면 타인을 나와 분리된 독립적인 인간으로 볼 수 있고, 그의 마음을 잠시 내 것처럼 느껴도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건강한 자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아의 경계가 약한 사람들은 공감해야 할 순간에 상대방과 하나로 합쳐져 버린다. 즉 남의 고통에 사로잡혀 자신도 구덩이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탓에 시련이나 아픔과 만나는 것을 꺼린다. (심리학 나 좀 구해줘/폴커 키츠, 마누엘 투쉬 지음/갤리온/86쪽)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지만, 이 책에 의하면 나는 적당한 거리의 안정된 내 울타리 안에서 가끔 눈물을 흘리는 정도로만 만족하며, 그들을 동정하고 편한한 내 삶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이 끔찍하게 여겨 질 때도 있지만,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는 아직도 내겐 요원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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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 - 미국이 쓴 착한 사마리아인의 탈을 벗기다
노엄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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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 입니다. -영화 변호인 중에서

 

변호인 역을 맡은 송강호의 연기가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친 면이 없지않다는 평가를 받는 이 장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국민이 곧 국가라는 말은 너무도 지당해서 오히려 불경스럽게 여겨질 지경이다. 노무현 정부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은 2009년 6월 9일,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비서실장이 기억하는 노무현에 대해 묻자, '노 전 대통령을 비주류라 하지만 사실 이땅의 진정한 주류는 서민이 아닌가. 진정한 주류에게 주류의 몫을 돌려주고 싶어했던 대통령으로 기억하노라' 라고 말했다.

노무현, 그는 물론 완벽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대통령이 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노란 풍선을 흔들며 그의 청와대 입성을 마르고 닳도록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도 그랬고, 무엇보다 그 자신을 위해 그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만이라도 서민의 입장에 서주었던 대통령이 우리의 역사에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는 어쨌든 마지막까지도 너무나 처절하게 서민스럽지 않았던가.

우리 모두의 불행이 바로 그것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주류와 비주류의 길은 이미 정해져있다는 절대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말이다.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를 읽으며,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이 국민과 주류에 관한 것이였다. 한 나라를 구성하는 국민을 100으로 보고 비주류와 주류를 80과 10, 더 극단적으로는 99와 1로 나누곤 할 때, 과연 어느 쪽이 주류인가. 국민의 대다수가 주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주류'에 관한 설명을 이렇게 하고 있다. '조직이나 단체 따위의 내부에서 다수파를 이르는 말.'

이 주류에 관한 헷갈림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일은 아닌데, 우리에게는 자못 민주주의의 원조격으로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90퍼센트의 국민은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국민의 80%가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정부가 국민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소수의 거대 이익집단에 의해 운영된다고 생각하고, 무려 94%는 정부가 국민의 의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 시기에, 어느 당도 국민 여론을 반영하지 않는 듯 하다. -117쪽

 

한 나라가 나아갈 바를 결정하는 것은 주류일텐데, 미국이든 한국이든 그 주류는 어쨌든 국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일까.

 

이 책은 촘스키가 2007년 부터 2011까지  <뉴욕 타임즈> 신디케이트에 기고한 칼럼을 묶은 것으로 <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에 이은 두번째 칼럼집이다. 이 책의 52개 칼럼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탈을 쓴 전쟁광의 질주'와 '속고 속이는 진실 게임:미국에 민주주의는 없다', '세계 최강대국 타이틀전'라는 소제목 아래에 나뉘어 실렸다.

러시아 유대인 이민2세인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며, 인지과학 혁명의 주역이다. 또한 그는 약자편에 서서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일을 팔순을 넘긴 현재에도 멈추지 않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노엄 촘스키의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제국주의에 관한 비판서인 것이다.

촘스키는 기본적으로 미국을 범세계적인 패권국이라 보기 때문에 그의 글은 미국내의 주류 언론에게는 거부 당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의 목소리는 국경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고, 이 책 역시 그 중 하나로, 2007년에서 2011년 사이에 있었던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들로 미국이 직접적으로 관여된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것이다.

중동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전쟁들과, 변화와 희망을 내건 오바마의 당선, 그리고 2009년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 승승장구하는 중국의 오늘과 미래, 미국의 영향력으로 부터 점차로 벗어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미국의 강력한 우방이 아닌 까닭에 분할되고 찢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고립과 함께 영토 확장에 대해 공공연하게 들어나는 이스라엘의 야욕, 석유자원과 세계패권을 둘러싼 미국의 제국주의적 음모, 금융위기를 불러왔지만 정작 책임은 서민들에게 지우고 이제 다시 자신들의 배를 불리우며 돈잔치를 벌이고 있는 금융재벌들을 위한 금융 자유화, 정부를 지배하는 까닭에 정부로 부터 보호받고 보조금까지 받으며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세계민을 이용하는 기업들의 전략인 자유무역협정, 그리고 2011년 10월 보스턴에서 일어난 풀뿌리 운동 '점령하라'에 이르기까지, 노엄 촘스키는 이 모든 사건들에서 비판적 시각을 늦추지 않는다.

'인스티튜트 프로페서'. 즉 독립적인 학문기관으로 대우받는 교수인 촘스키는 그야말로 1%의 주류 지식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권력의 불의를 향한 날선 비판과 행동하는 민중 지식인으로서의 모든 활동을 멈추지 않는 덕에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촘스키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참여를 게을리하지 말고, 또한 행동하라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미국인이며 유대인이기도 한 그는 가자지구로 향하는 구호선 '자유선단'을 납치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를 스스럼없이 벌이는 이스라엘과 이를 묵인하며 어쩌면 지지하기까지 하는 듯한 미국을 불량국가와 그 후원국이라 칭하며 비꼰다. 또한 미국이 세계에 행동하는 방식은 그들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무시하며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타국가들에서 쿠테타를 조장하기도 하고, 경제 제재를 가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이를 모두 프로파간다(심리공작용으로 선전되는 메세지, 일명 흑색선전)로 무마한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자본이 국경을 초월해 부를 축적하는데만 혈안을 올리는 반면 촘스키는 국경을 초월해 세상의 변화를 꾀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느냐, 모두를 생각하느냐의 차이는 이토록이나 엄청나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 나라뿐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주류'라는 것이 어느쪽이여야 할 지는 굳이 힘들여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모든 면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 경제의 흐름은 제조산업에서 점차로 금융 중심으로 옮아갔고, 최고경영자와 금융 대표같은 사람들의 부는 점차로 더 증가했으며, 부를 거머쥔 그들은 정치조차도 자신들의 부를 늘리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이에 반해 국민 대다수는 실업과 빚의 굴레를 헤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90%가 없다면 나머지 10%도 없을 것인데, 주류의(다수의) 국민들은 어째서 10%를 용인하는 것일까. 또 소수의 그들은 다수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상상하는 것일까.

 

미국은 실제적으로 일당 체제이다. 즉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파벌로 나뉜 기업 정당 밖에 없다. (중간생략) 유권자들은 양 정당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지난 수세기 경험했듯이 진보적인 법안과 사회복지는 위에서 내려준 선물이 아니라 민중 투쟁을 통해 쟁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민중 투쟁은 성공과 좌절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투쟁은 투표소에서부터 노동현장까지, 진정으로 민의를 반영하는 민주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4년에 한번이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114쪽

 

중동, 아프리카, 남미에 이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제주의 해군기지 등 세계 곳곳에서 자기들 멋대로 행동하는 미국인들에 관한 촘스키의 증언을 보면서 정말 못견디게 화가났다.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인지 개탄을 멈출 수가 없는데,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 미국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종 '악'을 뻔뻔하게 행하곤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약한자들의 신은 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까. 혹시 신도 '편애'라는 것을 하는 존재인 것이지 엉뚱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촘스키는 이 모든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상황이 바뀌면 주류조차도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때는 국민여론이 정부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 또한 세계의 공존을 위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재 미국의 주류들은 미국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 함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또한 미국민들은 자국의 모든 범죄행위를 옹호하지 않고, 국제법을 준수하라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2011년 보스턴의 '점령하라'와 같은 풀뿌리 운동이 도처에서 끈질기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 역시 자본은 초국적으로 거대해져 가고 있고, 국민들은 점차로 더 궁핍해져가고 있는 이 때에 북한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세워 미국의 속국을 자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말이다. 우리 역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애국'이라는 프로파간다에 휘둘리며, 정작 자신들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소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것처럼 과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곧 국가인가. 대다수 국민의 의견은 소외되고 무시되며, 정부에 반하는 개인에 대해서는 음으로 양으로 사찰과 제재를 가하는 정부 아래의 국민들이 정말 국가인가.

촘스키는 앉아서 책을 읽고 개탄한다고 해서 지식인이 아니며, 행동하고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배우고 성장하라고 말한다. 또한 그래야만 세상 달라질 것이고, 진보할 것이며 진정한 주류인 국민들이 주류의 몫을 돌려 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가 지상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그래야 약하고 미천한 대중에게 자유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복종해야만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중은 소심해지고 겁먹고 행복해질 것이다. - 193쪽,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발췌

이 책을 읽고 몇년 전 읽다 포기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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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2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 교수님이...
싸이 노래 <젠틀맨>이었나, 패러디에 나오기도 했어요 @.@
아이하고 패러디 영상을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답니다.
한국에 남달리 눈길을 두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주류와 비주류 이야기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도시 : 시골, 이 비율이 99:1이니,
아무래도 시골은 '비주류'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의딸 2014-01-25 12:44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댓글을 보고서 저도 싸이 노래를 찾아보았어요. MIT공대에서 만든 '강남 스타일' 패러디에서 촘스키가 언어학자답게 정확한 발음으로 '오빤 촘스키 스타일' 그러네요. ㅎ
이 책에도 마지막 즈음,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대한 칼럼이 있어요. 외국 저자의 글을 읽다 '한국'에 대한 부분이 나오면 어떤 내용이건 일단은 좀 위축이 되요. 이건 아무래도 개인적인 자신감 문제일까요?

도시 시골 상관없이 일단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은 비주류겠지요. 그러니 이상한 세상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대학교수인 데이비드 짐머는 아내와 두 아이를 비행기 사고로 잃고 자기파괴로 삶을 몰아가던 중 우연히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1920년대의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보게 된다. 콧수염을 기른 매우 잘생긴 배우가 출연한 '은행원 이야기'는 무성 코메디 영화였는데, 짐머는 바로 그 헥터 만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고 짐짓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6월 이후로 내가 뭘 보고 웃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뜻밖에도 내 가슴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허파가 들먹이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바닥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나의 일부가 계속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8쪽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배우자가 되었든 아이가 되었든 가족을 잃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인데, 그들을 모두 한꺼번에 잃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란 상상을 막연하게 해 본다.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건너 아는 사람 중 그런 고통을 당한 이를 알고 있다. 그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 딸을 잃고 그 혼자만 살아났는데, 마지막으로 들은 그의 소식은 그가 정신과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였다. 그후로는 그의 불행을 지나가는 말로라도 입에 올리지 않으려 조심하는데, 불경스러운 말 한마디가 그의 불행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짐머는 자기파괴를 일삼던 중, 자신의 삶을 다시 이어가게 해 줄 헥터 만을 알게되고, 무성영화 배우로서의 헥터 만에 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살고자하는 본능적인 욕망을 이어간다. 짐머가 파헤치는 헥터 만의 일대기는 이 책을 이어가는 중심 스토리인데, 그는 1928년이 다 저물어가던 때에 갑자기 실종되었다. 실종 당시 헥터는 스물여덟이였고, 그후 60년이 지난 1988년에도 그의 실종에 대해서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었다. 이에 데이비드 짐머는 사라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에게 증명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헥터 만의 책이 출판된 후, 짐머는 헥터 만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프리다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게 된다. 이윽고 연이어 밝혀지는 헥터 만의 비밀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치 거미의 입으로 부터 끊임없이 실을 뽑아내듯이 줄줄 흘려나오는 이야기들은 나로하여금 작가 폴 오스터의 끊임없는 상상력에 대해 또한번 놀라게 했다. 오스터는 이 책에서도 역시 '실종'에 얽힌 비밀을 다루고 있는데, 그 비밀들이란 다름 아닌 우연들의 연속이며, 우연들이 한겹한겹 다져진 결과가 바로 생의 비밀인 것이다. <달의 궁전>이나 <브루클린 풍자극>, 그리고 사적인 글쓰기에 관한 책 <빵굽는 타자기>와 <환상의 책>이 알게모르게 모두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인 이 이야기는 한 작가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절정이다. 아, 나는 아직 폴 오스터의 미궁에서 헤어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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