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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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판 1쇄 1999년 4월 8일, 값 6,800원.

아마도 나는 이 책을, 출간되고 얼마 안되어서 구입했었던가 보다. 그런데 정작 지금까지도 책을 읽지는 않았다. 물론 시도는 했지만, 그당시에 나는 이 책에 대해 세간에 알려진 만큼의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의고체라고 해석된 어려운 문장이 독서를 방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히라노는 책 뒤에 실린 제일문화평론가 장기권과의 인터뷰에서 표현이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지적에 대해 소설이라고 사전을 찾아가며 읽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했지만, 세상살이에 전력투구해야만 하는 나로서는 소설을 읽으며 그 많은 에너지를 쏟을 여력이 없었던 거라고 변명하고 싶다. 그렇게 책꽂이만 장식하던 이 책을 꺼내 읽게 된 것은, <일식>을 읽어보면 유럽사에 대한 히라노의 탄탄한 배경지식에 놀라게 될 것이라는 추천의 글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식>에 대한 호평은 차고 넘쳤지만, 유독 그 추천말에 끌렸던 것은 역시 히라노의 소설 <결괴>를 읽고 난 직후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괴>는 범죄소설이지만, 딱히 범죄소설이라고 분류하기엔 너무 아까운 소설이다. 내 나름으로는 올해 읽은 책 중 최고의 책이라고 여겨지는 책이 바로 <결괴>인데, 소설이지만 설렁설렁 읽을수만은 없는 그런 책이였다. 때문에 히라노의 데뷔작이며,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일식>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라에 히라노의 박식함에 놀라게 될 것이라는 추천글이 더더욱 반가웠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솔직히 나는 히라노가 <일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 히라노는 <책을 읽는 방법>에서 책을 천천히 읽을 것을 말했는데, 그의 책은 특히나 더 천천히 읽어야 한다. 사전을 찾고 공부하는 것처럼 읽지는 못하더라도, 천천히 문장들을 음미하며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 히라노의 소설인 것이다. 

<일식> 역시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인데,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몰입도가 떨어지는 책도 아니다. '의고체'라는 고풍스러운 문체로 씌였지만, 훌륭한 번역 덕분으로 그다지 읽기 힘든 책도 아니며, 오히려 긴장감과 속도감이 충만해서 몰입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책이다. 고전을 읽는 것 같은 문장들 속에서 판타지 영화의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 그건 마치, 고소하면서도 비릿한 먼지 냄새를 일으키는 차가운 촉감의 그것은 '비'라는 것을 처음 안 소경의 기분과 같은 것이였다. 천천히 음미하는 문장 속에서 묘하게 상쾌해지는 그런 기분을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1482년 파리. 이교도를 이해하고 그를 통해 기독교 사상을 더 탄탄히 하기 위해 이교도의 철학책을 찾아나선 한 수도사가 그 과정에서 연금술이며 마녀사냥을 겪으며 경험한 신비에 대해 적은 이 책은 히라노가 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스물세살에 쓴 것이다. 그는 법학도였으며,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피어싱을 한 신세대이기도 했는데, 어떻게 이런 고전적인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는지 정말 놀랐다. 뿐만아니라 이 책을 읽은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추천글처럼 히라노의 박식함에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불구하고 정작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유럽사와 기독교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은 '마녀사냥'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유일신'은 지식인이 추종할 만한 사상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남과 여, 육체와 영혼식으로 나뉘는 이원론적인 이론으로는 인간도 종교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천재라고 밖에 여길 수 없는 작가가 <일식>을 쓰면서 지적유희를 즐기고 싶었던 것인지 나로서는 정말 모르겠는데 그저 인간의 편협함과 대중심리에 편승하는 나약함에 반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쪽 넘어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광범위하게 넘겨짚어 본다.

그러나 어쨌든 <일식>이 잘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이 탄탄하고 몰입도 또한 뛰어난 소설이며 더불어 번역도 훌륭해 한문장 한문장 읽으면서는 줄곳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지만, 읽고나자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것은 전적으로 내 지적능력 탓이라 할 수 밖에.

아직은 실험적 성격이 몹시 두드러지는 히라노의 작품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지만, 한번에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문체로 씌인 번역되지 않은 원문은 좀 피곤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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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3-11-2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후 저랑 독서법이 비슷하신 듯 ㅋㅋ
'읽고 나자 모르겠다' 독서법의 저의 오랜 습관입니다.
뭐랄까...동지를 만난 듯한 이 느낌 -.-
전 지금 어디서 올 것 인지 생각 중입니다.
오늘 비 오네요 흠...

비의딸 2013-11-26 22:16   좋아요 0 | URL
음..? 드뎌 오신건가요..?
어디서 오는가보다는 어디로 가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해보는 밤입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은 더 모르겠네요.
그런데도 내려놓을 수가 없는 책이네요.
내일은 전국적으로 큰눈이 온다던데,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푸지게 눈이 쌓였으면 좋겠다 싶지만
그러면 참 여러사람 곤란하겠죠. 그래도, 그래도요. ^^

루쉰P 2013-11-27 16:43   좋아요 0 | URL
'왔다'긴 보다 '들른다'가 맞겠죠 ㅋㅋ
어디로 가는 지를 계속 고민 중이니까요 후후
모르는 책을 계속 읽으신다니....저보다 더 멘탈이 훌륭하신 듯 싶어요.
그건 정말 힘든 작업인 데 ㅎ
안타깝게도 눈이 다 녹아버리는 이 현실..
어쩌죠 어쩌죠....ㅋ